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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수 세계의 한의사-106화 (106/250)

< 시혁골 -1- >

대수림의 중앙에는 거대한 세계수가 존재한다.

그 크기는 인간이 감히 가늠하기 힘들 정도.

멀리서 보면 하늘에 닿는 듯 높이 솟았다. 두께도 무시무시했다. 고층 건물과 비교할 수도 없고, 흡사 거대한 산을 보는 것 같았다.

시혁은 바로 그 중앙에서 걸어 나왔다.

“크르릉.”

짝니가 갑자기 몸을 낮췄다.

귀를 바짝 세운 게 뭔가를 보고 놀란 듯했다.

그럴 만도 했다.

시혁도 충분히 놀라고 있었으니까.

지금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라.

수많은 영웅들이 웃고 떠들고 있었다. 심각한 얼굴로 뭔가를 토론하기도 했다. 그들 옆에 다양한 탈것들이 하품을 하며 대기하고 있었다.

사자, 늑대, 구렁이, 악어, 거대 토끼, 사슴, 비룡, 독수리, 마법 양탄자, 기계 새, 날개 달린 말 등등.

흡사 영화 속의 한 장면 같았다.

그들을 신기하게 쳐다보면서, 짝니를 데리고 내려갔다.

영웅들의 시선이 잠깐 시혁에게 모였다가 금방 흩어졌다.

딱 봐도 막 영웅이 되었다는 티가 폴폴 났으니까. 현자 영웅이고, 희귀한 탈것을 가진 건 특이하지만 그래봐야 햇병아리라고 생각했다.

시혁은 그들 사이를 지나쳤다.

짝니가 다른 짐승들과 괜히 신경전을 벌였다.

“크르르릉……”

성대를 울리며 소리를 내지만, 다들 관심이 없어 보였다.

한 번 짝니를 힐끗 보고는 자기 주인만 쳐다봤다. 가끔 자기 비늘이나 깃털을 고르기만 하고, 짝니를 한 번도 보지 않는 녀석도 있었다.

시혁은 짝니를 진정시켰다.

“조용히 해. 녀석들하고 싸울 이유가 없잖아?”

[먼저 공격해야 이기오.]

“그런 생각하지 말고 따라오기나 해.”

시혁은 순찰을 돌던 엘프 경비병에게 접근했다.

엘프가 시혁의 접근을 느끼고 경계했다.

시혁은 사뭇 수더분한 표정을 지으며 엘프식으로 인사를 했다. 왼손으로 의학자의 힘을 발현하며 질문을 했다.

“반갑습니다. 생명 진영 의학자를 거쳐 진리 진영 현자가 됐던 최시혁이라고 합니다.”

“오, 생명 진영에서 종군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딱딱하게 굳어 있던 엘프 경비병이 차분한 미소를 지었다.

아르거스의 원주민들은 자기네 종족 진영에서 종군하는 것을 좋게 평가하나 보다.

시혁은 으르렁대는 짝니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전 임관할 곳을 찾고 있는데, 반신의 사자들이 어디 모여 있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막 영웅이 되어서, 뭐가 뭔지 잘 모르겠네요.”

“반신의 사자들은 저기 보이는 회색 나무에 모여 있습니다. 흔히 영웅의 나무라고 부르는 곳이지요. 그런데 저기 가셔도 임관하긴 힘드실 겁니다.”

“왜요?”

“영웅님께서 아무리 현자라고 해도 아직 경험이 적으니까요. 최소한 수신 계급은 되어야 반신들이 등용한다고 들었습니다. 그것도 이제 막 반신이 된 이들이나 그렇고요. 세력이 강한 반신들은 능란 계급은 되어야 받아준다고 합니다.”

낭패였다.

전장에 가지 않으면 어떻게 계급을 올리지?

시혁이 난감한 표정을 짓자, 엘프 경비병이 말을 이었다.

“만약 임관에 실패하시면 의뢰를 받아 해결하시는 것도 좋습니다.”

“의뢰라고요?”

“예. 아르거스 행성에서는 영웅님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이 많거든요. 그 일들을 해결하시다 보면 레벨은 물론 계급도 자연스럽게 올라갑니다.”

그래도 전장에 가는 것보다는 효율이 덜하다.

시간 비율 때문이다.

전장에서는 길면 2달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최대 나흘 정도 체류하는 아르거스 행성과는 차원이 달랐다.

시혁은 감사 인사를 하고 영웅의 나무로 이동했다.

영웅의 나무는 속이 텅텅 비어 있었다. 빙빙 돌아가며 원형 난간이 설치되어 있고, 난간마다 다양한 종족이 자리를 잡고 옆에 깃발을 하나씩 세워두었다.

천사, 인간, 엘프, 드워프, 마법 부엉이, 어인, 마법사, 도플갱어, 영혼술사.

선 성향과 중립 성향 9개 진영만 보였다. 악 성향인 6개 진영의 사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마음에 들었다.

시혁이 임관할 수 있는 진영의 반신은 모두 여기서 만날 수 있다는 얘기니까.

가장 먼저, 저층에 있는 인간 사자에게 다가갔다.

그 옆에 꽂은 깃발에 눈이 먼저 갔다.

[3차 확장을 마친 백색 군왕께서 지원 계열 영웅을 모집합니다. 중급 병종 출신 이상, 능란 계급 이상, 성당 병종 출신 우대, 고급 병종 출신 우대, 2차 전직자 우대합니다.]

확장.

성역의 규모를 가늠할 수 있는 항목이다.

반신의 상황마다 다르지만, 대개 1차 확장한 성역은 기본 병종을, 2차 확장한 성역은 중급 병종을 다룰 수 있게 된다고 보면 되겠다.

혹시나 싶어 말을 붙여보았다.

“입문 계급 현자 영웅 최시혁입니다. 제가 백색 군왕을 위해 봉사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 사자가 시혁을 쳐다보았다.

흰 법복과 나무 지팡이를 한 번 살피더니, 죄송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영웅님. 백색 군왕께서는 아무리 고급 병종 출신이라고 해도 능란 계급 이상으로 못 박으셨습니다. 영웅님을 모시고 가면 제가 벌을 받습니다. 다른 반신을 찾아보시는 게 어떨까요?”

말투는 정중하지만, 칼날 같은 단호함이 어려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물러나왔다.

다음 사자도, 그 다음 사자도 마찬가지였다.

최소한 수신 계급은 되어야 임관을 청할 수 있었다. 그나마 1차 확장이나 2차 확장 상태의 반신들이 가능했고, 3차나 4차 확장 상태 반신들은 불가능했다. 최종 확장 상태 반신은 말할 것도 없었고.

수신 계급까지는 의뢰를 해결하며 올려야 할 모양이다.

의뢰는 어디서 받지?

영웅의 나무 바로 옆에 거대한 나무가 있었다. 살짝 청색을 띠고 있는데, 그 안도 텅텅 비었다. 반신의 사자들 대신, 정령들이 까불대며 날아다녔다.

그 안을 거닐자, 정령들이 다가와 속삭였다.

[영웅님, 저희를 도와주세요. 거대한 뱀이 나타나서 마을을 위협하고 있어요.]

[숲이 앓고 있어요. 계곡에 뭔가 있는 것 같아요. 뭐가 있는지 알아봐 주지 않으실래요?]

대수림 내에서 발생한 일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렇다고 다른 진영에서 보낸 의뢰가 없지도 않았다. 팻말이나 축음기, 천사의 깃털 등에서 꾸준히 전언이 흘러나왔다.

그 중 유독 시혁의 귀에 강하게 박히는 게 있었다.

[최시혁 의학자님을 찾습니다.]

시혁을?

왜?

멈춰 서서 정령의 속삭임을 들었다.

별 내용 없었다.

영웅이 되었으면 자기들이 있는 쪽으로 찾아오라는 내용이었다.

발신지는 생명 영령의 성역.

그걸 확인한 다음에야, 누가 이걸 보냈는지 깨달았다.

예전에 생명 영령의 휘하에서 만났던 꼬마 곰과 늙은 곰. 그들이 보낸 게 분명했다.

영웅이 되면 꼭 한 번 오라고 했었지.

가볼까?

오래 걸리진 않을 것이다. 기껏해야 하루 이틀 걸리니까.

정보부터 수집했다. 혹시 생명 영령의 성역이나 인근 반신의 성역에서 온 의뢰가 있으면 같이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몇 건을 건졌다.

잘 기억해 둔 뒤, 세계수 관문으로 돌아왔다.

[배고프오.]

짝니가 칭얼거렸다.

“또?”

양껏 배를 채운 지 얼마나 지났다고?

살살 달래가며 세계수 관문을 넘었다. 적당히 사냥을 하게 해 먹인 후, 생명 영령의 성역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안장도 없고 처음 탄 참이라 무척 어지러웠다. 시혁은 스스로에게 오행 순환체를 주입한 채 짝니에게 몸을 맡겼다.

세계의 틈에 도착했다.

짝니는 주저하지 않고 몸을 날렸다.

공허는 지금도 파도처럼 일렁이고 있다.

짝니의 몸에서 흑백색의 파장이 뿜어졌다. 파장이 공허를 밀어내자, 짝니의 몸이 허공으로 둥실둥실 떠올랐다.

검치호가 아니라, 작은 배를 탄 것 같았다.

속도는 느렸다. 전에 봤던 비행 탈것들이랑 비교가 안 됐다. 그나마 짝니가 가끔 그림자 이동을 써서 너무 늦지 않게 맞은편 성역에 도달했다.

녹색 마나로 가득 찬 곳이다.

짝니가 코를 벌름거렸다.

[맛 좋은 냄새가 나오.]

시혁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

“너 머릿속엔 먹을 생각밖에 없지? 참, 수인족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있니? 수인족부터 찾아가야 하는데.”

[찾았소. 가오리까?]

“그래, 가자.”

짝니가 몸을 날렸다.

세계 영령의 성역도 대수림과 비슷했다. 차이점이라면 나무들이 좀 작고, 생명의 마나가 좀 옅다는 정도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인족 도시에 도착했다.

눈에 익었다.

의학자일 때 방문했던 그대로였다. 작은 건물들이 숲 안에 널찍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 사이 인구가 늘었는지, 건물의 수가 꽤 불었다.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아이들.

일곱 종류의 수인족 아이들이 까르르 웃으며 놀고 있었다. 수가 어찌나 많은지, 마을 인구의 1/3은 되는 듯했다.

수인족 아이들이 시혁을 발견하고 눈을 반짝였다.

“영웅님이다!”

“인간 영웅님이야!”

“우와, 커다란 호랑이를 타고 있어!”

수인족 아이들이 몰려 왔다.

짝니가 무서운지 가까이 오진 못 했다. 그저 멀리서 꺅꺅 비명만 질렀다.

시혁은 짝니의 등에서 내렸다.

자기 뒤를 따라오게 해놓고, 수인족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수인족 아이들은 나무와 건물 뒤에 숨어 시혁을 훔쳐보았다. 그 눈이 매우 땡글땡글해서,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안녕? 잘 놀고 있니?”

“영웅님, 안녕!”

“저 호랑이는 영웅님 친구야?”

“잘 생겼다! 만져 봐도 돼?”

“안 돼. 성질 더러운 녀석이라 잘못하면 물어. 그냥 보기만 해.”

수인족 아이들과 얘기하고 있는데 경비병들이 다가왔다.

경계하는 눈으로 시혁을 주시했다.

“반갑습니다. 이곳은 생명 영령께 보호를 받는 도시, 시혁골입니다. 어쩐 일이신지요?”

응?

시혁골?

순간적으로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겨우 표정 관리를 했다.

“현자 영웅, 최시혁이라고 합니다. 대모 세계수에 있는 의뢰의 나무에서 의뢰를 듣고 왔습니다. 절 찾는 분들이 계신 것 같아서요.”

“최시혁 영웅님이시라고요?”

“이름이 익숙한데……”

경비병들이 눈을 굴렸다.

살쾡이 경비병이 뭔가 생각났다는 표정을 지었다.

“혹시, 8년 전에 우리 도시에 오신 적이 없습니까? 이곳 아르거스 행성이 아니라 전장에서요. 그때는 인간이 아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맞습니다. 그때는 엘프 의학자였지요.”

“헉! 영광입니다!”

살쾡이 경비병이 부동 자세를 취하더니 군례를 올렸다.

엉겁결에 후임 경비병들이 군례를 올리는 게 보였다. 그들의 얼굴에 이게 무슨 일인가 궁금한 기색이 역력했다.

좀 과한 인사에, 시혁은 살쾡이 경비병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아는 얼굴인가 싶어 그런 건데 알 수가 없었다. 시혁이 안다고 해봐야 꼬마 곰, 늙은 곰, 살쾡이 인간, 사슴 인간 정도가 전부이니까.

살쾡이 경비병이 씩씩하게 말했다.

“최시혁 님께서 오신 걸 알면 장로님들 모두 기뻐하실 겁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제가 직접 안내하겠습니다.”

경비대 조장 정도 되는 듯했다.

살쾡이 경비병을 따라갔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길이다. 많은 것이 바뀌었고, 또 많은 것이 바뀌지 않았다.

시혁은 옛 추억을 떠올리며 길을 걸었다.

장로 회관이 보였다.

좀 바뀌었다.

우선 규모가 커졌다. 5층까지 올라갔다. 중앙 부분을 커다란 나무가 관통하고 있는 게, 생명 영령이 힘을 쓴 듯했다.

살쾡이 경비병이 급히 문을 열었다.

“장로님들! 누가 왔는지 보세요! 최시혁 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뭐?”

“누가 왔다고?”

수인족들이 여기저기서 몸을 일으켰다.

복색이 화려한 게, 뭔가 직책이 있는 수인족들 같았다. 그들이 어슬렁어슬렁 다가오더니 뚱한 얼굴로 시혁을 쳐다보았다.

“뭐야, 인간이잖아?”

“엘프 의학자라고 분명히 말했는데, 왜 인간을 데리고 왔대?”

“멍청아! 최시혁 님은 자기가 인간이라고 그랬잖아! 영웅이 됐으면 당연히 인간이 됐겠지!”

“어, 그러네?”

“산왕은 어디 갔어? 매일 최시혁 님 보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더니?”

곧, 위층에서 곰 인간 하나가 내려왔다.

덩치가 컸다.

다른 곰 인간 보다 머리 하나는 위에 있는 것 같았다. 전신이 근육질이고, 두 손이 유난히 컸다. 반면 얼굴은 동글동글해서, 꽤 귀여운 인상이었다.

곰 인간, 산왕은 시혁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시혁은 고개를 갸웃했다.

낯이 익었다.

한 얼굴이 겹쳐졌다.

친구도 부모도 없어, 엘프 나무를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오던 한 작은 곰의 얼굴이.

< 시혁골 -1- > 끝

ⓒ 산호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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