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치호 짝니 -2- >
시혁은 신중하게 마법을 골랐다.
죽일 필요는 없다. 그냥 쫓아 보내기만 하면 된다. 그렇다면 시혁의 장기인 부여 마법보다, 간단한 직접 공격 마법을 쓰는 게 좋겠다.
한쪽으로 지팡이를 겨눴다.
번쩍!
시퍼런 번갯불이 튀어나갔다.
“캬아아앙!”
“크헝!”
“캐애액!”
다채로운 비명이 터졌다.
겉으로는 화려하고, 아프기도 굉장히 아프지만 그뿐이었다. 실질적인 피해를 입히지는 않았다. 위협용으로는 아주 제격인 셈이다.
맹수와 괴물들이 접근하다 말고 도망쳤다. 몇몇은 멀찍이서 겁을 먹고 머뭇거리다 일행을 놓치기도 했다.
엘프들이 인상 깊다는 얼굴을 했다.
“역시 영웅님이십니다.”
“저희가 저들을 쫓아내려면 굉장히 공을 들여야 하는데……”
“별 거 아닙니다. 간단한 마법인 걸요.”
시혁은 담담한 태도를 견지했다.
그때, 상공의 오행 순환체가 뭔가를 감지했다.
아니, 그렇지 않았다.
감지한 것은 없었다. 뭔가 존재감이 잠깐 들더니, 언제 그랬냐 싶게 사라져버렸다.
시혁의 얼굴이 굳었다.
오행 순환체가 잘못 감지한 것일까?
그럴 리 없다.
뻔했다.
늙은 검치호, 짝니가 주변에 접근한 것이다.
시혁은 지팡이를 움켜쥐었다.
하늘에서 밝은 청색 광채가 쏟아졌다. 광역 탐지 마법을 사용한 까닭이었다.
파란색의 빛이 사슴 마차 주위를 샅샅이 훑었다. 그러더니 한 군데로 모여들고, 거대한 검치호의 형상을 만들었다.
달리던 사슴 마차의 지척이었다.
엘프 하나가 소리를 쳤다.
“짝니다! 조심해!”
“크아앙!”
성난 울음이 터졌다.
짝니가 포효하는 것과 동시에 몸이 흐려졌다.
사슴 마차 위에 나타나더니, 거대한 앞발을 치켜들었다.
시혁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오행 순환체 둘이 찬란한 빛을 뿜었다. 그 빛이 짝니의 마법 저항력을 감소시켰다. 동시에, 시혁의 지팡이가 파멸적인 빛을 뿌렸다.
적색 광선이 짝니의 몸통을 강하게 후려쳤다.
짝니가 펄쩍 뛰었다.
“캬앙!”
생각보다 약했다.
배에 구멍 하나는 뚫어줄 요량으로 마법을 시전 했는데, 그저 가죽이 좀 그을리고 만 것이다.
시혁의 생각보다 짝니의 마법 저항이 강하다는 뜻.
짝니가 시혁을 노려보았다.
시혁은 지지 않고 짝니를 주시했다.
거대한 검치호다.
체고는 2미터, 체장은 5미터에 달했다. 백색 털에선 묘한 윤기가 흐르고, 검은 줄무늬가 그림자처럼 몸통 위를 떠돌았다. 네 발과 꼬리 끝이 흐려, 마치 유령을 보는 듯했다.
바로 지척에 짝니가 서 있었다.
고양잇과 맹수 특유의 노린내가 훅 풍겼다.
“크르르……”
짝니가 위협하는 소리를 냈다.
꽤 매서운 태도.
둘은 한동안 눈싸움을 했다.
시혁은 방심하지 않았다.
검치호는 숲의 진영에서 상급 병종 취급을 받는다. 눈앞에 있는 짝니는 그런 검치호 중에서도 유독 강했다. 고급 병종은 물론이고, 저레벨의 영웅도 이겨먹곤 했다.
얼마나 대치했을까.
별안간 짝니의 검은 줄무늬가 증발했다. 아니, 두 개의 앞발로 빨려 들어갔다. 거의 동시에, 짝니가 몸을 일으키며 두 앞발을 강하게 내쳤다.
시커먼 궤적이 그려졌다.
거뭇한 빛줄기가 시혁이 서 있던 자리를 난도질했다.
시혁의 몸이 수십 갈래로 찢겨졌다.
엘프들이 비명을 질렀다.
“아악, 영웅님!”
허상이었다.
시혁은 짝니의 배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환상 마법이 시혁의 전공은 아니지만, 실체에 가까운 허상을 남기는 것은 가능했다.
“크허엉!”
짝니가 분하다는 듯 괴성을 질렀다.
더는 덤빌 생각을 못 했다.
시혁을 한 번 돌아본 후, 그대로 몸을 날렸다.
심대한 위협을 느낀 모양.
가만히 놔둬도 도망칠 것 같다. 하지만 시혁은 이렇게 쉽게 짝니를 보내줄 생각이 없었다.
하늘에 떠 있던 오행 순환체가 내려와 있었다.
오행 순환체가 짝니의 전면을 가로막았다.
짝니도 그것을 느꼈다.
“크앙!”
울부짖으며 뛰어넘으려고 할 때, 오행 순환체에서 눈부신 빛이 터졌다.
섬광 마법.
찰나적 순간을 다투기에는 아주 좋은 마법이었다.
짝니가 몸을 움찔했다.
그것으로 끝.
시혁에게 아주 귀중한 시간을 내주고 말았다.
강력한 속박 마법이 쏟아졌다.
작정하고 시전한 마법이다. 오행 순환체가 걸었던 마법 저항 약화도 유효했다. 아무리 짝니의 마법 저항이 강해도 당해내기 힘들었다.
짝니의 거대한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끼이익! 끼익!”
괴상한 소리를 냈다.
몸을 뒤틀지만 소용없었다. 근육이 떨리며, 털이 물결치듯 흔들리기만 했다.
시혁은 천천히 짝니에게 다가갔다.
사슴 마차는 어느새 정지한 상태.
시혁의 손에서 서늘한 흰 빛이 반짝였다. 그 빛이 자라나더니, 한 자루 길쭉한 검이 소환되었다.
일반 소환자일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강해진 상태.
그걸 짝니의 목에 댔다.
“키이잉.”
최후를 직감한 듯, 짝니가 구슬픈 소리를 냈다.
엘프들이 살며시 고개를 돌렸다.
시혁은 검을 들어올렸다.
그걸 내리치려다 말고, 문득 한 가지 생각을 했다.
‘맞아. 탈것을 구해야 되지.’
멀리 갈 것 없이, 이 녀석을 구슬려 보면 어떨까?
야생성이 강해 과연 될까 싶지만, 까짓 거 밑져야 본전 아닌가.
시혁은 검을 짝니의 목에 댄 채 말했다.
“짝니라고 했지? 너, 내 탈것이 될 생각 없냐?”
“크릉?”
짝니가 무슨 소리냐는 눈으로 시혁을 쳐다보았다.
가당치도 않다는 듯,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아깝지만 어쩔 수 없지.
시혁은 망설이지 않고 검을 찔러 넣었다.
“카악!”
짝니가 겨우 몸을 웅크려 피했다.
그 간단한 몸짓으로도 힘든 것 같았다.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꼬리가 축 늘어져 배 아래로 들어갔다.
시혁은 딱딱하게 말했다.
“얌전히 있어. 빗나가면 아플 거다. 빨리 끝내주마.”
짝니가 질린 눈으로 시혁을 쳐다보았다.
뭐 이런 놈이 있나 싶었다.
자존심 상 한 번 거절했던 건데 다시 권하지도 않고 검을 찌를 줄이야?
풍기는 분위기는 온화한데, 뭐가 이리도 단호한지 몰랐다.
덕분에 완전히 기가 죽었다.
꼬리를 감추고, 땅에 배를 깔았다. 양 앞발 사이에 머리를 묻어 완전히 굴종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걸 보고 시혁도 멈칫했다.
저 자세, 시혁이 현자가 됐을 때 배운 바로는 완벽한 복종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믿어지지 않아 물었다.
“너, 내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거냐?”
끄덕끄덕.
짝니가 커다란 머리를 주억거렸다.
시혁의 어조가 집요해졌다.
“왜? 네가 이 근방에선 대장인 것 같은데, 내 탈것이 되는 것보단 혼자 멋지게 사는 게 좋지. 안 그래?”
“키아앙!”
짝니가 억울하다는 듯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당장 목숨이 달아날 판인데 그런 걸 가리게 생겼냐?
사실 노리는 것도 있었다.
자신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요즘엔 날이 조금만 추워도 부러진 송곳니 전체가 시렸다. 비가 오려고 하면 관절이 쑤시기도 했다.
인근의 이름난 맹수들은 진작 영웅 주인을 물어 떠났다. 주인들은 자기 탈것이라고 아주 열과 성을 다했다. 아픈 곳이 있으면 고쳐주고, 탈것 전용 무기다 갑옷이다 마련해주니 내심 부러웠던 것이다.
이것도 인연이고, 유약한 겉모습과 다르게 성품이 단호한 듯하니 섬길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혁은 짝니를 의심스럽게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종속의 의식을 진행하마. 반항하지 마라.”
“크으응.”
짝니가 얌전히 엎드렸다.
조심스럽게 짝니의 이마에 왼손을 얹었다.
속임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짝니의 움직임이 조금씩 풀리고 있어서였다. 충분히 주의하면서, 또한 정확하게 종속의 의식을 진행했다.
짝니의 이마에 작은 문양이 찍혔다.
하나의 별을 중간에 두고, 다섯 개의 점이 순환하는 형상.
시혁을 상징하는 문장이었다.
종속의 의식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동시에 짝니의 생각이 시혁의 머릿속으로 밀려들었다.
[배고프오. 주인어른, 뭣 좀 안 주시려오? 이틀이나 굶었소.]
나이 든 짐승이라 그런지, 시혁의 뇌에 전달되는 어감이 묘하게 무게가 있었다.
그나저나 이틀이나 굶었다고?
조금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종속의 의식도 끝났겠다, 검을 거두고 마법 주머니에서 보존시켜 놓은 사슴 고기를 꺼냈다.
짝니가 두 귀를 쫑긋 세웠다. 몸을 일으켜 시혁을 보더니, 침을 질질 흘렸다.
“배고프지? 옛다!”
사슴 고기를 던져주자, 가볍게 잡아챘다.
한 입에 집어삼키더니 부족하다는 얼굴로 시혁을 쳐다본다.
결국 지난 며칠 숲을 헤매면서 사냥했던 고기를 몽땅 털어주었다.
그러고도 모자란 모양이었다.
[주인어른, 뭐 더 없소?]
까만 코를 마법 주머니에 가져가 킁킁 냄새를 맡았다.
시혁은 쓰게 웃었다.
“이제 없어. 네가 다 먹었다고.”
[배고프오.]
“쯧쯧, 일단 움직여야 돼. 가면서 뭐 있을지 찾아보자. 내가 기절시킬 테니까, 네가 알아서 잡아먹어. 그리고 앞으로는 인간이나 엘프, 드워프 같은 지성 종족은 잡아먹으면 안 된다. 그러면 크게 혼을 낼 줄 알아라.”
[알았소.]
시혁은 짝니를 사슴 마차 멀찍이에서 따라오게 했다.
아까부터 사슴들이 부들부들 떠는 까닭에, 가까이 있으면 달리지 못할 것 같아서였다.
엘프들이 시혁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숲의 폭군을 길들이시다니 대단하십니다.”
“솔직히 전 거절할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죽이려고 했는데, 녀석이 보통 영악한 게 아니네요.”
“사실 짝니가 영웅을 만나면 종속될 지도 모른다는 얘기는 있었습니다. 짝니의 맞수였던 왕관 곰 빨간 눈이나 섬광 구렁이 빛비늘은 진작 주인을 만나 떠났거든요. 야성이 강해서 전사나 기사 영웅이 될 거라고 생각했지, 현자 영웅이 종속시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순간, 시혁은 짝니의 희미한 상념을 읽었다.
간단한 협박에 굴하여 종속된 행동의 뒤에 숨은 의도.
저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영악한 녀석 같으니……”
“네?”
“아닙니다. 계속 가시죠.”
혼잣말에 엘프가 반응하자, 시혁은 아무 것도 아니라며 손을 흔들었다.
사슴 마차가 속도를 올렸다.
아까처럼 마구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것을 감지한 동물들이 모여들었다. 시혁은 아까처럼 쫓아 보내는 대신, 간간히 기절 마법을 섞었다.
그러면 쫓아오던 짝니가 기절한 짐승을 낚아챘다. 행복한 감정을 보내며 씹어 먹으면서도, 속도를 올려 사슴 마차를 잘도 쫓아왔다.
시혁은 머릿속으로 질문을 했다.
[그런데 넌 어떤 능력이 있냐?]
[물리 저항, 마법 저항, 의태, 질주, 그림자 이동, 그림자 발톱……]
짝니가 두서없이 대답을 했다.
무려 6가지 능력이다.
날 수 없다는 것만 빼면 가히 최상급의 탈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나마 질주 능력 때문에 속도 면에서 크게 뒤지는 것도 아니고.
시혁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대단하구나. 비록 첫 만남은 좀 흉흉하긴 했다만, 이왕에 인연을 맺었으니 잘 해보도록 하자. 네가 범상하지 않다는 것은 잘 알고 있으니, 섭섭하게 대하지는 않겠다.]
그 말이 마음에 든 모양이다.
살짝 흥분된 감정이 전해졌다.
[나도 주인어른 좋소. 잘 해 봅세.]
어느덧 다 달렸나 보다.
저 멀리 거대한 세계수가 우뚝 솟아 있는 게 보였다.
그에 따라 맹수와 괴물들의 습격도 잦아들었다. 짝니도 배를 다 채웠는지 배가 고프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별나무의 도시에 진입했다.
상당히 번화한 곳이었다.
전장에서 보던 반신들의 본성을 오히려 압도했다. 거대한 나무들이 곳곳에 고층 건물처럼 서 있었다. 엘프 아이들이 나뭇가지 위에서 뛰어놀고, 정령들이 노래를 부르며 날아다녔다.
[맛있겠다.]
짝니가 엘프들을 보고 침을 흘렸다.
시혁은 다시 한 번 엄중하게 경고를 주었다.
“내가 말했지? 절대 인간이나 엘프 같은 지성 종족을 먹어선 안 된다. 그러면 정말 큰 벌을 내릴 거다. 난 말만 하고 넘어가는 성격이 아니니까 조심해라.”
[주인어른, 걱정 마오. 약조는 지키리다.]
경고한 보람이 있는지, 더는 맛있겠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엘프들이 시혁을 중앙 세계수로 데리고 갔다.
주위에서 신기하다는 시선이 쏟아졌다. 시혁이 아니라 짝니를 향해서였다. 개중에는 짝니를 알아보고 수군거리는 엘프도 몇 있었다.
세계수 앞에서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함께 온 엘프들이 깊이 허리를 숙였다.
“영웅님, 감사했습니다. 영웅님이 안 계셨으면 저희 중 몇 명은 대모 세계수에게 돌아가지 못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여기 통행권입니다. 이걸 보여주시면 앞으로 어느 도시에서든 세계수 관문을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어휴, 무슨 이런 것까지…… 감사히 받겠습니다.”
엘프들이 진은 실로 짠 나뭇잎 장식을 하나 내밀었다.
영험한 기운이 흘렀다.
고마워하며 받았다. 이 넓은 대수림을 오가는데, 이 나뭇잎 장식이 큰 역할을 할 테니까.
엘프들과 헤어졌다.
세계수 파수꾼들은 이미 상황을 알고 있었다. 진은 나뭇잎을 확인한 뒤 길을 비켜주었다. 짝니를 데리고 가서 고맙다는 말까지 남겼다.
시혁은 짝니와 함께 세계수 관문, 그 초록색 차원문으로 몸을 던졌다.
< 검치호 짝니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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