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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수 세계의 한의사-104화 (104/250)

< 검치호 짝니 -1- >

처음 느낀 감정은 당혹스러움이었다.

시커먼 기운이 파도처럼 시혁의 눈앞에서 물결치고 있었다.

어제까진 울창한 숲을 헤맸다. 괴물과 맹수가 도처에서 튀어나오는 흉험한 곳이었다. 그러다 익숙한 기운을 느끼고 접근했는데, 뜻밖에도 공허가 튀어나온 것이다.

지형도 참 괴상했다.

거대한 절벽이다.

칼로 깎은 듯 수직으로 떨어졌다. 워낙 높이가 높은 데다, 아래쪽이 보이지 않아 가까이 갈 엄두도 나지 않았다.

수십 킬로미터는 떨어진 곳에 또 하나의 절벽이 보였다. 그 절벽과 이곳 사이는 공허의 파도가 일렁이며 불길한 힘을 뿜어냈다.

그 공허를 보자,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시혁이 헤맸던 숲이 녹색의 생명력 넘치는 마나로 꽉 차 있었다는 사실이다.

저만치 보이는 절벽 위의 땅도 그랬다. 그곳은 백색의 마나가 넘실거렸다. 통찰 마법으로 살펴보니, 패도적이면서도 오만한 게 권세 진영의 반신이 웅거한 듯했다.

어쩐다?

비행 마법을 써서 날아가?

그건 안 된다.

영역 밖으로 나가는 순간 공허에 의해 몸이 침식될 것이다. 얼마 동안은 버텨도, 중간도 못 갈 테지. 그 다음에는 지구에서 인간형 괴수로 변이될 터.

50레벨을 찍어야 스스로 보호 마법을 걸어가며 이 거대한 공허를 넘어갈 수 있었다.

현재 시혁은 20레벨.

어쩔 수 없었다.

어차피 아르거스 행성에서 올린 레벨은 죽지 않는 한 유지가 된다. 나중에 50레벨을 찍고 오던가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한동안 공허를 노려보다가 몸을 돌렸다.

“어쩐다?”

막막했다.

다시 숲을 헤매야 할까?

또 며칠을 공칠 생각에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이번에는 괴물들과 맹수들이 많이 출몰하는 곳으로 가봐야겠다. 그곳이 생명의 마나 농도가 더 짙을 테니, 반신을 만나든 엘프 마을을 만나든 수가 나겠지.

막 발걸음을 옮기려고 할 때였다.

멀리서 뭔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크아앙!

뭐지?

시혁은 반사적으로 몸을 낮췄다.

지금까지 숲을 헤매며 한 번도 듣지 못한 소리다.

더구나 울음소리가 앞쪽이 아니고 등 뒤 먼 곳에서 들렸다는 게 이상했다.

뒤쪽에는 공허, 그리고 백색 영역밖에 없지 않은가.

설마 하면서도 고개를 돌렸다.

검은색의 비룡이 보였다.

한 쌍의 날개를 휘저으며 하늘을 날고 있었다. 거뭇한 공허가 사방에서 침습해 오지만, 검은색 파장이 흘러나와 공허를 밀어냈다.

다른 동물들도 보였다. 날개 달린 말이 우아한 몸을 뽐내고, 독수리를 닮은 거대한 새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투명한 물뱀이 하늘을 떠다니고, 심지어 작은 비행기도 하나 그 뒤를 쫓았다.

저것들은 뭐지?

시혁은 금방 그 정체를 알아차렸다.

괴수들의 위에 누군가 타고 있었다. 천사, 인간, 엘프, 어인, 드워프로 종족은 다 달랐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존재했다.

영웅들이라는 것.

또 하나.

각자 커다란 보따리 같은 것을 안장에 달아놓았다. 뭔가 해서 보니, 흉악한 갈고리가 달린 그물과 녹색의 작살을 얽어서 만든 보따리였다.

시혁은 그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이봐요! 여깁니다!”

거침없이 하늘을 날던 그들이 순간 움찔했다.

시혁의 머리 위에서 맴을 돌더니, 타고 있던 괴물들을 숲 언저리에 착지시켰다.

시혁을 한 번 훑어보더니 금방 어떤 상황인지 눈치 챘다.

“뭐야, 입문자잖아?”

“귀찮게……”

“현자 영웅인가? 흠, 아르거스 행성에는 처음 왔나 보지?”

영웅들은 초면인데도 바로 하대를 했다.

한바탕 질러버리려다 억지로 참았다. 화를 내도 최소한의 정보는 얻어내고 볼 일이었으니까.

“예. 지금까지 계속 헤매고 있습니다. 지리 정보는 지식 열람도 안 되고,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입문자면 그렇지 뭐. 신역 중앙에 있는 대신전으로 가 봐.”

“신역이라고요? 대신전?”

시혁이 의문을 표했지만 설명해 줄 마음은 없나 보다.

인간 영웅이 귀찮다는 듯 손가락질을 했다.

“저쪽으로 쭉 가. 저기에 대모 세계수의 대신전이 있어. 거대한 세계수가 있을 테니까, 그거 보고 따라가면 돼.”

거대한 세계수?

시혁이 숲을 헤매면서 그런 건 본 적이 없는데……

더 물어보려고 했지만, 영웅들은 고개를 저어 거부했다.

“우린 의뢰 때문에 바빠. 용을 잡아야 한다고.”

“네깟 놈은 상상도 못할 위업이지. 우린 새끼용을 미끼로 고룡을……”

“이봐, 입 조심 해. 잘못해서 일이 새어나가기라도 하면 우린 아르거스에서 발붙이지도 못 하게 돼.”

“이제 며칠 남지도 않았는데 뭘? 저놈이 대모 세계수, 아니 엘프 마을에 도착하기도 전에 끝이 날 걸.”

“자, 어서 움직이자고. 그 동안 고생한 대가를 받아야지.”

다섯 영웅들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시혁은 부러운 눈으로 그 뒤를 쳐다보았다.

생각해 보면 전장에서 만났던 영웅들도 저마다 탈것이 있었다. 앰버튼 경은 애마 바투스를, 이미라는 비룡을 타고 다니곤 했지.

아르거스의 탈것은 공허에 대해 저항력이 있나 보다.

신역은 신이 지배하는 영역을 말하는 것 같고, 대신전은 아마도 본성에 대응하는 듯했다.

그런데 어째서 세계수를 못 본 걸까.

시혁은 비행 마법을 사용하여 날아올랐다.

하늘 높이 올라갔다가 신역의 경계를 넘는 바람에 공허에 노출되었다. 전신이 딱딱하게 굳자, 기겁하여 얼른 영역 안으로 들어왔다.

아슬아슬하게 한계에 걸친 채, 인간 영웅이 가리킨 방향을 향해 통찰 마법을 최대한으로 발휘했다.

겨우 보였다.

아주 먼 곳에, 거대한 나무 그림자가 흐릿하게 일렁였다.

너무 멀어서 거리를 가늠할 수조차 없다. 도보로 가다가는 며칠이 아니라 수십 일은 족히 걸리게 생겼다.

어쩌지?

이래서야 시간만 낭비하게 생겼는데.

그러다 문득, 아까 영웅들이 자기들끼리 떠들어대던 말이 하나 생각났다.

엘프 마을.

분명히 엘프 마을에 도착하기도 전에 끝이 날 거라고 했다.

그 말은 곧, 이 근처에 엘프 마을이 있다는 뜻이겠지.

통찰 마법을 재차 사용하며 주위를 살폈다. 생명의 마나 농도를 위주로 확인하자, 이내 농도가 유난히 짙은 곳을 발견할 수 있었다.

꽤나 큰 나무들이 모인 곳이다.

그 형태가 낯에 익었다.

다름 아닌 생명 진영 건물과 비슷한 나무들이었다. 아무래도 저곳에 엘프들이 모여 사는 모양이다.

지상으로 내려온 뒤, 땅을 박찼다.

가속 마법과 도약 마법, 비행 마법을 섞어가며 달렸다. 상당히 거리가 있었지만, 그렇게 달리자 몇 시간 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정지! 누구냐!”

맞게 왔나 보다.

엘프들이 막아섰다.

전장에서 보던 엘프들과는 좀 달랐다.

풀색 옷을 입은 건 비슷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낡은 티가 났다. 허리에는 짧은 칼을, 손에는 짐승의 뿔로 만든 활을 들고 있었다. 오른손을 등 뒤로 감춘 게, 시혁을 경계하는 듯했다.

시혁은 정중히 인사를 했다.

“현자 영웅, 최시혁입니다. 대모 세계수의 대신전으로 가는 길인데, 너무 멀어서 도움을 청하고자 왔습니다.”

“현자 영웅이라고?”

엘프들은 경계의 눈을 늦추지 않았다.

개중 한 명의 엘프가 시혁을 주시하며 물었다.

“그렇다면 혹시, 죽음 진영이나 흡혈 진영, 어둠 진영이나 지옥 진영의 반신을 위해 일한 적이 있습니까?”

이런 건 왜 묻는 거지?

의아해하면서도 순순히 대답했다.

“전 권세 진영과 생명 진영, 진리 진영에서 종군했습니다. 보여드릴까요?”

비어 있는 왼손을 내밀었다.

지구에서 익힌 대로, 본인의 내민 깊숙이 숨어 있던 힘을 꺼냈다.

진녹색의 광채가 손바닥 중심에서 휘몰아쳤다.

거기에 치료사 특유의 힘까지 보여주자, 엘프들이 금방 경계를 풀었다.

“의학자셨구려!”

“치료사에 의학자를 거쳐 오신 영웅이라면 믿을 수 있겠소.”

“세계의 끝 마을에 오신 것을 환영하오.”

태도가 180도로 바뀌었다.

한때 생명 진영 소속이었다는 점에 호감을 느끼는 모양이다.

엘프들이 따라오라며 손짓을 했다.

마을은 으슥한 계곡에 숨어 있었다.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엘프들답게,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마을규모가 꽤 작았다.

기껏해야 수십 명 정도 사는 듯했다.

시혁은 주위를 둘러보다 말했다.

“수가 적네요?”

“예. 이곳은 세계의 끝을 연구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어서요. 대부분 연구 인력이고, 주기적으로 순환 근무를 합니다.”

하긴 아이와 노인이 안 보이는 게 이상하긴 했다.

시혁은 빈 방으로 안내를 받았다.

생명 진영 출신 영웅이라고 각종 과일과 채소를, 견과를 내주었는데 상큼하니 맛이 있었다.

하지만 배를 채우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적당히 먹어 성의를 보인 후, 대표 격의 엘프에게 질문했다.

“대모 세계수로 가야 하는데, 어떻게 가는 게 가장 좋겠습니까?”

“세계수 관문을 이용하는 게 가장 좋지요. 마침 별 나무의 도시가 근처에 있습니다. 거길 통해 가시면 될 겁니다. 보아하니 탈것도 아직 없으신 것 같은데, 도보로 가려면 저희도 오랜 시간 여행해야 합니다.”

일종의 차원문이라고 했다. 대모 세계수의 신역 내에서라면 어디든 단숨에 갈 수 있다나.

그런 게 있다니 다행이었다.

내친 김에 궁금하던 것도 한 가지 물었다.

“여기로 오는 길에 다른 영웅들이 각자 탈것을 타고 다니는 걸 봤습니다. 그것들이 공허의 힘도 밀어내던데, 그런 건 어디서 구하는 겁니까?”

“영웅마다 천차만별입니다. 사는 사람도 있고, 야생의 동물을 길들이는 사람도 있지요. 아르거스에 사는 동물 중에는 대재앙을 겪으면서 공허에 대한 저항을 가지게 된 동물이 많거든요. 이 근방에도 몇 마리가 있는 것으로 압니다.”

“그래요?”

“예. 그나마 얼마 전부터 한 마리 빼고는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지요. 예전에는 정말 골치 아팠습니다.”

길들이는 방법은 간단했다.

탈것으로 만들 대상을 제압해 놓고 종속의 의식을 진행하라던가.

시혁도 종속의 의식에 대해 알고 있었다.

재료도 마침 가지고 있으니, 동물만 잡으면 탈것을 얻는 셈이다.

마음이 급해졌다.

“그렇습니까? 감사합니다.”

당장 일어나려고 했는데, 엘프들이 시혁을 붙잡았다.

“그러지 마시고 내일 같이 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마침 정기 보고 날이어서 내일 연구 결과물을 싣고 같이 출발할 예정입니다. 저희만 아는 길을 통해 이동하니, 더 빨리 도착하실 겁니다. 저희도 영웅님의 보호를 받을 수 있고요.”

나쁜 소리는 아니다.

시혁은 엘프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탈것이야 이동하면서 잡아도 될 일이니까.

엘프들은 시혁을 융숭하게 대접했다. 잠자리도 최상으로 주고, 엘프 차니 엘프 술이니 하는 것을 계속해서 내왔다.

다음날 새벽 일찍 함께 출발했다.

사슴이 끄는 마차에 탔다. 지붕은 없고, 떨어지지 말라고 나무 난간만 설치되어 있었다.

고삐를 잡은 엘프가 시혁에게 주의를 주었다.

“영웅님. 달리는 도중에 늑대나 검치호, 거대 거미 같은 것들이 공격해 올 겁니다. 어차피 우리를 쫓아오진 못하니까, 굳이 죽이진 마시고 쫓아내기만 해주세요.”

“좀 위험한가 보죠?”

“그렇지는 않습니다. 좀 귀찮을 뿐이죠. 그래도 조심해야 할 게 하나 있습니다.”

별나무의 도시로 가는 길에 있는 늙은 검치호 한 마리.

대표 격의 엘프가 언급했던 동물 중 하나다.

덩치가 다른 검치호의 두 배는 족히 된다고 했다. 송곳니 하나가 부러져 짝니라고 부르는데, 보통 녀석이 아니라던가.

가죽이 질기고 마법 저항 능력과 순간 이동 능력이 있어 얕보면 큰 일 난다고 했다. 이미 몇 명이나 희생당했다고.

시혁은 눈살을 찌푸렸다.

“놈이 나타나면 끝장을 봐야겠네요. 가만 놔두면 희생자가 더 늘 것 아닙니까?”

“그렇게만 된다면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

엘프들이 은근히 기대하는 기색을 보였다. 현자 영웅이 어떤 것을 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혁은 오행 순환체 하나를 하늘 높이 띄웠다. 일종의 인공위성처럼 활용해서 주변을 정찰하려는 것이다.

영웅이 된 현재도 다를 수 있는 오행 순환체는 3개에 불과했다. 대신 더 정밀한 조종이 가능해졌다. 거의 저레벨 마법사처럼 써먹을 수가 있었다.

“출발하겠습니다.”

엘프가 손짓을 했다.

그걸 알아들은 듯, 사슴 네 마리가 일제히 발을 옮겼다.

다각다각 소리가 났다.

곧 속도가 붙었다.

바람의 정령들이 달라붙었다. 속도가 더 빨라졌다. 지상에서 살짝 뜬 채로 날 듯이 질주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나무와 부딪치지 않는 게 신기했다. 어느새 숲이 울창해져, 햇볕이 잘 들어오지 않을 지경이 되었어도 그랬다.

“흠!”

시혁이 얼굴을 굳혔다.

띄워놓은 오행 순환체에서 어떤 움직임을 감지한 까닭이었다.

엘프들이 경고했던 맹수들이다.

< 검치호 짝니 -1- > 끝

ⓒ 산호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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