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담 >
진료가 끝나고, 인근 한정식 집에서 마주 앉았다.
둘 다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대강 식사를 한 후, 손문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르거스에 대해 하실 말씀이 있는 거지요?”
“맞습니다. 그 동안 제가 알아낸 사실이 좀 있어서요.”
좀이 아니지.
어쩌면 기존 이능력자들이 수집한 정보보다 더 많이 알아냈을지도 몰랐다. 정보 계열 발현자라고 해도 바늘구멍으로 아르거스를 엿보는 게 전부이니까.
슬슬 시동을 걸었다.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아르거스는 외계의 행성 같습니다. 지구와 비슷한 환경이고, 다양한 종족이 살고 있습니다. 꼭 판타지 소설이나 게임의 배경처럼요.”
그 말을 듣고, 손문철의 눈빛이 묘해졌다.
“행성이라고요? 저희가 파악하기로는 인공적인 장소 같았습니다만.”
전장에 대해서는 알아도, 행성에 대해서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나 보다.
시혁은 그 점을 지적했다.
“그곳은 보통 전장이라고 부릅니다. 협회장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인공적인 장소지요. 신위 경쟁을 위해, 아르거스의 신들이 만들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 말에, 손문철이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아르거스의 신들이라고요?”
“예. 음, 생각보다 많은 걸 알아내진 못하셨나 봅니다.”
손문철이 고소를 머금었다.
“그랬지요. 몇몇 이능력자들이 꾼 꿈이나 정보 계열 발현자들이 알아내는 걸로 재구성한 게 고작이니까요. 대체 전장은 뭐고, 신들은 또 뭡니까?”
“음…… 일단 그 동안 알아낸 사실부터 알려주시겠습니까? 잘못된 것은 바로잡고, 부족한 부분은 보충하겠습니다.”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불특정 다수가 아르거스에 소환되어 그들끼리 전쟁을 벌인다는 것과, 그 결과 이능을 각성하거나 간혹 괴수 질병에 걸린다는 것 정도?
일반, 영웅, 반신의 차이에 대해서도 잘 몰랐다. 그저 강하고 약한 자가 있다고만 알고 있었다.
시혁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무 거라도 좋습니다. 백지 상태라고 생각하시고, 뭐든 말씀해 주세요.”
손문철이 눈을 번뜩였다.
꼭 닭장의 병아리를 노리는 솔개의 눈을 보는 듯하다.
시혁은 손깍지를 꼈다. 의자에 등을 기대고 적당히 뜸을 들이다 말했다.
“한 가지 약속해주시기 바랍니다.”
“뭡니까?”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 그 누구에게도 옮기지 말아 주세요. 피치 못할 경우에는 제 이름을 대지 마시고요.”
“그야 당연한 말씀이지요. 걱정 마십시오. 원장님 신변을 노출시킬 생각은 절대 없습니다. 설령 대통령이 물어보더라도 비밀로 하겠습니다.”
몇 번이나 다짐을 받았다.
그런 다음에야 아르거스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저번에 말씀하셨지요? 지금 지구에 생긴 모든 일들이, 바로 그곳에서 시작되었다고요.”
“예. 그렇게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야기가 깁니다. 어디 보자…… 일단 아르거스 행성과 전장의 관계에 대해 설명해야겠네요. 자, 여길 보세요.”
시혁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그림 어플을 실행시킨 후, 반원을 하나 그리고 그 주위에 작은 덩어리를 수십 개 넘게 그렸다.
“이게 아르거스 행성입니다.”
손문철이 눈을 깜빡였다.
“행성이라니요? 이렇게 생긴 행성도 있습니까?”
“원래 이렇지는 않았지요. 수백 년 전 대재앙이 발생하고 이렇게 변했다고 합니다.”
“대재앙이요?”
“예. 온전하던 아르거스 행성을 수천 조각 이상으로 찢어버렸다고 합니다. 지금은 그나마 복구되어서, 여기 보이는 것처럼 절반 정도는 원래대로 돌아갔습니다.”
“아, 이 반원이 복구된 부분인가 봅니다.”
“예. 여기 작은 덩어리들이 보이지요? 이게 아르거스 행성의 파편들입니다. 지금은 신들의 힘으로 생태계가 유지되는데, 이것들이 이능력자, 그러니까 소환자들이 싸우는 전장이 됩니다. 전장이 될 때는 아르거스에서 멀어졌다가, 전투가 끝나면 복구된 부분에 가서 붙는 것 같습니다.”
“흠, 그런 식으로 행성을 복구하나 보네요. 그런데 소환자라는 게 뭡니까? 아, 그 전장으로 소환되는 사람들 말입니까?”
“맞습니다. 전 우주에 걸쳐 있고, 원래는 평범한 사람들이지요. 개중에는 인간도 있고 엘프, 드워프, 오크 같은 여러 종족이 존재합니다.”
“예, 저도 거기까진 알고 있습니다.”
“소환자들끼리 전장에서 싸운다는 것도 안다고 하셨지요? 그 경험에 따라 조금씩 계급이 상승합니다. 지구의 온라인 게임에서 계급이 오르는 방식과 비슷하죠.”
“신기하네요. 그럼 저도 아르거스에서 경험을 쌓았겠습니다.”
“당연하지요. 제가 보기에는 철 진영의 반신 같습니다.”
“반신이요? 철 진영?”
“아르거스의 소환자들은 등급을 크게 셋으로 나눌 수가 있는데 그게 일반, 영웅, 반신입니다. 영웅 소환자부터 지구에서 각성해서 이능력자가 되지요. 협회장님은 G급이잖습니까? 아르거스에서는 반신이라는 뜻입니다.”
“아, G급과 S급 사이에 간극이 크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그런 사실이 숨겨져 있었네요.”
시혁은 자신이 지금까지 알아낸 사실을 이야기했다.
대재앙, 그리고 신위 경쟁.
열다섯 진영과 중립 괴물들, 그리고 원주민들에 대해서.
모든 이야기를 다 하려면 밤을 새도 모자랐다. 일단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만 설명했다.
단, 한 가지는 숨겼다.
열다섯 마법사.
시혁의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어서였다.
손문철은 오른손 검지로 식탁을 탁탁 두드렸다.
설명을 듣다 보니 한 가지 의문이 생긴 모양이었다.
“신기하네요. 그런데 어째서 원장님만 아르거스를 기억하고 계신 걸까요? 제가 아는 어떤 이능력자와 발현자도 이렇게 모든 것을 알지는 못했습니다. 매일 아르거스에 방문하는 것도 그렇고, 뭔가 원장님이 모르는 사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시혁이 말하지 않은 사실이다.
대재앙을 초래한 열다섯 마법사의 행방에 대해서.
수인족들이 그랬다.
열다섯 마법사의 영혼이 이계로 튕겨져 나갔다고.
아르거스에서 이계가 뭐냐.
바로 소환자들의 고향 세계가 아니냐.
지구도 그 중 하나였다.
어쩌면 열다섯 마법사 중 한 명, 혹은 그보다 많은 수가 지구에 도착했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쯤은 지구인으로 환생했을지도 모른다.
가장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면……
시혁이다.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시혁이 전생에 아르거스의 열다섯 마법사 중 하나였을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열다섯 마법사에 대해서는 함구한 것이다. 괜히 번거로운 일이 생길 듯해서.
손문철이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말했다.
“도대체 아르거스의 신들이 왜 이런 일을 벌인 걸까요? 행성 파편을 굳이 멀리까지 보내고, 소환자들끼리 전투를 벌인 다음 원래 자리로 복귀시킨다? 굉장히 비효율적인데요. 그 과정에서 드는 힘만 해도 상당할 거 아닙니까?”
“그렇지요.”
“신들의 의도가 중요한 역할을 할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게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면 모를까, 지금처럼 해가 된다면 두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시혁도 동의했다.
엔트로피의 법칙은 아르거스에서도 유효하다. 신위 경쟁이 생산적인 일이라고는 보기 어려웠다.
새로운 신의 탄생, 그것과 관련이 있었다.
천상도에서 이미 눈치 채지 않았나.
아직 비어져 있는 신들의 자리와, 공허에 남은 힘의 속성 사이에 상당한 유사점이 있다는 것을.
그렇다면 문제는 하나.
새로운 신이 탄생하는 게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알아내야 했다.
그때, 손문철이 말을 이었다.
“조사를 좀 해봐야겠습니다. 혹시 제가 또 알아야 하는 건 없습니까?”
시혁도 정신을 차렸다.
방금 전 떠올린 생각을 깊이 묻어두고, 한 가지 사실을 더 공개했다.
“더는 없습니다. 아, 제가 이능력자가 되었으니 조만간 더 많은 사실을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반 소환자들은 아르거스의 전장에만 소환이 되는데, 영웅들은 아르거스 행성에 방문하는 게 가능하거든요.”
“아르거스 행성? 여기 복구된 곳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예. 신들의 지역과 반신들의 성역이 모여 있는 곳이죠. 지금은 그곳을 탐험하고 있습니다. 전장은 인공적인 공간이라 두 달이 지나도 현실에선 1, 2시간 지난 게 다인데, 아르거스 행성은 시간 비율이 대충 12대 1 정도여서 오래 있기가 힘듭니다.”
“오호, 아르거스 행성이라…… 그럼 그곳에서도 많은 것을 알아내셨겠습니다.”
“그게, 지금은 숲을 헤매는 중입니다.”
“숲을 헤매다니요?”
시혁은 입맛을 다셨다.
영웅 진화를 끝마치고, 시혁은 기쁜 마음으로 아르거스에 방문했다.
도착한 곳은 반절 가량 복구된 아르거스 행성.
영웅들이 모여 있는 곳에 갈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거대한 숲에 덜렁 떨어졌다.
그 다음부터 지금까지, 며칠을 허탕 치고 말았다.
영웅은 반신과 계약을 맺어야 전장으로 갈 수 있다. 그런데 반신과 계약을 하기는커녕 반신 얼굴도 못 본 상태였다. 일단 대처로 나가는 것을 목표로 마을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다행인 것은, 어제 방문에서 성과를 거두었다는 점.
숲의 경계 부위에 접어들었다. 나무가 듬성듬성 해지고, 멀리 검은 오로라 같은 것이 보였다. 어디서 본 것 같은 현상이어서, 지금은 거길 향해 가고 있었다.
손문철이 활짝 웃음을 지었다.
“원장님이 계셔서 다행입니다. 어둡던 세상에, 한 줄기 서광이 비친 것 같습니다. 사실을 밝히시는 게 쉬운 결정은 아니셨을 텐데, 원장님의 결단 덕에 인류는 더 나은 미래를 맞이할 겁니다.”
“과찬이십니다.”
손문철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시혁을 칭찬했다. 하도 금칠을 해서, 얼굴이 다 화끈거릴 지경이었다.
공식적으로 요청을 받았다.
“원장님. 꼭 아르거스 행성이나 신들에 대한 내용이 아니더라도, 아르거스에 대한 내용을 정리해서 주시지 않겠습니까? 전장에서만 통용되는 내용이더라도, 저희에겐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러지요. 다만 제가 요즘 좀 바빠서, 늦어져도 양해는 해주세요.”
“하긴 오늘 보니 한의원 환자가 엄청나던데, 시간이 부족하시겠습니다. 어쩐다……”
손문철은 고민하다가 한 가지를 제안했다.
협회 차원에서 치유 계열 이능력자를 파견하겠다는 것이다.
비용은 협회에서 책임진다. 대신 하루에 일정 시간을 할애하여 아르거스의 지식을 정리해야 했다. 그것을 협회로 제공하는 대가였다.
물론 공짜는 아니다. 지적 재산권을 인정하여, 지식 한 건마다 거액의 돈을 받기로 했다.
가장 급한 것은 열다섯 진영의 병종과 아르거스의 괴물들에 대한 것이다.
이것 말고도 마법, 마나학 등 기존에 아는 것을 다 전달해야 하니 당분간 꽤 바빠질 것 같았다.
혹시 지구인 영웅을 만나면 그에 대한 정보도 넘겨주기로 했다. 아르거스에서의 능력과, 지구에서의 능력을 비교하는 것도 의미가 있으니까.
“또 필요한 게 있습니까?”
그렇게 묻자, 손문철이 머리를 흔들었다.
“글쎄요. 지금은 이 정도로 충분한 것 같습니다. 혹시 필요한 게 생각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좋습니다. 오늘은 늦었고, 조만간 하나씩 정리해서 보내드리겠습니다. 음, 숲 진영 병종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네요.”
“예, 감사합니다. 다시 한 번, 원장님의 결단에 감사드립니다.”
“아닙니다. 어차피 저도 언젠가 밝히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차라리 이렇게 되니 마음이 편하네요.”
혼자만 아르거스에 대해 알고 있는 것도 스트레스였다. 가끔은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기도 했다.
이젠 그 짐을 내려놓은 셈.
홀가분했다.
손문철과 헤어져 오피스텔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날 밤.
시혁은 세계의 끝에 도착했다.
< 대담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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