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웅의 시련 -3- [4권 끝] >
그 중에서도 일곱.
권세, 철, 바다, 영혼, 파괴, 피, 죽음 진영 반신들이 발휘하는 힘.
이 이질적인 힘들을, 지독한 악의가 하나로 묶어 놓았다.
시혁은 승천 이적 때마다 보는 일곱 개의 태어나지 않은 별을 떠올렸다.
그것들과 일치했다.
그렇다면 한 가지 가설을 세울 수 있겠다.
신위 경쟁에서 승리자가 나타날 때마다 공허가 약화된다는 것.
어째서 그게 가능한지는 모르겠다.
한 가지 짐작 가는 게 있긴 한데, 증거 하나를 더 찾아야 확신할 수 있었다.
시혁은 신녀에게 인사를 하고 물러나왔다.
약을 만들기 시작했다.
공허 자체를 해독할 수는 없었다. 워낙 심하게 얽혀 있어 불가능한 일이었다. 대신 그 자체를 독으로 간주하여 추방하는 것은 가능했다.
오행 순환체를 응용했다. 천상도에는 좋은 약효를 가진 식물이나 동물이 없어서, 주민들의 도움을 받았다. 헬라드 권속의 빛 속성 힘을 이용하고, 네일룬 권속의 밤 속성 힘을 이용하는 식이었다.
그렇게 만든 게 칠색 저항체.
오직 공허에만 작용을 했다. 천상도 주민들의 긴밀한 도움이 필요하니 만들기도 어려웠다. 일정 이상 강한 공허에는 힘도 못 썼다.
그러나 이것으로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소지하는 게 가능하고 모든 종족에게 적용이 되니까.
라크라가 놀라워했다.
[대단한데? 아르거스 행성에서 못 써서 그렇지, 천상도 주민들이 유용하게 쓰겠어. 솔직히 성공할 거란 예상을 못 했는데, 정말 대단해.]
“행성에서는 쓸 수가 없다고?”
[못 쓰는 건 아니고 못 만들지. 고신의 권속은 천상도나 몇몇 특별한 장소에서만 살고 있으니까. 다른 종족들도 그렇지만, 우리 같은 24 고신의 권속들이 대재앙 때 너무 큰 피해를 입었어. 자, 그건 그렇고 할 건 해야지?]
라크라가 또 빙글빙글 돌았다.
빛이 터져나왔다.
시혁은 스스로의 머리에 떠오르는 개념을 받아들였다.
[의학자 영웅으로 진화 가능.]
[특전 : 엘프의 민첩.]
괜찮은 특전이다.
엘프 때보다는 못해도 빠르게 움직일 수 있다는 뜻이니까.
라크라가 푸르륵대며 웃었다.
[이제 하나 남았지? 이번엔 간단한 대신 힘들어. 환자 1명만 치료하면 돼.]
“환자 1명? 어째 불길한데……”
[네일룬의 신녀, 기억하지?]
“당연하지. 잠깐, 그 신녀를 치료하라는 거야?”
[응. 할 수 있잖아? 힘이 들어서 그렇지.]
시혁은 인상을 썼다.
라크라의 말 대로였다.
불가능하진 않다. 오행 순환체와 칠색 저항체를 총동원하면 공허의 핵도 소멸시킬 수 있었다.
공허의 핵을 품은 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일룬의 신녀니까. 네일룬의 권속들은 공통적으로 봉인 능력을 가지기 때문이었다.
다만 시간이 오래 걸린다.
시혁의 계산으로는 최소한 두 달 정도.
오늘 안으로 영웅이 될 줄 알았더니, 그게 최소한 2월 말로 미뤄지게 생긴 것이다.
전장과 다르게, 이곳의 시간은 끊임없이 흘러가니까.
라크라가 푸르륵 거렸다.
[그래도 그게 낫지 않아? 시간만 투자하면 끝이잖아. 그리고 고향 세계에 가 있는 동안 신녀 스스로 치료할 수 있게 방법 같은 거 알려주면 더 좋을 것 같아.]
“너희들, 이제 보니 내 밑천을 다 빼먹으려는 거구나?”
[에이, 어차피 세계 지식에 이미 다 등재된 거잖아. 바탕이 된 이론도 우리 아르거스 거고. 어려운 사람끼리 같이 쓰자는 거야. 너도 네 고향 세계에서 곧 각성할 테니까 이익이잖아? 소환자들은 각성하고 나면 인생이 뒤바뀐다던데, 기대해도 될 거야.]
“흥, 말이나 못하면.”
시혁은 짐짓 웃어 넘겼다.
하지만 이런 라크라의 태도가 계속 마음에 걸렸다.
신들도 그렇고 라크라도 그렇고, 자신을 이용할 대상으로 밖에 보지 않는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새삼 오행 순환체의 파훼 마법을 세계 지식에 등재하지 않은 게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비장의 무기를 만들어야겠다.
신들도, 그 누구도 모를 시혁만의 비밀 무기를.
바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좋아. 어쨌든 신녀만 치료하면 끝이다, 이거지? 난 이만 가봐야겠다. 조금이라도 빨리 시작해야 빨리 끝을 내지.”
라크라가 꼬리를 살랑거렸다.
[그럴래? 좋아, 건투를 빌게. 신녀님은 24 고신의 모든 권속에게 존경 받는 분이야. 얼른 건강해졌으면 좋겠어.]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그 길로 신전을 벗어났다.
신녀는 당황스러워 했지만, 곧 시혁의 치료를 받아들였다.
치료라고 해봐야 오행 순환체와 칠색 저항체를 주입하는 게 전부였다. 마나를 꾸준히 부어주면 되니, 여유가 남는 것이다.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일곱 명의 새로운 신이 태어나면 고신들이 돌아오는 겁니까?”
“알 수 없어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죠. 저희는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어요.”
최악의 상황?
다름 아닌 고신들이 공허에 침식되는 것을 말했다.
고신들은 스스로를 공허 속에 던졌다. 자기들을 희생하여 아르거스 행성을 유지시켰다. 실로 거룩하고 위대한 행위지만, 공허에 침식되어 파괴신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시혁은 한 가지를 지적했다.
“신전에 보니까 고신들 말고도 신들이 더 있는 것 같던데, 그들에게는 도움을 받을 수 없습니까?”
“힘들어요. 그 분들은 신위 경쟁을 유지하는데도 벅차하세요.”
“수가 훨씬 많은데요?”
“힘의 크기가 달라요. 지금은 24 고신과 100 현신(現神)이라고 지칭하지만, 예전에는 상위신과 하위신이라고 불렀어요. 100 하위신은 저마다 모시는 상위신이 있었으니까요.”
지금까지는 아르거스의 신들, 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중에도 분류가 있나 보다.
신녀가 지평선 너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인간의 시력으로는 확인할 수 없는 거리.
그곳에 세계의 끝이 있다고 했다. 신위 경쟁의 결과 안정된 대지 사이로, 지금도 공허의 파도가 솟구치고 있다던가.
“불길한 느낌이 들어요.”
신녀가 그런 말을 했다.
“아르거스가 옛 모습을 되찾는다 해도, 우리가 알고 있던 살기 좋은 세계는 아닐 거라는 생각을 자꾸 하곤 해요.”
그야 그렇겠지.
이렇게 홍역을 겪은 뒤 복구되었는데 멀쩡하면 그게 더 이상하다.
“다 잘될 겁니다.”
시혁은 좋은 말로 신녀를 위로했다.
신들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내용을 들을 수 있었다. 반면, 열다섯 마법사에 대해서는 듣기가 힘들었다.
얘기를 꺼내자마자, 신녀가 혐오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저주 받을 종자들 말은 하지도 마세요.”
결국 더 이상의 정보 획득은 실패했다.
시간이 흘렀다.
처음 예측했던 것처럼, 신녀 치료에는 약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지구 기준으로 딱 2주.
아르거스에서는 거의 반년이 소요된 셈이다.
신녀가 홀가분한 얼굴을 했다.
“죽을 때까지 공허의 핵을 품고 있어야 하는 줄 알았는데, 소환자님께 빚을 졌네요.”
“도움이 됐다니 다행입니다.”
“지금은 영웅이 아니시니 보답할 길이 없겠어요. 나중에 영웅 되시고 한 번 찾아오세요. 그때 보답을 할게요.”
천상도에서 영웅을 본 적이 없다.
영웅이 된 후 방문하는 게 가능한 일인가?
신녀가 허튼 소리를 하는 건 아닌 듯했다. 시혁은 그저 기억해 두었다.
신전으로 돌아왔다.
라크라가 껑충껑충 뛰었다.
[대단해, 대단해! 3차 시련도 끝마쳤네? 자, 이쪽으로 와. 영웅이 되는 것을 축하해!]
라크라는 시혁을 신전 중앙으로 이끌었다.
축축한 코로 시혁의 어깨를 건드리더니 말했다.
[이제 보기 힘들겠네. 시련 받느라 고생했어. 잘 가고, 좀 아플 텐데 잘 참아.]
아프다니?
라크라가 재주를 넘어 모습을 감췄다.
그 순간, 머릿속에서 어떤 정보들이 마구 튀어 올랐다. 바로 영웅으로서 시혁이 가질 힘에 대한 내용이었다.
[현자 영웅]
[입문 계급]
[인간 종족]
[복합(생명, 불, 땅, 쇠, 물) 속성]
[진영 미정 : 선 성향, 중립 성향 진영 임관 가능]
[경험 : 권세/치료사, 생명/의학자, 진리/현자]
[특전 : 인간의 의지, 엘프의 민첩, 진리 포착]
[특기 : 다중 속성 치료, 약효 강화, 급속 치료, 대량 조제, 치료소 구축, 광폭화, 소환물 연결, 다중 속성 강화, 영혼 회복]
[특화 : 질병, 연구, 의학]
[귀속 : 12 분열 오행 순환체]
[궁극기 : 환생]
시혁의 행보가 집약되어 있었다.
새롭게 얻은 진리 포착은 시혁의 마법 성공률을 증가시켰다. 오행 순환체가 발현하는 마법까진 적용이 안 되니 아쉽지만, 이만하면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거기다 궁극기는 또 어떤가.
무려 환생이다.
흔히 영웅들이 갖는 부활과 비슷하면서 달랐다.
죽은 다음 시간이 오래 지났어도 사용이 가능했다. 이건 환생의 장점이었다. 대신 제한이 있었다. 환생을 쓸 때마다 어떤 힘을 소모했다. 이걸 다 쓰면 사용이 불가능해진다.
최종 병기를 살리려면 힘의 전부. 영웅은 1/4. 고급 병종은 1/10. 상급 병종은 1/20. 중급 병종은 1/50. 기본 병종이나 일꾼은 1/100.
이 정도면 괜찮다.
부활은 이러한 제한이 없는 대신 영웅이나 최종 병기를 살리지는 못 하니까. 오히려 더 전략적으로 쓸 수가 있겠다.
시혁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고생하긴 했지만, 대가는 충분히 얻었다.
그나저나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하나?
설마 더 통과 의례가 남아 있는 건 아니겠지?
그런 생각을 할 때, 신전 전체가 으르렁대며 진동하기 시작했다.
신전 안 24개 기둥이 일제히 빛났다.
무지개처럼 찬연한 빛이다.
그 빛이 일제히 쏟아졌다.
쿵!
시혁의 심장이 크게 울렸다.
몸이 한 차례 들썩였다.
뭐지?
일이 잘못 되었나 싶어 당황할 때,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쿵쾅쿵쾅쿵쾅.
피가 미친 듯이 전신을 질주했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몸이 뜨거워졌다.
안구의 모세 혈관이 터졌나 보다. 시야가 빨갛게 변했다.
머리가 핑핑 돌았다.
팔다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시혁은 자신도 모르게 모로 쓰러졌다. 바닥을 벅벅 긁으면서 신음을 흘렸다.
“크흐흑.”
개미 떼가 몰려와 온 몸을 갉아먹는 것 같았다.
간지럽고, 따갑고, 찌르는 듯한 감각이 시혁의 영혼을 점령했다.
이를 악물고 견뎠다.
영웅이 되는 게 쉽지는 않을 거라고 이미 예측했었다.
이 정도 고통쯤은 참아야 했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근육이 몽땅 꼬였다. 누군가 양끝을 붙잡고 걸레 짜듯 쥐어짜는 것 같았다.
뼈가 부셔졌다.
가루가 되었다가 꼬물꼬물 다시 뭉쳤다. 더 강건하게, 더 크게 변하여 자리를 잡았다. 인대와 근육이 그 변화에 따라 자리를 옮겨, 상상하기 힘든 통증이 시혁의 척추를 관통했다.
고통의 시간이 지나갔다.
단지 육체만이 아니라 영혼까지 개조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대뇌피질에 숨어 있던 어떤 법칙도 한층 진화했다.
그 힘이 흩어졌다.
아득한 허공으로 떠올라, 어떤 천체를 통과했다. 아득한 거리를 뛰어넘어 은하계 외곽 푸른 별에 내려앉았다.
“으으음……”
시혁은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새 장소가 바뀌었다.
천상도의 신전이 아니다.
몇 달 전 시혁이 구입한 오피스텔 안이었다.
‘내가 불을 켜고 잤나?’
시혁은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히 불을 끄고 암막까지 치고 잤는데, 어두워야 할 오피스텔 안이 대낮처럼 훤했다.
문득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
심각하게 역겨운 냄새였다.
다름 아닌 자기 몸에서 났다. 몸 전체가 시커먼 액체로 뒤덮여 있었는데, 그게 시궁창 썩는 냄새를 풍기는 것이다.
곧 상황을 알아차렸다.
거울을 보거나, 피부 위에 일어났을 껍질을 확인할 필요는 없다.
그저 조용히 손을 뻗었다.
정신을 집중했다.
아르거스에서 익힌 요령대로 했다. 체내에서 꿈틀거리는 힘을 움직이자, 손끝에서 투명한 오색 빛이 꽃잎처럼 피었다.
시혁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 시혁은 이능력자다.
[4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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