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 세계의 한의사-99화 (99/250)

< 영웅의 시련 -2- >

다른 환자들도 치료해 나갔다.

마나가 많이 들어서 힘들었다. 그래도 복잡하게 치료할 것 없이 영혼 회복만 쓰면 되니 오행 순환체와 더불어 쉽게 처리했다.

이 공간에 누워 있던 환자만 해도 서른 명.

그들을 모두 깨우는데 성공했다.

남자의 말대로 정신만 차리게 하면 됐다. 그러면 자기들이 알아서 빛의 힘을 키워 공허를 몰아냈다.

회복된 이들이 시혁에게 고마워했다.

“감사합니다. 연구자님께서 저희를 도와주셨다고요?”

“이번에는 얼마나 오래 고통을 겪어야 할지 두려웠었는데 연구자님 덕에 빨리 고통에서 벗어났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들이 하는 말 중 신경이 쓰이는 게 있었다.

공허에 침식된 게 처음이 아니었나 보다.

그에 대해 묻자, 시혁을 처음 데려왔던 남자가 한이 서린 듯한 얼굴로 말했다.

“섬기는 신께서 공허 속에 몸을 던지셨는데, 그 권속들이라고 오죽하겠소? 이 좁은 감옥에 갇혀 세계가 복구되기만을 기다리는 신세라오. 그나마 그대들 소환자들 덕에 절반 가까이 회복되어 다행이오. 이제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우리들의 신께서도 돌아오겠지……”

할라드의 구역을 벗어났다.

해, 달, 별 종족들이 시혁을 도와주었다.

각 종족마다 앓고 있는 병을 소개해주고, 그걸 쉽게 치료할 수 있게 도와준 것이다.

덕분에 빠르게 첫 시련을 마칠 수 있었다.

대부분 공허와 관련되었다.

공허에 침식되었거나, 괴물에게 습격 당했거나, 침식된 음식을 먹은 것 등등.

숫자를 채운 후 신전으로 돌아갔다.

라크라가 놀라워했다.

[벌써 다 끝낸 거야? 대단하네. 최소한 몇 주기는 걸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환자들이 많았거든. 공허에 침식된 환자들, 그들을 치료해야 되는 거 맞지?”

[꼭 그런 건 아닌데…… 그들을 치료해준 거면 고마운 일이야. 어쨌든 축하해. 꽤 어려운 시련이었는데 정말 훌륭해.]

라크라가 저벅저벅 시혁의 주변을 돌았다.

무지갯빛 털이 반짝였다. 그 빛이 신전 전체를 물들이더니, 소용돌이치며 시혁에게 쏟아졌다.

시혁은 그 빛이 자신의 영혼을 바꿔놓는 것을 느꼈다.

아직은 확정되지 않았다.

그저 잠복해 있었다.

다만 몇 가지 정보만 시혁의 머릿속에 주입되었다.

[치료사 영웅으로 진화 가능.]

[특전 : 인간의 의지.]

특전?

시혁이 알기로, 진영을 전향해가며 다양한 경험을 하면 영웅이 될 때 더 강해진다고 했었다.

바로 이것 때문인가 보다.

한 개의 진영에서는 하나의 특전만 얻을 수 있다. 단 같은 진영 같은 계열로 전직을 한다면 그 특전이 계속해서 강화된다.

다양한 진영을 겪는 게 더 유리하지만, 한 곳만 겪었다고 얕보면 안 된다는 뜻이다.

인간의 의지는 모든 마법 저항력을 상승시켰다. 그 상승분이 미미하긴 하지만, 없는 것보단 나았다.

그것을 확인한 뒤, 라크라를 보고 물었다.

“2차 시련은 뭐야?”

[바로 도전하려고?]

“내 고향 세계로 돌아가려면 멀었잖아. 하는 김에 빨리 끝내는 게 좋지.”

[알았어. 이번 시련은 약을 만드는 거야.]

“약?”

[응. 1차 시련을 겪으면서 공허에 침식된 이들을 봤지? 그들을 치료할 약이 필요해. 천상도 주민들은 그래도 소환자들에게 치료를 받을 수 있는데, 다른 곳의 주민들은 그게 아니거든.]

“어렵겠는데……”

[그렇겠지? 지금까지 소환자들도 제대로 성공한 사람은 없었어. 그냥 최선을 다해 줘. 약간의 효과만 있어도 성공으로 인정돼. 정 힘들겠으면 포기하고 다음 방문 때 다른 항목으로 재도전할 수 있어.]

그 말을 듣자 마음이 좀 편해졌다.

알겠다고 하고 신전을 나왔다.

공허에 침식되는 것은 종족을 가리지 않았다. 안전한 지역을 벗어나 접촉하고 있으면 반드시 몸을 침식하여 변형시켰다.

거기에 강한 저항력을 가진 게 할라드의 권속들이다. 그 외에 밤의 여신인 네일룬이나 마법의 신 까뮈의 권속들도 저항력이 강했다.

그들의 힘을 주입하면 공허를 몰아낼 수 있지 않을까?

아니다.

확언할 수가 없다.

종족이 모두 다르니까. 어떤 종족에게는 약으로 작용하는 게, 어떤 종족에게는 독으로 작용할 수도 있었다.

일단 공허를 직접 확인해 봐야겠다.

그래야 뭘 해도 할 수 있겠지.

우선 할라드의 구역을 찾아갔다. 지위가 높아 보이는 이를 붙잡고 공허를 직접 볼 방법이 없느냐고 묻자, 그 자가 얼굴을 찡그렸다.

“공허를 보고 싶다고? 어째서? 공허는 단지 보는 것만으로도 침식을 시작하오. 가까이 하지 않는 게 유일하게 현명한 방법이오.”

“제 2차 시련은 공허 침식의 치료약을 만드는 겁니다. 그러려면 병의 원인에 대해 정확히 알아야지요.”

“치료약? 그럴 거라면 차라리 우리 종족에 대해 연구하는 게 좋을 거요. 예전에 생명 양육자 중 하나가 그렇게 해서 시련을 통과한 적이 있소.”

“그 방법은 한계가 있지 않습니까? 기껏해야 할라드 님의 권속이나 몇 종족에게만 쓸 수 있는 약인데요. 기왕이면 모든 종족에게 효과적인 약을 만들고 싶습니다.”

“허허, 불가능한 일이오. 종족 자체가 다른데 어찌…… 뭐, 좋소이다. 그대가 시련을 통과한다면 우리들에게도 좋은 일이지. 네일룬 님의 구역으로 찾아가 보시오. 그곳의 신녀에게 부탁한다면 공허를 코앞에서 볼 수 있을 거요.”

그 말과 함께, 품 속에서 작은 돌조각을 하나 꺼냈다.

네모나다.

기껏해야 새끼손가락 크기. 특정한 마나 파장이 느껴지는데, 뭘 뜻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걸 건네더니 말했다.

“네일룬 님의 신녀는 이게 있어야 만날 수 있소. 아무에게나 이걸 보여주시오. 그럼 바로 안내해 줄 거요.”

시혁은 허리를 굽혀 사의를 표했다.

네일룬의 구역으로 향했다.

꽤나 멀었다.

사실 할라드와 네일룬은 서로 앙숙이었다. 할라드는 빛의 신이고 네일룬은 밤의 신이니 그럴 만도 했다. 예전에는 전쟁도 몇 차례 벌였다던데, 요즘엔 공동의 적 때문인지 사이가 꽤 돈독해졌다.

돌조각을 본 주민이 아홉 개의 눈을 일제히 감았다.

“신녀님을 뵈러 온 거요? 별로 현명한 선택은 아닌데……”

“걱정 마세요. 공허에 침식돼도 괜찮습니다. 어차피 다음 방문할 때 멀쩡히 되살아나요.”

“그게 끝이 아니니까 그렇소. 예전에도 소환자들이 신녀님을 찾곤 했는데, 후에 듣기로는 침식이 고향 세계에서도 일어났다고 하오.”

이게 무슨 소리지?

간단했다.

공허에 침식당하면 고향 세계에서 변이된다는 뜻이다.

인간형 괴수.

아마 그들이 공허에 침식당한 소환자들이 아닐까 싶었다.

잠시 꺼림칙한 마음이 들었지만, 시혁은 곧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공허를 볼 수 있다면 미리 봐둬야 한다.

시련은 둘째 치고, 나중에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

“괜찮습니다. 데려다 주세요.”

“정말로 괜찮겠소? 신녀님께서 품으신 공허는 그냥 공허가 아니오. 공허 중에서도 가장 짙고, 핵이 되는 것 중 하나요. 차라리 다른 방법을 찾는 게 좋을 거요.”

다른 방법?

하지만 천상도에서 공허와 접할 수 있는 방법은 네일룬의 신녀와 만나는 것뿐이다. 근처로 접근하기만 해도, 주민들이 힘을 합쳐 격퇴했으니까.

시혁이 반드시 신녀를 봐야겠다고 하자, 주민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좋소. 따라 오시오.”

주민을 따라 구역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저번에는 오지 못했던 곳이다.

공간이 끝없이 확장되고 있었다. 공간 왜곡이 지나쳐, 중심으로 갈수록 머리가 핑글핑글 돌았다.

온갖 화려하고 큰 건물을 지나쳤다. 경비병들이 시혁을 향해 칼날 같은 눈빛을 보냈다. 그러다 움막처럼 작고 허름한 집 앞에 멈춰 섰다.

“여기요. 안에 들어가면 신녀님께서 계실 거요.”

“감사합니다.”

안으로 들어갔다.

생각보다 넓었다. 공간 왜곡이 여기에도 적용되었는지, 저만치 보이는 침대에 사람 한 명이 앉아 있었다.

다른 권속들이 그런 것처럼, 아홉 개의 눈과 여섯 개의 팔을 가지고 있다. 다만 흰 천으로 전신을 감아 놓은 탓에 특유의 칠흑 피부는 볼 수가 없었다.

시혁은 천천히 그 사람에게 다가갔다.

“그만.”

짧고 단호한 목소리가 들렸다.

신녀는 시혁을 보지도 않고 말했다.

“저는 공허를 품고 있습니다. 다가오지 마십시오.”

“알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온 겁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전 2차 영웅의 시련을 겪고 있습니다. 제가 받은 시련은 공허 침식을 치료할 약을 만들라는 거고요. 그러려면 공허를 한 번 확인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신녀님을 찾아온 겁니다.”

그 말을 듣고, 신녀가 비로소 몸을 돌렸다.

눈을 떴다.

진주처럼 까맣고 맑은 눈동자다.

시혁을 한참이나 응시하더니, 다짐을 받듯 힘을 주어 말했다.

“제 몸 속에 있는 공허를 꺼내는 것만으로도 침식이 시작될 겁니다. 결과가 어찌되든 절 원망하지 않겠다고 맹세하시면, 공허를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미 충분히 고민했습니다. 무슨 일이 생겨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좋아요, 그렇게 확신하신다면 보여드릴게요. 저한테 최대한 멀어지세요.”

시혁은 입구 근처로 자리를 옮겼다.

신녀가 눈을 감았다.

여섯 개의 팔을 들어 올리더니, 한 곳에 모아 꽃봉오리 같은 형태를 만들었다.

공기가 차가워졌다.

음울한 기운이 세상 가득 깔렸다.

시혁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지독한 악의와 적의, 증오와 분노가 신녀의 손이 모인 곳에서 알알이 풀려나오고 있었다.

까만 것이 튀어나왔다.

아니, 단순히 까맣다고 말할 게 아니었다.

세상의 모든 사악한 것을 다 모아놓은 듯했다. 살아있기라도 한지, 그르릉그르릉 흑색의 울음을 토했다.

시혁은 시야가 검게 물드는 것을 느꼈다.

머리가 빙글 돌았다.

침식이 일어나고 있었다.

신녀가 공허를 거뒀다. 시혁도 미리 주입해 둔 오행 순환체를 활성화시켰다. 세 개의 오행 순환체가 힘을 뿜어내며, 공허의 힘을 밀어냈다.

꽤 어려웠다. 천상도의 주민들에게서 봤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들이 파도에 적신 정도라면, 거의 해일이 닥쳐온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신녀가 다시 돌아앉았다.

“그래도 그대는 영향을 적게 받네요. 회복되는 것도 빠르고…… 지금까지 제가 본 소환자 중 절반 이상이 공허를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공허에도 강약의 차이가 있습니까? 제가 본 마을 주민들은 이 정도의 공허에 노출된 건 아닌 것 같았는데요.”

“당연하지요. 제가 품은 것은 공허의 핵 중 하나니까요. 필멸자의 몸이라 하나밖에 품을 수 없지만, 조금씩 그 힘이 약해지고 있으니 몇 년 뒤에는 소멸시킬 수 있습니다.”

공허는 거대한 괴수와 같다고 했다.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핵이 내뿜는 힘이 그 영체가 된다던가.

그래도 최근에 많이 약해졌다고. 처음에는 신녀라 해도 공허에 닿는 순간 즉사할 지경이었는데, 이제는 공허를 무시하고 여행을 다니는 것도 가능했다.

물론 일정 수준 이상의 강자들에 해당하는 얘기지만.

다만 주의해야 할 것이, 방금처럼 공허의 핵에 접촉하는 일이었다. 강자건 뭐건 공허에 침식되어 괴물로 변이할 테니까.

시혁은 방금 전 느낀 점을 솔직하게 얘기했다.

“무시무시하긴 한데, 어째 그 구성이 치밀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구멍 뚫린 그물을 보는 것 같았어요.”

“맞습니다. 많이 약해졌지요. 사실 지금처럼 아르거스가 절반 정도 복구된 시점이 아니면, 그대가 겪었을 시련도 다른 종류가 내려왔을 겁니다.”

몸으로 겪은 탓에 한 가지를 알아냈다.

공허.

그것은 일곱 가지의 힘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도 어지럽게 얽혔고, 괴상하게 변이된 상태지만 시혁은 그 힘들의 정체를 금방 알아보았다.

반신들과 비슷했다.

완벽하게 똑같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매우 흡사한 것이 사실이었다.

< 영웅의 시련 -2- > 끝

ⓒ 산호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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