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웅의 시련 -1- >
더 이상의 전직은 불가능하다.
진영 전향과 영웅 진화만 가능한 시점.
망설이지 않았다.
영웅 진화를 선택했다.
시혁의 시야가 새하얗게 변했다.
몸이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눈을 떴을 때, 시혁은 이질적인 곳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거대한 섬이다.
푸른 하늘이 먼저 보였다. 그 다음으로는 황금빛 태양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바다처럼 드넓은 구름이 섬 아래쪽에 펼쳐져 있었다.
그렇다.
바다에 있는 섬이 아니다.
하늘 위에 있다.
섬 중앙에는 웅장한 신전이 존재했다. 갖가지 종족들이 신전을 드나들었다. 무슨 이유에선지 기뻐하는 사람도, 낙담하여 울상은 짓는 사람도 보였다.
시혁이 서 있는 곳은 섬의 외곽.
신전으로 향하는 외길이 나 있었다. 반대편에는 넓게 마을이 형성되었다. 다양한 양식의 건물들이 뒤섞여, 참 희한한 광경을 연출했다.
외길을 따라 갔다.
신전에 가까워지자, 소환자들이 한탄하는 소리가 들렸다.
“젠장, 또 졌어!”
“벌써 세 번째 아냐? 시련이 어렵긴 어렵나 보지?”
“골렘 한 마리를 어떻게 혼자 잡으라는 거야? 이거 나한테만 어려운 시련을 내린 것 같은데, 진짜 이가 갈리네.”
“네가 실력이 없어서 그런 거겠지.”
“뭐라고?”
소환자들이 신전 앞을 자유롭게 활보하고 있었다.
영웅은 아니고, 일반 소환자들.
동시에 거장 계급이기도 했다. 영웅 진화를 선택한 순간, 이 괴상한 섬으로 이동되는 것이다.
지식 열람으로 섬에 대해 알아냈다.
천상도(天上島).
신들이 빚어낸 곳이었다. 소환자들은 이곳에서 영웅으로 거듭나게 된다. 다만 시련이라고 부르는, 각 영웅마다 다른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시혁은 천천히 신전으로 들어갔다.
넓고 높았다.
육중한 기둥들이 신전을 떠받치고 있었다. 기둥마다 부조가 새겨져 있는데, 어째 예사롭지가 않았다.
하나하나 자세히 살폈다.
몸은 구름으로, 꼬리는 번개로, 다리는 바람으로 이루어진 살쾡이가 있었다. 현란한 무늬를 가진 꽃도 보였다. 한 자루 기이한 칼처럼 생긴 조각도 있어, 이게 뭘까 한참을 생각했다.
곧 답을 얻었다.
신들이다.
아르거스에 존재하는 신들의 형상을 기둥마다 새겨놓은 것이다.
기둥의 숫자를 세어 보았다.
정확히 100개.
아르거스에 이렇게 신들이 많았나?
그러면서 안으로 들어갔는데, 또 24개의 기둥이 보였다.
밖에 있는 기둥보다 훨씬 두툼하고 컸다. 자연히 부조에도 힘이 실렸다. 밖의 기둥은 그저 조각만 해놨는데, 안쪽 기둥은 정교하게 색을 칠한 것이다.
신들에게도 급수 차이가 있나 보다.
기둥을 구경하며 안에 들어가자, 경쾌한 목소리가 들렸다.
[호, 새로운 소환자인가?]
안쪽에서 말 한 마리가 걸어 나왔다.
털 색깔이 오묘했다. 기본적으로 하얀색인데, 움직일 때마다 무지갯빛 물결이 출렁였다.
시혁이 신기한 얼굴로 쳐다보자, 말이 으스대듯 고개를 쳐들었다.
[나 같은 존재는 처음 보지? 나는 짐승의 여신, 르미아 님의 권속 무지개 천마 라크라다. 이번 주기 동안 만신전의 지킴이를 맡았지.]
“르미아 님의 권속이라고?”
[그래. 아름답고도 고귀한 분이지. 르미아 님이 아니었다면, 아르거스 행성은 이미 산산조각 나서 우주의 먼지로 흩어졌을 거다.]
시혁은 라크라가 나타난 쪽의 기둥을 훑었다.
한 여인이 조각되어 있었다.
가죽옷을 입고 뿔피리를 든 여인이다. 머리에는 사슴뿔로 만든 관을 썼다.
저게 짐승의 여신 르미아인가 보다.
라크라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네가 나한테 시련을 주는 거야?”
[암, 그렇고말고. 뭐, 내가 주는 건 아니고 신들의 말씀을 대신 전하는 것뿐이지만.]
라크라가 가까이 다가왔다.
시혁에게 머리를 들이대더니, 킁킁대며 냄새를 맡았다.
[호오, 2차 전직자야? 특기들이 굉장한데?]
“그래?”
[다 알짜 특기들이잖아. 이러면 시련은 좀 어려운 걸로 나오겠는데? 내가 주는 거 아니니까, 나한테 뭐라고 해도 소용 없어. 알았지?]
도대체 어떤 시련이 나오기에 그러지?
라크라가 꼬리를 쫑긋 세웠다.
시혁의 눈치를 살피더니 입을 오물거렸다.
[곤란하네…… 좀 어려운 시련이야. 천상도에서 각 구역마다 24명의 환자를 치료해야 한데.]
그게 어렵나?
전장에 투입되기만 하면 24명쯤은 금방인데?
금방 맹점을 깨달았다.
천상도에서, 라는 단서조항이 달려 있었다.
한 가지 더.
각 구역마다, 라고 했다.
도대체 구역이 몇이나 있기에 그러지?
기가 막혀서 한 마디를 했다.
“구역마다 24명이면, 도대체 총 몇 명이야? 천상도 구역이 몇 개나 되는데?”
라크라가 살며시 시선을 피했다.
[24개 구역으로 나눠지니까 총 576명이야. 그래도 그 정도는 별 것 아니잖아?]
“천상도에 아픈 사람이 그렇게 많다고? 거장 소환자들이 이렇게 많이 오는데?”
[끄응, 어쩔 수 없어. 말 했잖아. 내가 주고 싶어서 주는 거 아니라고. 네가 너무 강해서 시련도 어려운 게 나온 거야.]
시혁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차라리 불사의 역병 같은 것 10개를 치료하라고 하지 뭐 이 따위 시련을 준담?
라크라가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천상도 하부에 있는 마을로 가 봐. 24 고신(高神)의 권속들이 사는 곳인데, 네 도움이 필요한 자들이 있을 거야.]
아까 외길을 따라 오면서 봤던 마을을 말하나 보다.
시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말해줘서 고맙다. 576명이라…… 그들만 치료하면 된다, 이거지?”
[그게 1차 시련이야.]
“뭐?”
[넌 2차 전직자잖아. 그러니까 시련이 3개야. 중간에 포기해 되는데, 전직 효과는 못 봐. 시련 1개만 통과하면 치료사 영웅이 되고, 2개 통과하면 의학자 영웅, 3개 다 통과해야 현자 영웅이 돼.]
시혁은 얼굴을 찌푸렸다.
꼼짝없이 3개의 시련 모두를 치러야 한다는 소리 아닌가.
2차 시련은 1차 시련을 끝낸 다음에야 알 수 있다고 했다.
어쩔 수 없지.
몸을 돌려 빠져나왔다. 기둥을 헤치고 밖으로 나가자, 기다렸다는 듯 다른 소환자가 안으로 들어갔다.
천상도는 흡사 기울어진 팽이처럼 생겼다.
그 중 한쪽, 넓게 퍼진 부위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멀리서 살펴보니 크게 24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라크라가 말했던 24 고신의 권속들이 따로 모여 사는 모양이었다.
어디로 간다?
망설이다가 인간형 종족들이 사는 곳으로 향했다.
가만 보니 인간과는 좀 달랐다.
피부에 광택이 흐르고, 두 눈은 태양을 담은 듯 눈동자 대신 불꽃이 담겨 있었다. 전신에 털이 한 올 없이 대머리여서 눈이 다 부셨다.
그 중 좀 늙어 보이는 남자에게 다가갔다.
“실례합니다.”
“뉘신지?”
“소환자 최시혁이라고 합니다. 영웅의 시련으로 환자들을 치료하라는 임무를 받았는데, 제가 도울 사람이 없겠습니까?”
남자가 딱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 종족은 병에 걸리지 않소. 다른 종족에게 찾아가 보는 게 좋을 거요.”
“아, 그렇습니까?”
“할라드 님의 권속 모두가 그러하니, 다른 구역으로 가보는 게 좋을 거요.”
빛의 신 할라드.
지금 시혁이 대면한 해 종족이나 달 종족, 별 종족이 할라드의 권속에 속했다. 순수한 빛의 힘을 체내에 담고 있다 보니, 모든 병에 면역인 것이다.
시혁은 그 대목에 대해선 잘 몰랐다.
지식 열람이 작동하지 않고 있었으니까. 시행착오를 거치며 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자연히 얼굴이 살짝 굳었다.
“그렇습니까? 큰 일이네요. 전 24개 모든 구역에서 치료를 해야 합니다.”
“허어, 신들께서 상당히 어려운 시련을 내리셨구려. 보통은 1구역에서 치료하면 그만인데…… 참, 혹시 공허에 침식된 이도 치료할 수 있소?”
공허에 침식된 이?
처음 듣는 말이지만 고개부터 끄덕이고 봤다.
“일단 한 번 보지요. 자랑 같지만, 제가 치료하지 못할 병은 거의 없습니다.”
“오호, 믿음이 가는구려. 진리 연구자들은 힘들고 생명 양육자들이 와야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자, 나를 따라오시오.”
생명 양육자? 진리 연구자?
생명 진영과 진리 진영의 소환자들을 저렇게 부르나 보다.
남자는 구역 깊숙이 시혁을 인도했다.
그저 작은 마을인 줄 알았는데, 깊이 들어갈수록 그렇지가 않았다.
공간이 왜곡되어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면 더 넓어졌다. 정확히 가늠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각 구역이 도시 하나 정도는 되는 듯했다.
할라드 구역 중 가장 깊은 곳.
커다란 신전이 있었다.
해와 달, 별을 형상화한 문양이 보였다. 빛의 신 할라드를 모시는 신전인가 보다.
남자는 신전 옆의 작은 건물로 시혁을 데려갔다.
순간, 시혁은 몸을 움찔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괴상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지독하게 악의적이고 흉험했다. 존재를 느낀 것만으로도 전신이 긴장해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여기요.”
남자는 지하로 들어갔다.
환자들이 누워 있었다.
이상하다.
남자와 비슷한 종족들인데, 피부가 시커멓다.
언뜻 보이는 두 눈에는 까만 어둠이 담겼다. 밤의 어둠도 아니고, 석유처럼 질척질척했다.
“이 분들이 공허에 침식된 겁니까?”
무심코 손을 뻗었다.
남자가 질색을 하며 만류했다.
“뭐하는 거요? 조심하시오! 아무리 소환자라도 공허에 침식되면 죽고 마오!”
깜짝 놀라 손을 거뒀다.
통찰 마법을 써서 관찰했다.
공허가 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대단히 사악하고, 파멸적인 힘의 집합체라는 사실만 알아냈다.
다만 미루어 짐작하는 것은 가능했다.
승천 이적 때마다 봤던 아르거스 행성을 감싸고 있는 공허.
바로 그것이었다.
열다섯 마법사가 신들에게 맞서 발휘했던 저주와 마법이 한데 뭉쳐 이루어진 힘.
이걸 어떻게 치료하지?
막막해 하고 있을 때, 남자가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할라드 님의 권속은 공허에 대해 어느 정도 면역이 있소. 그래서 공허가 천상도에 다가오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하는데, 간혹 이렇게 공허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오. 일단 정신만 차리면 손을 써보련만……”
시혁은 귀를 쫑긋 세웠다.
정신만 차리면 된다고?
그렇다면 시혁에게 아주 좋은 방법이 있지 않은가.
바로 거장이 되어 새로 얻은 특기.
영혼 회복.
최근에 영혼 관련한 일들을 겪었더니 이런 게 생겼다.
단순히 영혼만이 아닌, 정신까지 영향을 미쳤다. 누가 세뇌시켰으면 풀어버리고, 정신병에 걸렸으면 치료하고, 감정이 폭발해도 진정시키는 것이다.
당장 치료에 들어갔다.
쉬웠다.
멀찍이 떨어져서 영혼 회복을 사용했다. 시혁의 손이 무지갯빛으로 빛나더니, 그 빛이 꾸물대며 환자에게 옮겨갔다.
무지갯빛이 환자의 머리에 머물렀다.
마나가 상당히 소모되었다.
귀속 오행 순환체까지 동원했다. 그러고도 힘겨운 느낌이 들었다. 시혁이 오행 순환체 없이 쓸 수 있는 마나를 초과한 다음에야 반응이 나타났다.
“으으음……”
환자가 신음소리를 냈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곧 눈을 떴다. 남자와 시혁을 한 번씩 쳐다보더니, 말없이 앉아 심호흡을 했다.
공허가 조금씩 해독되었다. 피부가 원래대로 돌아가고, 눈가에서 공허 대신 빛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남자가 반색을 했다.
“효과가 있소! 생명 양육자가 아니라, 진리 연구자에게서도 이런 광경을 볼 줄이야!”
시혁은 빙긋 웃었다.
아닌 게 아니라 진리 진영 현자들은 이런 환자들을 치료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생명 진영 신의, 피 진영 혈의(血醫) 정도나 가능했겠지.
< 영웅의 시련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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