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쌍둥이 -1- >
그게 가능한가?
3년 전 울산 사태처럼 검은 천체가 하루 내내 에테르를 토해놓은 것도 아니고, 최종 병기가 나타나는 게 가능한 일일까?
시혁은 놀란 마음을 다스렸다.
냉정하게 생각했다.
천왕봉에서 빛나던 광채가 어느새 잦아든 뒤였다. 기껏해야 30초 정도 반짝이고 만 것이다.
아르거스에서는 5분이 넘게 지속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형편없이 짧았다. 뿜어지던 빛의 양도 훨씬 적었고.
그렇다면 나타났을 영혼 군단도 매우 약할 가능성이 높았다. 손문철이 아니라, 이미라 혼자서 상대할 수도 있지 않겠나.
한결 마음을 놓았다.
그래도 광주로 가는 건 미루기로 했다. 어쩌면 시혁의 능력이 필요할지도 모르니까.
손문철이 얼굴을 찡그렸다.
“큰일이네요. 이제 끝난 줄 알았더니……”
“별일 없을 겁니다. 너무 걱정 마세요.”
시혁은 주둔지 안으로 들어갔다.
가장 먼저 프네우마 디스파라투스에 걸렸던 환자들의 상태부터 확인했다.
특별한 변화는 없었다.
단, 한 가지 공통적인 증상을 호소했다.
“머릿속에서 이상한 목소리가 들려요.”
신아영이 눈살을 찌푸린 채 말했다.
강찬은 자기 머리에 손을 하나 가져갔다.
“저도 그렇습니다. 누군가 제 머리 안에다 대고 뭐라고 속삭이는 것 같아요.”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진술이다.
둘이 하는 말이, 아르거스에서의 상황을 연상시켰으니까.
시혁은 신중한 얼굴로 물었다.
“뭐라고 하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도와달래요.”
“저도 똑같습니다. 누군가 도와달라고 외치는 것 같습니다.”
강찬과 신아영이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군부대가 있는 방향이다.
다른 환자들도 같은 이야기를 했다. 누군가 자신을 도와달라는 것 같고, 그 방향은 군부대가 있는 쪽이라는 것이다.
일단 환자들을 안정시키고 밖으로 물러나왔다.
“아무래도 군부대에 뭐가 있는 것 같지요?”
손문철의 말에, 시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 생각에도 그렇습니다. 확인해 봐야 합니다.”
당장 군부대가 주둔한 곳으로 날아가기로 했다.
주둔지에서 남서쪽.
현재 지리산을 통제하고 있는 충무부대와 충장부대 중 후자였다. 더 정확히 말하면 95 연대인데, 환자들이 모두 그곳을 지목했던 것이다.
헬기를 타고 출발했다.
손문철은 주둔지를 지키고, 시혁과 이미라, 채현애, 장현, 그리고 S급 이능력자 몇이 붙었다. 이 정도면 어지간한 일에는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충장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곳에 도착했는데, 어째 좀 어수선했다.
지금은 새벽 2시.
불침번만 빼고 다 자고 있어야 할 시간인데, 불이 훤히 밝혀진 것은 물론 군인들이 무장한 상태로 돌아다녔다.
정말로 무슨 일이 있는 것 같다.
헬기가 천천히 연병장으로 내려앉았다.
대령 계급장을 단 중년의 군인이 헬기를 향해 다가왔다.
장현이 앞으로 나서서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아사달 공격대장 장현입니다. 협회장님께 연락은 받으셨지요?”
“아! 반갑습니다. 대장님 이름은 많이 들었습니다. 저는 연대장 김중걸입니다. 안 그래도 상의할 게 있어서 전화를 드리려고 했는데, 잘 됐습니다.”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직접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절 따라오시겠습니까?”
김중걸이 한쪽으로 이능력자들과 시혁을 인도했다.
막사 중 하나였다.
군인들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막사 밖을 지키고 있었다. 이능력자들에게 애타는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시혁은 군인들의 배치를 눈여겨보았다.
외부의 침입을 막는 모양새가 아니다. 막사 밖이 아니라, 안쪽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어?”
“저 사람 뭐에요?”
이능력자들이 깜짝 놀랐다.
막사 안에 앉아 있는 한 남자.
이상했다.
전신이 회색으로 변해 있었다.
머리카락은 물론 피부도 회색이다. 꼭 먼지 쌓인 대리석으로 빚은 조각상 같다. 그런가 하면 몸 전체에서 옅은 빛이 흘러나와, 굉장히 이질적인 느낌이 풍겼다.
남자는 완전히 결박되어 있었다. 게다가 충장부대 소속 이능력자들이 남자를 둘러싸고, 언제든 이능을 발현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누군가 한숨처럼 한 마디를 했다.
“에테르 변이……”
동식물이 그러하듯, 인간도 검은 천체의 영향으로 변이될 수가 있다.
그렇게 변이된 이를 예전에는 괴인이라 불렀으나, 최근에는 인간형 괴수라고 했다.
일단 변이되면 괴수와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이성을 잃고 파괴만 일삼거나, 기존 인간과는 전혀 다른 행동 양식을 보이니까.
그런데 이때,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남자가 몸을 크게 뒤틀더니, 항변하듯 소리를 지른 것이다.
“에테르 변이라니 말도 안 됩니다! 전 멀쩡합니다! 몸이 이상하게 변한 걸 가지고 어이없는 소리하지 마십시오!”
말을 했다?
그럼 괴수가 아니라는 뜻 아닌가.
한 이능력자가 남자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조용히 해라! 네가 발하는 에테르 파장은 지금 천왕봉이 발하는 에테르 파장과 똑같다. 에테르 변이의 전형적인 특징이야. 당장 총살시키지 않는 걸 감사히 여겨!”
남자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보고만 있던 시혁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지금 이렇게 변한 분이 여기 한 분입니까?”
“예?”
“몇 분 정도 더 계실 것 같은데요. 여기 한 분만 변이되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충장부대 소속 이능력자들이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에테르 파장이 느껴지지 않아 누구인가 싶었던 것이다.
김중걸이 시혁의 얼굴을 살폈다.
“뉘신지……”
창졸지간이라 시혁을 못 알아봤나 보다.
장현이 시혁을 소개했다.
“발현자, 최시혁 원장님입니다. 예전에 부안에서 일어난 좀비 사태를 해결하신 분이죠.”
“아, 그 분! 죄송합니다. 제가 정신이 없어 미처 못 알아 뵀습니다.”
김중걸이 정중히 목례를 했다.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다.
시혁은 재촉하듯 말했다.
“통성명은 아무래도 좋습니다. 이렇게 변이되신 분, 또 없습니까?”
“실은 한 명 더 있습니다. 박주호 일병과는 쌍둥이 형제인데, 조금 떨어진 막사에 격리시켜 뒀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괜찮고요?”
“예. 방금 전 점호까지 해서 확실히 확인했습니다.”
쌍둥이가 변이됐다라……
시혁이 걱정했던 게 맞았다.
지금 눈앞에 있는 박주호 일병의 모습은, 아르거스에서 봤던 영혼 군단과 똑같았으니까.
다만 한 가지는 좀 달랐다.
스스로의 의지로 말을 한다는 것.
천왕봉의 영향으로 영혼병 특기만 발현했나 보다. 이능력자들이 그러했듯, 프네우마 디스파라투스까진 발병하지 않은 듯했다.
그럼 지구에서 이들을 어떻게 대우해야 하지?
이능력자? 인간형 괴수?
시혁은 박주호의 앞으로 다가갔다.
박주호가 사정하듯 말했다.
“선생님! 정말 좀비들 치료해주셨던 최시혁 선생님 맞습니까? 저랑 제 동생 좀 살려주십시오! 이 새끼들이 저흴 죽이려고 합니다!”
몸을 뒤틀자 이능력자들이 박주호의 등을 후려쳤다.
“조용히 못 해?”
“가만히 있어! 즉결 처분 당하고 싶어?”
시혁은 눈살을 찌푸렸다.
비인간적으로 대우하는 게 우선 거슬렸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박주호에게서 느껴지는 이질감이었다.
조용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진정하세요. 환자분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박주호입니다. 선생님, 저 정말로 죽어야 합니까? 변이된 거 아니라고 말씀 좀 해주십시오!”
간절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럴수록 이질감이 더 짙어졌다.
표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얼굴의 근육이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심지어 눈도 깜빡이지 않아, 사람이 아니라 로봇을 보는 듯했다.
시혁은 간단한 시험을 했다.
“박주호 님, 한 번 웃어보세요.”
“네?”
“웃어보세요. 중요한 일입니다.”
박주호가 얼굴을 꿈틀거렸다.
웃지 못한다.
입가가 살짝 뒤틀리는 게 전부였다.
그것을 본 사람들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들이 보기에도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시혁은 여러 가지를 더 시켜보았다.
눈물을 흘려보라고 하고, 소리 내어 웃어보라고 하고, 화를 내보라고도 하고……
마찬가지.
달라지는 건 음색뿐이다.
장현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주머니에서 작은 단검을 꺼냈다. 주위를 한 번 둘러보더니,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들 나가세요. 어쩔 수 없겠습니다.”
박주호가 악을 썼다.
“안 돼! 이 새끼야! 날 어쩌려고? 대대장님! 연대장님! 저 좀 살려주십쇼! 전 괴수가 아닙니다! 억울합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무표정하니, 참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장현이 칼을 들고 다가가려는 것을, 시혁이 급히 나서서 말렸다.
“방법이 있을 겁니다.”
간절한 감정을 담아 말하지만, 장현은 물론 이미라와 채현애도, 김중걸도 착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미라가 시혁을 설득했다.
“이미 변이된 인간형 괴수는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거, 원장님도 잘 아시잖아요? 어쩔 수 없어요. 민간인 피해가 생기기 전에 끝을 봐야 해요.”
“안 돼!”
박주호가 발악을 했다.
힘이 어찌나 센지, 결박하고 있던 줄과 수갑이 순식간에 뜯어져 나갔다.
이능력자들이 바로 제압에 들어갔다.
이미라와 장현이 직접 나섰다.
S급 강화 계열 이능력자와 격투 계열 이능력자.
몇 번 투덕거린 것으로 끝이었다. 순식간에 제압당했다. 이미라가 박주호를 두 팔로 결박하고, 장현이 단검을 역수로 쥐었다.
그대로 끝장을 보려는 것이다.
시혁은 얼른 그 앞을 가로막았다.
장현이 싸늘한 눈을 번들거렸다.
“뭐 하십니까? 비키세요!”
“다들 성격도 급하십니다. 인간형 괴수라고 확정된다면 모를까, 아직 그런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일단 제가 확인할 게 있으니, 박주호 님 좀 놔주세요.”
“그러다 잘못 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걱정 마세요. 박주호 님은 충분히 이성적입니다. 괴수들에게서 보이는 폭력성은 보이지 않아요.”
계속 설득한 끝에, 이미라와 장현이 겨우 물러났다.
하지만 아예 관심을 끄지는 않았다. 이미라는 지금도 주먹을 쥐고 있고, 장현은 단검을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돌리는 게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박주호가 눈치를 보며 일어났다.
막사 침상에 앉게 한 후, 시혁도 그 앞에 마주 앉았다.
“전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박주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로 인간형 괴수라면 시혁도 어쩔 도리가 없다. 하지만 그게 아닐 가능성이 크니까 문제지.
시혁은 처음부터 한 가지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다.
발현자.
아르거스의 특기가 모종의 이유로 지구에서 발현된 사람을 발현자라고 한다.
확인해봐야 했다.
아까운 생목숨을 날릴 수는 없는 거니까.
“박주호 님.”
이름을 부르자, 박주호가 고개를 들어 시혁을 보았다.
눈은 마음의 창.
깜빡이진 않고 있지만, 절망과 공포에 찬 눈빛이 가득 배어나오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확신을 가졌다.
낮은 목소리로, 힘을 주어 말했다.
“손에 힘 한 번 줘보세요.”
“손에요?”
“네. 최대한 꽉이요.”
박주호는 시혁을 빤히 보다가 그렇게 했다.
주먹을 꽉 쥐자, 자연스럽게 의념이 집중되어 회색 광채가 흘러나왔다.
이능력자들이 눈을 번뜩였다.
시혁은 땅바닥을 가리켰다.
“그걸 땅에다 흘려보내세요.”
“여기다가요?”
“네. 땅속에다 집어넣는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별거 아니에요.”
박주호가 조심스럽게 양 주먹을 땅바닥에 가져갔다.
그그그.
힘을 워낙 세게 주고 있는 탓에, 주먹과 땅바닥이 수십 번이나 마주쳤다. 그러면서 회색 기운이 천천히 땅으로 흘러들어갔다.
시혁은 박주호를 재촉했다.
“너무 약합니다. 더 세게 흘리세요. 전신의 힘을 쥐어짠다고 생각하시고 모조리 뽑아내세요.”
“이익!”
박주호는 앓는 소리를 냈다.
회색 기운이 더욱 짙어졌다. 이젠 폭포수처럼 땅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이미라가 의구심 어린 눈으로 시혁을 보았다.
“원장님,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요?”
“두고 보시면 압니다.”
금방 끝이 다가왔다.
박주호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탁한 회색빛이 폭발하듯 박주호의 주먹을 떠났다. 동시에, 한 가지 변화가 일어났다.
박주호의 몸이 원래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 쌍둥이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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