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네우마 디스파라투스 -2- >
광주 지부에서 재료를 모아주었다.
시혁은 다섯 가지 재료를 차례대로 늘어놓았다.
호기심에 찬 시선이 쏟아졌다.
“지금부터 이걸로 한 가지 물건을 만들 겁니다. 나무의 씨앗인데, 그걸 심으면 커다란 나무가 생겨서 에테르를 생산하기 시작합니다.”
이능력자들이 웅성거렸다.
“그거 위험하지 않습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무속성 에테르라서요. 생물체를 변이시키지도 않습니다. 중요한 건, 그 나무로도 각혼분을 생산할 수 있다는 거지요. 정 위험하다 싶으면 나중에 폭파해버려도 되고요.”
“일단 환자 치료가 급하니 환자부터 치료하고 봅시다.”
바로 제작에 들어갔다.
근원의 나무 씨앗은 만드는 게 어렵지 않다. 시혁 혼자서도 충분했다. 다른 사람의 이목을 피해, 골방에 들어가서 만들었는데 1시간도 지나지 않아 완성 했다.
논의 후, 지리산으로 장소를 옮겼다.
부작용이 없다는 것은 익히 알지만, 도심 한복판에 근원의 나무를 심는 건 좀 꺼려졌으니까.
헬기를 타고 지리산으로 날아갔다.
손문철을 비롯하여 핵심 이능력자들이 마중을 나왔다.
처음 보는 얼굴도 있었다.
날카로운 눈매에, 입술이 가늘어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남자.
이미라가 놀라 인사를 했다.
“공격대장님도 오셨어요?”
남자가 가느다란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저도 협회 이사이니 와 봐야지요. 미라 씨와 현애 씨만 보내놓고 가만히 앉아 있어서 되겠습니까?”
아사달 공격대장?
시혁도 남자를 눈여겨 보았다.
옆에 선 손문철이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남자가 서 있는 자리가 묘했다.
다른 사람들은 다 한 발짝씩 물러서 있는데, 남자만 손문철과 어깨를 나란히 한 것이다.
남자가 시혁에게 악수를 청했다.
“반갑습니다. 이름은 많이 들었습니다. 장현이라고 합니다.”
“저도 반갑습니다만, 지금은 상황이 급하니 인사는 나중에 하는 게 좋겠습니다. 협회장님, 밤 동안 별 일은 없었습니까?”
한가하게 얘기를 할 시간은 없다.
그 생각에 고개를 돌렸더니, 장현의 눈썹이 한 차례 꿈틀거렸다.
손문철이 그런 장현을 한 차례 보더니 입을 열었다.
“실은 안 좋은 소식이 하나 있습니다. 방금 전, 환자 한 명이 더 발생했습니다.”
“또요?”
“예. 협회원들 모두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분위기가 좋지 않아요. 이러다 이탈하는 협회원이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서둘러야겠네요.”
주둔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산등성이에 자리를 잡았다. 적당히 땅을 파낸 후 씨앗을 심었다.
잠깐 기다렸다.
아르거스보다는 시간이 좀 오래 걸렸다. 꽤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싹이 움트고, 뱀이 기듯 성장하여 나무의 형상을 갖추었다.
시혁은 이능력자들을 보며 말했다.
“여기에 물 준다 생각하시고 에테르 좀 뿌려주세요. 그럼 더 빨리 성장합니다.”
“별 게 다 있네요.”
“이런 건 도대체 어떻게 알아 오신 거예요?”
이능력자들은 신기해하며 에테르를 주입했다.
과연 성장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졌다. 겨우 서너 시간 만에 10여 미터까지 자라났다.
그게 한계였다.
지름도, 높이도 아르거스의 절반에 불과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하다.
벌써 에테르를 가득 머금고 있었다. 이제 각혼분을 만들기만 하면 된다.
시혁은 근원의 나무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텅 비어 있었다.
다만 윗부분에는 다섯 가지 영롱한 색깔로 빛나는 보석이 둥둥 떠 있다. 나무껍질 안쪽에 원형으로 난 계단을 통해 보석 가까이 다가가는 게 가능했다.
이능력자들이 신기해하며 떠들었다.
“그 씨앗이 이렇게 변한 거예요?”
“저거 좀 봐요! 엄청 예뻐요!”
“다들 조심하세요. 에테르 농도가 무척 높아요.”
누군가 주의를 주었다.
이능력자는 에테르 변이에 대해 면역이 있는데, 최근 사태 때문에 놀랐나 보다.
시혁은 계단을 밟고 위로 올라갔다.
보석 앞에는 서 있을 수 있게 바닥이 설치되어 있다. 그곳에 서서 보석에 손을 뻗었다.
강렬한 빛이 뿜어졌다.
녹색, 적색, 황색, 백색, 청색의 빛이 명멸하며 시혁의 주위를 감돌았다. 아르거스에서 몇 번이나 봤던 그 광경 그대로였다.
익숙하게 조작했다. 에테르를 다룰 수 있다면 더 정교한 조작이 가능하겠지만, 손짓만으로도 대부분의 기능을 활용할 수 있었다.
눈을 감고도 할 수 있는 일.
각혼분의 마법 수식을 입력했다. 그때마다 다섯 가지 광채가 정렬하며, 특징적인 문양을 만들었다.
이능력자들은 입을 벌리고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김미애가 눈살을 찌푸렸다.
“저거,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아르거스에서의 기억이 무의식 깊은 곳에 숨어 있는 걸까.
다른 이능력자, 특히 만능 구현 계열 이능력자들도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다. 데자뷰가 느껴지긴 하는데, 기억을 아무리 되살리려 해도 본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다.
이윽고 마법 수식 입력을 끝냈다.
허공에 그려진 마법진이 보석으로 흡수되었다. 근원의 나무가 진동하며, 생산하는 에테르가 보석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휴!”
시혁은 이마에 난 땀을 닦았다.
집중하며 보석을 조작한 탓이었다. 환자 수십 명에게 연달아 침을 놓은 것처럼, 심력을 상당히 소모했다.
“원장님, 이거 쓰세요.”
“아, 감사합니다.”
이미라가 손수건을 건넸다.
그걸로 땀을 닦는 사이, 손문철이 옆으로 다가왔다.
“이제 다 된 겁니까?”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다. 제가 계산하기에 약 1시간 후에 각혼분이 완성될 것 같습니다. 그걸 환자들의 머릿속에 넣고 서너 시간 지나면 깨어날 겁니다.”
“오늘 내로 가능하겠네요.”
“그렇지요. 참, 새로 발병하셨다는 분들도 이곳으로 데려와주세요. 각혼분 완성되면 바로 치료 들어가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새로 발병한 환자들도 근원의 나무쪽으로 왔다.
도합 10명.
이미라에게 들은 대로, 강찬과 신아영도 그 안에 끼어 있었다. 평소의 재기발랄한 눈빛은 사라지고 멍하니 서 있는 걸 보니 가슴이 아팠다.
한세훈과 김미애도 그런 감정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둘을 착잡한 눈으로 보다가, 시혁에게 한 마디씩을 했다.
“원장님만 믿습니다.”
“원장님이 계셔서 다행이에요.”
사뭇 부담스러웠다.
주둔지에 있는 이능력자들 모두 시혁만 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담담한 표정을 띄워놓은 채, 잘될 거라고 위로하곤 했다.
그러는 동안 각혼분이 완성되었다.
밖이 아니라 안에 만들어졌다.
보석 주위에만 화려한 꽃이 피었다. 외부로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서였다. 지금은 도톰한 열매가 맺혀, 시혁의 명령만 기다리고 있었다.
시혁은 10명의 환자들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잠근 후, 원형 계단을 타고 위로 올라갔다.
“다들 앉아서 쉬고 계세요.”
그 말을 하자, 환자들이 적당한 자세로 앉았다.
자세는 편하게 하고 있는데, 별로 편해 보이지는 않는다. 여전히 전신이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시혁은 한쪽에 앉아 있는 강찬과 신아영을 한 번씩 눈에 담았다.
익히 상태에 대해 들었지만 실제로 보니 더 가슴이 아팠다. 특히 신아영을 한 차례 치료한데다, 둘의 결혼식에 참석한 적이 있어 더 그런 것 같았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속으로 그렇게 말을 했다.
보석을 조작하여 각혼분을 터뜨렸다.
열매가 쪼개지며 조그만 빛 덩이들이 튀어나왔다.
흡사 민들레 씨앗 같았다.
좁쌀 보다 작은 빛 알갱이가 근원의 나무 안에 가득 찼다. 자연히 환자들의 두개골을 통과하여 뇌로 스며들었다.
시혁은 적당히 시간이 경과하기를 기다렸다가 각혼분을 회수했다. 근원의 나무 안이 원래대로 돌아간 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이능력자들이 초조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
“원장님, 어떻게 됐습니까?”
“잘됐겠죠?”
시혁은 말을 아꼈다.
“두고 봐야 알 수 있습니다. 일단 주둔지로 옮기죠. 제 생각에는 세 시간 정도 걸릴 것 같네요.”
“그러지요.”
환자 모두 주둔지의 빈 방에 옮겼다.
지루한 시간이 지나갔다.
주둔지 전체가 축 늘어져 있었다. 그 와중에 또 환자가 한 명 발생해서 분위기가 더 나빠졌다.
시혁은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어느덧 오후 3시다.
곧 시혁이 계산했던 시간이 된다. 앞으로 한 시간 내에는 환자들이 깨어나야 했다.
초조하게 기다렸다.
시혁만 아니라 손문철, 이미라, 채현애, 박철호 등 주요 이능력자가 모두 모여 있었다. 10명이 넘는 S급 이능력자가 뿜어내는 기운에, 숨이 턱턱 막혔다.
1시간이 더 지났다.
실패한 걸까?
어디서 실수를 했기에?
시혁이 오늘 일을 되돌아 볼 때였다.
작은 신음 소리가 들렸다.
“끄으응……”
신아영의 목소리.
급히 다가갔다.
“신아영 님, 정신이 드세요?”
“으음, 여기 어디에요? 방금 전에 분명히 천왕봉에 있었는데……”
영혼 진영 소환자들과 같았다.
기억이 송두리째 사라졌다. 정확히 따져보니 영혼 구덩이의 세뇌가 발동한 시점부터였다.
이미라가 신아영의 옆에 와서 앉았다.
얼굴 이모저모를 뜯어보더니,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괜찮아? 아픈 덴 없어?”
“미라 언니? 응, 난 괜찮아. 머리가 좀 멍하기만 해.”
신아영이 시작이었다.
다른 이능력자들도 하나둘 정신을 차렸다.
시혁은 채현애의 도움을 받아 그들을 진찰했다.
성공적이었다.
대뇌 피질에 얼룩처럼 끼어 있던 회색 마나가 한 덩이로 뭉쳤다. 그것도 빠르게 소실되는 중이었다. 하루나 이틀 정도만 지나면 다 사라지지 싶었다.
이걸로 됐다.
시혁은 마음을 놓았다.
그 사이 새로 발병한 환자들도 근원의 나무에 데리고 갔다가 나왔다. 이들도 몇 시간 후면 호전 될 것이다.
한편, 손문철에게 건의하여 주둔지의 이능력자들을 모두 검사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지리산에 모인 수백 이능력자 중, 절반 이상의 대뇌 피질에 회색 마나가 잠복해 있던 것이다.
또 천왕봉에 가까이 갔거나, 시간이 오래 지났으면 이지를 잃고 꼭두각시 신세가 됐겠지.
다들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맙소사!”
“이렇게 많았어?”
“정말 큰일 날 뻔 했네.”
여기 있는 이능력자들은 대한민국의 핵심 전력이다. 이렇게 쉽게 잃을 수는 없다는 뜻이다.
손문철을 비롯하여, 유명 이능력자들이 시혁에게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원장님 덕에 희생자를 줄일 수 있었습니다.”
“협회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감사 말씀을 올립니다. 뭐든 곤란한 일이 있으면 연락을 주십시오. 원장님 일이라면 협회 전체가 도와드리겠습니다.”
“기꺼이 그렇게 하겠습니다. 나중에 모른 척 하지나 마세요.”
대충 일이 마무리 되는 듯했다.
근원의 나무 조작 방법도 박철호에게 알려주었다. 이제 시혁이 없어도 이능력자들끼리 알아서 잘 해낼 것이다.
시혁은 천왕봉으로 인해 발생한 이 병에, 프네우마 디스파라투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라틴어로 영혼 괴리라는 뜻.
벌써 자정이 넘어갔다. 새벽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젠 광주로 돌아가야 할 때.
얼른 돌아가서 쉬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 시혁이 돌아갈 때는 아니었나 보다.
이능력자들과 작별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올 때였다. 갑자기 세상이 번쩍하고 밝아졌다.
뭐지?
번개라도 쳤나?
시혁이 고개를 두리번거리는데, 이미라가 시혁을 소리쳐 불렀다.
“원장님! 저기 좀 보세요! 천왕봉이요! 천왕봉이 이상해요!”
천왕봉이 왜?
고개를 돌리자 괴상한 장면이 보였다.
천왕봉 전체에서 회색 광채가 칼날처럼 뿜어지고 있었다. 그 날카로운 빛줄기가 세상 전체를 난도질 할 듯 뻗어 나왔다.
“저, 저건……”
시혁은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본 적이 있다.
바로 오늘, 아르거스에서.
지식 장로 진영에서 영혼 약탈자를 압박할 때 저런 장면을 목격하지 않았나.
그때와 같았다.
영혼 진영의 최종 병기, 영혼 군단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 프네우마 디스파라투스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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