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네우마 디스파라투스 -1- >
오피스텔에서 깨어났다.
새벽 6시. 겨울이라 그런지 깜깜했다.
시혁은 침대에 걸터앉아 생각에 잠겼다.
환자들의 치료법은 제대로 알아왔다. 각혼분을 그대로 재현하기만 하면 끝이다.
아니, 과연 그럴까?
천왕봉은 영혼 구덩이와 비슷하다. 하지만 완전히 같다고는 할 수 없었다. 검은 천체에서 뻗어 나온 에테르에 의해 변이된 거니까. 각혼분으로는 치료가 안 될 가능성도 생각을 해야 했다.
그래도 처음 치료는 각혼분으로 시작을 해야겠지. 그 전에 어떤 식으로 변형되어 있는지 살펴봐야겠고.
간단히 씻고 오피스텔을 나섰다. 한의원으로 전화를 걸어서 오늘은 가기 힘들 것 같다고 미리 말해 두었다.
환자들이 있는 대한 이능 협회 광주 지부로 갔다.
여전히 보안 절차가 철저했다. 시혁의 신분을 확인한 다음에야 들여보내주었다.
“원장님 오셨어요?”
“잘 주무셨습니까?”
“예, 저는 잘 잤습니다. 두 분도 잘 주무셨지요? 환자들은 어떻습니까?”
“어제랑 같습니다. 별 변화는 없어요.”
환자들의 상태부터 확인했다.
김진태의 말이 맞았다. 지금도 어제처럼 누군가 명령하는 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시혁이 환자들을 살핀 뒤, 한세훈이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원장님, 치료법은 알아 오신 거죠?”
“네. 그러긴 했는데 지금 환자들의 상태가 제가 알아낸 내용과 약간 다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 제 치료법이 바로 통하지는 않아요. 상태를 주시하면서 약간 변형을 시켜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렇습니까? 원장님이 정보를 알아낸다는 그 나무가 궁금해지네요.”
“언젠가는 제 꿈속의 나무도, 괴수 질병들도 정체가 밝혀지겠지요.”
시혁은 각혼분의 개념을 설명했다.
김진태와 한세훈은 눈을 멀뚱멀뚱 뜨고 설명을 들었다.
이해가 쉽게 안 되는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각혼분은 일종의 초소형 마나 생명이다. 지구에서는 이와 같은 개념이 아직 알려져 있지 않았다.
시혁은 고민하다가 한 가지 예를 들었다.
“쉽게 말해서 의료용 나노 로봇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초소형이고, 형태가 따로 없이 에테르로만 이루어졌다는 게 다르죠.”
“신기하네요. 그런 것도 있습니까?”
“어쨌든 그걸 만들어서 주입하면 된다, 이거지요?”
“예. 쉽지는 않을 겁니다. 아주 정밀한 에테르 조절 능력이 필요해서요.”
슬며시 걱정이 되었다.
지구의 이능력자들이 각혼분을 만들 수 있을까 싶어서였다.
우선 만드는 방법을 전해주는 것부터 문제가 된다. 이건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직접 보여주거나 느끼게 하는 게 제일 좋은데, 그럴 수가 없으니……
새로운 인력을 요청했다.
두 가지 계열.
진단을 도와줄 탐지 계열과, 각혼분을 만들 만능 구현 계열이었다. 만능 구현 계열이 아르거스에서는 학자와 현자이니까.
금방 도착했다.
그 면면을 보고, 시혁은 깜짝 놀랐다.
이미라가 딱 두 명을 데리고 왔는데, 둘 다 S급 이능력자였기 때문이다.
채현애와 박철호.
시혁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반갑습니다. 최시혁입니다.”
“안녕하세요. 채현애에요. 미라랑은 같은 아사달 공격대 소속이고, S급 탐지 계열 이능력자에요.”
“처음 뵙겠습니다. 대한이능협회 기획부장 박철호입니다. S급 만능 구현 계열 이능력자니 도움이 되실 겁니다.”
“두 분이 오셔서 든든합니다. 전 A급 이능력자만 오셨어도 충분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이네요.”
“아, 그게……”
어째 이미라의 얼굴이 좋지 않다.
주위를 한 번 살피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새벽 새로운 환자가 발생했어요.”
그 말에, 시혁의 얼굴도 덩달아 굳어졌다.
아르거스에 가기 전 들었던 말이 생각나서였다.
“혹시 그게 강찬 씨랑 신아영 님은 아니지요?”
“어떻게 아셨어요? 어제 순찰 다녀오고 좀 멍해 보이더니 새벽에 이상하게 되더라고요. 원장님, 이거 치료할 수 있는 거죠?”
이미라의 목소리가 가냘프게 떨리고 있었다.
시혁은 좋은 말로 위로했다.
“걱정 마세요. 충분히 치료할 수 있어요. 혹시 두 분 말고도 또 발병하신 분은 없습니까?”
“세 명이 더 발병했어요. 지금은 순찰 모두 중지하고, 주둔지에 모여서 상태만 주시하고 있어요.”
“음…… 에테르 때문에 괴수가 나타날지도 모르는데 큰일이네요. 서둘러야겠습니다.”
“네, 원장님만 믿을게요.”
바로 시작했다.
먼저 채현애에게 부탁했다.
“환자들의 머릿속을 살펴보시고, 그 안에 있을 에테르의 느낌을 저한테 전해주셨으면 합니다.”
“알았어요.”
채현애가 환자들에게 다가갔다.
눈을 푸르게 빛내며 환자들을 관찰했다.
허탕이었다.
아무리 찾아봐도 머릿속에 아무 것도 없다고 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
김진태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저도 진작 뇌를 살펴봤습니다만 별 것 없었습니다. 약간의 에테르가 느껴지긴 했지만, 그것 때문에 이렇게 심한 증상이 나타날 거라고 보긴 어렵고요.”
하긴 이능력자들이 두 손 놓고 있었을 리 없었다. 아르거스에서처럼 강한 에테르가 두개골 안 가득 차 있었다면, 진작 알아채고 치료했겠지.
아르거스 신들의 힘이 없이 영혼 구덩이의 세뇌만 걸린 상태라면 세뇌를 푸는 게 어렵지 않으니까.
뭐가 문제지?
잠시 고심하다가, 김진태가 말한 내용에 주의를 기울였다.
“약간의 에테르라고요?”
“예. 두개골 안쪽에 미량의 에테르를 감지하긴 했는데, 뇌는 민감한 부위라 더 자세히 보진 못하고 거기서 끝냈습니다. 저는 제 에테르를 집어넣어야 진단이 가능하니, 잘못하면 뇌를 건드릴 수도 있어서요.”
“하긴 그렇지요. 혹시 그 부위가 대뇌피질 부위 아닙니까? 특히 전두엽 쪽이요.”
“어, 그러고 보니 그랬던 것 같습니다.”
전두엽은 운동 기능과 성격, 감정, 독창성, 판단력 등에 관여한다고 알려져 있다. 따라서 지금 같은 경우에는 그쪽부터 확인해 보는 게 좋았다.
채현애에게 전두엽의 대뇌 피질을 확인해달라고 했더니, 채현애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전두엽이요? 대뇌 피질? 그게 어디 있는 데요?”
대충 어떤 건지는 상식으로 들어 알지만, 정확한 위치나 생김새는 잘 모르는 것이다.
시혁은 즉석에서 간단히 설명을 했다.
“대뇌는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그 중 이마 쪽에 있는 게 전두엽입니다. 은혜 씨가 두개골을 투시해서 보면 뇌를 싸고 있는 막이 보일 텐데, 3층의 막을 지나가면 꼬불꼬불한 주름들이 보일 겁니다. 그게 대뇌 피질입니다.”
“아, 그래요?”
“거기에 혹시 에테르가 깃들어 있는지 살펴 봐 주세요. 제 생각에는 그게 핵심인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찾아냈다.
에테르가 대뇌 피질에 마치 얼룩처럼 묻어 있다는 것이다.
“더 정밀하게 봐야 할 것 같아요.”
그런 말을 하더니, 한쪽 침상에 편히 누웠다. 가지고 온 가방에서 넓적한 태블릿 PC도 하나 꺼냈다.
뭘 하려는 거지?
이미라가 시혁에게 속삭였다.
“현애 언니는 원래 미대 출신이에요. 이능력자로 각성하기 전에는 태블릿 PC로 그림 그리는 걸 개인 방송도 하고 그랬어요.”
그거랑 탐지 계열 이능이랑 무슨 상관이지?
곧 의문을 해소할 수 있었다.
채현애는 그림 그리는 어플을 하나 실행시켰다. 두 눈에서 청광을 번쩍이면서, 환자들을 주시한 채 태블릿 PC 위에서 손을 휙휙 움직였다.
뭔가가 했더니, 그림을 그리는 거였다.
채현애의 손짓 한 번에 정교한 그림이 그려졌다. 두개골 아래 대뇌의 주름이 섬세하게 그려졌다. 순식간에 네 명 환자의 대뇌가 태블릿 PC 화면에 재현되었다.
시혁은 그걸 보고 눈을 둥그렇게 떴다.
TV에나 나오는 화가들을 보는 듯했다. 태블릿 PC로 저 정도 수준의 그림을 그리는 것도 놀라운데 속도가 매우 빨랐으니까.
이 광경을 보고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몽마를 잡을 때 이미라를 도왔던 이능력자가 바로 채현애라는 것을.
이윽고 채현애의 손길이 멈췄다.
지금까지처럼 과감하게 그리는 대신, 조심스럽게 천천히 손가락을 놀렸다.
시혁의 눈빛이 깊어졌다.
여태 검은색만 써서 뇌의 윤곽만 그렸던 채현애다.
지금은 회색을 썼다.
사용하는 도구도 달라졌다. 또렷한 펜 도구가 아닌, 흐릿한 브러시 도구를 썼다. 확연한 윤곽의 뇌 주름과 대비되면서, 확연히 눈에 띄었다.
게다가 뇌 주름마다 일일이 회색 흐릿한 선을 그리고 있었다. 어떤 주름에는 그리지 않기도 했다. 대부분은 전두엽에 집중되어 있고, 드물고 두정엽과 측두엽에도 배치되었다.
“하아!”
채현애가 한숨을 내쉬었다.
다 끝났다는 태도.
시혁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고생하셨습니다. 거기 회색으로 그린 게 에테르입니까?”
“맞아요. 대뇌 피질 사이 주름에 숨어 있네요. 저도 모르고 살펴봤으면 놓쳤을 거예요.”
“절대적인 양이 많지는 않은가 봅니다.”
“네. 뇌가 아니라 인체 밖에 있었으면 C급 이능력자라도 간단히 소멸시킬 수 있을 정도 수준이에요.”
에테르의 성질에 대해서도 설명을 들었다.
아르거스와 거의 비슷했다.
[복종하라.]
다만 약간의 차이는 있었다.
아르거스에서는 복종의 방향이 오직 반신을 향한다. 다른 누가 오든 복종하지 않았다.
반면 지구에서는 그 방향성 자체가 없었다. 누가 와서 명령하든 그에 따르는 것이다. 혹시 상충하는 명령이 내려진다면 가장 최근의 것을 우선하게 되고.
이러면 치료는 간단하다.
처음 생각대로 각혼분을 쓰면 된다. 약간만 손을 보면 충분히 통할 것이다.
이후 적당한 시간이 지난 뒤 각혼분이 자연히 소멸하게 하면 끝. 언제 그랬냐 싶게 환자들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게 할 수 있었다.
금방 끝이 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한 가지 난황에 부딪쳤다.
박철호에게 각혼분을 만드는 방법에 대해 설명했는데, 박철호가 이해를 못 하는 것이다.
“솔직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에테르를 응축하는 것까지는 이해가 갑니다. 어렵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의념을 집중시켜 자아를 탄생시키라는 말씀이 이해가 안 됩니다. 속성도 그렇고요. 맹목적인 방향성? 스스로에 대한 확신? 그런 걸 어떻게 에테르에 부여할 수 있지요?”
시혁은 답답함에 가슴을 쳤다.
아르거스에서 현자나 학자라면 거의 대부분 아는 내용이다. 마법은 기본적인 소양이고, 특히 마나학에서 중점적으로 배우는 부분이니까.
그 기억이 모두 없어지니 이렇게 반응하는 듯했다.
직감적으로, 이들에게 각혼분 제작 방법을 알려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르거스의 마나학을 가르친다면 가능하겠지만 그게 어디 쉽겠나. 최소한 한 달은 걸릴 텐데, 그 사이에 환자들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어떻게 알고.
어쩐다?
차선책을 궁리했다.
진리 진영에는 여러 실험 장비가 있다. 그것들을 이용해도 각혼분을 만들 수 있었다. 소환자가 직접 만드는 것만 못해도, 세밀한 마나 조절이 가능하니까.
잠깐만.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있나?
실험 장비에 대해 생각하다 말고, 문득 근원의 나무에 생각이 미쳤다.
근원의 나무를 만드는 것은 쉽다. 필요한 재료를 지구에서 모두 구할 수 있었으니까. 아르거스보다는 마나 생산이 적겠지만, 그 정도는 감수할 만 했다.
그걸 만든 뒤, 각혼분을 생산하게 하면 어떨까?
근원의 나무를 조작하는 건 시혁도 가능하다. 이능력자가 더 쉽게 조작하긴 하겠지만, 일반인도 조작할 수 있게 설계 되었으니까.
시혁은 활짝 웃었다.
“아, 다른 방법이 생각났습니다. 각혼분 말고, 이 방법을 쓰는 게 더 낫겠습니다.”
“휴, 다행입니다. 각혼분인지 뭔지, 너무 복잡해서 만들 엄두가 안 났거든요. 그럼 저희는 가봐도 됩니까?”
“그래도 절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여러분이 도와주시면 금방 일을 끝낼 것 같아서요.”
“좋습니다.”
필요한 재료를 수배했다.
다섯 가지.
생명의 씨앗, 햇볕 너울, 땅의 심장, 바위 껍질, 샘 요정의 눈물.
지구에서는 이름이 다르고, 조금씩 미성숙했지만 존재하긴 했다. 이것들을 가져다가 정해진 방법대로 융합시키면 근원의 나무 씨앗이 된다.
< 프네우마 디스파라투스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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