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각혼분 -1- >
시혁과 발티라스만 전방으로 이동했다.
나머지 소환자들은 다른 연구실로 뿔뿔이 흩어졌다. 연구 막바지라, 8명 모두가 필요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지식 장로가 가진 2개의 마나 집중점 중 하나.
요새가 건설되어 있다. 진리 진영 특유의 아름다운 요새였다. 방어탑이 곳곳에 서 있어, 어지간한 병력 가지고는 뚫기가 어려웠다.
아직 영혼 약탈자의 군대는 보이지 않는 상태.
발티라스가 시혁을 보고 물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무엇보다 마나 공급이 관건인데요. 마나 집중점에서 마나를 끌어오실 겁니까?”
“지금은 승천 이적 밖에 답이 없는데 그럴 수는 없죠. 근원의 나무 항목을 지식 열람해 보세요.”
“근원의 나무요? 그게 무슨…… 허!”
지식 열람을 했는지, 발티라스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동하면서 근원의 나무를 만들 씨앗을 제작한 뒤다. 시혁은 그것을 요새 앞에 가져다가 심었다.
성장시키는 것은 식은 죽 먹기.
오행 순환체 셋을 모두 동원했다. 세 개를 교차시켜 반대 방향으로 회전시켰다. 강한 반발력이 일어나며 막대한 양의 마나가 생성되었다.
어디 그뿐이냐.
다중 속성 강화도 써먹었다.
식물 성장, 개화, 비옥한 토양, 해충 제거, 샘물 공급 등의 마법을 부여하여 나무가 성장하는 것을 도운 것이다.
근원의 나무도 결국은 식물의 한 종류.
싹이 움트더니 빠르게 자라났다.
비 온 뒤 죽순 자라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쭉쭉 뻗어나갔다. 동화 속 잭의 콩나무가 성장하는 것을 보는 듯했다.
순식간에 작은 오두막 크기가 되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계속 성장하는 것이, 조만간 5층탑 정도는 될 모양이었다.
발티라스가 탄성을 질렀다.
“이거, 세계 지식에 기록된 것보다 훨씬 성장이 빠른데요? 개량하신 겁니까?”
“원래 마나만 충분하게 공급하면 빨리 성장합니다. 세계 지식에 기록된 건 그냥 방치해 뒀을 때에요. 제가 성장 관련 주문까지 써줬으니 더 빠르게 큰 거죠.”
약 1시간 만에 근원의 나무가 성장을 끝마쳤다.
건물과 나무가 뒤섞인 형태.
생명 진영의 나무들을 연상시켰다. 잎사귀가 반짝이는 청색이 아니었다면, 진리 진영의 것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웠을 터였다.
지식 장로도 근원의 나무에 관심을 보였다.
[순식간에 건물 하나를 만들어 냈구나. 방어탑으로 쓸 거냐? 나무가 마나를 생산하는 게 느껴진다.]
“비슷합니다.”
시혁은 발티라스와 함께 근원의 나무로 들어갔다.
먼저 치료소 구축 특기를 사용했다. 이제 시혁은 근원의 나무 안에 있는 한, 마나 회복과 치료 행위에 상당한 이점을 얻는다.
근원의 나무를 조작했다.
애초에 어떤 용도로든 개조할 수 있게 만든 발명품이었다. 영혼 구덩이의 세뇌를 푸는 씨앗을 만들게 하는 건 쉬웠다. 잎사귀 사이에서 꽃이 피어나더니, 수술과 암술이 생겨 씨앗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씨앗의 이름은 각혼분(覺魂粉).
이론상 근원의 나무는 무한대로 각혼분을 생산할 수 있었다. 시혁이 오행 순환체 세 개를 써서 보조하자, 생산 속도도 급격히 빨라졌다. 게다가 치료소 구축의 영향을 받는지, 각혼분 자체의 효능도 좋아진 것 같았다.
이것으로 준비는 끝.
발티라스가 시혁을 돕다가 갑자기 생각난 듯 말했다.
“이제 정화 마법에만 대비하면 끝이겠습니다. 저도 생각을 해 봤는데, 지식 장로께서 절대엄금 이적을 쓰면 어떻겠습니까?”
시혁도 동의했다.
“저도 찬성합니다. 사실 그 방법 말고는 뭐가 없지요.”
절대엄금 이적은 일정 반경 내에서 특정 계열 마법을 쓰지 못하도록 한다. 지금 같은 경우는 정화 계열 마법으로 국한 지으면 될 것이다.
마법적 면에서 압도적으로 뛰어난 진영이라 가능한 이적.
[좋다. 그렇게 하마.]
지식 장로도 둘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이후, 지식 장로의 군대를 지휘하는 마법 기사 영웅이 근원의 나무로 건너왔다. 곧 벌어질 전투에 대비하여 작전을 짜기 위해서였다.
모든 준비를 마쳤을 무렵이다.
영혼 약탈자의 군대가 진군해오기 시작했다.
최강의 군대를 구축한 상태였다. 다섯 영웅 모두 흉흉한 눈빛을 빛내고, 수천에 이르는 군세가 그 뒤를 받쳤다. 게다가 최종 병기인 영혼 군단도 서른 명 정도가 보였다.
반면 지식 장로의 군대는 무척 초라했다.
근원의 나무와 그 뒤 요새의 방어탑, 그리고 5백 남짓한 마법 생명체와 3백 정도 소환자들이 전부였다. 영웅도 둘이 전사한 뒤여서, 겨우 셋밖에 되지 않았다.
마법사 영웅이 암담한 표정을 지었다.
“영웅에 영혼 군단에 일반 소환자들에 아주 난리가 났군. 만회하기 힘들겠어.”
그나마 위안거리라면 영혼 군단의 수가 아주 적다는 것 정도. 영혼 군단은 초기부터 출현하는 대신 1백 명 정도는 모여야 다른 진영의 최종 병기와 비슷한 전력이 되니까.
시혁은 영웅들을 향해 말했다.
“지식 장로께서 명령하시는 즉시 근원의 나무를 발동시키겠습니다. 바로 효과가 발휘되지는 않습니다.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최대한 막아주시고, 영혼 약탈자의 군대가 자유의지를 가져 혼란에 빠지는 순간을 노리셔야 합니다.”
“알겠네. 걱정 말게.”
“영혼 약탈자가 우리 실험을 보고 있었다는 걸 주의해야 합니다. 뭔가 대비책을 세워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발리타스가 한 가지를 지적했다.
옳은 말이다.
시혁은 영혼 약탈자 입장에서 생각해 보았다.
자신이 영혼 약탈자라면, 상대 진영에서 자유 의지의 문신을 연구하고 있을 때 어떻게 대비했을까?
대략 세 가지 방법이 있겠다.
이적을 미리 준비하거나, 군대에 세뇌 마법을 보호할 장비를 지급하거나, 자유의지를 가진 예비대를 확보하거나.
시혁은 통찰 마법을 이용해 멀찍이서 영혼 약탈자의 군대를 살폈다.
특별한 장비는 보이지 않았다. 각자 소환된 때 그대로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다만 뒤쪽에 영혼 군단이 한데 모여 있는데, 그들이 좀 심상치가 않았다.
첫 번째와 세 번째 방법을 쓸 생각인가 보다.
시혁이 그 점을 이야기하자, 마법 기사 영웅이 심각한 얼굴을 했다.
“영혼 군단은 좀 껄끄러운 상댄데……”
마법사 영웅이 그 말을 받았다.
“자기들끼리 힘도 공유하고 증폭하면서, 피해도 분산하는 게 문제지요. 그나마 지금은 서른 명밖에 안 되니 상대할 수 있을 겁니다.”
“지식 장로께 고해서, 그들에게 이적을 집중시켜 달라고 해야겠소.”
“현자님도 이 나무를 이용해서 마나를 공급해 주시는 게 좋겠습니다. 일단 각혼분을 한 번 날리면, 굳이 계속 각혼분을 만들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작전 회의를 마친 후 모두 자기 자리로 이동했다.
시혁은 근원의 나무를 지켰다.
이번 전투에서 시혁의 자리는 바로 이곳이었으니까.
삘리리리 삘릴리.
피리 소리가 커졌다.
하늘이 회색으로 물들었다. 영혼 약탈자가 힘을 집중하는 듯했다.
쿵! 쿵! 쿵!
영혼 약탈자의 군대가 전진해 왔다.
수천 명이 하나처럼 발을 맞췄다. 지구의 공산주의 국가보다 더 각을 맞춰서, 거대한 한 마리의 괴물이 다가오는 것만 같았다.
군대가 전진하는 속도가 빨라졌다. 공성 병기가 하나둘 자리를 잡고 공격을 날리지만, 그걸로 요새를 무너뜨릴 생각은 없어 보였다. 어느덧 이적의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오고, 이젠 아예 뛰기까지 했다.
쿵쿵쿵쿵!
함성은 없었다.
차가운 눈빛만 번쩍이며 달려왔다. 마치 거대한 해일이 밀려오는 듯한 광경이었다.
[공격하라!]
산발적인 공격이 날아갔다.
방어탑이 작동하여 불과 번개를 뿌렸다. 마법 생명체들이 활을 쏘고 간단한 마법을 시전 했다. 당연히, 영혼 약탈자 군세가 달려드는 속도에는 변화가 없었다.
지식 장로가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환자들은 마나를 공급하여 하늘에 거대한 마나 구름을 만들었다. 얼룩처럼 번진 금빛 마나가 반짝여, 거대한 위압감을 자아냈다.
어느 순간, 그게 폭발했다.
황금빛 파동이 퍼져나갔다. 세계의 법칙을 강제하여, 정화 계열 마법과 이적의 사용을 금지했다.
[음? 무슨 수작이냐?]
영혼 약탈자의 음성이 하늘 저편에서 울려 퍼졌다.
의도를 읽지 못해 당황한 음색.
지식 장로는 묵묵히 다음 이적을 발휘했다.
요새 앞 땅이 늪으로 변했다. 얼음벽이 일어나 영혼 약탈자의 군대가 진군하는 것을 막았다. 덩굴 식물이 기어 나와 발목을 잡기까지 했다.
기다리던 순간이다.
시혁은 있는 힘껏 근원의 나무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펑!
뭔가 터지는 소리가 났다.
근원의 나무에 매달려 있던 열매들이 일제히 폭발했다. 그러면서 민들레 씨앗처럼 생긴 각혼분을 공기 중으로 방출했다.
때마침 발티라스가 바람 마법을 사용했다. 그 바람을 타고, 각혼분이 영혼 약탈자의 군대로 쏟아졌다.
처음에는 변화가 없었다.
1시간, 2시간이 지나도 그랬다. 지식 장로가 집요하게 영혼 약탈자 군대의 발목을 붙잡고 있지만, 그것도 슬슬 한계에 도달했다.
영혼 약탈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하! 뭔가 했더니 고작 그거냐? 이제 끝이다. 몽땅 끝장내주마!]
말로만 그치지 않았다.
후방에 위치해 있던 영혼 군단을 출격시켰다.
영혼 진영의 소환자는 흔히 영혼병 특기를 얻는다. 이들을 영혼 구덩이에서 강화시키면 서로의 힘과 정신을 공유하고 증폭하는 영혼 군단이 된다. 혼자일 때는 강화 이전과 다를 게 없지만, 모이면 모일수록 강해지는 것이다.
서른 명의 영혼 군단은 번개처럼 전장을 가로질렀다. 막 진리 진영의 방진에 들이닥칠 무렵, 한 가지 이변이 일어났다.
괴상한 소리가 하나 들렸다.
“뭐야? 여기 어디야?”
비명 하나, 함성 하나 없던 영혼 약탈자 진영이다.
당혹에 찬 목소리가, 유난스레 크게 들렸다.
무명 전사 중 한 명.
막 늪을 헤치며 전진하다 말고, 눈을 끔뻑이더니 입을 놀린 것이다.
순간, 차가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무명 전사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차가운 얼굴로 진군하는 소환자들과, 하늘에서 쏟아지는 이적들을 한 번 보고는 납득한 표정을 지었다.
“아, 꿈이구나. 완전 현실 같네. 더 자야지.”
그러더니 아예 제 자리에 누워 버린다.
그 한 명만 이랬으면 금방 수습했을 것이다. 기존에 그러했듯 수족처럼 움직일 수는 없어도, 반신의 명령은 여전히 유효하니까.
하지만 한 명이 아니었다는 게 문제.
이런 일이 동시다발적으로 곳곳에서 일어났다.
“당신들 뭐야?”
“이 요망한 마녀가 이번엔 환상 마법을 걸었구나! 이놈들, 다 죽어버려라!”
“으아악! 살려줘!”
온갖 혼란이 벌어졌다.
비명을 지르는 사람, 제 자리에 주저앉는 사람, 괴성을 지르며 주위를 공격하는 사람, 떠밀려 다니다가 아군에게 짓밟혀 죽는 사람……
영혼 약탈자의 군대가 완전히 돈좌되었다.
혼란에 빠진 수가 너무 많았다. 게다가 그 수가 급속도로 늘고 있었다. 이제 겨우 몇 분 지났을 뿐인데, 거의 2할 가까이로 불어났다.
[지금이다. 마나를 집중하라.]
지식 장로의 근엄한 음성이 시혁의 머릿속으로 파고들었다.
기다리던 순간이다.
시혁은 두 팔을 활짝 펼쳤다.
오행 순환체가 그 몸짓에 따라 넓게 흩어졌다. 각각의 속성 별로 나뉘어, 근원의 나무를 둥글게 에워쌌다. 서로를 굳이 구별할 것 없이, 오색의 고리처럼 변했다.
그것들이 회전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소용돌이쳤다. 근원의 나무가 생산하는 마나가, 오행 순환체에 공급되었다.
오행 순환체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그 수를 몇 배나 불리고 불려, 결과적으로 엄청난 마나를 뿜어냈다.
무시무시했다.
강렬한 마나가 거꾸로 흐르는 폭포수처럼 솟구쳤다.
세 영웅도, 삼백에 이르는 소환자도 이 근원의 나무와 오행 순환체의 조합에 미치지 못했다. 두 발명의 조합이, 일당백 수준으로 마나를 공급하고 있었다.
[굉장하구나!]
짧은 감탄이 들렸다.
이렇게 전달 받은 마나를 바탕으로, 지식 장로가 이적 공격을 시작했다.
혼란 이적을 걸었다.
원래대로라면 영혼 진영에겐 절대 통할 리가 없는 이적이다. 하지만 자유 의지를 가진 소환자들에겐 특효약이었다. 당장 영혼 약탈자 군대의 혼란이 심해졌다.
영혼 약탈자가 방어해 보려고 하지만 역부족.
다양한 정신 계열 이적이 영혼 약탈자의 군대를 괴롭혔다. 공포로 날뛰고, 증오에 가득 차 아군을 공격했다. 막 자유 의지를 가지고, 아르거스에 대해 알게 된 참이라 피해가 컸다.
영혼 군단도 그랬다.
오히려 더 혼란스러워했다.
눈을 떠서 정면을 봤는데, 서로 다른 서른 명의 시야가 동시에 머리가 들어온다고 생각해 보라.
과연 제대로 정신을 차릴 수가 있겠나.
감정도 공유하니 더 문제가 커졌다. 한 명이 어떤 감정을 느끼면 순식간에 그 감정이 전파되니까. 평소보다 서른 배는 더 짙은 감정을 느끼는 셈이다.
과연 영혼 약탈자가 이 사태를 어떻게 대처할까?
시혁은 회색으로 물든 하늘을 주시했다.
결정을 내렸나 보다.
공격해 오던 소환자들이 몸을 움찔거렸다.
그러더니 몸을 돌려 뒤로 달리기 시작했다. 영혼 약탈자가 퇴각 명령을 내린 게 분명했다.
영혼 군단도 머리를 싸매고 달렸다. 얼굴은 짙은 혼란에 빠져 있으면서도, 일단 영혼 약탈자가 내린 명령대로 움직였다.
자유 의지를 되찾았다 해도, 반신의 절대 명령은 따라야 하니까.
지식 장로가 노호성을 질렀다.
[이놈들! 놓칠 줄 아느냐?]
< 각혼분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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