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리의 탑 -3- >
하지만 실패.
최대한 세뇌 마법과 비슷한 조성의 마나를 주입했는데, 무명 전사의 뇌가 격렬한 거부 반응을 일으켰다.
무명 전사의 몸이 미친 듯 발작을 했다. 결국, 채 몇 분이 지나지 않아 숨통이 끊어지고 말았다.
시혁은 혀를 찼다.
“안 되네요.”
“뭐가 문젤까요?”
“보안 명령이라도 걸려 있나 봅니다. 영혼 진영의 소환자들은 세뇌가 안 되기로 유명하잖습니까? 아무리 반신이라도, 낙인을 찍어 봤자 영혼 진영의 소환자를 부릴 수 없다는 건 유명한 사실이지요.”
그건 그렇다.
그래도 뇌에 직접 마나를 공급하면 어떻게 될 것도 같았는데……
시혁은 무명 전사의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마법 생명체들이 들어왔다. 감정 없는 얼굴로 무명 전사의 시체를 들더니, 그대로 가지고 나가려고 했다.
무감각한 눈으로 그걸 보다가, 발티라스가 방금 전 한 말에 생각이 미쳤다.
뭐라고 했더라?
반신의 낙인으로도 영혼 진영 소환자를 부릴 수 없다고 했지.
낙인?
시혁은 눈살을 찌푸렸다.
뭔가 잡힐 듯 말 듯 했다.
흐릿한 영감이 아른거렸다. 그 옅은 흔적을 찾아, 시혁은 정신을 집중하고 또 집중했다.
드디어 그걸 잡아챘다.
머릿속에서 구체화시키고, 입을 벌려 한 가지 질문을 했다.
“혹시, 반신의 낙인 이적은 진영마다 다 똑같습니까?”
“아뇨, 그렇지는 않습니다.”
발티라스가 대답했다.
“진영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습니다. 핵심 원리야 같습니다만, 속성이 다르니 그럴 수밖에 없지요.”
“낙인 이적은 해제가 가능하지요? 반신의 이적으로요.”
“그야 그렇습니다만, 그게 왜요?”
“영혼 진영의 낙인 이적을 한 번 참고해보는 게 어떻습니까? 회색 마나와 통하는 부분이 있을 것 같은데요. 이걸 먼저 해석해서, 회색 마나의 성질을 비틀면 방법이 보일 것 같습니다.”
“음, 그렇게 한다고 해도 낙인 수준에서 끝나면 실용성이 없습니다. 반신의 이적으로만 세뇌를 풀 수 있다고 하면, 어느 반신이 세뇌를 풀려고 하겠습니까?”
“이제 첫 걸음이니까요. 첫 술에 배부르겠습니까? 이번 연구를 바탕으로, 또 발전시켜 봐야지요.”
다행스럽게도, 낙인 이적에 대한 기존 연구가 있었다. 그것도 각 진영 별로 자세히 비교 분석한 연구라 크게 도움이 되었다.
그걸 바탕으로 영혼 이적의 낙인 이적을 재현했다.
아니, 이적을 재현했다고 보기엔 어려웠다. 그 속성을 흉내 낸 것에 불과했다.
마나 공급기에 해석한 속성을 입력했다.
몇 차례 들썩이더니, 혼탁한 회색 마나를 공기 중에 흩뿌렸다. 무명 전사의 머릿속에 있던 것과 비슷한 느낌의 마나였다.
마법 기사가 생쥐 한 마리를 그 앞에 가져갔다.
뭔가를 느꼈는지 생쥐가 발버둥을 쳤다.
그것을 무시하고 회색 마나에 노출시키자, 이내 생쥐가 축 늘어졌다.
마법 기사가 생쥐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앉아, 일어서, 굴러, 달려, 누워.”
짧게 명령을 하자, 생쥐가 잘 훈련된 것처럼 곧잘 따라했다.
여기까진 성공.
그 다음, 무명 활잡이를 상대로 실험을 했다.
마법 자체를 바꾸는 실험이었다. 영혼 구덩이의 세뇌를 영혼 진영의 낙인으로 바꾸는 것이다.
“끄아악!”
섬세한 조절이 필요했다.
덕택에 몇 번이나 실패를 했다.
실험체로 삼은 영혼 진영 소환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죽어나갔다. 그것을 본 시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르거스에서 소환자를 지지든 볶든 고향 세계에 영향이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심지어 기억까지 사라지지 않나.
그래도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지금까지 연구를 했어도 소환자를 대상으로 한 적은 없었으니까.
발티라스가 그것을 눈치 챘다.
가만히 다가와 시혁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현자님은 대가가 된 지 얼마 안 되셨나 보죠?”
“예. 오래 되진 않았습니다.”
“진리 진영은 좀 외골수적인 면이 있습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믿으니까요. 고향에서 같았으면 불가능한 일이지만, 어차피 이곳은 한바탕 꿈과 같은 곳인 걸요. 너무 괘념치 마십시오.”
“끄응, 그건 그렇지요.”
시혁도 그건 알지만, 의료인 입장에서 마음이 불편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둘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소환자들이 실험을 끝냈다.
성공이었다.
영혼 구덩이의 세뇌가 낙인으로 바뀌어 있었다.
시혁은 무명 전사의 머릿속을 자세히 살폈다.
그 결과, 한 가지 차이점을 발견했다.
“다들 보세요. 낙인은 신들이 새겨놓은 명령을 증폭시키지 못하고 있어요.”
“정말입니까? 저도 확인해보겠습니다.”
시혁은 오행 순환체를 차례로 주입했다. 정신 보호를 받으며, 소환자들이 무명 전사의 상태를 확인했다.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요.”
“이래서 해제가 가능한 모양입니다.”
“이거 잘하면 연구 주제를 성공시킬 지도 모르겠는데요? 이렇게 몇 번만 더 바꾸면, 이적이 아니라 일반 마법으로도 해제가 가능해질 겁니다!”
시혁도 그 의견에 찬성했다.
한 번 마법 자체를 바꾸는데 성공하지 않았나. 그걸 또 성공시키지 말란 법이 없었다.
이번에는 영혼 계열 병종들의 마법을 조사했다. 주로 영혼술사와 영 인도자의 것을 참고했다. 두 병종 출신 영웅의 궁극기도 잊지 않았다.
세뇌 관련 마법으로 변환하는 실험을 시작했는데, 어째 이번에는 잘 되지 않았다.
영혼 진영의 소환자들이 수십이나 죽어나갔다.
지식 장로도 조바심을 냈다.
[아직 멀었느냐? 영혼 약탈자가 내 영역을 공격하고 있다. 영혼 군단이 대거 출현해서 힘의 균형이 무너졌어. 승천 이적에 필요한 마나를 모으는 것보다, 영혼 약탈자의 군대가 내 본성을 공격하는 게 더 빠를 것 같다.]
전방에서 무슨 일이 있기에 그러지?
시혁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더 서두르겠습니다.”
어째서 영혼 진영 병종의 마법으로는 바꿀 수 없었던 걸까?
세밀한 조절을 못 해서? 마나가 부족해서?
다른 이유 때문일 거라고 봤다.
영혼 진영 반신이 깃든 곳이 어디냐.
바로 영혼 구덩이가 아닌가. 어쩌면 반신이 사용하는 이적이나 마법으로만 변환이 가능할 수도 있었다.
당장 실험에 들어갔다.
이번에 선택한 것은 영혼 진영의 반신들이 가끔 사용하는 자유 의지의 문신이었다.
앞서 말했듯 영혼 진영 소환자들은 자유 의지가 없다. 따라서 개별적인 전투력은 떨어지는데, 고급 병종들까지 그러면 손해가 컸다. 자연히 고급 병종 위주로 이 문신을 새기곤 했다.
그러면 영혼 진영 소환자들은 자신의 자유 의지를 회복한다. 물론 완전히 자기 마음대로 할 수는 없고, 어디까지나 다른 진영 소환자들 수준이지만.
처음에는 세뇌 쪽만 생각해서 이걸 떠올리지 못했다. 지금 반신의 마법 목록을 보다가 이걸 써보자고 생각한 것이다.
일종의 편법.
소환자들은 회의적인 모습을 보였다.
“세뇌가 아니라 엄연히 다른 계통 마법인데, 과연 변조가 될까요?”
“제가 생각하기에도 힘들 것 같습니다만.”
“한 번 해보죠. 우리 기준에서는 다른 계통이지만, 영혼 진영에서는 다를 수도 있잖습니까?”
시혁이 직접 실험을 했다.
작은 칼을 소환해 두개골을 살짝 갈랐다. 그 틈으로 마나 공급기의 관을 집어넣었다. 문신의 마나를 직접 인도하여, 기존 낙인 마나의 성질을 바꿔나갔다.
참 섬세한 작업이었다.
거미줄보다 가는 실로 짠 옷감을, 한 차례 풀었다가 다시 엮는 것과 같았다. 아니, 그것으로도 모자라 옷감에다 대고 자수를 놓아야 했다.
시혁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오행 순환체가 아니었으면 실패했을 것이다. 정신을 방어하는 한편, 집중력을 극도로 강화시켰으니까.
순조로웠다.
통찰 마법으로 보니, 낙인 마나가 살짝 맑게 변화하고 있었다. 예전에는 걸쭉한 죽 같았다면, 이제는 건더기가 듬뿍 든 찌개의 국물 정도라고 보면 되겠다.
약 2시간 정도가 걸렸다.
시혁은 마나 속성 변조를 끝마쳤다.
“후우.”
길게 숨을 토하며 물러나자, 소환자들이 웅성거리며 모여들었다.
“성공한 겁니까?”
“발작하지 않는 걸 보니 그런가 봐요!”
확인을 해봐야겠지.
시혁은 무명 전사를 흔들어 깨웠다.
“으으음……”
무명 전사가 신음을 흘리더니 눈을 떴다.
눈동자가 또렷했다.
완벽하게 초점을 맞춘 채 시혁을 보고 있었다.
성공이다.
시혁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발티라스가 눈을 크게 떴다.
“성공한 겁니까?”
무명 전사는 불안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영혼 진영 소환자는 소환되는 즉시 영혼 구덩이에게 세뇌 당한다. 아르거스에 소환되었다는 인식도 없었다. 어젯밤에 잠든 기억이 마지막일 텐데, 작은 침대에 묶인 채 누워 있으니 두렵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하다.
시혁은 무명 전사의 입에 물린 재갈을 풀어주었다.
“여, 여긴 어디요? 당신들은 누구고?”
무명 전사가 벌벌 떨며 물었다.
시혁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기억 안 나십니까? 여긴 지식 장로의 본성 내 진리의 탑입니다. 전사님은 영혼 약탈자에 의해 소환되었고, 전투 중에 생포되어 이곳으로 호송되었습니다.”
“지식 장로? 영혼 약탈자? 그게 무슨…… 어어?”
무명 전사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몸을 발작적으로 흔들더니, 갑자기 혀를 깨물었다.
핏물이 입가로 흘러내렸다.
강렬한 고통이 무명 전사의 뇌리를 관통했다. 그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 무명 전사의 뇌가 생각하는 것을 멈추고 말았다.
쇼크사.
살리려면 살릴 수 있었지만 시혁은 보고만 있었다.
무명 전사에겐 차라리, 지금 죽어서 현실로 돌아가는 게 나을 테니까.
한 가지 사실이 확실해졌다.
영혼 구덩이의 세뇌는, 영혼 구덩이에서 비롯된 마나를 써야 해제가 가능하다는 것. 여태 그걸 모르고 자기 진영 고유의 마법만 퍼부었으니 세뇌를 해제할 수 없었던 것이다.
발티라스가 인상 깊다는 표정을 지었다.
“성공이네요. 이제 양산하기만 하면 되겠습니다.”
사실 그게 가장 어렵다.
지구에서 쓸 수 있도록 하는 것도 문제고.
시혁도 2시간에 걸쳐 마법을 변조하지 않았나. 지금 이 상태로는 지구에 가져가 봐야 써먹지도 못 한다.
하지만 시혁은 이미 해결책을 생각해 두고 있었다.
즉석으로 열린 회의에서, 시혁은 그 방법을 제시했다.
“일일이 영혼 진영의 뇌를 교정할 수는 없습니다. 시간도 많이 걸리고, 난이도도 높아요. 대규모 병력을 한꺼번에 바꾸는 게 필요한데, 작은 씨앗을 심는 게 어떻겠습니까?”
“씨앗이라니요?”
“영혼 진영 소환자의 뇌에 침투해서 마법을 변조시키는 겁니다. 순식간에 바꾸지는 못 하겠지만, 동시에 다수를 해결할 수 있으니 유용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수인족 도시에서 겪은 불임의 저주와, 시혁이 만든 오행 순환체에서 착안한 방법이었다.
시혁은 이미 이런 마나 생명체를 만드는데 도가 튼 몸.
기존의 연구들을 참고하여 씨앗을 만들었다.
그런데 만들고 보니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우선 개체 하나를 만들 때마다 상당한 마나가 들었다. 또, 간단한 정화 마법만 펼쳐도 소멸되었다.
소환자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힘들겠는데요?”
“마나 소모가 너무 극심합니다. 만드는 씨앗은 지능이 없어 공중에 살포하는 식으로 써야 하는데, 열 중 하나가 소환자 머리에 들어가도 다행이에요. 5백 명만 세뇌를 풀려고 해도, 적당한 이적 두 개를 쓸 마나가 소모됩니다. 차라리 그냥 이적을 써서 때려잡는 게 나아요.”
“그 뿐만이 아닙니다. 어떻게 씨앗을 다 들여보내도 반신이 대규모 정화 이적만 한 번 쓰면 끝입니다. 실전에서 쓸 수가 없어요.”
하지만 시혁은 담담했다.
해결할 방법이 있었으니까.
고개를 들어, 지금 이 상황을 보고 있을 지식 장로에게 말했다.
“지식 장로님, 지금 전황은 어떻습니까?”
[좋지 않다. 내가 가지고 있던 네 개의 마나 집중점 중 두 개를 빼앗겼다. 이제 영혼 약탈자가 가진 마나 집중점이 내 세 배나 된다. 한 동안 조용했지만, 곧 놈이 공격해 올 거다.]
목소리에서 조급함이 느껴졌다.
시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침착한 목소리로 한 가지를 청원했다.
“절 전방으로 보내주시겠습니까? 이제 마지막 실전 연습만 하면 연구가 완성될 것 같습니다.”
[흠, 그래?]
지식 장로는 잠시 생각한 후 허락했다.
시혁은 한 가닥 미소를 베어 물었다.
현자가 되고 슈발츠와 함께 연구했던 근원의 나무.
그걸 써먹을 때가 왔다.
< 진리의 탑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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