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 세계의 한의사-89화 (89/250)

< 진리의 탑 -2- >

시혁도 여기에 충실하게 따르지 않았나. 물론 반신들의 명령을 짐짓 미루거나 비트는 등의 행동은 많이 했지만.

지금까지 소환자들이 영혼 진영의 세뇌를 풀지 못한 이유가 보였다. 회색 마나가 이 세 법칙 중 마지막, 복종과 반응하여 더욱 강해지니 세뇌 해제가 그만큼 어려워지는 것이다.

현재로서는 이 세 법칙 자체를 풀어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직감적으로 그것을 느꼈다.

대신 기억속에 똑똑히 박아두었다. 언젠가는 이 세 법칙을 해결해야 할 테니까.

손을 뗐다.

그것을 느꼈는지 무명 전사가 히죽거렸다.

마검사가 불안한 눈으로 시혁을 쳐다보았다.

“괜찮으십니까? 많이 힘든 모양인데, 좀 쉬었다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시혁은 괜찮다고 손을 저었다.

아니, 저으려고 했다.

그런데 뜻대로 움직이지가 않았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전신이 땀으로 절어 있고, 눈앞이 갑자기 캄캄해졌다.

시혁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무명 전사의 뇌를 탐색한 게 힘들긴 힘들었나 보다.

회색 마나가 위험한 존재였으니까. 시혁이 회색 마나를 들여다볼 때, 회색 마나가 시혁을 잡아 삼키려고 덤벼들었던 것이다.

스스로의 정신을 보호해야 했으니, 과부하가 걸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시혁은 오행 순환체에 부여한 주문을 모두 급속 치료로 돌렸다. 그러자 몸이 차츰 정상으로 돌아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천천히 눈을 떴다.

무명 전사가 아쉽다는 눈빛을 보냈다.

“왜, 이 정도에 당할 줄 알았습니까?”

마검사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입니다. 현자님한테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았습니다.”

“하하, 이래 뵈도 저는 만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상태 좀 살피다가 제 풀에 쓰러질 수는 없지요.”

“뭔가 성과가 있었습니까?”

“글쎄요. 일단 영혼 구덩이의 저주에 대해서는 파악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오, 그게 정말입니까?”

마검사가 눈을 번쩍 떴다.

지금까지 영혼 구덩이의 저주에 대해 제대로 밝혀진 게 없었기 때문이다. 대략적인 것은 알려져 있지만, 탐색하다가 세뇌 당하는 사람이 워낙 많아 어느 시점에서 멈추고 말았다.

시혁은 마법 등불을 손에 들었다.

그 위에 손을 얹고, 지금까지 알아낸 사실들을 모두 입력했다. 자동적으로 세계 지식에 등재가 되면서, 상당히 많은 양의 마나가 진리의 탑에서 생산되었다.

연구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도 않아 성과를 거둔 것이다.

지식 장로가 시혁을 주시하는 게 느껴졌다.

[훌륭하구나. 지금껏 영혼 구덩이의 저주에 대해 이렇게 자세히 파헤친 자는 없었다. 필요한 것은 없느냐? 무엇이든 지원해주겠다.]

“다른 것보다 연구원을 배정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영혼 관련 연구 장비도 필요하고요.”

[알겠다. 최상층으로 가라. 그곳을 내어주마.]

최상층?

시혁은 잠깐 몸을 멈칫했다.

진리의 탑에서 가장 좋은 연구실이 있는 곳이다. 현존하는 모든 실험 장비를 배치할 수 있고, 층 하나를 통째로 쓰게 되었다. 연구원도 8명까지 배정하는 게 가능하고.

다른 연구들의 진행 상황이 지지부진하다 보니, 시혁을 밀어주려고 하나 보다.

시혁은 감사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결코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좋다. 대가 이상의 고급 병종들이 소환되는 대로 연구원으로 배정해주마. 아, 조만간 학자 영웅 발티라스를 소환할 생각이다. 발티라스와도 한 번 의논해보도록 해라.]

학자 영웅이라……

실전에는 약해도 이런 연구에는 강점이 있었다. 시혁도 몇 번 연구를 같이 해봐서 잘 알았다.

최상층으로 연구실을 옮겼다.

시혁은 손 하나 까딱 안 했다. 마법 생명체들이 다 알아서 했다. 사실 옮길 거라고는 결박한 상태의 무명 전사밖에 없기도 했고.

중간에 다른 소환자들과 마주쳤다.

소환자들이 반쯤은 부러워하고, 반쯤은 시기하는 눈으로 시혁을 보았다.

“현자님, 최상층 배정 받으셨다면서요?”

“대단하시네요. 소환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원래 그 쪽 분야 연구를 쭉 하셨나 보죠?”

“하하, 그런 셈입니다.”

최근에 영혼 분야 괴수 질병을 좀 보지 않았나.

시혁은 웃으며 최상층으로 올라갔다.

과연 최상층은 달랐다.

벽이 투명한 수정으로 되어 있어 진리의 탑 주변이 다 보였다. 몇 개의 구획으로 나뉘어져서, 중요한 실험 설비가 모두 놓여 있었다. 마법 생명체들도 여럿 배치되어 실험을 도왔다.

시혁은 잠시 쉬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영혼 구덩이의 저주가 어떤 것인지는 알아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저주를 치료할 방법을 찾아내는 거였다.

어떻게 할까?

가장 먼저 뇌에 직접 마나를 투사하는 방법이 떠올랐다. 물의 마나로 뇌를 보호하면서 불의 마나로 정화하면……

안 되겠구나.

마나 치료를 하다간 뇌에 손상을 입을 가능성이 컸다. 피질의 이랑(gyrus, 대뇌의 주름 사이 불룩한 부분) 하나만 상해도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모른다. 그런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었다.

불이나 쇠의 마나를 뇌에 집어넣는 것은 금물. 마나 치료를 하자면 생명이나 땅, 물의 마나를 써야 했다.

물의 마나로 뇌를 씻어볼까?

생명의 마나로 인체 자체의 저항력을 강화시켜 봐?

마땅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딸랑딸랑.

한참 고민에 빠져 있을 때, 작은 종소리가 들렸다.

진리의 탑에 누군가 새로 배치되었을 때 나는 소리다.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라 네 번이나 연거푸 들렸다. 지식 장로가 고급 병종들을 대거 소환한 듯했다.

시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서 뭉개고 있어봐야 뾰족한 수가 없다. 차라리 연구원들을 더 들여서 머리를 맞대보는 게 낫지 싶었다.

1층으로 내려갔다.

소환자 넷이 막 들어오던 참이었다.

현자가 둘, 마도사가 하나, 마법 기사가 하나.

다른 소환자들이 그들에게 다가갔지만 소용없었다. 네 명 모두, 시혁을 똑바로 응시했다.

“반갑습니다. 최시혁 현자님이시죠?”

“지식 장로께서 현자님 연구실로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시혁은 그들을 반겼다.

“반갑습니다. 최시혁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다른 연구실의 소환자들은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었다.

대애앵!

잠시 후, 이전과는 다른 커다란 종소리가 났다.

영웅이 배치된 것이다.

화려한 옷을 입고, 높은 모자를 쓴 중년 남자가 진리의 탑 안으로 들어왔다. 주위를 둘러보더니 이내 시혁에게 시선을 고정하는데, 특이하게도 눈이 무지갯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무지개 연구자 발티라스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발티라스까지 하여 다섯 명이 시혁에게 합류했다.

다른 소환자들이 시기어린 눈빛을 보냈다.

“지식 장로님도 너무 하시는군.”

“고작 작은 성과 하나 냈다고 바로 최상층을 주시다니……”

“거기다 영웅까지 붙여줘?”

“흥, 어디 얼마나 잘 하는지 두고 보자.”

시혁은 신경 쓰지 않았다.

이런 일은 많이 겪어 봤으니까.

열심히 연구를 하는 게 중요했다. 그래야 전투도 빨리 끝나고, 시혁 본인에게도 도움이 된다.

다섯 소환자와 함께 최상층으로 올라왔다.

발티라스는 당연하다는 듯 연구실 중앙 탁자 앞에 앉았다.

“연구 주제가 어떻게 됩니까? 전 이제 막 소환되어서 자세히 듣진 못했습니다. 언뜻 듣기로는 영혼 진영의 세뇌 관련 문제라고 하던데요.”

“영혼 진영 세뇌 문제요?”

“뭐 그걸 흉내 내서 세뇌하는 방법이라도 만드나요? 좀 약한데……”

시혁은 탁자 위에 손짓을 했다.

탁자 안에 숨겨진 마법 등불이 거기에 반응했다. 시혁의 손끝에서 흘러나온 마나의 자취를 읽어, 원하는 정보를 빛의 형태로 그렸다.

사람의 뇌.

대뇌는 물론, 소뇌와 교, 연수까지 모두 표현되어 있었다. 겉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내부에는 시상과 시상하부 등도 존재할 테고.

또 마법 등불을 조작했다.

이번에는 희뿌연 연기 같은 게 생성되었다. 그것이 뇌 주위를 감쌌다. 특히, 대뇌피질 부위에 진하게 어렸다.

시혁은 그걸 가리키며 말했다.

“혹시 이게 뭔지 아시겠습니까?”

소환자들의 얼굴에 의구심이 떠올랐다.

발티라스만 눈을 가늘게 뜨고 보더니 무릎을 쳤다.

“영혼 구덩이의 세뇌 마법을 형상화한 것 아닙니까? 예전에 한 번 연구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십니까?”

“예. 정신 보호 주문을 쓰고 연구했는데도 연구실 인원 중 절반이 세뇌되는 바람에 고생했던 기억이 납니다. 여기 연구 주제가 영혼 구덩이의 세뇌인가 보죠?”

“예, 맞습니다.”

시혁은 일단 자신이 알아낸 사항을 숨김없이 설명했다.

소환자들은 집중하여 설명을 들었다. 마법 등불을 통해 다른 지식을 참고하거나, 필기를 하는 사람도 보였다.

한 현자가 손을 들었다.

“무명 전사의 머릿속에서, 세 가지 명령을 발견하셨다고요?”

“예. 투쟁, 승급, 복종의 세 단어가 강하게 새겨져 있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영혼 진영만이 아니라 소환자 전부에게 걸린 마법 같습니다.”

“세계 지식에 그런 내용은 없었는데……”

“저도 처음 듣는 내용입니다.”

하긴 세계 지식에 아예 등재되지 않았으니까.

시혁이 마법 등불에 기록을 해도 마찬가지였다. 내용을 쓰고 저장하려고 하면 스르륵 사라져 버렸다. 직접 말로 전한다면 모를까, 기록은 안 되는 듯했다.

발티라스가 설명을 듣다가 말했다.

“일단 우리도 직접 그걸 확인해 보지요. 말로 듣기만 하는 건 한계가 있습니다.”

“위험하지 않을까요? 잘못하면 역으로 세뇌당하기 십상인데요.”

“최시혁 현자님께 방법이 있을 것 같습니다. 저도 몇 번 영혼 진영에 대해 연구를 해봤지만, 이렇게 정교한 모형은 처음 봐요.”

발티라스가 시혁에게 시선을 던졌다.

시혁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게 정신 방어 마법을 받으면 어지간해서는 영혼 약탈자에게 몸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물론 저만 믿고 방심하시면 안 됩니다만.”

“그럼 한 번 확인을 해볼까요?”

“마침 저기 실험체도 있는데, 저놈부터 먼저 보지요. 그 다음 서로 머릿속을 탐색해 보면 되겠습니다.”

“그럽시다.”

미리 오행 순환체를 만들어 놓긴 잘 했다. 안 그랬으면 귀속된 오행 순환체만으로 이들을 지원했어야 할 테니까.

소환자들이 무명 전사에게 달라붙었다. 시간을 들여 무명 전사의 머릿속을 꼼꼼히 살폈다. 몇 번 그렇게 하자, 시혁이 밝힌 내용을 완벽히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사이, 시혁은 다른 소환자들의 머릿속을 검사했다.

이들도 똑같았다.

투쟁, 승급, 복종 세 단어가 화인처럼 박혀 있었다.

소환자들이 납득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소환되었는데도 자연스럽게 싸운 이유가 있었네요.”

“백 명 중 서넛은 자살해서 고향으로 돌아갈 법도 한데, 그렇지 않아서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습니다.”

“신들이 이런 명령을 삽입한 이유가 뭘까요?”

“새로운 신을 탄생시켜서, 아르거스를 복구하기 위해서겠죠. 승천 이적 때마다 보이잖아요? 열다섯 개의 빛 덩이요. 이제 일곱 자리 남았는데, 그게 다 차면 신위 경쟁도 끝이 난데요.”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다.

상태를 파악한 후, 다 함께 머리를 짜내기 시작했다.

난상 토론이 벌어졌다.

“세뇌 마법은 일종의 마나 덩어리인데, 그걸 통째로 뽑아내면 어떻습니까?”

“마나 공백 때문에 안 됩니다. 참 절묘한 게, 뇌의 신경 전달이 마나 덩어리의 영향을 받게 개조되어 버렸어요. 마나를 제거하면 아예 식물인간이 될 겁니다.”

“마법 해제 주문을 쓰면요? 우리 여섯 명이 동시에 마법 해제 주문을 들입다 쓰면, 제 아무리 영혼 구덩이의 세뇌라도 안 풀리고 배기겠습니까?”

시혁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뇌에 충격이 갑니다. 마찬가지에요.”

“이야, 진짜 악랄한 작자들이네요.”

“영혼 진영이 그렇죠, 뭐.”

“마나 덩어리가 재생되지는 않는 것 같은데 조금씩 소멸시켜 보죠. 뇌가 적응할 수 있게 최대한 느린 속도로 하면 될 것 아닙니까.”

“일리가 있네요.”

시혁은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발티라스가 얼굴을 찡그렸다.

“힘들어요. 뇌가 적응하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립니다. 최소한 100일은 걸릴 걸요?”

“그럼 연구를 완료하기도 전에 전투가 끝난다는 얘기네요.”

“그렇지요.”

“저기요. 두개골을 통째로 걷어내서 수술하면 어떨까요? 여기서 몇 분은 생명을 유지시키고, 몇 분은 마법을 해제하고, 몇 분은 그걸 대체할 마나를 주입하는 식으로 하면 좋을 것 같아요.”

섬뜩하지만 그럴듯한 얘기였다.

< 진리의 탑 -2- > 끝

ⓒ 산호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