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리의 탑 -1- >
현재 시혁은 대가 계급에 올라섰다.
예전에 이미라와 함께 전세를 역전시켰던 영향이 컸다. 그 뒤로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아르거스에 방문하기도 했고.
새로 얻은 특기는 다중 속성 강화.
속성 별로 다른 강화 주문을 걸었더니 이게 튀어나온 것이다. 시혁은 지원 영웅으로 성장할 테니, 최고급 특기라 할 만 했다.
특화는 의학 특화를 선택했다. 마법 특화를 선택하면 무력이 강해지겠지만, 지금 이 정도로도 충분했으니까.
[진리의 탑으로 가라.]
소환되자마자 그런 명령이 내려왔다.
예전에는 주로 지식의 전당에서 연구를 했다. 반면 대가가 된 이후에는 진리의 탑에서 연구를 할 때가 많아졌다.
시혁은 공경의 의미로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 다음 바로 뒤에 있는 날개 형상의 탑으로 들어갔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본성의 규모는 아직 작은 편이었다. 각종 건물의 발전 정도도 낮았다. 전투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듯했다.
진리의 탑에 들어오자 그게 더 확실해졌다.
연구실을 주도할 영웅 하나 배치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시혁까지 합쳐서 현자 셋에 마도사 넷, 마법 기사 둘이 연구원의 전부였다.
시혁이 들어오자, 한참 연구에 열중하던 이들이 하나둘 얼굴을 내밀었다.
“오, 현자님이네요?”
“현자님! 이쪽으로 오세요! 저흰 새로운 키메라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최종 병기급 키메라를 만들어서 세상을 휩쓸어 봅시다!”
“흥, 최종 병기급? 우린 최종 병기를 날려버릴 마법을 만들고 있습니다. 핵분열 마법 아시죠? 그걸 쓰려면 반신 정도는 되어야 하는데, 그걸 일반 소환자들끼리만 구현하려고 합니다. 현자님도 우리 연구실로 오시죠! 성공만 하면 뭐든 다 날려버릴 수 있습니다!”
“저런 거창한 계획을 진행하다가 실패하기 십상입니다. 저희랑 같이 무인 포탑 연구를 하시지요. 건설에 마나가 전혀 필요하지 않고, 구동도 간편한 포탑입니다!”
지금 진행 중인 연구는 셋이었다.
초거대 키메라 합성, 핵분열 마법진 구현, 무인 포탑 설계.
시혁은 고개를 저었다.
“전 독자적인 연구를 하려고 합니다. 미리 생각해 둔 게 있어서요.”
소환자들이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요?”
“뭐, 어쩔 수 없죠.”
“연구 잘 하시고, 성공하시길 빕니다.”
소환자들이 자기들 연구실로 쏙 들어갔다.
잠시 기다리자, 지식 장로가 시혁에게 말을 걸었다.
[독자적인 연구가 하고 싶다고?]
살짝 긴장이 되었다.
연구 주제는 일반 소환자가 선정한다. 그러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별로 성과가 없을 것 같으면 반신이 거부하고 다른 연구 주제를 선택하라고 명령할 수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연구를 성공시켰을 때 얻는 마나가 연구 과정 중에 얻는 마나보다 훨씬 많기 때문이다. 주구장창 연구만 해서는 승천 이적을 완성하기 어려웠다.
시혁은 잠깐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예. 영혼 진영 소환자에게 걸린 세뇌에 대해 연구하고 싶습니다. 세뇌를 풀어서, 자유 의지를 갖게 하는 게 제 목표입니다.”
[그건 불가능하다.]
시혁을 소환한 반신, 지식 장로가 단칼에 잘라냈다.
[영혼 진영 소환자에게 걸리는 세뇌는 아르거스의 신들에게 연원한 것이다. 어떤 방법으로도 푸는 게 불가능하다. 지금까지 그런 시도가 없었던 줄 아느냐? 모조리 실패로 돌아갔다. 그 연구를 해봐야 시간 낭비이니, 다른 주제를 선택하도록 해라. 그게 싫다면 기존 연구실에 들어가고.]
신의 힘이라고?
아르거스를 이루는 시스템, 그 자체라는 얘기 아닌가.
정말 불가능한 걸까?
시도도 하지 않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시혁은 조곤조곤 지식 장로를 설득했다.
“힘들 거라는 점은 압니다. 하지만 세뇌를 완전히 풀지는 못해도 다른 진영 수준으로 약화시킬 수는 있지 않을까요? 영혼 진영 소환자에 대한 세뇌는, 영혼 구덩이를 통해 소환되기 때문에 유효한 거니까요. 그 방법을 알아낸다고 해서 영혼 약탈자에게 우위를 점할 수는 없겠지만, 연구 성공 마나는 상당히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가능성이 있다면 시도하겠으나 불가능한 게 문제다. 설령 가능하다 치더라도 그 가능성이 너무 낮다. 진리의 탑에 배치할 수 있는 소환자의 수도 적은데, 그저 연구 행동 마나만 얻는 것으로 만족할 수는 없다.]
“지식 장로님. 반신들은 세계 지식을 폭넓게 열람할 수 있지요? 저에 대해 열람해 보십시오. 전 치료사 때 불사의 역병을 치료했고, 의학자 때 불임의 저주를 해결했습니다. 야만 진영에 끌려갔다가 야만 괴수를 지배하여 그 반신을 박살낸 적도 있지요. 어디 그뿐입니까? 군주 계급 영웅과 함께 판세를 뒤집은 적도 있습니다. 절 그냥 대가 계급 현자로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제 이력을 보시고 다시 한 번 생각해주시기 바랍니다.”
[흠!]
생각해 보면 시혁처럼 수많은 업적을 달성한 소환자가 있을까 싶다.
그러니 2차례나 전직하면서도 고작 1년 만에 영웅 진화를 코앞에 둔 거겠지. 매일 같이 아르거스에 오는 것도 한몫을 했고.
지식 장로가 마지못해 승낙을 했다.
[좋다. 네 이력을 봐서 허락하도록 하마. 완전한 성공은 거두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어느 정도 성과는 내야 한다.]
“감사합니다. 참, 혹시 영혼 진영의 기본 병종이나 세뇌 노예를 생포해 주실 순 없으십니까? 연구를 하려면 최소한 하나는 필요합니다.”
[그 정도야 어렵지 않지.]
시혁에게는 적당한 연구실이 하나 배정되었다.
크지는 않았다.
시혁의 한의원보다 규모가 더 작았다. 실험 도구도 몇 개 없었다. 침대 하나와 책상 하나, 탁자 하나가 놓여 있고 지식 등불과 마나 공급기 등 기본적인 물건 정도만 보였다.
뭔가 실험을 해보려면 공용 실험실로 가야 한다.
어쨌든 좋았다. 영혼 진영의 세뇌는 마나를 통해 이뤄지니, 이 연구실에서도 어지간한 건 다 해볼 수 있으니까.
생포한 무명 전사가 도착했다.
영혼 진영의 기본 병종.
“그으윽! 그르르륵!”
무명 전사가 전신을 뒤틀었다.
시혁의 연구를 돕기 위해,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혼 약탈자와의 연결을 끊었다가 세뇌에 영향이 있으면 안 되지 않겠나.
무명 전사를 잡아온 마검사가 머리를 흔들었다.
“정말 영혼 구덩이의 세뇌를 풀 수가 있겠습니까? 제가 보기엔 힘들 것 같은데요. 이놈들은 반신이 먹지 말라고 하면 먹지도 않는 족속이에요.”
“해봐야죠. 그래도 불수의근까지 조절하지는 못하는 모양이네요.”
“네? 불수의근이요?”
무명 전사는 아까부터 눈을 번뜩이며 둘을 노려보고 있었다. 입을 오물거리는 게 혀를 깨물어 자결이라도 할 작정인가 본데, 재갈이 물린 터라 불가능한 일이었다.
불수의근 조절이 가능하다면 심장을 멈춰 죽게 하면 될 터. 그게 불가능하니 저렇게 입을 오물거리겠지.
시혁은 무명 전사, 정확히 말하면 그 뒤에서 이 상황을 보고 있을 영혼 약탈자에게 말했다.
“저는 지금부터 이 무명 전사의 세뇌를 풀 겁니다. 그런다고 소속이 옮겨오진 않겠지만 자유 의지를 갖게 될 테니 앞으로 귀측 진영을 상대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겠지요.”
무명 전사가 그 말을 듣고 콧방귀를 뀌었다.
영혼 진영의 세뇌는 신들의 힘으로 이루어진다는 게 정설. 다른 진영 병종을 세뇌한 것을 해제하기는 가능해도, 영혼 진영 병종의 세뇌를 풀기란 불가능했다.
그걸 믿고 있는 모양이다.
배를 쑥 내밀며, 한 번 해볼 대로 해보라는 표정까지 지었다.
마검사가 옆에서 투덜댔다.
“이야, 영혼 약탈자는 굉장히 얄밉네요? 소환자 조종에 능숙한 것 같은데, 표정 좀 봐요.”
“고급 병종도 다 소환하는 반신 아닙니까. 경험이 많겠지요. 모르긴 몰라도, 전투에서 승리한 게 수백 번은 넘을 겁니다.”
다 듣고 있나 보다.
무명 전사가 뻐기는 표정을 지었다.
이것도 영혼 진영의 강점 중 하나.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천천히 손을 뻗었다.
빡빡 깎은 머리.
회색 마법진이 머리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모든 영혼 진영 소환자들의 머리에 새겨지는 마법진인데, 가끔 다른 형태의 마법진이 관찰되곤 했다. 그 의미는 아무도 몰랐고.
무명 전사는 해보라는 얼굴로 시혁을 보고 있었다. 눈을 감지도 않고, 시혁을 오만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손이 머리에 닿았다.
마나를 투사하여, 직접 그 안을 살폈다.
혼탁하다.
그 생각부터 먼저 들었다.
나무가 타고 남은 회색 재와 같은 혼탁한 마나가, 무명 전사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흥.]
이질적인 목소리가 들렸다.
[세뇌를 풀겠다고? 어디 잘 해보려무나. 지금껏 수많은 진리 진영 소환자들이 시도했었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간 건 아느냐? 지금 널 소환한 지식 장로도 그 중 하나다. 진리의 탑을 무너뜨리며, 네 심장을 꺼내 축제를 벌이도록 하겠다.]
영혼 약탈자의 속삭임.
무시했다.
무명 전사의 뇌 안을 더듬는데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탁한 마나라 몇 가지 속성이 섞여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렇지는 않았다.
딱 한 가지 종류의 마나만 분포했다. 어떤 속성이라고 특징짓기 힘든, 묘한 느낌의 마나였다.
마나?
시혁은 자신이 한 가지를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 이건 시혁이 흔히 다루던 속성 마나가 아니다.
이미 마법으로 가공이 끝난 상태였다.
다름 아닌 세뇌 마법.
마나로 탐색하는 게 아닌, 통찰 마법을 시전하자 비로소 그 정체가 보였다.
[복종하라.]
그 명령 하나가 무명 전사의 뇌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게 영혼 구덩이가 건 세뇌의 정체였다.
다만 이상한 점이 있다.
뇌 전체에 작용한다면 당연히 불수의 운동도 지배를 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영혼 진영 반신들은 소환자들의 불수의 운동까지는 지배를 못 하지 않나.
‘자율신경계에는 영향을 못 미친다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더 자세히 알아봐야겠다.
“으음……”
하지만 그 전에, 시혁은 잠깐 물러났다.
무명 전사의 뇌를 들여다보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그 안에 가득한 회색 마나가 시혁에게도 마수를 뻗기 때문이었다.
이대로 계속 진행하다간 시혁이 회색 마나에 먹히고 만다. 저 멀리서 이쪽을 관찰하고 있을 영혼 약탈자의 손에 붙잡혀, 영혼 진영의 꼭두각시가 되겠지.
궁리 끝에, 스스로의 머리에 귀속된 오행 순환체를 집어넣었다.
속성마다 강화 주문을 부여했다.
영혼 치유, 혼백 등불, 조화의 정신, 두뇌의 벽, 명경지수.
모두 정신을 보호하는 마법이었다.
이 상태라면 더 자세히 살펴봐도 괜찮겠지.
스스로를 믿으며 통찰 마법을 사용했다. 동시에 마나를 주입하여 상태를 살폈다. 마법적인 시각과 촉각을 동시에 사용한다고 할까.
두개골 바로 밑 대뇌부터 측뇌실 사이 기저핵과 시상을 훑어 내렸다. 그 아래 중뇌를 거쳐 교뇌와 연수까지 확인하자, 비로소 확신할 수 있었다.
영혼 구덩이의 세뇌는 대뇌에만 영향을 미친다.
하다못해 시상과 시상하부에도 발을 들이지 못했다. 그러니 자율신경계를 지배할 수는 없는 것이다.
자율신경계의 중추는 시상하부에 있으니까. 호흡이나 섭식 조절을 따지면 얘기가 달라지지만.
마나로 더듬다가, 한 가지를 더 알아차렸다.
회색 마나는 분명 뇌 안을 가득 채우고 있다. 하지만 그 집중도를 살피니 두개골과 맞닿은 부분이 가장 농도가 진했다. 경막과 지주막, 연막 아래 대뇌피질 부분이었다.
드디어 이해가 갔다.
대뇌피질에 작용하는 게 진짜였다. 실질 부분에 있는 마나는 헛것이었다. 어느 정도 작용을 하지만, 그보다는 피질 부위의 마나를 지원하는 역할이 컸다.
이것만 해결하면 된다.
정체를 완벽히 알아냈으니 이제 그걸 치료할 방법만 찾으면 되지 않겠나.
하지만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더 들어갔다.
아까 대뇌를 살폈을 때, 이질적인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피질 부위.
구불구불한 그 부위에, 뭔가가 은밀하게 숨겨져 있었다.
통찰 마법을 최대한으로 발휘하고, 마나도 더 집어넣었다. 두 진단 방법을 모두 동원하여 무명 전사의 대뇌 피질을 샅샅이 살폈다.
결국 무형의 어떤 것을 발견하는데 성공했다.
법칙이다.
불사의 역병이나, 불임의 저주와 비슷하다.
그 두 가지보다 훨씬 정교했다. 보다 더 은밀하고, 강력한 힘을 숨긴 채 잠복해 있었다.
세 가지.
[투쟁하라.]
[승급하라.]
[복종하라.]
소환자들의 행동을 결정짓는 단어였다.
< 진리의 탑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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