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 세계의 한의사-87화 (87/250)

< 천왕봉 -2- >

시혁은 잠시 생각하다가 반문했다.

[혹시 괴수의 소행은 아닙니까?]

[네. 탐지 계열 이능력자들이 살펴봤는데 괴수 때문은 아니래요. 에테르에 노출되어서 그런 거라는데, 정확한 원인은 모르겠대요.]

그런 괴수 질병도 있나?

금시초문이다.

시혁은 아르거스에서의 지식을 떠올렸다.

한 가지 짐작가는 것이 있었다.

영혼 진영과 연관이 되면 그럴 수도 있겠다. 영혼 진영의 병종들은 반신에게 세뇌 당하여 로봇처럼 시키는 일만 하곤 했으니까.

고급 병종인 영 인도자나 상급 병종 영혼술사라도 출현해서 테러를 한 걸까?

그랬으면 이능력자들이 진작 찾아냈을 텐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직접 지리산에 가봐야겠습니다. 환자들도 봐야 하고요. 전화만으로는 어렵네요.]

[그래요? 그럼 헬기 보낼까요?]

[그럼 좋지요. 상황이 많이 급합니까?]

[최대한 빨리 와주셨으면 좋겠어요.]

[급한 환자들만 보고 가겠습니다. 한 30분 정도 걸릴 겁니다.]

일은 순식간에 처리되었다.

간호사들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최대한 빠르게 환자들을 본 후, 대한이능협회로 이동했다.

“원장님,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혹시 괴수 나오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치세요!”

“조심하셔야 돼요!”

“걱정 마시고, 저 없는 동안 한의원을 부탁합니다.”

헬기에 탔다.

지리산까지 자동차를 타고 가면 시간이 좀 걸린다. 하지만 헬기를 타고 가니 금방이었다. 겨우 30분도 되지 않아 지리산 천왕봉 상공에 도착했다.

멀리서도 확연히 보였다.

천왕봉이 탁한 회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불길한 그 색채가, 시혁의 눈에 아프게 박혔다.

헬기는 천왕봉에서 멀찍이 떨어진 봉우리에 착륙했다. 그곳에 이능력자들의 주둔지가 있다고 했다. 지나치게 가까우면

에테르의 영향을 받으니 이곳에 만든 것이다.

190의 큰 키에, 덩치가 커서 곰처럼 보이는 사내가 마중을 나왔다.

얼굴에 수염이 덥수룩했다.

호랑이를 보는 듯한 부리부리한 눈이 인상적이었다.

생긴 건 산적 같은데 피부는 아기처럼 뽀얗다. 그런가 하면 바다처럼 웅장한 기세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내가 호의적인 미소를 짓더니,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대한이능협회 회장 손문철입니다.”

TV에서나 보던 G급 이능력자다.

시혁은 정중하게 악수를 했다.

“광주광역시에서 한의원을 운영 중인 발현자, 최시혁이라고 합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영광은요. 저번에 좀비 사태 때와 몽마 사건 때 일은 잘 들었습니다. 진작 찾아갔어야 했는데, 바빠서 그렇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일단 환자를 볼 수 있을까요? 혹시라도 치료 시간을 놓치면 안 되지 않습니까.”

“어이쿠, 그러시죠. 저도 그걸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주둔지는 원래 제법 큰 산장이었다. 그걸 통째로 빌리고, 가건물 몇 채를 세워 사용하고 있었다.

산장의 한 객실에 환자들을 모아 놓았다. 정연대학교의 김진태 과장이 거기 있으면서 환자들을 보살폈다. 화장실을 가는 것도 누군가 지시해줘야 하니, 의사이자 치유 계열 이능력자인 김진태가 제격이었다.

“과장님! 오랜만입니다!”

“아, 최 원장님! 바쁘실 텐데 어려운 걸음 하셨네요!”

시혁은 방에 들어가자마자 인사를 했다.

김진태도 반색하며 시혁을 맞이했다. 전혀 알지도 못하는 병이고 이능도 통하지 않는 참이라 난감하던 참이니, 시혁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옆에 있던 홍천대학교 이능과장과도 통성명을 했다. 그 후, 환자들을 천천히 살폈다.

남자 둘에 여자 둘이었다.

이능력자답게 하나같이 미남미녀.

눈에 초점이 없었다. 얼굴도 가면을 쓴 것처럼 무표정했다.

간단히 지시를 내려 보았더니 무조건적으로 따라했다. 설령 자살하라고 해도 따를 기세였다.

손문철을 따라온 이미라가 걱정하는 표정을 지었다.

“원장님, 나을 수 있겠죠?”

“일단 무슨 병인 줄 알아봐야겠습니다.”

환자들을 직접 보니 명확해졌다.

영혼 진영과 얽힌 것이 맞다.

단, 영혼 계열 병종들이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다름 아닌 영혼 진영의 일반 소환자들이 저랬다.

아르거스의 열다섯 진영 중에서도 영혼 진영은 꽤 특이하다. 주된 종족이 없는 것은 물론, 아무 종족이나 불러다가 세뇌해서 써먹었다. 특히 소환되어 영혼 구덩이를 통과할 때 세뇌가 되는데, 이렇게 세뇌가 되면 반신의 명령이라면 무엇이든지 따르곤 했다.

그 장악력은 다른 진영의 반신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다른 진영은 소환자들이 자기 의지로 반신의 명령을 일부 뒤트는 게 가능하지만, 영혼 진영은 불가능했다. 소환자들의 개성을 죽이는 대신, 전투를 완벽히 반신의 통제 아래 두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게 어떻게 지구에 나타난 건지 모르겠다.

‘혹시……’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급히 고개를 돌려 손문철을 보았다.

“천왕봉에 가봐야겠습니다.”

“천왕봉에요?”

“예. 거길 가봐야 원인을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요?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하지요. 아, 시혁 씨는 이능력자가 아니니 저희가 이능 보호 반지를 제공하겠습니다.”

이능 보호 반지를 차고, 헬기에 타 천왕봉으로 향했다.

천왕봉에는 헬리패드가 없다. 따라서 지상에 근접하여 천왕봉을 살피는 것으로 끝을 냈다.

시혁은 힘껏 공기를 들이마셨다.

공기에 포함된 천왕봉의 에테르가 시혁의 가슴 깊이 스며들었다.

에테르를 느끼는 감각은 없지만, 워낙 농도가 짙다 보니 그 특질을 느낄 수가 있었다.

탁하면서도 음험한 성질의 에테르.

시혁은 자신도 모르게 혀를 찼다.

짐작이 맞았다.

검은 천체를 통해 쏟아져 나온 에테르가, 천왕봉을 영혼 구덩이로 변형시킨 게 분명했다.

그래서 이능력자들이 저 꼴이 되었다.

영혼 진영 반신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할까. 그랬으면 이능력자 넷이 졸지에 그 반신의 노예가 됐을 것이다. 지금은 천왕봉에는 반신이 없으니 누구의 명령이든 듣는 듯했다.

이걸 어떻게 치료하지?

아니, 애초에 영혼 진영에게 세뇌 당한 소환자를 제정신으로 돌리는 방법이 존재하던가?

시혁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옆에 앉은 이미라가 시혁을 살폈다.

“힘들까요?”

“일단 돌아가죠. 원인은 알았습니다.”

헬기가 기수를 돌렸다.

주둔지로 돌아온 후, 시혁은 이능력자들 앞에서 선언했다.

“변이된 천왕봉 자체가 원인입니다. 거기서 나온 에테르가 문제에요. 탐지 계열 이능력자들도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했지요? 더 피해가 커지기 전에 천왕봉을 부숴야 합니다.”

그 말에 이능력자들이 웅성거렸다.

손문철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반드시 부숴야 합니까? 정화하거나, 상황이 나아질 때까지 기다리면 안 될까요?”

“소용없습니다. 정화가 불가능해요. 게다가 저 변이된 천왕봉 자체가 에테르를 생산하고 있을 테니, 기다려도 상황이 나빠지면 나빠졌지 좋아지진 않을 겁니다. 일정 반경 이상에는 영향을 못 미치는 것 같지만 그것도 장담할 수는 없고요.”

손문철은 고심어린 표정을 지었다.

천왕봉은 지리산의 최고봉이다. 그걸 박살내면 환경 단체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뻔했다.

시혁은 손문철을 보며 경고했다.

“나중에 부수더라도 이능력자들을 더 접근시켜서는 안 됩니다. 탐지 계열 이능력자 분들이라면 천왕봉의 영향권을 알아낼 수 있으니까, 한 번 살펴보세요. 최소한 그 영역은 피해야 돼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알겠습니다. 그렇게 조치하겠습니다.”

“문제는 이미 병에 걸린 네 분인데……”

지금 당장은 시혁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고민하다가 본인의 한의원에 입원시킬 것을 권유했다. 오늘 밤에도 아르거스에 갈 테니, 거기서 치료 방법을 찾아보려는 의도였다.

손문철을 비롯한 이능력자들도 수락했다.

그들이 아는 시혁의 능력은 꿈을 통해 괴수 질병의 정보를 알아내는 것. 입원하고 치료하면 나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헬기를 타고 한의원으로 돌아갔다.

병원으로 돌아가면서, 병동 간호사들에게 전화를 했다.

괴수 질병 환자 넷이 가는데, 혹시 통째로 빈 다인실이 없느냐는 것이다.

간호사가 난색을 표했다.

[원장님, 다인실은 빈 거 없어요. 아니, 병동 자체가 꽉 찼는 걸요? 오전에 민병호 님 퇴원하시고 남은 한 자리가 다에요.]

[난감하네요. 꼭 입원해야 하는데……]

방법이 없었다.

없는 입원실을 만들어 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렇다고 다른 환자들을 쫓아낼 수도 없고.

시혁은 겨우 방법을 짜냈다.

왕진을 하기로 한 것이다.

의료법 상 의료인은 개설한 의료기관 내에서 의료업을 해야 한다. 왕진은 특수한 몇몇 경우에만 가능하다.

이번 경우도 그에 해당했다. 대한이능협회의 공식적인 요청에 따라 왕진을 간 거니까.

“지부에 남는 방 몇 개 있죠?”

광주 지부장이라는 사람에게 물었다.

지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있지요. 부족하면 근처 빌딩을 빌리면 됩니다. 거길 쓰시겠습니까?”

“아무래도 그렇게 해야겠습니다. 제 한의원에 입원실이 없다고 하네요.”

“알겠습니다. 지부에 연락을 하겠습니다.”

지부 건물에 임시로 입원실을 만들었다.

꼭대기 층에, 엘리베이터에서 먼 쪽이었다. 최대한 다른 사람들과 접촉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주둔지에서 계속 데리고 있자는 의견도 나왔다. 하지만 시혁도 할 일이 있는데 주둔지에 놔두는 것은 좀 그랬다. 좀비 사태처럼 시혁이 24시간 상주할 수는 없지 않겠나.

이미라는 주둔지에 남고, 김진태가 동행했다. 한세훈도 김진태를 돕겠다며 따라왔다.

“강찬 씨랑 신아영 님은 주둔지에 계신가 보죠?”

“아, 원장님 오셨을 때 순찰 나갔어요. 그래서 못 보셨을 거예요.”

“순찰이라…… 별 일 없어야 할 텐데요.”

어째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설마 그 둘도 꼭두각시가 되어 나타나진 않겠지?

한세훈이 별 일 있겠냐며 웃었다.

“걱정 마세요. 둘은 어디에 던져 놔도 살아나올 걸요? 우리 공격대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찬이 형이랑 아영이는 진짜 실력파에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입원실에 네 명 모두 자리를 잡았다.

본인들은 그런지 어쩐지도 몰랐다. 멍한 눈으로 허공만 바로보고 있었다.

김진태가 시혁에게 질문했다.

“원장님, 혹시 주의해야 할 것은 없습니까? 이런 환자는 처음 봐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생리 현상만 잘 조절해주세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알겠습니다. 그 정도야 어렵지 않지요.”

“아, 혹시 모르니까 영혼 계열 이능력자와는 마주치지 않게 해주세요.”

“영혼 계열 이능력자요?”

“예. 어쩌면 그들에게 명령권이 고정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치료하기가 힘들어져요.”

“그러고 보니 주둔지에서는 영혼 계열 이능력자가 없었네요. 하긴 워낙 희귀한 계열이니…… 그렇게 하겠습니다.”

시혁은 이능력자들이 보안 조치를 취하는 것을 보고 물러나왔다.

입원실에 출입할 수 있는 것은 지부장과 몇몇 고위 이능력자, 그리고 시혁과 김진태, 한세훈 등 의료진뿐이다. 이렇게까지 했으니 별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의원으로 돌아왔다.

마침 퇴근 시간이었다. 간호사들이 뒷정리를 하다가 시혁을 맞이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질문을 했지만, 시혁은 기밀사항이라고 고개를 저었다.

원장실 의자에 몸을 묻었다.

요즘 들어 영혼 관련 분야와 자주 얽힌다는 생각이 들었다.

몽마부터 소누스 콜라보르, 그리고 천왕봉까지.

그렇다면 오늘 아르거스에서 뭘 해야 할지는 이미 결정된 셈이다.

영혼 진영 반신을 상대해야 한다.

직접 전투에 나서는 게 아니라, 연구실에서.

< 천왕봉 -2- > 끝

ⓒ 산호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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