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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수 세계의 한의사-86화 (86/250)

< 천왕봉 -1- >

2017년이 되었다.

새해가 밝았지만, 시혁은 도무지 실감하기 힘들었다.

똑같은 나날이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시혁의 오피스텔과 한의원은 도보로 5분 거리다. 아침에 일어나는 대로 출근해서, 하루 종일 환자를 보다가 퇴근하면 힘이 쪽 빠졌다. 괴수 질병 환자가 많으면 밤늦게까지 약을 만들어야 할 때도 있었다.

그나마 최근에 발현자 1명을 고용해서 나아졌다. 지구에서는 별 쓸모가 없는 보존 능력을 가진 발현자였다. 그 능력을 활용하는 것도 아닌데, 상당히 많은 연봉을 줘야 했다.

어쨌든 1월 1일, 새해다.

시혁은 오랜만에 부모님 집에 와 있었다.

“면허증 나왔다고?”

“네. 며칠 전에 나왔어요.”

“어디 한 번 보자.”

최근, 시혁도 드디어 면허증을 땄다.

2종 자동.

굉장히 쉬웠다. 이 정도로 쉬워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기능 시험이라고 해봐야 시동 걸고 50미터 주행하다가 좌회전 한 번 하는 게 전부였다. 중간에 급정거야 식은 죽 먹기였고.

도로 주행을 할 때는 긴장을 했지만 결국 한 번에 통과했다. 시혁은 광주 토박이라, 인근 도로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얘기를 하자 아버지가 혀를 끌끌 찼다.

“그럼 S자 주행이나 T자 주행은 해보지도 않은 거냐?”

“기능 시간에 강사가 가보게 하더라고요. 이거 해보는 게 좋다고요. 그런데 결국 시험에는 해당이 안 됐어요.”

“진짜 문제다, 문제. 운전면허를 그렇게 쉽게 딸 수 있으면 안 되는데. 그러니 교통사고가 날이 갈수록 늘어나는 거 아니냐.”

“맞아요. 좀 난이도를 높여야겠던데요.”

“그래서 차는 언제 살 거냐?”

“글쎄요. 고민 중이에요. 지금 당장은 필요가 없어서요.”

“처음부터 너무 좋은 차 사지 말고 국산 적당한 놈으로 사라. 중고차도 좋고. 그래야 마음대로 긁고 다니지.”

“알았어요.”

돈은 많다.

제약회사와의 계약을 마치고, 계약금이 입금되었으니까.

지금 당장 한방병원을 차려도 좋을 정도였다.

더구나 한의원을 경영하면서 새로운 치료법을 몇 개 더 개발했다. 그것도 계약을 진행 중이니, 화수분을 얻은 셈이나 다름없었다.

부모님과 덕담을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평화로운 하루가 지날 줄 알았다.

오산이었다.

정오 무렵, 별안간 하늘이 시꺼멓게 변했다.

식사를 하다 말고 깜짝 놀랐다. 얼른 창가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았다.

“저, 저거……”

어머니가 손가락질을 했다.

시혁은 눈을 가늘게 떴다.

언제나 하늘 높이 떠 있던 검은 천체가 눈에 띄게 확장되어 있었다.

검은 어둠이 울컥울컥 풀려나왔다.

마치 처음 검은 천체가 지구에 나타나던 날을 보는 듯했다.

천만다행으로, 검은 천체는 곧 안정을 되찾았다. 크기가 줄어들어 평상시 그러하듯 작은 점처럼 변했다.

아버지가 시혁을 돌아보았다.

“저게 대체 뭐냐?”

시혁이라고 알 턱이 없다.

“글쎄요. 그러고 보니 2014년에도 이런 일이 있었는데……”

“2014년? 삼두룡이 나타났던 해잖니? 설마 또 삼두룡이 나타나는 걸까?”

“모르겠어요. 두고 봐야 알죠.”

2014년에도 이런 현상이 벌어진 적이 있었다.

검은 천체에서 풀려나온 어둠이 동해에 떨어졌고, 거대한 괴수가 울산에 상륙했지.

시혁은 방금 본 장면을 머릿속으로 복기했다.

어둠은 한 방향으로 쏟아졌다.

시혁이 보는 시점에서 왼쪽이니 동쪽 방향이었다. 시혁의 집은 남향 건물이니까.

거리가 꽤 멀어보였다.

광주광역시 동쪽에 뭐가 있더라?

88고속도로를 통해 대구와 연결되는데, 그 사이에 지리산이 있다.

지리산.

한반도에서 비무장 지대와 개마고원에 이어 가장 많이 괴수가 출몰하는 곳이다.

예전에 이미라에게 들은 이야기가 생각났다.

전라도의 괴수 출현이 눈에 띄게 줄었다고 했지. 원래 지리산과 다도해에 많이 출현하는데, 확연히 수가 줄어 예의주시하고 있다던가.

‘괜찮겠지?’

일이 터지면 협회장이 직접 올 거라고 했다.

G급 강화 계열 이능력자 손문철.

2014년에 나타난 삼두룡을 단신으로 사냥하여 명성을 얻은 인물이었다.

지구의 삼두룡은 곧 아르거스의 야만 괴수.

비록 삼두룡이 야만 괴수보다 턱없이 약하기는 하지만, 단신으로 잡을 정도면 그 무력이 어느 정도일지 알 만 했다.

시혁은 마음을 놓기로 했다.

대한민국의 이능력자가 모조리 동원될 텐데 걱정할 필요 있겠나. 한의원 업무만 해도 바빠 죽겠는데, 여기에 정신을 쏟는 게 좋을 것이다.

곧 뉴스 속보가 나왔다.

벌써 지리산으로 기자들이 파견된 모양이다. 방송국 헬기들이 날아다니고, 등산객들 인터뷰가 방송으로 나왔다.

지금도 50대 초반 아주머니가 TV 화면 속에서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아, 글쎄 산 잘 타고 있는데 세상이 전부 어두워지더라니까? 깜짝 놀라서 멈췄는데, 검은 번개 같은 게 치지 뭡니까?]

[검은 번개라고요?]

[그렇다니까요! 어디쯤이더라? 그렇지, 천왕봉, 천왕봉을 검은 번개가 때리는 것을 똑똑히 봤어요. 내가 그때 막 천왕봉에서 내려오던 참이니까, 천왕봉이 분명해요.]

곧이어 화면에 천왕봉 정상을 찍은 장면이 나왔다.

시혁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천왕봉 전체가 탁한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색깔만 변한 게 아니라, 지표면 자체가 불투명한 유리 공예처럼 묘한 질감으로 번들거렸다.

괴수는 어디 숨었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저 괴상하게 변한 천왕봉만 요요로운 빛을 뿜었다.

그 색채를 보니 걱정이 되었다. 아르거스에서 몇 번 봤던 모양이었기 때문이다.

다름 아닌 영혼 구덩이.

영혼 진영 반신들이 깃드는 건물이다.

생김새가 좀 다르긴 한데 꼭 그것을 연상시켰다. 색깔도 그렇고 질감도 그랬다.

‘혹시 영혼 군단이 온 건 아니겠지?’

영혼 진영의 최종 병기.

다른 진영과는 좀 다르다. 따로 소환되는 게 아니라, 영혼 진영의 소환자 중 특정 특기를 가진 인물을 강화하여 만들어진다.

이들은 서로의 힘을 공유했다. 영혼이 연결되어 상대의 상황을 자기가 겪는 것처럼 느낄 수 있었다. 파괴력은 다른 진영의 최종 병기보다 떨어질지 몰라도, 그 유용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나마 이능력자들이 속속 모여드는 것을 보니 안심이 되었다. 31사단 충장부대와 39사단 충무부대도 급히 지리산으로 모여 민간인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으면 그때 도움을 주면 되겠지.

새해 연휴가 끝나고, 한의원으로 출근했다.

“원장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병동에서 인계 중이던 간호사들이 합창하듯 인사했다.

시혁도 웃으며 목례를 했다.

“네, 선생님들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아, 저 따라오실 필요 없어요. 일 보세요.”

원장 회진이라고 간호사들이 따라오려고 하기에 그러지 말라고 손을 저었다.

민수진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세 간호사끼리 인계를 하라고 눈짓을 보낸 후, 종종걸음으로 시혁을 따라왔다. 시혁도 거기까진 막지 않았다.

“그 동안 별 일 없었죠?”

“네. 환자들 대부분 호전되셨어요. 참, 605호 김필순 님이랑 609호 민병호 님이 퇴원 원하세요.”

“김필순 님은 그렇다 치고 민병호 님은 좀 이른 것 같은데…… 일단 제가 한 번 보죠.”

시혁의 한의원에는 8개의 병실이 있다.

그것들을 한 바퀴 쭉 돌았다.

환자들의 상태는 괜찮았다. 대부분 호전되어 있었다. 몇 명은 그제 봤을 때나 지금이나 똑같았지만, 그건 시혁이 예측했던 사항이었고.

604호는 없고, 마지막 병실인 609호에 들어갔을 때 좀 시끄러워졌다.

민병호가 퇴원시켜달라고 고집을 부렸던 것이다.

“여보, 그러지 말고 치료 받고 가자. 응?”

보호자가 설득했지만 소용없었다.

한사코 고집을 부리니, 시혁도 보호자도 꺾이고 말았다.

시혁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외래 치료하는 것으로 하지요. 어차피 약이 가장 중요하니까, 집에서 쉬시면서 약이라도 잘 챙겨 드세요.”

“그래도 될까요?”

“솔직히 좀 이르긴 합니다만, 응급 상황이 잘 발생하지 않는 병이니 괜찮을 겁니다. 치료 기간은 늘어나긴 해도 환자분이 이렇게 원하시니 어쩔 수 없지요. 혹시 무슨 일 생기면 외래나 병동으로 전화하세요.”

“감사합니다. 애기 아빠가 병원을 너무 싫어해서요. 외래는 꼭 데리고 올게요.”

“네, 그렇게 하세요. 최소한 1주에 1번은 제가 상태를 확인해야 합니다.”

회진이 끝나니 8시 반이었다.

간호사 스테이션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야간 근무 간호사들은 이미 퇴근했고, 주간 근무 간호사 둘만 남아 있었다.

민수진이 간호사실에 들어가더니 간단한 샌드위치를 몇 개 들고 나왔다.

“원장님, 아침 안 드셨죠? 이거라도 좀 드세요.”

“어, 괜찮아요. 먹고 나왔어요.”

“그래봐야 토스트 몇 쪽이 다잖아요. 얼른 드세요. 너무 많아서 버려야 될지도 몰라요.”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시혁도 더 사양하지 않고 샌드위치를 집어 들었다.

둘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김유하가 입을 열었다.

“참, 원장님. 뉴스 보셨어요?”

“무슨 뉴스요?”

“천왕봉이요. 어제 난리 났잖아요.”

“아, 저도 봤습니다. 괴수가 나타난 건지는 모르겠는데, 천왕봉이 이상하게 변했던데요.”

“원장님 혹시 협회에서 들은 것 없으세요? 원장님은 유명한 발현자니까, 거기서 좀 챙겨주지 싶은데요.”

“어휴, 그런 거 없어요. 필요해지면 연락하겠죠.”

담소를 나누다가 외래로 내려왔다.

새로 나오는 뉴스를 보니 별 일 없는 것 같았다.

군대가 지리산을 에워싸고, 이능력자들이 수색에 들어갔는데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했다. 다만 강력한 에테르가 검출되고 있어서 지리산 전체 통행이 통제되었다나.

에테르에 노출되면 변이될 위험이 있다. 지구에 나타나는 괴수들 대부분이 기존 동식물이 변이되어 나타난 거였다. 그리고 변이는 인간이라고 해서 피해갈 수가 없다.

일반 군인들은 경계만 하고 이능력자들만 수색에 참여하는 이유가 있었다. 이능력자들은 에테르에 의한 변이에 면역이라고 하니까.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이 지나갔다.

지리산에서는 아무런 소식도 들리지 않았다.

여전히 통행은 통제되어 있고, 이능력자들은 괴수의 출현을 경계하고 있었다. G급 이능력자인 협회장까지 내려왔다는 게, 아무래도 별 일은 없지 싶었다.

자연히 언론도 슬슬 관심을 껐다.

일요일에는 세상이 멸망할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는데, 이젠 뉴스에 겨우 얼굴을 비추는 정도였다.

시혁도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러던 차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원장님, 오랜만이에요.]

[아, 미라 씨?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습니까?]

시혁은 반갑게 전화를 받았다.

이미라가 투정을 부리듯 말했다.

[원장님은 전화도 한 번 없고, 저 안 보고 싶었어요?]

[네? 하하하, 워낙 바빠서요.]

[하긴 저도 들었어요. 원장님 한의원이 엄청 잘 된다면서요?]

[네, 그래서 좀 바빠요. 퇴근하면 쓰러져서 잠들기 일쑤에요. 미라 씨는 어떠셨어요?]

[사실 저도 많이 바빴어요. 요즘 한가해져서 휴가 갈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런 일이 터졌네요.]

[그래도 별 일 없지 않습니까? 뉴스에서 보니까 괴수도 안 나타나고, 출입도 잘 통제되는 것 같던데요.]

[음……]

이미라가 묘한 소리를 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나 보다.

무슨 일일까 싶어 잠자코 기다렸다.

한참이 지난 뒤에야 이미라가 입을 열었다.

[사실 원장님께 여쭙고 싶은 게 있어요.]

[뭡니까?]

[천왕봉에 접근한 환자 중에, 갑자기 이상하게 변하는 사람들이 나오는데 이능 치료를 해도 소용이 없더라고요. 정연대학교 병원 이능과장님이랑 홍천대학교 병원 이능과장님도 오셨는데, 처음 보는 증상이라고 잘 모르겠다고 하셨어요.]

[김진태 과장님도요? 음, 상황이 심각하네요. 이상하게 변한다는 게 어떻게 된다는 얘기죠?]

[어, 뭐라고 해야 되지…… 사람이 꼭 로봇처럼 변해요.]

[로봇이라뇨?]

[자기 혼자 뭘 하려고 하지 않아요. 그냥 그 자리에 서 있어요. 누가 밥 먹으라고 해야 밥을 먹고, 화장실도 가라고 해야 가요. 그런 사람이 벌써 4명이나 되어서, 혹시 새로운 괴수 질병이 아닌지 의심하고 있어요.]

< 천왕봉 -1- > 끝

ⓒ 산호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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