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멸 경쟁 >
시혁도, 이미라도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어쩌죠? 시간이 더 필요한데.”
현재 인세 군주가 보유한 영웅은 숲 지킴이 아리오즈와 삼원 마법사 팰컨.
각각 원거리 저격과 광역 마법에 특화되어 있었다. 그런 만큼 둘이 다 붙어도 이미라 하나를 당해내기 어렵다. 반면 화신과 함께한다면 요새건 본성이건 모조리 밀어버릴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
막막하기 짝이 없었다.
이미라가 패배를 각오했는지 평온한 얼굴로 시혁을 쳐다보았다.
“여기까지네요. 요 며칠 원장님이랑 함께 해서 즐거웠어요. 앞으로 또 언제 뵐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벌써 포기하시면 안 됩니다. 방법이 있어요.”
“무슨 방법이요?”
이미라가 불신에 찬 눈으로 시혁을 보았다.
“냉정하게 따져 봅시다. 미라 씨, 동일한 조건이라면 아리오즈와 팰컨을 이대 일로도 이길 수 있다고 했죠?”
“그야 아리오즈와 팰컨 둘 다 발이 느리니까요. 아군의 보호를 받아가며 싸우는 영웅들이지, 독자적인 작전을 치르지는 못 해요. 일격에 절 어쩔 수도 없고……”
이미라는 중급 병종에서 시작하여 두 번 전직 끝에 고급 병종이 되었다. 그 후 영웅으로 진화했고, 지금은 군주 계급이 되었으니 당연히 다른 영웅들과 차이가 있었다.
아리오즈나 팰컨 모두 상급 병종 출신이고, 계급도 능란으로 2계급이나 아래였으니까.
시혁은 한 가지를 지적했다.
“인세 군주가 어떻게 할까요? 영웅들을 본성에 놔둘까요, 아니면 최종 병기에게 딸려 보낼까요?”
“솔직히 모르겠어요.”
“그렇죠? 확률은 반반이에요. 최종 병기를 지원하게 할 수도 있고, 본성을 지키게 할 수도 있죠. 우리는 그 틈을 노려야 합니다.”
“설마 우리 둘이서 인세 군주의 본성을 공격하자는 말씀은 아니죠?”
“바로 그겁니다.”
“네? 농담이시죠?”
이미라가 눈을 부릅떴다.
두 개의 마나 집중점을 공략하는 동안 레벨이 올라 50레젤에 도달한 상태다. 아무리 그래도 본성을 직접 공격하자니?
너무 무리하는 것 같았다.
시혁은 씩 웃었다.
화신은 굉장히 빠른 시간에 소환되었다. 인세 군주가 무리를 했다는 얘기다. 자연히 화신을 보조할 군대가 부실할 수밖에 없었다. 본성의 시설들도 마찬가지고.
“화신도, 영웅도 없는 인세 군주의 본성이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습니다. 기껏해야 고급 병종 수십으로 된 방어 부대가 남아 있을 텐데, 그 정도로는 미라 씨를 막을 수가 없어요.”
그 점을 강조하자, 이미라는 마뜩치 않아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대체 뭘 보고 원장님 제안을 받아들였는지 모르겠네요. 좋아요. 해 봐요. 까짓 거 한 번 죽어도 그만인데요. 요새 두 개를 둘이서 끝장냈으니까, 몇 번만 아르거스에 더 오면 승급할 거예요.”
“걱정 마세요. 장담컨대, 미라 씨는 다음 방문 때 초월 계급 영웅이 되어 있을 겁니다.”
“호호, 알았어요. 믿을게요.”
마법 양탄자를 타고 날아올랐다.
별자리 스승과는 충분히 이야기를 나눈 뒤였다. 정면대결은 필패라는 시혁의 의견에 별자리 스승도 동의했다. 항상 시혁을 주시하다가 신호를 보내면 소환 이적으로 본성에 불러오기로 했다.
화신이 쿵쾅대며 별자리 스승의 진영으로 다가왔다. 두 영웅도 그 뒤를 따르고, 그간 소환한 병력들도 진군했다.
그 덕에 본성이 빈집이 되었다.
그렇다고 완전히 비워둔 것은 아니다.
기본적인 방어 시설과 방어 병력은 있었다. 1천 규모의 군대 정도는 충분히 막아내는 게 가능했다.
하지만 그게 이미라라면?
50레벨에, 광폭화의 도움을 받아 훨씬 더 강한 힘을 내는 상태였다. 이 정도 방어 시설이라면 돌파하는 게 가능했다.
“으어어어!”
화신이 길게 고함을 지르는 게 들렸다.
쓸데없이 마나 집중점을 공격하지 않았다. 지척에 있어도 그냥 무시하고 달렸다. 저 멀리 보이는 별자리 스승의 본성을 직접 공격하려는 것이다.
아리오즈와 팰컨은 그 뒤를 따랐다. 얼마 안 되는 군대도 그러했다. 최대한 화력을 집중시켜 단번에 별자리 스승의 본성을 떨어뜨리려는 의도가 엿보였다.
시혁과 이미라에게는 호재.
가만히 기다렸다.
공격 시점은 화신이 두 번째 마나 집중점을 지나는 시점으로 잡았다. 거리가 충분히 멀어져서, 화신이 되돌아올 수는 없을 테니까.
화신이 두 번째 마나 집중점을 지나치자, 별자리 스승의 목소리가 시혁의 머릿속으로 파고들었다.
[지금이다.]
그걸 듣고 몸을 일으켰다.
“미라 씨, 가죠.”
“좋아요.”
이미라가 길게 심호흡을 했다.
오행 순환체가 광폭화의 힘을 뿜기 시작했다.
광폭화는 삽시간에 뇌까지 치고 올라갔다. 이미라의 전신이 한계 이상의 힘을 내고, 심장이 미친 듯이 박동하기 시작했다.
“하아아……”
이미라가 달뜬 신음소리를 냈다.
광폭화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어서일까. 더 빠르게 중독되는 느낌이었다. 해독 후 후유증도 심하게 호소했다.
단기전이니 이렇게 거듭해서 쓴 거지, 장기전에서는 쓸 게 못 된다.
시혁은 남는 오행 순환체를 요새로 잠입시켰다.
시야를 확보하기 위함이었는데, 그만 뼈아픈 일이 생겼다.
[건방진! 당하고만 있을 줄 알았느냐?]
인세 군주가 노호성을 질렀다.
시혁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오행 순환체가 땅속을 유영하며 잠입하려 했는데, 꼭 어딘가에 막힌 것처럼 전진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성벽 위에 박힌 보석 횃불. 그것들이 마법 생명체를 밀어냈기 때문이다. 요새에서 시혁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대처 방법을 생각한 듯했다.
이미라는 물색도 모르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원장님 수법이 막힐 때가 다 있네요? 저 먼저 갑니다!”
경쾌하게 몸을 날렸다.
50레벨에 이른 이상 그 몸놀림은 차원이 달랐다. 가볍게 땅을 찍은 것 같은데, 어느새 성벽 앞에 도달해 있었다.
성벽에 대기하던 소환자들이 공격을 했다.
화살과 불덩이가 마구 날아왔다. 이미라는 그걸 사뿐사뿐 피했다. 위험할 것 같으면 쌍검으로 쳐냈다. 충분히 거리가 가까워진 다음에는 쌍검을 휘둘러 목을 땄다.
시혁은 뒤에서 지원만 해주었다. 알고 있는 보조 마법을 모조리 걸어주자, 이미라가 더 강해져서 날아다녔다.
오행 순환체를 들여보낼 수가 없으니 마법 양탄자를 타고 하늘 위에서 인세 군주의 본성을 내려다보았다. 혹시 이적 공격이라도 당할까 싶어 거리는 적당히 벌린 뒤였다.
그런 시혁의 눈에, 본성 중앙의 거인 석상 앞에 한 무리의 소환자들이 모여 있는 게 보였다.
숫자는 약 1백.
성기사와 광휘 기사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모든 부정한 것을 멸하는 찬연한 광채가 하늘끝까지 번졌다. 거리가 멀어 레벨은 알 수 없지만, 그 기세가 삼엄한 게 최소한 1레벨은 아닐 것 같았다.
시혁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이들이 이미라의 대항마인 모양이다.
이들의 방어력은 동급 최고 수준이다. 여기에 방어 이적이 더해진다면, 까짓 거 시간을 끌지 못할 이유가 없다.
어쩐다?
고민에 빠진 순간, 별자리 스승이 다급하게 속삭였다.
[화신이 본성에 당도했다.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어쩔 수 없었다.
이미라에게 정면 공격을 주문했다.
기다렸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며 돌진했다. 성기사와 광휘 기사들이 진을 치고 있는 곳을 향해 벼락처럼 질주했다.
그들이 담담한 얼굴로 방패를 치켜들었다.
이미라가 그들을 덮치기 직전, 흰 빛이 그들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보호의 빛.
방어력과 생명력, 저항력을 크게 강화시키는 이적이었다.
이미라의 검이 최초로 막혔다.
그 대가로 공격을 받아낸 방패가 두 조각났지만, 옆에서 다른 광휘 기사가 끼어들자 금방 틈이 사라졌다.
“아하하! 재미있어!”
공격이 막힌 게 기꺼웠나 보다.
이미라가 웃음을 터뜨렸다.
미친 듯이 몸을 날리며 적들을 공격했다. 용암 송곳니와 빙하 궤적을 휘두르고 찌르는데, 그때마다 불과 얼음이 일어났다.
그것을 본 시혁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성기사와 광휘 기사들이 잘 대처하고 있었다. 어느새 이미라를 둘러싸기까지 했다. 지금은 천방지축처럼 날뛰고 있지만, 힘이 다하면 결국 지쳐 쓰려질 것이다.
아니, 그 전에 별자리 스승이 깃든 진리의 탑이 박살나 전투에서 패배하겠지.
뭔가 좋은 방법이 없을까.
시혁은 자신의 두 손을 들여다보았다.
결국 믿을 건 오행 순환체 밖에 없다. 시혁이 부리는 세 오행 순환체 중 귀속된 것만 이미라의 몸에 들어가 있고, 나머지 두 개는 남아 있으니까.
보석 횃불이 오행 순환체의 진입을 막고 있지만, 한 개를 희생하여 그걸 파괴하면 나머지 한 개는 들여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들여보낸다고 뭘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성기사들에게 약화 주문을 걸어?
소용없다.
그들 스스로 마법을 해제하거나, 인세 군주가 이적으로 해제할 확률이 높았으니까.
이미라를 더 강화시켜 봐?
시혁이 아는 마법은 다 쓴 다음이었다. 더는 쓸 게 없었다. 오행 순환체를 추가로 이미라의 몸에 주입한다면 모를까……
잠깐만.
오행 순환체를 더 주입한다고?
그게 가능할까?
여태 한 번도 시도해 본 적이 없었다. 애초에 시혁이 이렇게 오랫동안 일선에서 전투를 치르지 않았으니까.
좋다, 해보자.
시혁은 이미라를 향해 손짓을 했다.
두 오행 순환체가 빛을 뿌리며 날아갔다.
보석 횃불이 반응했지만, 이미라를 제압했을 때처럼 오행 순환체 하나를 소멸시켜 막았다. 마지막 오행 순환체가 이미라의 몸 안으로 쏘옥 들어갔다.
“어?”
이미라가 당혹한 소리를 냈다.
시혁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두 오행 순환체가 조화를 이루는 게 아니라 서로를 경계하고 있었다. 한 몸에 두 오행 순환체는 무리수였던 것이다.
시혁은 급한 대로 둘을 분리시켰다.
원래 있던 20480 개체의 오행 순환체는 체내 깊이 장부로 보내고, 두 번째 투입된 5120 개체 오행 순환체는 체표에 머무르게 했다.
그러자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두 오행 순환체의 순환이 반대 방향으로 이뤄지면서, 반발력이 생겨나 그 위력이 더 강해지는 것이다.
세상에 이럴 수도 있나?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더 떠올랐다.
오행 순환체는 하나처럼 행동하지만 실은 다섯 종류 마나 생명체의 군집이다. 그것마다 각기 다른 강화 주문을 부여하면 어떻게 될까?
당장 실험해 보았다.
오행 순환체를 더 세밀하게 움직였다.
생명의 마나는 근육으로, 불의 마나는 혈관으로, 땅의 마나는 살로, 쇠의 마나는 피부로, 물의 마나는 뼈로 들어갔다.
공간을 격하고 다섯 가지 강화 주문을 부여했다.
호랑이 힘. 끓는 피. 고래의 인내. 강철 피부. 뼈 속의 마나.
익숙하지 않은 까닭에 장부의 오행 순환체는 조종하지 못했다. 그저 광폭화만 더 끌어올렸다. 그것만으로도 효과가 컸다.
“으아아아아!”
이미라가 별안간 괴성을 질렀다.
미쳐 날뛰었다.
단칼에 기사들을 토막냈다. 광풍이 불어닥치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도 강했지만, 훨씬 더 강해져서 무시무시한 위세를 뽐내고 있었다.
여기서 끝낼쏘냐.
날뛰다 말고 별안간 멈춰 섰다.
우뚝 서서 기사들을 노려보았다.
기사들이 숨을 돌리는데, 한 줄기 바람이 불어 왔다.
폭풍이 이미라의 몸에서 휘몰아쳤다. 어찌나 힘이 강해졌는지, 마나가 유형화되어 사방을 강타하고 있었다.
이미라의 왼쪽 뺨에 있는 문신이 별안간 환한 빛을 뿜었다. 빛이 이미라의 전신으로 퍼지더니, 몸 전체가 불처럼 타오르기 시작했다.
난리가 났다.
“조심해라! 피의 춤이다!”
“피해! 막을 수 없어!”
이미라의 궁극기.
몸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검 끝에서 핏빛 광선이 줄기줄기 뿌려졌다.
붉은 궤적이 사방으로 날아갔다. 성기사와 광휘 기사들이 거기 맞고 비명을 질렀다.
원래 이미라의 궁극기는 물리적인 공격만 가한다.
그런데 들고 있는 무기 때문인지, 두 가지 특수 효과가 발휘되었다.
용암 송곳니는 화염 피해를 같이 입혔다. 빙하 궤적은 냉기 피해를 주었다. 곳곳에서 적들이 불에 타고 몸이 얼어붙어 온통 혼돈의 도가니에 빠졌다.
시혁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이미라가 만든 혼란을 증폭시켰다.
사용한 마법은 환각.
스스로의 몸에 불이 붙고, 얼어붙는 환상을 심었다.
현실을 기반으로 한 환상이다.
더 심각하게 작용했다. 경상자는 심각한 피해라고 착각하고, 중상자는 자신이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 자연히 두려움에 빠져 멀찍이 도망치고, 구석진 곳에 숨어 벌벌 떨었다.
역시 궁극기는 무시무시했다.
하긴 시혁이 치료사일 때 마주쳤던 칠흑 처형인도 궁극기를 기반으로 앰버튼 경을 단번에 박살내지 않았나. 소규모 접전에선 그리 좋다고 할 수 없는 궁극기인데도.
더구나 두 개의 오행 순환체 덕에 이미라가 훨씬 강해진 상태이니……
“후우, 후우.”
이미라가 숨을 몰아쉬었다.
병사들이 악을 쓰며 몰려왔다.
성기사들이 지리멸렬한 이상, 인세 군주가 깃든 거인 석상까지 어떤 방어선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인세 군주도 다급하게 소리쳤다.
[막아라! 막아!]
이미 늦었다.
화신이 별자리 스승의 방어 시설을 뚫고 막 본성에 진입했을 때, 이미라가 몸을 날려 거인 석상을 공격했다.
쌍검을 수십 번이나 휘저었다.
이미라는 전사 영웅들 중에서도 공격력이 발군인 인물.
거인 석상은 오래 견디지 못했다. 겨우 몇 초 만에 금이 쩍쩍 가더니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아!]
인세 군주가 장탄식을 불어냈다.
화신이 진리의 탑 지척에 도착한 상태였다. 검을 들어 내치기만 하면 진리의 탑을 박살냈을 텐데, 간발의 차이로 패배한 것이다.
진리의 탑에서 금색 빛이 뿜어졌다.
금색 빛은 하늘을 자신의 색으로 물들였다. 세계가 웅웅 진동하며, 별자리 스승의 승리를 축하했다.
세계가 멈췄다.
소환자들이 빛에 휩싸여 사라졌다.
문득, 시혁과 이미라의 눈이 마주쳤다.
승리하면서 광폭화가 모두 해독된 것일까. 중독되어 열띤 눈이 아닌, 평소의 차가우면서도 도도한 눈빛으로 돌아와 있었다.
이미라가 뭐라고 입술을 달싹이는 게 보였다.
[내일 봐요.]
시혁은 한 번 씨익 웃어보였다.
몸이 가벼워졌다.
영혼이 육체를 이탈하기 시작했다.
지구로 복귀하기 직전, 인세 군주가 으르렁대며 시혁을 위협했다.
[네놈이 내 영웅을 빼간 녀석이구나. 기억해두겠다. 나를 전장에서 다시 만나는 날,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시혁은 콧방귀를 뀌었다.
“뭐, 그러시던가.”
< 전멸 경쟁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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