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 세계의 한의사-79화 (79/250)

< 회유 –1- >

시혁은 진리의 탑 안으로 들어갔다.

진리의 탑에는 여러 시설이 있다. 그 중 반드시 존재하는 게 다름 아닌 감옥이었다.

진리 진영 소속 소환자 중에는 생체 연구를 통해 진리를 추구하는 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연구할 실험체를 진리의 탑 지하 감옥에 가두곤 했다.

이미라도 그곳에 갇혀 있었다. 움직일 수 없게 팔과 다리를 수갑으로 결박하고, 전신에 쇠사슬을 칭칭 동여매 놓았다.

좀 과하다 싶지만, 워낙 강건한 인물이니 어쩔 수 없었다.

“으으으……”

이미라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후유증 때문이었다.

눈동자는 게게 풀렸고, 입에서는 더러운 침이 줄줄 흘렀다. 팔과 다리는 축 늘어졌고, 괄약근이 풀어져 하의가 더러워져 있었다.

가둬놓고 치료도 안 해 준 모양이다.

시혁은 혀를 차며 침을 꺼냈다.

갑옷 위로 드러난 팔과 다리에 침을 꽂았다. 생명의 마나가 깃들며, 이미라를 회복시키기 시작했다.

이것만으로는 부족할 터.

목 뒤에 약침을 자입했다. 골수로 파고든 광폭화를 몰아내기 위해서였다. 그러는 한 편 뜸을 떠서 그걸 정화했다. 칼로 좀 긁어내기도 하고, 땅의 마나로 흐트러진 기운을 조화롭게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오행 순환체를 흡수시켰다.

이번에는 광폭화 때문이 아니었다. 몸 전체를 정화하고 치료하기 위해서였다. 몸을 씻겨 청결하게 만드는 작용도 수행했다.

치료를 끝내고, 시혁은 고개를 갸웃했다.

일어날 때가 된 것 같은데 왜 안 일어나는 거지?

정확히 상태를 파악하려고 접근하자, 별안간 이미라가 두 눈을 번쩍 떴다.

“헉!”

순간, 시혁은 기절할 것처럼 놀랐다.

이미라의 두 손이 번개처럼 움직였기 때문이다. 시혁의 이마와 턱 앞에서, 음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쇠사슬이 짧아서 다행이다.

조금만, 딱 반 뼘씩만 더 길었어도 시혁의 목이 부러졌을 테니까.

이미라가 아쉽다는 얼굴로 시혁을 쳐다보았다.

“아깝게 됐네요. 원장님을 길동무 삼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흠!”

시혁은 헛기침을 하며 한 발짝 물러났다.

이미라가 고개를 모로 꼬았다.

“남자답게 더 다가올 생각은 없으세요? 찐하게 키스해드릴 수 있는데.”

“죽음의 키스는 사양합니다.”

시혁은 정색을 했다.

이미라가 빙글빙글 웃으며 벽에 몸을 기댔다.

“유머 감각 없기는…… 재미없는 남자는 인기 없는 거 알아요?”

시혁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이미라를 쳐다보았다.

아직 다 치료가 안 됐나 싶어서였다.

이미라가 벽에 몸을 기댄 채 묘한 눈으로 시혁을 응시했다.

“그나저나 이제 어쩌실 거예요?”

“뭘 말입니까?”

“별자리 스승은 이미 패배했어요. 다음 기회를 기약해야지요. 무슨 수를 써도 인세 군주를 막는 건 불가능해요. 차라리 항복하라고 건의하시는 게 어때요? 일반 소환자도 건의 정도는 가능하잖아요?”

“아직 방법은 있지요. 완전히 끝난 건 아닙니다.”

“어떻게요?”

시혁은 말없이 이미라를 응시했다.

이미라도 금방 그 뜻을 알아차렸다. 얼굴을 찡그리더니, 곤란하다는 듯 말했다.

“절 세뇌해서 써먹게요? 글쎄요, 좋은 선택은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원장님이 저한테 뭘 하신 건지는 몰라도, 제 몸 상태는 지금 말이 아니거든요. 지금 제 레벨이 15인데, 절 세뇌해봤자 그 절반 정도 위력밖에 못 낼 거예요.”

7레벨 영웅?

그 정도면 그리 강하지 않다. 아무리 군주 계급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10레벨 고급 병종 두셋이면 충분히 잡는다.

시혁은 담담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세뇌하는 게 아니라, 미라 씨가 자발적으로 저희를 돕는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요.”

“제가요? 왜요? 차라리 죽이세요. 세뇌 당해서 싸우면, 인세 군주가 약속한 승리 수당을 못 받아요. 계약이 해제될 수도 있다고요.”

“승리 수당과 계약이라……”

그런 이유 때문에 열심히 싸우는 모양이다.

어떻게 해야 이미라를 설득할 수 있을까?

별자리 스승에게 보상을 달라고 할까?

그랬다간 차라리 세뇌를 하겠다고 나설 것 같았다. 아까 시혁에게 명령하면서 풍긴 뉘앙스가 그랬다. 광명용 이적을 사용하면서 이미 상당한 대가를 치른 것이다.

“뭘 받기로 하셨는데요?”

“승리할 때마다 마법 무구를 하나씩 받기로 했어요. 저한테 귀속되는 걸로요. 이번에는 마법 신발 차례였죠. 저는 다른 전사 영웅들에 비해서 순간적인 돌진 능력이 떨어지는 편이거든요.”

하긴 아까도 민첩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빨리 적을 추격한다는 느낌은 못 받았다.

처음 등장했을 때 낙하한 것도 그저 비룡에서 뛰어내린 거였고.

다른 것도 물어보았다.

“계약 해제는 무슨 말씀입니까? 제가 듣기로는 영웅들은 자유롭게 반신들을 옮겨 다닐 수 있다고 하던데요. 인세 군주와 계약을 해제하면, 다른 반신이 계약해주지 않는 겁니까?”

“그런 건 아니에요. 새로 절 소환할 반신을 찾아야 하는데 그게 귀찮아서 그래요. 인세 군주는 전투에 들어가면 꼭 저부터 소환하는데, 다른 반신들도 그럴 거라고 장담할 수도 없고요.”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이미라가 탐탁치 않아하는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해가 갔다.

반신들은 여러 영웅을 거느리지만, 선호하는 영웅은 대부분 두셋 정도였다. 대개 그들만으로 전투를 치르고, 전투가 길어져야 나머지 영웅도 소환했다.

시혁은 이미라를 보며 고민에 잠겼다.

지구에서의 인연을 빌미로 밀어붙여 볼까?

이미라는 시혁에게 큰 빚을 진 바 있다. 그걸 상기시킨다면 별자리 스승 진영에 합류하는 것을 거부하진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하긴 싫었다.

시혁 자신이 이득을 보는 대신 이미라가 손해를 보는 것 아닌가. 시혁이 큰 이익을 얻는 것도 아닌데, 굳이 그렇게 해야 할 필요가 있나.

둘 다 득을 보는 방법이 없을까.

한 가지가 생각났다.

시혁은 진지한 얼굴로 이미라의 이름을 불렀다.

“미라 씨.”

“네?”

“저랑 전설 한 번 찍어보지 않겠습니까?”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이미라가 눈가를 찌푸렸다.

황당하다는 감정을 전혀 숨기지 않고 있었다.

시혁은 넉넉하게 웃었다.

“영웅 1명과 일반 소환자 1명이 인세 군주의 군대 전부를 몰살시키면 어떻습니까? 세계 지식에도 기록이 될 정도의 성과인데요. 미라 씨가 군주 계급을 넘어 초월 계급에 도달하는데 도움이 될 겁니다.”

이미라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인세 군주의 군대 전부를 몰살시킨다고요? 그런 건 불가능해요. 제가 50레벨이라면 모를까, 아직 15레벨에 불과하다고요. 10레벨 고급 병종 서넛만 모여도 상대하기 힘들어요. 인세 군주한테는 아직도 영웅이 둘이나 남아 있고요.”

“통상적이라면 그렇겠죠. 아까처럼 제 능력에 의해 힘이 증폭된 상태라면 어떻습니까?”

“아까 그게 원장님 때문에 그런 거였어요? 어쩐지 이상하더라니…… 그럼 소규모로 싸워볼 만해요. 10명까진 잡겠네요. 하지만 그 정도에요. 거기서 숫자가 더 늘면 힘들어요.”

“상관없습니다. 미라 씨의 레벨도 그만큼 높아질 테니까요. 저도 힘을 더 강하게 쓰면 되고요. 그러다 30레벨을 넘으면, 사실상 끝이 납니다.”

“세상 일이 그렇게 마음먹은 대로만 되면 얼마나 좋겠어요? 제가 보기엔 도중에 요격 부대가 출격해서 우릴 잡으러 올 가능성이 높아요.”

“그때는 별자리 스승의 도움을 받아야지요. 굳이 요격 부대를 전멸시킬 필요까지도 없습니다. 그냥 우리 둘의 몸을 빼낼 정도로 이적 지원을 받으면 됩니다.”

이미라도 시혁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슬슬 감을 잡았다.

아르거스에서 흔히 쓰이는 전술 중 하나였다. 고레벨의 영웅 몇 명을 이용하여 후방 교란을 하는 것이다.

이미라는 시혁을 빤히 쳐다보았다.

과연 시혁이 자신을 제대로 지원할 수 있을까?

지금이야 가능하겠지. 하지만 20레벨이 되고 30레벨이 된 다음에는? 마나가 부족하여 골골거리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거절하려고 할 때, 시혁이 뜻밖의 말을 했다.

“미라 씨 말처럼 많이 힘들 겁니다. 실패할 가능성이 훨씬 더 많지요. 그러니 도전할 가치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쉬운 일이라면, 해봐야 경력에 도움이 되지도 않는 걸요.”

여기까지 말한 후 잠시 말하는 것을 멈췄다.

잠깐 망설이다가, 몇 마디를 덧붙였다.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더 중요한 이유요?”

“예. 비록 미라 씨와 적으로 만났지만, 되도록 별로 싸우고 싶지 않습니다. 세뇌되어 꼭두각시가 되는 것도 보고 싶지 않고요. 힘들더라도 저와 미라 씨가 함께하는 길을 택했으면 좋겠습니다.”

진정어린 말에, 이미라가 묘한 눈으로 시혁을 쳐다보았다.

굳이 피할 필요는 없었다. 시혁은 담담한 표정으로 이미라와 시선을 마주했다.

둘 다 한 동안 침묵을 지켰다.

문득 이미라가 입술을 오물거렸다.

함께하는 길을 택했으면 좋겠다?

이성적인 호감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안다.

그래도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고, 또 기꺼웠다.

지구에서의 인연을 내세워 압박하면 거부할 명분이 없었다. 거절하려면 거절할 수는 있겠지만, 사람 관계라는 게 어디 그렇게 자기 마음대로 되나.

고민하던 이미라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좋아요. 제가 져드릴게요.”

“네?”

“원장님 말씀대로 하겠다고요. 원장님께 도움을 받은 것도 있고,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는데 차마 거절할 수가 없네요. 좋아요. 우리 한 번 전설을 찍어 봐요.”

“하하! 잘 생각하셨습니다.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시혁은 웃음을 터뜨렸다.

당장 열쇠를 받아다 수갑을 풀어주었다. 쇠사슬도 벗겨냈다. 그러자 속옷만 입은 이미라의 완벽한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시혁은 짐짓 고개를 돌렸다. 그걸 느낀 이미라가 깔깔 웃으며 가슴을 내밀었다.

“가릴 거 다 가렸는데 왜요?”

“끄응,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청결 마법으로 씻긴 후, 둘은 사이좋게 지하 감옥을 벗어났다.

간수들이 경계했지만 공격하지는 않았다. 별자리 스승이 별도의 명령을 내린 탓이었다.

감옥을 벗어나고, 이미라가 쨍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내 갑옷 어디 있어?”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듯 커다란 목소리였다.

시혁이 쳐다보자, 이미라는 뭐 어떠냐는 듯 당당한 얼굴을 했다.

마법사들이 부랴부랴 갑옷을 가져왔다.

무슨 짓을 한 건지 낱낱이 해체가 되어 있었다. 불에 그슬린 자국, 염산에 담근 자국까지 보였다.

이미라가 그걸 보고 얼굴을 찡그렸다.

“이봐, 이걸 입고 싸우라는 얘기는 아니지?”

“잠시만 기다리시오. 금방 수리해 드리리다.”

마도 공학을 전공한 현자와 학자들이 달려들었다.

수리를 하면서도 시혁을 향해 호기심어린 눈빛을 보냈다. 뭘 어떻게 했기에 이 사나운 여자를 회유했냐는 것 같았다.

시혁은 그저 웃어 보였다.

그러다 생각나는 게 있어 이미라를 돌아보았다.

“참, 미라 씨. 무기는 있습니까?”

아까 쌍검을 버리고 온 기억이 난 것이다.

이번 전투가 끝나면 이미라에게 돌아오겠지만, 지금 당장 쓸 물건이 없었다.

이미라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 그러네요. 어쩌죠? 지금 제 레벨이 낮으니까, 좋은 무기가 있어야 하는데요.”

별자리 스승에게 요구했다.

당연한 일.

진리 진영에는 검을 쓰는 병종이 거의 없다. 기껏해야 마법 기사와 마검사 정도인데, 그나마 마법에 치중하는 병종이라 검의 성능이 좋지 않은 편이었다.

별자리 스승도 그 요구를 받아들였다.

성역에서 또 지원을 끌어와야 한다는 마뜩치 않았다. 그래도 그 정도는 해야 이미라가 실력을 발휘할 거라는 사실을 납득했다. 어차피 아예 주는 것도 아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자루의 검을 전달 받았다.

이미라가 들고 다니던 투박한 검과는 다른, 아름답기 그지없어 예술품처럼 보이는 물건.

용암 송곳니와 빙하 궤적.

마법적인 힘이 강하게 깃들어 있었다. 용암 송곳니는 적중하는 모든 적을 불태웠고, 빙하 궤적은 마나를 주입하여 얼음 칼날을 날리는 게 가능했다.

이미라는 두 검을 보고 한눈에 반했다.

< 회유 –1- > 끝

ⓒ 산호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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