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채 파괴자 –3- >
시혁은 눈을 가늘게 떴다.
대규모 부활 이적을 받아서일까. 이미라의 체내에 있는 오행 순환체가 최대한으로 불어 있었다. 지금도 시혁의 명령에 따라 쉬지 않고 광기 어린 기운을 생성했다.
자연히 이미라는 무시무시한 위세를 뽐냈다. 지금은 15레벨도 되지 않는데, 30레벨은 된 듯한 무력으로 진리 진영 소환자들을 썰고 있었다.
[후퇴! 후퇴하라!]
사태를 반전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당연히 후퇴 명령이 떨어졌다. 마법 생명체들은 뒤에 남아 인간 군대의 발목을 붙잡고, 소환자들만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아하하! 어디 가는 거야? 나랑 놀자!”
이미라가 입에 거품을 물고 쫓아왔다.
처음 봤을 때는 저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광폭화가 골수까지 치민 모양이었다.
이미라를 필두로 기사단장, 광휘 기사, 대마법사, 성자 같은 고급 병종들이 모조리 추격전을 벌였다. 비행 마법과 가속 마법을 아는 소환자는 가까스로 도망쳤지만, 그렇지 않은 자는 하나둘 따라잡혀 목숨을 잃었다.
시혁은 그나마 안전했다. 가장 뒤에 있었고, 보조 분야로 선택한 부여 마법에 가속 마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달리면서 뒤를 힐끔거렸다.
어떻게 해야 이 상황을 뒤집을지 고민하는데, 신나게 소환자들을 학살하던 이미라가 시혁을 발견했다.
히죽, 괴상한 웃음을 지었다.
“어머, 원장님! 원장님이 여기 있다는 걸 잊고 있었네! 이리 와 봐요! 잘 해줄게!”
그러면서 빠르게 달려오는데, 그 속도가 가속 마법을 건 시혁보다 훨씬 더 빨랐다.
시혁은 기겁하여 달아났다.
전신은 피범벅이고, 입가에는 뒤틀린 웃음이 달려 있다. 장난스럽게 휘두르는 검 끝에서 피가 뚝뚝 떨어져, 꿈에 나올까 두려운 모습이었다.
그런 여자가 깔깔대며 쫓아오면, 세상 그 어느 누구라도 기함을 할 것이다.
시혁 주변의 소환자들도 놀라 헛바람을 들이켰다.
“뭐야! 저년이 왜 이쪽으로 와?”
“저리 가!”
“도망치자!”
소환자들은 이미라가 누굴 노리는지 금방 눈치 챘다.
자연히 시혁에게서 벗어났다. 금세 이미라가 시혁 하나만 쫓는 형상이 되었다.
다른 인간 소환자들은 시혁이 아니라 다른 소환자를 노렸다. 무시무시하게 강한 이미라가 쫓아갔는데, 놓칠 가능성은 아예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미라가 환희에 찬 얼굴로 부르짖었다.
“원장님! 좀 멈춰 봐요! 잘해드린다니까요?”
무시하고 달렸다.
어느새 다른 소환자는 아무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시혁과 이미라만 숲 속을 쫓고 쫓기고 있었다.
오래 가지는 못할 것이다.
이미라가 점점 시혁을 따라잡는 중이었다. 아무리 가속 마법을 썼어도, 기본적인 육체 능력의 차이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나마 탈것을 소환하지 않는 게 다행이다. 비룡을 타고 쫓아오면 금세 잡힐 테니까.
정신이 나가 있어서 그런 모양.
그렇다면 시혁이 그냥 무작정 달아나고 있느냐?
그런 건 아니다.
아까 빼돌렸던 오행 순환체.
바로 그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그냥 맞서 싸운다면 오행 순환체로 기습을 한다 해도 단칼에 목이 달아날 것이다. 하지만 시혁만의 특제 마법이 가미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윽고 목적지에 도착했다.
시혁은 달리는 것을 멈췄다. 몸을 돌린 후, 오른손에 침을 소환하고 이미라를 노려보았다.
이미라가 히죽거렸다.
“어머, 그걸로 뭘 어쩌시려고요? 절 찌르려고 그러세요? 아휴 무서워라!”
시혁은 말없이 주변을 확인했다.
아무도 없다.
시혁과 이미라 둘만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천천히 왼손을 들어올렸다.
아무 것도 쥐지 않은 빈 손.
이미라가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것도 잠깐, 몸을 살짝 낮추더니 도약 자세를 취했다.
이제는 끝을 내자는 태도.
시혁도 그렇게 했다.
미리 만들어 두었던 마법을 시전했다.
오행 순환체를 사멸시키는, 이름을 짓지 않은 마법.
탁한 회색의 빛이 뻗어나갔다. 이미라가 본능적으로 칼로 튕겨내려고 했다. 칼날이 호선을 그리고, 섬뜩한 광채가 뻗어 나왔다.
소용없었다.
회색의 빛은 이미라의 몸에 정확히 적중했다.
이미라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방어 자세를 취하고 시혁을 경계했다.
당장은 큰 변화가 없었다. 대치하며 약간의 시간을 보내도 마찬가지였다.
이미라가 깔깔대며 웃었다.
“뭐야, 아무 것도 아니잖아? 그럼 제 차례죠? 아하하, 화끈하게 끝내드릴게요!”
한 걸음을 옮겼다.
다시 또 한 걸음. 그리고 세 번째 걸음.
이때서야 비로소 이미라의 얼굴에 변화가 일어났다.
“어?”
균열이 생겼다.
당혹한 표정이 떠올랐다.
몇 걸음 더 걷자 이미라의 얼굴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일그러졌다.
이미라가 이를 갈았다.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지?”
시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최대한 집중한 채 이미라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했다.
아무리 광폭화라고 해도 후유증이 나타나려면 시간이 걸린다. 그 잠깐이면 이미라가 시혁을 몇 번이고 도륙 낼 수 있었다.
이미라가 신음소리를 내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생각보다 후유증이 더 심각한 건가?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이미라가 무릎을 꿇은 자세 그대로 휙 날아올랐다.
“죽어!”
뭔가 특이한 기법을 이용해, 용수철처럼 몸을 튕긴 것이다.
그러나 이런 얕은 수법에 당할 시혁이 아니다.
손을 저었다.
맹렬한 빛이 터졌다. 태양이 지상에 내려온 듯 어마어마하게 거센 빛이었다.
“아아악!”
이미라가 무방비 상태로 빛에 노출되었다.
안구가 타들어가는 듯한 통증에, 이미라가 악을 썼다.
다만 시혁도 한 가지 실수를 했다.
약간의 계산 실수.
이걸로 조금은 무력화될 줄 알았는데, 이미라가 비명을 지르고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시혁이 있는 곳으로 정확히 달려오는 것이다.
과연 2번의 전향 및 전직을 거쳐, 군주 계급까지 올라온 철의 여인 답다고 할까.
시혁의 눈이 커졌다.
이미라의 손이 양쪽으로 벌어지며, 쌍검이 위험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그 인내심에 놀라면서도 재빠르게 행동했다.
바닥에 마법을 걸었다.
미끄러짐 마법.
동시에 오행 순환체 하나를 앞으로 내밀었다. 오행 순환체가 시혁의 마음을 읽고 사람 형상을 취했다.
이어 가속 마법을 건 채 뒤로 몸을 날리자, 빙판 위를 미끄러지듯 폭발적으로 자리를 벗어났다. 그러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또 옆으로 몸을 던졌다.
그게 시혁의 목숨을 구했다.
“죽어!”
이미라가 일갈하며 검을 수십 번이나 베고 그었다.
시혁 형상을 한 오행 순환체가 거기 당했다. 5종류, 5120 개체나 되지만 순식간에 격파 당했다. 수가 형편없이 줄어들다 못해 완전히 소멸되었다.
더구나 오행 순환체를 베면서 이게 시혁이 아니라는 점을 눈치 챈 것 같았다. 몸을 또 날려 시혁을 쫓아왔다. 중간에 미끄러짐 마법에 당해 볼 성 사납게 넘어졌지만, 씩씩하게도 벌떡 일어났다.
이미라의 검이 시혁의 가슴에 박히기 직전, 숨어 있던 오행 순환체가 빛을 뿜었다.
그냥 원격으로 마법을 쓰게 한 게 아니다.
공터에 온 시점에서 미리 주문을 부여하고, 오행의 순환을 역으로 돌려 증폭시켰다. 적당히 증폭 속도를 조절하다가, 결정적인 시점에 폭주시켜 터뜨렸다.
덕택에 그 힘이 평소 보다 몇 배는 더 강력하게 발휘되었다.
이미라의 몸이 덜커덕 멈췄다.
마비 마법.
시혁은 입을 앙다물었다.
피 묻은 검 끝이, 시혁의 가슴 바로 앞에 정지해 있었다.
이미라와 눈이 마주쳤다.
입가가 올라가더니 차가운 웃음을 짓는다. 비록 한 번 당하긴 했지만, 그래서 뭘 어쩌겠냐는 태도였다.
실제로 손이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마비를 힘으로 깨겠다는 것 같았다. 일반 소환자라면 어림도 없는 소리지만, 영웅 소환자라면 가능할 지도 몰랐다.
어떻게 할까?
오행 순환체를 남겨 마비만 시키면서 도망칠까? 최소한 시혁이 본성으로 갈 때까지 시간은 벌 수 있을 것 같은데.
하지만 그렇게 해봐야 의미가 없다.
결국 별자리 스승이 패배할 테니까. 특히 마약 중독을 완전히 해소한 이미라가 그 선봉에 서지 않겠나.
여기서 패배를 인정할 게 아니라면 모험을 해야 한다.
“좋아.”
시혁은 눈에서 불을 토했다.
알고 있는 제압용 마법은 모조리 퍼부었다.
마비, 실명, 속박, 석화, 혼미 등등.
한편 귀속된 12 분열 오행 순환체를 이미라의 몸속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마비 주문을 부여하여 이미라를 제압하게 시켰다.
시혁과 오행 순환체의 합공.
안과 밖에서 색색의 빛이 뿜어져 이미라를 공격했다.
이미라는 처음에는 눈가를 꿈틀거리며 저항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광폭화의 후유증이 심해지는 상태였다. 결국 전신이 딱딱하게 굳으며 의식을 잃고 말았다.
“후!”
완전히 제압된 것을 확인하고, 시혁은 겨우 한숨을 내쉬었다.
힘들었다.
이미라가 몇 번이나 제압을 풀 뻔 했다. 한 번은 검을 던져 시혁을 맞추려고까지 했다. 끝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았더라면, 그 검에 몸이 두 조각났을 것이다.
“으으으……”
이미라가 땅에 쓰러진 채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시혁은 이미라를 들쳐 업었다. 그 와중에도 한 자루 검을 세게 쥐고 있어서, 겨우 손가락을 풀어 검을 빼앗아 멀리 던져 버렸다.
본성으로 복귀했다.
다행히 시혁을 쫓는 인간 소환자는 없었다. 이미라에게 죽었을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어쩌면 주인을 잃고 버려진 쌍검을 발견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본성의 분위기는 침통했다.
살아 돌아온 자가 1할에 불과했다.
대부분 고급 병종인 것이 위안거리이긴 하다. 그러나 이 정도 수로는 이어질 인세 군주의 공격을 막는 게 불가능했다. 당장 병력을 보충할 마나도 없으니까.
이런 상황이지만, 귀환한 시혁은 별자리 스승과 소환자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업고 온 이미라 때문이었다.
소환자들이 놀라 웅성거렸다.
“성채 파괴자잖아?”
“제압되어 있어!”
“어떻게 잡은 거지? 군주 계급 영웅인데?”
시혁은 진리의 탑 앞으로 이미라를 데려갔다.
별자리 스승이 솔직하게 찬탄했다.
[대단하구나. 그 상황에서 영웅을 생포해 오다니, 그대는 내가 본 수많은 소환자 중에서도 단연 최고의 소환자다.]
“감사합니다.”
잡아 온 이미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몇몇 소환자가 고문하자는 의견을 냈지만 곧바로 기각되었다. 암흑 진영이나 지옥 진영도 아니고, 그래 봐야 얻을 게 없으니까.
방법은 하나뿐이다.
이미라를 회유하거나 세뇌하여 별자리 스승의 진영으로 끌어들이는 것.
그러면 활로가 생긴다.
이미라를 이용해 인세 군주의 진격을 막으면서 군대를 보충한다면, 불리한 전세를 못 뒤집을 이유도 없지 않나.
최소한 멍하니 있다가 패하는 것보다는 낫겠지.
“마나를 모아 세뇌합시다.”
“저는 정신 마법의 대가입니다. 영혼 진영의 사도들만큼은 아니어도, 세뇌에 일가견이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그렇게 주장했다.
후유증 때문에 이미라가 침만 흘리고 있자, 세뇌하기 쉬울 거라고 생각했나 보다.
별자리 스승이 허락하려는 찰나, 시혁이 앞으로 나섰다.
“저한테 맡겨 주십시오. 제게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흠, 그래?]
처음 소환했을 때부터 시선을 끌던 시혁이다.
별자리 스승이 알기로 이미라와는 고향 세계에서 개인적인 친분이 있다고 했다. 아마 그걸 이용해서 어떻게 하려나 본데, 능력도 뛰어나니 한 번 맡겨보는 게 좋지 싶었다.
세뇌 당해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자보다야, 자발적으로 나서서 싸우는 자가 훨씬 더 강한 법이니까.
[좋다. 네 뜻대로 해보아라.]
별자리 스승이 흔쾌히 허락했다.
< 성채 파괴자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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