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채 파괴자 -1- >
이번에 소환된 전장은 숲이 우거진 곳이었다. 듬성듬성 산이 있고, 마나 집중점이 두 군데에 위치했다.
시혁은 후방에서 연구만 했다. 두 반신, 별자리 스승과 인세 군주가 마나 집중점을 하나씩 갈라먹은 뒤라 대치 구도가 이어졌던 것이다.
연구 활동에 전념한 끝에, 시혁은 10레벨을 달성했다.
‘설마 이렇게 끝나지는 않겠지?’
인세 군주가 바보가 아닌 바에야 놔둘 리가 있나. 그랬다간 승천 이적으로 별자리 스승이 승리하고 말 텐데.
시혁의 예측이 맞았다.
인세 군주가 전군을 휘몰아쳐 공격한 것이다.
별자리 스승은 완전히 허를 찔렸다.
세 영웅을 앞세운 게 컸다. 마검사 영웅 하나가 마나 집중점을 지키고 있었지만 그들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최근에 소환하여 레벨이 낮은 편이어도 그러했다.
생산한 모든 마나를 군대 구축에 쓴 보람이 있었다. 조금만 시기가 늦어졌어도 뚫기 힘들었을 텐데, 그 미묘한 순간을 제대로 짚은 것이다.
“막아!”
“뚜, 뚫린다!”
“버텨! 곧 탑이 완성된다!”
인세 군주는 마나 집중점을 차지한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별자리 스승의 본성까지 쳐들어왔다. 별자리 스승은 당연히 모든 전력을 동원하여 방어전에 돌입했다.
위태위태했다.
시혁은 눈살을 찌푸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병사들이 해일처럼 몰려왔다. 성기사들이 선두에서 검을 뿌렸다. 화살의 비가 성벽 위를 덮치고, 마법 공격이 그 뒤를 따라 날아왔다. 사제들의 주문이 그들을 보호하고, 멀리서는 공성 병기도 불을 토하고 있었다.
조금만 지체했다간 바로 뚫릴 상황.
시혁의 마음이 급해졌다.
가장 방어가 취약해 보이는 쪽으로 달려가며, 주위 허공을 감도는 오행 순환체를 깨웠다.
[일어나라.]
강하게 의념을 보내자, 오행 순환체들이 깨어 빛을 뿜었다.
녹적황백청의 다섯 기운.
순식간에 분열했다. 작은 보석 같던 게, 아주 잘게 쪼개져 흡사 빛나는 안개처럼 변한 것이다.
이걸로 뭘 할 수 있느냐고?
이런 난전에서, 오색 순환체는 무시무시한 위력을 발휘한다.
시혁은 오색 순환체에게 한 가지 속성을 부여했다.
광폭화.
의학자 시절 거장이 되면서 얻은 특기..
오핵 순환체가 핏빛으로 위험하게 물들었다. 그러더니 하늘을 날아 성벽을 뛰어넘었다. 한참 성벽을 공격하던 적군의 대열 중간을 덮쳤다.
“어어, 뭐야?”
“조심해!”
경호성이 울려퍼졌지만 소용 없었다. 오행 순환체는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그들의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오행 순환체가 그들의 몸을 극도로 활성화시켰다. 치유, 정화, 조화, 파훼, 보호의 힘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탓이었다.
문제는 그 중 이질적인 힘이 하나 숨어 있었다는 것.
그 힘이 두뇌로 들어갔다. 이성을 흐려 정상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러면서 공격성과 폭력성을 극도로 증폭시켰다.
“으아아아!”
멀쩡히 전진하던 중갑보병이 갑자기 광분했다.
방패를 들어 주위를 후려치더니, 검을 들어 찌르고 베고 긋는 등 난리를 쳤다.
당연히 그 동료들이 깜짝 놀랐다.
“야! 너 미쳤어?”
“이게 무슨 짓이야?”
그러나 그들도 시혁의 손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오행 순환체가 그들의 몸에 흡수된 까닭이다. 채 몇 초 지나지 않아, 그들 또한 눈을 까뒤집고 주위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시혁이 다룰 수 있는 오행 순환체는 세 개.
원래는 두 개였으나 숙련 계급이 되면서 생긴 특기, 소환체 연결 덕에 한 개가 늘었다. 또한 더 세밀하게 조종이 가능해졌다.
상급 병종 이상이라면 모를까, 이 정도라면 거의 수백이 넘는 이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대세를 바꿀 수 없었다.
진리 진영이 확연히 밀리고 있었으니까.
상급 병종과 고급 병종 소환자들이 문제였다. 마법 실력은 다들 뛰어난데, 아르거스에 있는 내내 연구실에 처박혀 있다 보니 제대로 실력 발휘를 못하는 것이다.
특히 마나가 소모되어 쉬고 있는 자들이 많았다. 고급 마법이면 최고인 줄 알고 초반에 마나를 마구 사용한 탓이었다.
차라리 마법 생명체들이 더 잘 싸웠다. 기계처럼 냉혹하게 인간 병사들의 공격을 받아내고, 날카로운 반격을 가하며 한 치도 밀리지 않았다.
시혁은 냉정하게 판단했다.
마법을 사용해서 마법사들을 보조할 것이냐, 파괴된 마법 생명체들을 치료하여 복귀시킬 것이냐?
후자가 낫겠다.
꼬락서니를 보아하니, 마법사들을 보조해봤자 마나만 낭비할 테니까.
마법이 날아들고, 화살이 빗발치는 성벽 위로 올라갔다.
파괴된 마법 생명체가 어디에나 널려 있었다. 돌무더기가 한쪽에 쌓이고, 기괴하게 생긴 인간이 피떡이 된 채 널브러졌다.
시혁의 관점에서 보면 생물보다 기계에 가까운 것들.
가까이 다가가 침을 꽂았다. 그 결과 돌들이 저절로 형체를 갖추더니 거대한 골렘이 되고, 쓰러져 있던 인간이 숨을 쉬며 제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리 진영의 마법 생명체들이 갖는 장점이다.
소환자가 아니니 전투 능력은 떨어진다. 레벨은 올라도 계급은 올리지 못하니까. 대신 이렇게 치료를 받거나 마나를 공급받으면 멀쩡히 되살아나곤 했다.
누군가 그걸 보고 혀를 찼다.
“쯧쯧, 그럴 시간에 공격 마법이나 한 번 더 날리지.”
시혁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만약 스스로가 강한 마법사라면 그 말처럼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혁은 치료사와 의학자에서 전직한 인물이고, 직접 공격하는 것보다 치료를 하는 게 효율이 몇 배나 높았다.
시혁의 노림수가 통했다.
광폭화를 퍼뜨려 진입을 제한하고, 마법 생명체들을 일으켜 세우자 점차 방어선이 안정적으로 변하는 것이다.
인간 군대가 점차 밀려나기 시작했다.
[훌륭하군.]
환상처럼, 한 마디 말이 시혁의 뇌리를 스쳤다.
별자리 스승이 시혁을 보고 있었나 보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진리 진영 소환자들도 힘을 냈다.
“힘을 내!”
“밀어붙여!”
“다 죽여 버려!”
온갖 화려한 마법이 인간 군대를 공격했다.
불과 얼음, 번개, 섬광의 향연이 펼쳐졌다. 그 서슬에 성벽 위의 인간 군대가 순식간에 갈려 나갔다.
반면 시혁은 눈살을 찌푸렸다.
척 보기에도 마나를 낭비하는 게 보여서였다. 더구나 위력에만 중점을 둔 탓에 마법 생명체들까지 휩쓸렸다. 기껏 회복시킨 마법 생명체들이 죽어 나가자 속이 살살 쓰렸다.
인간 군대도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성벽 위에서 완전히 몰아내기 직전, 쩌렁쩌렁한 고함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뭐가 이렇게 느려?”
강인한 힘이 깃든 여성의 목소리였다.
[쿠아악!]
뭔가가 울부짖는 소리가 났다.
시혁은 반사적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적색의 비룡이 저 높은 곳에 떠 있었다. 그게 한 차례 몸을 뒤집자, 거리가 멀어 점처럼 보이는 것이 휙 하고 떨어졌다.
점은 벼락처럼 낙하했다. 그리하여 성벽 정중앙을 강타했다.
꽝!
거대한 충격이 성벽을 강타했다.
폭발하듯 성벽이 무너졌다.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폭음이 터지며, 근처에 있던 모든 이가 나동그라졌다.
먼지가 폴폴 날렸다. 하지만 그 속에 자리 잡은 여성의 모습은 누군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가죽 갑옷을 입은 여성.
두 손에 두툼하고 짧은 칼을 들었다. 왼쪽 뺨에는 호랑이 줄무늬 같은 문신을 했다. 팔과 다리는 그냥 드러냈고, 손목과 발목에만 두툼한 금속 보호대를 찼다.
누군가 당황하여 소리쳤다.
“성채 파괴자다!”
인세 군주의 대표적인 영웅이다.
시혁도 성채 파괴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얼굴 때문이었다.
흐린 문신 사이로 드러난 얼굴이 익숙했다.
이미라.
그녀가 쌍검을 든 채 사납게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이게 무슨……”
시혁의 시선을 느낀 건지 이미라가 눈을 돌렸다.
둘의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이미라의 눈도 커졌다.
사납던 얼굴이 풀리더니, 당혹한 한 마디가 붉은색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왔다.
“원장님?”
그토록 아르거스에 많이 왔지만, 아는 얼굴을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당황스러워 손을 쓰지 못하고 있는데, 뒤쪽에서 째지는 소리가 났다.
찌이잉!
공기가 갈라지며, 강렬한 빛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진리 진영의 방어 시설 중 가장 강력한 태양탑이 완공된 것이다.
태양탑의 꼭대기에 빛이 맺혔다. 성벽 안을 한 번에 쭉 훑더니, 가장 강력한 존재인 이미라를 겨냥했다.
빛이 쏘아졌다.
“칫!”
이미라가 혀를 찼다.
어느새 냉정을 되찾은 뒤였다. 가볍게 몸을 굴러 태양탑의 공격을 피했다.
하지만 태양탑의 공격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벌써 꼭대기에 빛이 휘몰아치며 두 번째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잠시 후퇴해야 할 모양.
이미라가 시혁에게 애교스럽게 눈짓을 했다.
“아르거스에서 원장님을 뵈니까 반갑네요! 몽마 일은 감사했어요! 그렇다고 해서 제가 설렁설렁 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지구는 지구, 아르거스는 아르거스니까 각자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자고요! 그럼 전 이만!”
이미라가 태양탑의 공격을 피하며 본진으로 돌아갔다.
그와 함께 다른 두 영웅을 비롯한 인간 군대도 퇴각하기 시작했다. 태양탑이 완공된 이상 더 공격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인간 군대를 혼란시키던 오행 순환체도 시혁에게 돌아왔다. 마치 던진 공을 문 강아지처럼 빛을 반짝여서, 가볍게 그 단단한 몸을 쓸어주었다.
소환자들이 한숨 돌리고 모여들었다.
개중 몇몇이 묘한 눈으로 시혁을 살폈다.
“성채 파괴자와 아는 사이인가 봅니다.”
“네? 아, 고향에서 안면이 있는 사람입니다. 아르거스에서 볼 줄은 몰랐지요.”
“아, 그런 겁니까?”
아르거스에 소환되다 보면 왕왕 일어나는 일이었다.
시혁도 언젠가는 지인을 만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다만 그게 이미라일 줄은 몰랐지.
전투 뒷정리에 들어갔다.
잡일은 마법 생명체의 일이었다. 골렘들이 무너진 성벽을 보수하고, 그림자 하인이 청소를 했다. 호문클루스가 마법적인 수리를 담당하고, 가고일은 하늘을 날며 부셔진 마법 생명체를 회수했다.
시혁의 일은 정해져 있었다.
마법 생명체를 치료했다. 3개의 오행 순환체도 모두 치료에 투입했다. 다른 현자들도 마법 생명체 치료에 들어가서, 금세 모든 마법 생명체를 일으킬 수가 있었다.
이런 걸 보면 확실히 진리 진영은 강한 세력이다.
그러나 약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시혁은 성벽에 올라 저 멀리 진을 치는 인간 군대를 살펴보았다. 장기전을 대비하려는지 근처 숲에서 통나무를 베어 오는 게, 공성 병기를 만들려는 것 같았다.
‘힘들겠는데.’
저절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현재 전황이 인세 군주에게 유리하니, 장기전으로 들어가 소모전을 강요하려는 듯했다.
인세 군주가 전장 전체를 장악한 상태다. 두 개인 마나 집중점도 인세 군주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마나 생산량에서 크게 차이가 나니, 곧 병력 비율이 3대 1을 넘어갈 것이다.
아무리 진리 진영의 방어 시설이 사기적이고 이적이 강력하다 해도 이 정도면 방어하기가 힘들다. 권세 진영도 정면 대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진영이니까.
그것을 느낀 듯 여기저기서 푸념이 흘러나왔다.
“이거 이미 끝난 거 아냐?”
“다 글른 것 같아.”
“마나 집중점을 두 개 다 뺏긴 시점에서 끝난 거지. 아니, 하나만 점령하면 될 걸 뭐 굳이 두 개 다 먹어보겠다고 난리를 쳤나 몰라.”
“아직 속단하기는 이르지. 방어를 굳히면서 마나를 축적하면, 승천 이적으로 끝낼 수도 있어.”
“그 전에 최종 병기가 나타나서 끝장을 볼 걸? 권세 진영의 화신이 얼마나 강한지 모르지? 방어 시설이 얼마나 많이 있든 소용없어. 여기 본성 정도는 가볍게 깨질 거야.”
< 성채 파괴자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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