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색출 [3권 끝] >
몽마가 완전히 소멸된 것을 확인하고, 이미라가 시혁에게 깊이 허리를 숙였다.
“선생님, 감사해요. 선생님 덕에 이 녀석을 잡을 수 있었어요. 선생님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고 있다가 저 정말 폐인 됐을 거예요.”
“아닙니다. 꼭 제가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이 도와줬겠지요. 너무 늦지 않게 해결할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한 동안 덕담을 나누고 청소하기 시작했다.
바닥과 벽을 닦는 게 문제였다. 사향 샘과 거북이 소금이 눌어붙어 더러워졌기 때문이다. 벽에 밀어놓은 가구들을 원상복귀시키는 것도 일이었다.
악몽의 재는 그림자 보자기에 담았다. 송곳니와 수정 거울 등 물건들도 잘 정리해서 보관해 두었다.
한참 청소 중인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네, 누구세요?”
“원장님! 저예요! 임희연이에요!”
누군가 했더니 아까 시혁에게 농담을 걸었던 간호사다.
시혁이 문을 열자, 간호사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이밀었다.
“이제 다 끝났어요? 진짜 귀신 소리 나던데요.”
“끝났습니다. 청소하던 중이었죠.”
“저희도 도울게요. 말씀하시지 그러셨어요.”
병동을 지키던 간호사들이 청소 도구를 갖고 들어왔다.
넷이 힘을 합치니 금방 끝이 났다.
환자들이 모두 외출했거나 퇴원한 뒤라 다행이었다. 안 그랬으면 불평 좀 들었을 테니까.
이미라가 꽤 피곤한 기색을 보였다. 시혁도 그랬다. 유사 유계에 있었던 것은 고작 2시간이었지만, 둘에겐 거의 하루 종일 있었던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간호사들이 냉커피와 쿠키 같은 주전부리를 내왔다.
“치료가 많이 힘드셨나 봐요. 두 분 다 땀을 많이 흘리셨네요.”
유사 유계를 탐험하면서 긴장하긴 했었나 보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전신이 흠뻑 젖어 있었다. 시혁은 간호사의 말을 듣고서야 그것을 자각했다.
“휴, 그렇게 됐어요. 제가 했던 치료 중에서도 가장 힘들었던 것 같네요.”
“그 정도에요?”
임희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시혁은 씁쓸하게 웃었다.
잠깐 한담을 나누다 원장실로 내려왔다. 원장실에 있는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내일도 해야 할 일은 많았다. 무엇보다도 대한이능협회에 보고하는 것이 급했다.
멀리 갈 것 없이 601호에서 함께 보고서를 작성했다.
“몽마의 재를 가지고 다른 몽마도 추적할 수 있다고 하셨죠?”
“네. 정확히는 악몽의 재라고 부릅니다. 거기에 처녀의 생리혈을 섞으면 몽마를 유인하는 미끼가 되고, 영혼 나침반에 바르면 몽마에 당한 희생자를 찾는 탐지기가 됩니다.”
자세한 설명에, 이미라가 묘한 눈빛을 보냈다.
“선생님은 그런 걸 어떻게 다 아세요? 정보 계열 발현자라고는 들었는데, 누가 정리해 놓은 걸 훤히 들여다보시는 것 같아요.”
시혁은 한 차례 쓰게 웃었다.
“하하, 그렇습니까? 나중에 자세히 말씀드릴 때가 있겠지요.”
언젠가는 모든 것을 밝혀야겠지.
아르거스에 대해서.
정보를 독점한다면 많은 이득을 볼 수 있겠지만, 시혁은 그럴 생각까진 없었다.
지구를 습격한 괴수와 그로 인한 각종 재해들.
그것은 인류 전체가 공동 대처해야 할 문제니까.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좀 더 신뢰를 쌓고, 시혁 자신의 영향력을 더 강화한 다음에 공개하는 게 좋을 것이다.
처음에는 믿을 만한 몇 명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고.
그런 기색을 눈치 챘는지 이미라도 입을 다물었다.
보고서에 집중했다.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대한이능협회의 서류 양식은 대부분 간단했으니까. 이렇게 써도 될까 싶을 정도였다.
“몽마가 또 있을까요?”
이미라의 물음에, 시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가능성이 높죠. 언제부터 출현했는지, 수가 얼마나 될지가 관건입니다. 피해자들이 임신한 게 석 달만 넘지 않았으면 정화 이능으로 간단히 추스를 수 있는데, 그렇지 않으면 골치 아파지거든요.”
“피해자가 적어야 할 텐데요.”
“그러게 말입니다. 아, 거기 낙태라고 쓰지 마세요. 정화라고 쓰세요.”
“차이가 있나요?”
“당연하죠. 피해자들 뱃속에 들어 있는 건 인간이 아니라 몽마의 유충입니다. 유전적으로도 모체와 일치하는 점이 없어요. 당연히 낙태가 아니라 정화라고 써야 합니다. 낙태라고 써놓으면 괜히 논란만 일으킬 수 있어요.”
“그렇겠네요. 원장님 말대로 할게요.”
약 2시간 만에 보고서 작성을 마무리 지었다.
이미라가 보고서를 챙겼다.
“제가 광주 지부 가서 보고서 내고 올게요. 원장님도 같이 가실래요?”
“굳이 저까지 갈 필요가 있을까요?”
“기왕이면 같이 가는 게 좋죠. 가서 설명도 해주시고요.”
“좋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이메일로 보내도 되지만, 이미라는 직접 광주 지부를 방문하겠다고 했다.
하긴 그게 낫긴 하다. S급 이능력자가 대면하여 보고서를 내밀고 빠른 해결을 촉구하면 무시하기 힘들 테니까.
대한이능협회 광주 지부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굳이 뭘 탈 필요도 없이 도보로 이동했다.
지부장은 없지만 당직 이능력자 몇이 지부를 지키고 있었다. 이미라는 시혁과 함께 작성했던 보고서를 그들에게 제출했다.
당직 이능력자가 보고서를 보고 눈을 치켜떴다.
“이게 뭡니까?”
“새로운 괴수를 발견했어요. 당장 대처해야 해요.”
“잠시만…… 허어, 정말 이런 괴수가 존재합니까? 꿈을 통해 임신을 시킨다고요?”
“그러니까 문제죠. 빨리 지부장님한테 연락해주세요. 지금도 어디선가 피해자가 생기고 있을지도 몰라요.”
“지부장님 지금 고향 가셨을 텐데…… 어쩔 수 없지요. 당장 연락하겠습니다.”
이능력자는 재빠르게 움직였다.
비번이던 이능력자들이 모두 모여들었다. 지부장도 영광에서 곧 돌아온다고 했다.
그 사이, 시혁은 한 가지 물건을 만들었다.
몽마 나침반.
악몽의 재를 활용한 물건이었다. 만드는 방법은 그리 어렵지 않아서 시혁이 잘 기억하고 있었다. 가장 가까운 몽마 유충의 위치를 알아낼 수 있는데, 유효 범위가 반경 20킬로미터 정도 되었다.
제작을 마친 후, 시혁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둥근 접시에 바늘 하나가 둥둥 떠 있는 모양의 몽마 나침반이다. 아무런 움직임이 없기를 기대했는데, 한 차례 움찔하더니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이미라가 설마 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거 왜 이래요? 이 근처에 몽마가 있는 건 아니죠?”
“있습니다. 그것도 둘 이상이에요.”
“네? 정말요?”
“큰일이네요. 그냥 무턱대고 쳐들어가서 정화할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이건 협회만 아니라 정부에서 나서야 할 문제 같습니다.”
“맙소사……”
다른 이능력자들도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이 정도면 시혁이 할 일은 다 했다.
지부장이 돌아와서 회의를 주재하는 것까지 보고 한의원으로 돌아왔다.
이미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귀원했다.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원장님. 저 내일 퇴원해야 할 것 같아요.”
시혁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상황은 좀 어떻습니까?”
“말도 마세요. 완전 비상 걸렸어요. 원장님이 알려주신 나침반으로 찾아봤는데, 광주광역시 내에만 몽마 유충 셋이 확인됐거든요. 지금 협회장님이 절 호출하셨어요.”
“광주에만 셋이요? 큰일이네요. 그럼 내일 서울 가시는 겁니까?”
“아침에 퇴원하자마자 비행기 타고 날아가야 될 것 같아요. 광주에서 이 정도면, 서울은 얼마나 피해자가 많을지 상상도 안 돼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참, 너무 무리하진 마세요. 유사 유계에 다녀왔으니, 원래대로라면 한 사흘은 푹 쉬어야 합니다.”
“그럴게요. 어차피 전 강화 계열이라 몽마 사냥에는 직접적으로 참가하지 않으니까요. 참, 혹시 보약 같은 거 먹으면 도움이 될까요?”
“당연히 되죠. 주소 남겨 놓으시면 택배로 보내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해주세요.”
이미라는 당장 짐을 쌌다.
퇴원하면서 한 가지 제의를 했다.
“원장님, 나중에 제가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예? 아닙니다. 그러실 필요 없어요.”
“아니에요. 생각 같아선 차 한 대 뽑아드리고 싶은데 그건 싫다고 하실 것 같아서 식사라도 대접하려고요. 왜요, 저랑 밥 먹기 싫으세요?”
“그런 건 아닙니다만……”
몇 번 거절을 했지만 이미라는 막무가내였다.
어쩔 수 없겠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시혁도 싫지는 않았다.
연예인 뺨치는 미모의 이미라 아닌가. 몸매가 엄청나서 남미권의 미녀들을 보는 듯했다.
사적인 이득을 취하는 것 같아 좀 부담스럽긴 했지만, 끝까지 거절하기는 힘든 노릇이었다. 감사히 이미라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언제든 연락하세요. 전 요즘 시간 많습니다.”
“호호, 꼭 연락해야겠네요? 전 당분간 몽마 때문에 바쁠 것 같으니까 시간 나는 대로 연락할게요.”
“알겠습니다.”
이미라가 손을 흔들며 한의원을 떠났다.
입원해 있던 것은 겨우 3박 4일이었는데, 그 자취는 오래도록 남았다.
한의원에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601호에 입원했던 여자 환자와 시혁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것.
시혁은 입맛을 다셨다.
늦은 밤에 몇 시간 동안 같이 있었고, 그 다음 날에는 함께 한의원을 나가기도 했다. 이후 퇴원하면서 약속 운운 했으니 이런 소문이 도는 게 당연했다.
다람쥐 쳇바퀴 돌아가듯 단조로운 일상이다. 이런 가십거리라도 있어야지, 안 그러면 심심해서 못 견딘다.
시혁도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뜬소문에도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곧 오해가 풀릴 테니까.
과연 그러했다.
추석이 지나고 채 1주도 지나지 않아서, 모든 언론 매체에서 몽마 출현에 대한 이야기를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처녀를 임신시키는 몽마, 그 해결책은?]
[몽마가 인류를 공격하다!]
[인솜니움 페투라, 상상도 못했던 끔찍한 병!]
방송국과 신문사들은 온갖 자극적인 미사여구를 동원했다.
자연히 병원 사람들도 그 병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오해가 풀렸다.
이미라가 상황을 주도하고 있었는데, TV 인터뷰에서 시혁의 이름을 언급했기 때문이다.
[몽마의 존재에 대해 밝히는데 광주광역시에서 한의원을 운영 중인 발현자, 최시혁 씨의 도움이 컸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인터뷰 뒤로는 병원을 떠돌던 소문이 쏙 들어갔다. 당시 뭘 했는지 다들 알아챈 것이다.
뉴스를 통해 현재 상황이 속속 알려졌다.
몽마의 피해자는 생각보다 많았다. 대한민국에서만 1천 명이 넘는 것으로 공식 집계 되었다.
1천 명.
끔찍한 숫자였다.
그나마 빨리 발견해서 다행스러웠다. 희생자들 대부분이 임신 초기여서, 정화 이능을 받는 것만으로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이 진원지였는지 다른 나라에서는 몽마가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든 출현할 수 있는 게 몽마이니, 세계 각국의 산부인과 학회에서 임신 초기에 몽마 검사를 받으라고 강력히 권고했다.
시혁의 한의원도 덩달아 바빠졌다.
아주 상한가를 쳤다.
병동은 괴수 질병 환자로 꽉 찼다. 외래로도 많이 방문했다. 그뿐만 아니라 일반 환자들도 찾아와서, 한의원에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벌써부터 확장을 고려해야 할 정도였다.
하지만 30 병상부터는 한의원이 아니라 한방병원으로 분류가 된다. 좀 더 시간이 지난 다음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시기상조라고 봤다.
아니면 외래를 늘리던가.
일단 외래 간호사만 한 명 더 뽑았다. 그것만으로도 외래가 안정되어 원활하게 돌아갔다.
시간이 지났다.
10월 중순 경에는 몽마 사태도 좀 진정되었다.
이미라와 연락하여 약속을 잡았다. 이미라가 강권한 대로 식사 대접을 받기로 한 것이다.
약속 하루 전날 밤, 시혁은 생각지도 못한 일을 겪었다.
이미라.
그녀를 아르거스에서 만난 것이다.
[3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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