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 세계의 한의사-74화 (74/250)

< 몽마 -2- >

“쉬아아서니거거거거그이스스우여.”

아스라이 메아리 같은 게 들렸다.

이미라의 목소리였다.

근처에 있을 텐데, 꼭 멀리 산 너머에서 울리는 듯 웅웅거렸다.

시혁은 진득하게 기다렸다.

인내심 싸움이라 생각하고 몽마가 덮칠 때까지 기다리려는 거였는데, 문득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몽마를 끌어들이는데 사용한 물건이 뭐냐?

이미라의 자궁에 숨어 있다가 정화된 새끼 몽마 아닌가.

자연히 몽마는 이미라를 공격했을 것이다. 이미라는 비록 S급 이능력자이지만, 영혼 계열에게는 취약한 강화 계열이었다. 이미 한 차례 몽마에게 당하기까지 했으니, 어쩌면 위험에 처해 있을지도 몰랐다.

시혁은 속으로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서 영혼 계열 이능력자를 섭외하자고 한 건데……

어쩔 수 없지. 이미라의 사생활도 중요하니까. 아무리 유사 유계라고 해도, 몽마가 이미라를 압도한다고만 볼 수도 없고.

시혁은 수정 거울을 앞으로 내밀었다.

붉게 물든 세상이 거울을 통해서는 원래대로 보였다. 다만 거리 감각은 여전히 왜곡되어 있었다. 실제로는 한 발짝 떨어져 있을 이미라가, 족히 수백 미터 밖에 서 있는 것처럼 비쳤다.

거울에 보이는 광경을 의지하며 천천히 접근했다.

한참을 걸었다.

마침내 이미라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이미라도 그것을 느꼈나 보다. 고개를 들어 시혁을 보더니 뚜렷이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선생님!”

그러더니 달려와 덥석 안겼다.

풍만한 가슴이 시혁을 덮쳤다. 말로 형언하기 힘든 부드러운 느낌이 시혁의 전신을 감쌌다.

이미라가 시혁에게 애원하듯 속삭였다.

“선생님만 기다렸다고요…… 왜 이제야 오셨어요?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요?”

속삭이는 이미라의 음성이 달콤했다.

활짝 핀 장미꽃 같았다.

가시를 숨긴 채 유혹적인 향내를 풍겼다. 시혁의 눈앞에 관능적인 자태를 무방비 상태로 드러냈다.

목소리에 담긴 힘이 시혁의 정신을 흔들었다.

하지만 시혁의 얼굴은 무표정하기만 했다.

가만히 오른손을 들었다.

영혼 호랑이의 어금니를 움켜쥔 채, 인정사정 보지 않고 이미라의 옆구리에 찔러 넣었다.

“아악!”

이미라가 비명을 질렀다.

시꺼먼 연기가 상처 부위에서 솟구쳤다.

동시에 이미라의 몸이 꿈틀거리다가 그 모습이 변했다.

눈동자는 파래지고 머리칼은 회색이 되었다. 가슴과 엉덩이가 더 커져 비현실적인 몸매로 변했다. 얼굴은 조각처럼 아름다운데, 퇴폐적인 색기가 어려 있어 보는 이를 미혹시켰다.

몽마.

표독스러운 눈으로 시혁을 노려보더니 소리쳤다.

“이 고자 자식! 이렇게 아름다운 여자가 들이대는데 안 받아줘? 너는 사내새끼도 아냐!”

시혁은 코웃음을 쳤다.

눈으로 보면 이미라였지만 거울에 비춰보니 회색 머리의 몽마였다. 시혁은 몽마가 굉장히 아름답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괴수와 교합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위협적으로 오른손에 든 송곳니를 흔들었다.

“못 생긴 년아, 썩 꺼져라! 살만 뒤룩뒤룩 쪄서 보고 있기 역겹다.”

몽마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비록 오랜 삶을 살지는 않았으나, 이렇게 신랄한 말은 일찍이 들어본 적이 없는 까닭이다.

시혁이 이렇게 도발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몽마는 영체이고, 정신에 타격을 입으면 그게 심각한 피해가 되었다. 말로 공격하는 것은 비단 몽마만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영혼 계열 괴물에게 통했다.

아니나 다를까.

몽마의 몸이 흐릿해졌다. 마치 그림자처럼 변해 흔들거렸다.

“두고 보자, 이 사악한 놈! 내 궁전에서 인간 변기로 써주마! 세상이 다할 때까지, 네놈은 온갖 영체 종족들의 오줌과 똥을 받아먹어야 할 것이다!”

“누가 돼지 같은 년 아니랄까 봐 하는 말도 천박하구나. 똥? 오줌? 네 뚱뚱한 몸에 든 게 똥과 오줌이겠지!”

“이익, 두고 보자!”

몽마는 더 버티지 못했다.

이를 갈면서 자리를 떴다. 슬쩍 몸을 날리자 몸이 투명해져, 시혁이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미라가 있던 자리를 향해 갔다.

곧 만날 수 있었다.

목에 서늘한 느낌이 들더니, 긴 검이 시혁의 목에 드리워졌다.

“정체를 밝혀라, 또 너냐?”

몽마로 오인했나 보다.

시혁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미라 씨, 접니다.”

“선생님? 정말 선생님 맞아요?”

“거울로 비춰보세요. 그게 제일 정확해요. 지금은 저로 보여도, 언제 몽마로 변화할지 모르니까 조심하시고요.”

이미라가 거울에 시혁을 비춰보았다.

그렇게 확인하고 나서야 검을 거두었다.

“죄송해요. 몽마가 벌써 몇 번이나 나타나서 이번에도 몽마인 줄 알았어요.”

“이해합니다. 지금도 나타났네요.”

“네?”

시혁은 송곳니를 자연스럽게 이미라의 가슴에 꽂았다.

이미라가 멍하니 자기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얼굴이 물결치듯 일렁였다. 그게 몸 전체로 번지더니, 방금 전 보았던 몽마의 모습으로 변했다.

몽마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쩝. 거의 다 됐는데.”

하여간 몽마라는 족속은 음흉하기 짝이 없다.

방금 전까지 이미라는 진짜 이미라였다. 그런데 순간적으로 몽마가 자신과 이미라를 바꿔치기 한 것이다. 이미라는 몇 발짝 옆으로 이동하고, 몽마가 대신 그 자리를 차지했다.

딱 한 번만 거울을 확인하고 대했다간 속아넘어갔을지도 몰랐다.

몽마는 그 뒤로도 몇 번이나 나타났다.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 시혁을 유혹하려고 했다.

전신이 결박당한 가련한 여인, 길을 잃고 헤매는 소녀, 노골적으로 유혹하는 풍염한 중년 부인……

심지어 단체로 나타날 때도 있었다. 벌거벗고 군무를 벌이는가 하면, 술집 같은 정경을 꾸며놓고 한 잔 하고 가라고 손짓을 하는 것이다.

시혁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몽마가 유혹할 때마다 어떤 힘이 시혁을 옭아매려고 했다. 그때마다 코웃음 한 번으로 떨쳐냈다. 기계적으로 송곳니를 몸에 꽂아주자, 몽마가 질린 표정을 지었다.

“목석같은 놈. 네 거시기는 돌로 되어 있는 거냐?”

“그런 건 아니고, 네가 별로 예쁘지 않아서 흥분되지가 않을 뿐이야.”

“이이익! 죽여 버리겠다!”

말은 표독스럽게 하지만, 몽마는 이미 궁지에 몰려 있었다.

거울에 비친 몸이 거의 투명해졌다. 병실 바닥이 몸을 통해 고스란히 보일 지경이었다.

이미라도 잘 대처하고 있었다. 가끔 몽마를 만나면 시혁처럼 한 번만 공격하는 게 아니라 아예 난도질을 해댔다. 나중에는 기가 질려 이미라는 건드리지도 않았다.

한동안의 실랑이 끝에 몽마가 포기하고 말았다.

한 쪽은 분노의 화신이 되어 있고, 한 쪽은 고자인지 뭔지 유혹이 불가능한 인물이었다. 이대로 계속 유혹했다간 자신의 존재 자체가 위험해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통스러운 여정을 거쳐 도착한 이 세상에는 사냥감이 널려 있다.

손짓만 해도 발정 나서 달려드는 인간들이 수십억인데, 굳이 이런 어려운 사냥감에 집착할 필요 뭐 있나.

그 생각을 하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려고 했다.

가볍게 영체를 뺐는데, 그 순간 약한 반발력이 느껴지며 튕겨져 나오고 말았다.

“뭐, 뭐냐?”

몽마는 깜짝 놀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소환되었을 때는 몰랐던 게 두 눈에 들어왔다.

소금.

그것도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원시 거북이가 체내에서 합성한 소금이 주변 벽에 발라져 있었다.

참 깜찍한 짓거리였다.

평상시라면 모를까, 시혁과 이미라를 유혹하다 힘을 소모한 지금은 저걸 뚫을 수가 없다.

몽마가 이를 갈며 소금이 발린 벽을 노려보았다.

유령처럼, 시혁과 이미라가 그 앞에 나타났다.

시혁은 손에 든 송곳니를 까딱거렸다.

“이제 숨을 힘도 없나 봐? 자, 얌전히 몸을 대라. 빨리 끝내자.”

몽마가 그 와중에도 고혹적으로 웃었다.

“흐흥, 대주면 뭘 어쩌려고? 네 그거라도 꽂아줄 거야?”

“응. 이걸 꽂아주지. 조금 아플 거다.”

한 걸음 다가가자, 몽마가 다급하게 말했다.

“그러지 말고 협상하자.”

“뭐?”

“솔직히 말해서 나는 너랑 원수 진 게 없잖아? 저 여자는 내가 한 번 건드리긴 했지만, 이미 내 분신도 정화된 마당에 굳이 다툴 필요 없지 않겠어? 협상하자, 어때?”

예상하지 못했던 제안이다.

시혁은 몽마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미라는 어느새 또 없어진 뒤였다. 몽마가 힘을 쥐어짜 독대를 성사시킨 것이다.

몽마가 엉덩이를 살랑거렸다.

“나 이래 뵈도 능력 좋아. 혹시 마음에 두고 있는 여자 있어? 남자라도 좋아. 내가 이어줄게. 아니면 아무 때나 따먹을 수 있는 여자 필요하지 않아? 밤이면 밤마다 네가 원하는 얼굴, 원하는 체형의 여자로 변신해서 즐길 수 있게 해줄게. 어때?”

이번 제안에는 시혁도 잠깐 흔들렸다.

많은 남자가 바라는 바 아닌가.

비록 자신의 꿈속에서지만, TV 속 연예인은 물론 어떤 미녀라도 불러낼 수 있다면 혹할 만 했다.

하지만 금방 마음을 다잡았다.

겉을 어떻게 꾸미든 본질은 괴물이다. 남자의 정액을 원료 삼아 자신의 분신을 복제하고, 그걸 처녀의 자궁에 넣어 번식하는 놈이다.

거기에 일조하라고?

괴수 질병을 치료하는 게 아니라 확산되도록 돕는 꼴이다.

절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시혁은 냉엄한 얼굴로 일갈했다.

“어림도 없는 소리! 얌전히 목을 내놔라.”

가운 주머니에서 그림자 보자기를 꺼냈다.

보자기를 밖으로 까자, 아주 연약한 불꽃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순수한 정화의 불꽃.

현재 몽마의 상태라면, 이 불꽃에 닿기만 해도 타올라 재가 될 것이다.

몽마가 불꽃을 보고 이를 갈았다.

“너, 아주 작정을 했구나!”

“그럼 몇 번 때리고 끝날 줄 알았냐?”

불꽃이 등장하자 몽마의 존재감이 옅어졌다.

사라졌던 이미라도 다시 나타났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시혁과 몽마를 보더니, 이내 상황을 깨닫고 차갑게 웃었다.

이미라 또한 불꽃을 꺼냈다. 두 개의 불꽃이 나란히 압박하자, 몽마의 얼굴이 다급해졌다.

“그러지 말고 협상하자! 응? 내가 뭐든지 해줄게. 불꽃 좀 집어넣어. 내가 매일 밤마다 즐겁게 해준다니까? 응? 제발 말로 해, 그런 흉악한 것 좀 치워 줘!”

이미라가 혐오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더러운 놈. 이제 끝이다!”

가볍게 몸을 날렸다.

힘을 거의 소모한 뒤 정화의 불꽃에 노출된 상태.

몽마는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목 줄기가 송곳니에 관통되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이미라는 수십 번이나 송곳니를 몽마에게 찔렀다. 정화의 불꽃을 심장 부위에 쑤셔 박자, 푸른 불꽃이 일어나며 몽마를 태우기 시작했다.

“꺄아악!”

몽마가 비명을 질렀다.

몸부림을 치지만, 이미라의 완력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공간 이동에 가까운 움직임을 보이는 것도 불가능했고.

시혁은 그저 구경만 했다.

이미라는 몽마가 완전히 불에 휩싸이자 그때서야 물러났다. 아직도 성이 풀리지 않았는지, 몽마에게 침을 뱉으며 욕을 했다.

“퉷, 더러운 놈. 지옥에나 떨어져라!”

이렇게 일이 끝난 것일까?

아니다. 뒷마무리를 확실히 해야 한다.

불에 타고 남은 잔해를 뒤적였다. 완전히 재로 변한 것은 한쪽으로 밀어놓고, 잔해 속에서 끈적끈적한 액체 같은 것을 골라 한 곳에 모았다.

손을 대진 않았다. 송곳니만 썼다. 그러자 액체가 기괴하게 꿈틀거렸다.

이미라가 그걸 보고 질색을 했다.

“더럽게 그런 건 왜 만지세요?”

“이거 그냥 놔두면 안 됩니다. 새로운 몽마가 탄생해요. 정화의 불꽃을 더 써서, 완전히 태워 없애야 합니다.”

“아……”

모든 것을 불살랐다.

한 줌 재만 남았다.

악몽의 재라 부르며, 여러 방면으로 쓰이는 물건.

시혁은 놋쇠 향로의 불을 껐다.

자욱하던 연기가 흐트러지고, 지금껏 시혁을 얽매던 기묘한 감각이 소멸되었다.

이것으로 끝.

이미라를 괴롭힌 몽마는 완전히 소멸했다.

그러나 모든 일이 다 해결된 것은 아니다.

이미라 말고도 다른 피해자들이 있지 않겠나. 어쩌면 몽마가 더 있을 수도 있고.

지금부터가 더 중요했다.

< 몽마 -2- > 끝

ⓒ 산호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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