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처녀 임신 –2- >
시혁이 한 동안 말이 없자, 이미라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원장님, 저 어떻게 하죠? 낙태해야 하나요?]
[그건 제가 말을 드릴 수 있는 부분이 아닌 것 같습니다. 혹시 한의원에 오실 수는 없습니까? 제가 직접 진찰을 해야겠습니다.]
[네! 갈게요! 지금 갈게요!]
[제가 오후 6시까지 진료를 합니다. KTX 타시면 2시간이면 오니까, 그 전에만 오셨으면 좋겠습니다.]
[알았어요. 그때 갈 테니까, 꼭 시간 내주셔야 돼요?]
[걱정 마세요. 이따가 뵙겠습니다.]
전화를 끊었다.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참 별 일이 다 있었다. 처녀가 임신을 하다니……
일단 이미라를 직접 봐야 제대로 알 것 같았다. 지금은 정보가 너무 부족했다.
이미라는 오후 다섯 시 정도에 한의원에 도착했다. 접수를 하자마자 원장실로 들어왔는데, 잔뜩 흥분한 기색이었다.
“원장님!”
얼굴이 빨갛고, 눈에서는 불을 뿜다시피 했다.
일단 진정부터 시켰다.
“자, 여기 앉으세요. 지금 막 오신 겁니까?”
“네. 방금 도착했어요.”
이미라가 원장실 안을 서성이다가 겨우 의자에 앉았다.
시혁은 냉장고에서 시원한 음료를 하나 꺼내왔다. 그걸 건네자 이미라가 단번에 음료를 들이켰다.
“휴, 살 것 같네요. 감사해요.”
“좀 진정되셨습니까? 슬슬 얘기를 더 자세히 듣고 싶은데요.”
“정말로 더 드릴 말씀이 없어요. 의사들은 제가 어디서 남자랑 원나잇이라도 한 것처럼 얘기하던데, 진짜 그런 게 아니거든요. 처녀막은 멀쩡히 있다면서 그러니까, 돌아버리는 줄 알았어요.”
이미라가 답답하다는 듯 하소연을 했다.
“그리고 저도 따로 알아봤는데 제가 잡은 괴수들 중에서는 사람 임신시키는 게 없다고 하더라고요. 진짜 미치겠어요. 저도 이 남자 저 남자 만나고 다녔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도대체 왜 이런 거래요?”
그걸 이제부터 알아봐야 한다.
시혁은 두 가지 가능성 중 하나라고 보았다.
지구에 출현한 적이 없는 괴수가 일을 저질렀거나, 아니면 다른 이능력자에 의한 범죄이거나.
천천히 입을 열어 질문했다.
“이건 좀 예민한 질문입니다만, 괜찮겠습니까?”
“뭔데요? 말씀하세요. 의사가 환자한테 묻는 건데, 뭐 어때요.”
“혹시 미라 씨를 스토킹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미라가 얼굴을 찌푸렸다.
왜 그걸 묻는지 모르겠다는 듯, 두 눈에 의구심이 짙게 배어 있었다.
반면 시혁의 얼굴은 담담하기만 했다.
어떤 사심도 보이지 않는 태도.
덕분에 이미라도 냉정을 되찾았다.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좀 곤란한 얼굴을 했다.
“어…… 솔직히 말해서 몇 명 있었어요. 소송도 몇 번 했었죠. 그런데 그건 왜요?”
“어디까지나 제 생각입니다만, 다른 이능력자에 의한 범죄일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뭐, 뭐라고요?”
이미라가 말을 더듬었다.
충격 받은 얼굴을 하더니, 시혁을 멀거니 쳐다보았다.
“그런 게 가능한가요?”
“가능하지요.”
시혁은 현자 시험을 준비하면서 열람했던 현자들의 업적을 떠올렸다.
그 중 몇 개가 있지 않았나.
성적 교합 없이 임신하게 만드는 열매의 물약이라든가, 인공적으로 쌍둥이를 배게 하는 마법 같은 것들이.
그것을 이용해 범죄가 이뤄졌거나, 아니면 그런 효력이 있는 줄 모르고 이미라가 복용했을 수도 있었다.
아니면 지구에 알려지지 않은 괴수, 가령 몽마에게 당한 것일 수도 있다. 몽마는 꿈속에서 인간 처녀와 교합하는데, 인간 처녀는 그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대신 배가 불러오고, 몇 달 후 새끼 몽마를 출산하는 것이다.
일단 몽마는 제외하고 설명을 했다. 너무 충격적인 내용이니까.
그것만으로도 이미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러고 보니까 저도 그런 얘기 들어본 것 같아요.”
“혹시 짐작 가는 게 있습니까?”
“글쎄요. 저한테 치근덕대는 사람은 있지만 이런 식으로 범죄를 저지를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뭘 잘못 드셔서 그런 것일 지도 모릅니다.”
“하아, 어렵네요.”
이미라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시혁도 이 시점에선 뾰족한 수를 낼 수가 없었다.
낙태를 하고 말고는 이미라가 결정할 일이고, 어떤 경위로 임신했는지 알아내는 것도 이미라에게 달려 있으니까.
이미라가 간절한 눈으로 시혁을 보았다.
“원장님 전 어떻게 해야 하죠?”
잠깐 침묵했다.
당장 어떻게 해줄 수는 없어도 결정에 도움을 줄 수 있지는 않을까.
“제가 보기에 미라 씨가 당장 할 일은 두 가지입니다.”
“두 가지요?”
“예. 첫 번째는 뱃속의 아기를 어떻게 할지 결정하는 거고, 두 번째는 투시 계열 이능력자를 섭외하든 어쩌든 해서 임신한 경로를 알아내는 겁니다.”
이미라가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 배를 한 번 쓰다듬더니,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이런 경우에는 낙태해도 법적으로 문제가 생기지는 않겠죠?”
“모자보건법에서 정한 경우에는 가능합니다. 그 중 하나가 강간 또는 준강간에 의해 임신된 경우인데 이 경우에도 적용될지는 모르겠네요.”
“그럼 어째서 임신했는지 알아내는 게 먼저겠네요?”
“그렇지요. 듣기로 사이코메트리 같은 이능을 가진 사람들이 꽤 있다는데, 그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맞아요. 그래야겠네요. 상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누리 공격대 출신이시라면서요? 누리 공격대에 도움을 많이 받고 있으니 그걸 좀 갚은 셈 치지요. 미라 씨도 앞으로 누리 공격대에 신경을 좀 써주세요.”
“네, 그럴게요. 감사합니다.”
이미라의 얼굴이 좀 안정된 듯 보였다.
여전히 충격을 받은 상태인 것은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능력자답게 스스로를 추스르는 능력이 뛰어났다. 그 정도쯤 되니 일선에서 괴수들과 싸우지 않겠나.
게다가 이제는 자신이 임신한 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여전히 분통 터지고 황당하긴 해도, 그 덕에 냉정을 되찾게 된 것이다.
이미라가 감사하다며 시혁에게 인사를 했다.
그러면서 봉투를 찔러 주려고 하자 시혁이 거절했다. 지금 한 것은 기껏해야 간단한 상담에 불과했으니까.
“밖에서 그냥 수납만 하고 가세요. 혹시 제 치료가 필요하면 그때 다시 오시고요.”
“그래도요.”
“정말 괜찮습니다. 정 마음에 걸리면 강찬 씨랑 신아영 님한테 잘 해주세요. 저도 두 분한테 신세 많이 지고 있습니다.”
“휴, 알겠어요. 오늘 일 정말 감사했어요. 다음에 또 뵐게요.”
“예. 부디 빨리 회복되시길 빕니다.”
이미라가 정중히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시혁은 그렇게 일단락된 줄 알았다.
그런데 오산이었다.
저녁 9시, 원장실에서 쉬고 있는데 이미라가 또 전화를 했다.
받자마자 울먹이며 하소연을 한다.
[원장님, 저 어쩌죠?]
뭐지?
목소리에 실린 울음에 저절로 긴장이 되었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미라를 달랬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울지만 말고 자세히 말씀해보세요.]
[실은……]
서울에 가자마자, 이미라는 가족처럼 친한 한 투시 계열 이능력자에게 상담을 청했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섭외한 이능력자가 이미라의 과거를 투시한 결과, 한 남자와 성행위를 하는 장면이 보였다는 것이다.
칙칙한 회색 머리칼에, 권태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파란 눈동자의 외국인.
처음에 이미라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자기는 분명히 그런 적이 없었으니까. 급기야 투시 계열 이능력자가 정신 감응 이능으로 자신이 본 영상을 이미라의 뇌에 직접 투사해주었다.
그 순간, 이미라가 무너져 내렸다.
자신이 정체모를 백인 남자와 엉켜있는 장면이 여과 없이 보였기 때문이다.
저 남자는 대체 뭐야?
나는 왜 저기 있는 거지?
이미라가 울며 말했다.
[원장님, 저 어떻게 해요? 그 남자 진짜 생전 처음 보는 남자에요. 맹세할 수 있어요. 원장님은 저 믿으시죠?]
두서없는 말이 자꾸 튀어나왔다.
여기까지 듣자, 시혁은 슬슬 사건의 전모를 파악할 수가 있었다.
확신을 하기 위해선 몇 가지 정보가 더 필요하다.
[그 이능력자, 어떤 식으로 과거를 읽어낸 겁니까?]
[네?]
[사이코메트리는 사물의 기억을 읽어서 과거를 보는 거잖습니까? 그 이능력자의 이능이 어떻게 작용하는 건지 알아야 합니다. 단순하게 과거에 있었던 사건을 보는 건지, 아니면 인과 관계를 역으로 추적하여 원인을 알아내는 방식인지 알아야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어요.]
[언니 말로는 인과 관계를 직접 추적한다고 했어요. 저랑 같은 공격대 있는 아주 친한 언닌데, 지금까지 실패해 본 적이 없어요.]
[사정이 어떻게 된 건지 알 것 같네요. 그 사람 말고 다른 사람에게 또 과거 투시를 의뢰해보세요. 좀 부끄럽더라도, 육체를 직접 이용하는 게 좋겠습니다. 여자 이능력자한테 의뢰하는 게 좋겠네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어요.]
[미라 씨가 아시는 줄 모르겠는데 판타지 소설에 잘 나오는 괴물 중 인큐버스와 서큐버스라는 게 있습니다. 어쩌면 그와 비슷한 괴수의 소행일 지도 모릅니다.]
[인큐버스? 서큐버스? 그런 건 처음 들어봐요.]
[그럴 겁니다. 아직까지 보고된 적은 없으니까요. 하지만 언제든 나타날 가능성은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르거스에는 분명히 존재하니까.
이미라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정말인가요?]
[정말입니다. 일단 제 말대로 하세요. 손해 볼 것은 없지 않습니까? 미라 씨가 육체관계를 맺지 않았는데 임신을 했고, 그게 그 정체불명의 백인 남자 때문이라면 그 백인 남자는 인간이 아니라 괴수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아! 꼭 소설 같은 이야기네요. 하긴 5년 전부터 지구 전체가 다 그랬죠. 알았어요. 그렇게 할게요. 마침 아는 이능력자가 있으니까 부탁해 볼게요.]
[결과 나오면 저한테도 알려주세요.]
[네. 늦은 밤에 전화해서 죄송해요.]
참 별 일이 다 있었다.
지구에 몽마가 나타날 줄이야.
이능력자일 가능성은 적었다. 몽마는 중립 괴물로 존재하는 괴수라, 몽마로 진화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종례를 받고 시간이 지났다. 막 씻고 숙소로 들어가는데, 스마트폰이 진동하며 문자가 도착했다고 알렸다.
이미라였다.
[원장님! 원장님 말이 맞았어요. 저는 분명히 육체관계를 맺은 적이 없대요!]
이제 확실해졌다.
화면을 두드려 답장을 보냈다.
[미라 씨, 혹시 성교하는 꿈을 꾸거나 귀접한 경험 없습니까? 그게 아니면 가위 눌린 경험이라도 좋습니다.]
[어, 그러고 보니……]
짚이는 게 있는 모양이다.
[7월 말인가 8월 초인가 몇 번 가위 눌렸던 것 같아요. 두 번? 세 번?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그때 아랫배에 이상한 느낌을 받았는데, 그 이후에는 그런 일이 없어서 그냥 넘어갔어요.]
이거다.
산부인과에서 6주 진단을 받았다고 했으니 시기적으로도 거의 일치했다. 산부인과에서 말하는 주수는 산모의 마지막 생리일부터 세니까.
[그것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제 원인을 알았네요.]
[그럼 전 어떻게 하면 되죠?]
[굳이 병원 가서 낙태하실 필요 없습니다. 정화 계열 이능력자 찾아가서 하복부에 정화 이능을 받으세요. 그럼 하루 정도 하혈하는 것으로 끝입니다. 그리고 보호 이능이 걸린 장식을 침실에 두거나 항상 소지하시면 이런 일이 없을 겁니다.]
[그래요? 다행이네요. 원장님께 상담하길 잘 했어요.]
[미라 씨는 별 문제가 안 됩니다. 초기에 알아냈으니까요. 만약 5개월 6개월 지나서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으면 골치 아팠을 겁니다. 이렇게 간단히 일을 끝내지는 못했겠지요.]
[휴, 그러게요. 미애한테 고맙다고 밥이라도 한 끼 사야겠어요.]
시혁은 쓰게 웃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이미라는 자신에게 닥친 상황만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 시혁이 우려하는 것은 다른 곳에 있었다.
이미라를 임신시킨 정체불명의 몽마 괴수.
그놈을 잡아야 했다.
피해자가 딱 이미라 하나일 리가 없지 않은가.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앞으로 분명 다른 피해자가 생길 것이다.
시혁의 눈이 차가워졌다.
< 처녀 임신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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