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결혼식 >
시간 참 빠르다.
벌써 9월 초다.
병원을 박차고 나와 한의원을 개원한 게 엊그제 같은데, 2달이 넘는 시간이 훌쩍 지나간 것이다.
달력을 보며, 시혁은 잊고 있던 기억을 상기했다.
‘강찬 씨랑 신아영 님 결혼식이 9월 첫째 주 일요일이라고 했지?’
여러모로 인연이 깊은 사람들이다. 당연히 시혁도 가는 게 좋다.
9월 4일 일요일이 되었다.
시혁은 검은 양복에 무난한 넥타이를 매고 한의원을 나섰다.
지금도 입원 환자가 꽤 있어 원장실에서 숙식 중이었던 것이다. 언제까지 그럴 수는 없어서, 조만간 인근에 오피스텔을 구할 예정이었다.
결혼식은 상무지구의 한 호텔에서 열렸다.
택시를 타고 도착하자, 결혼식장 앞에 서 있던 강찬이 얼른 뛰쳐나왔다.
“원장님, 오셨습니까? 바쁘신데 괜히 청첩장 드린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닙니다. 주말이라 한의원도 쉬는 걸요. 당직 간호사도 있고요. 두 분 결혼하시는데 당연히 와봐야죠. 그 동안 얼마나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요.”
“어이쿠, 도움은요! 저희가 원장님께 은혜를 입었지요. 원장님이 아니었으면 여기 들어오지도 못했을 겁니다. 아직도 아영이가 병원에 누워 있었겠지요.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강찬이 절을 하듯 허리를 숙였다.
이제 좀 그만할 법도 한데 이 얘기만 나오면 허리를 숙여대니 시혁도 적잖이 민망했다.
어서 일어서라고 손짓을 했다.
“어휴, 그만 하세요. 얼른 일어나세요. 어서요.”
몇 번 실랑이를 벌인 다음에야 강찬이 허리를 폈다.
주변 사람들이 묘한 얼굴로 둘을 보고 있었다.
그들도 시혁을 알아본 것 같았다. 시혁의 귀로 좀비니 발현자니 하는 말이 들렸다. 시혁과 강찬의 관계는 잘 알려져 있어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던 중, 한 요염하게 생긴 여성이 다가왔다.
특정 부위 두 곳이 아주 터질 것 같았다. 자연히 눈길이 갔는데, 단지 미모 때문이 아니었다.
에테르 파동이 느껴졌다.
그런데 다른 이능력자들보다 훨씬 강했다. 이 정도면 에테르 파동만으로도 사람을 후려칠 수 있을 것 같았다.
강찬이 여성을 보고 깜짝 놀랐다.
“미라 씨! 여기엔 어떻게 오신 겁니까?”
여성 이능력자가 빙긋 웃었다.
“왜요, 제가 못 올 곳을 왔나요? 누리 공격대는 제 친정집이나 마찬가지잖아요.”
“계시는 동안 제대로 대우도 못 해드렸는데……”
“대신 아사달 공격대에 연결시켜 주셨잖아요. 지금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둘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시혁은 여자의 정체를 깨달았다.
S급 이능력자다.
아사달 공격대는 오로지 S급 이능력자만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으로 유명하니까.
강찬이 자연스럽게 둘을 서로에게 소개했다.
“미라 씨. 여기 이분은 최시혁 원장님입니다. 저번에 말씀드렸지요? 아영이를 치료해 주셨고, 좀비 사태를 해결하신 분입니다.”
“아, 저도 들은 기억이 나요. TV에서도 봤고요. 치유 계열 발현자라고 하셨죠? 만나서 반가워요. 아사달 공격대 이미라에요.”
“최시혁 원장님. 여기 미라 씨는 S급 이능력자입니다. 겉보기에는 좀 여리여리 해도 속은 강화 계열 이능력자니까 조심하세요. 섣불리 접근했다가 쌍코피가 터진 남자가 한 트럭……”
“강찬 씨!”
이미라가 소리를 빽 질렀다.
강찬이 찔끔했다. 애써 웃으며 이미라를 달랬다.
“하하, 그냥 농담한 겁니다. 웃자고 한 이야기에요. 아, 아영이 신부 대기실에 있는데 한번 가보실래요?”
말을 돌리자, 이미라가 날카로운 눈으로 강찬을 째려보았다.
시혁은 먼저 발을 뺐다.
“전 신아영 님에게 가보겠습니다. 신부 화장한 모습이 궁금하네요.”
“보시면 깜짝 놀라실 겁니다.”
미리 챙겨온 축의금을 냈다. 마침 한세훈이 앉아 있었는데, 시혁을 보더니 찡긋 눈짓을 보냈다. 시혁도 목례를 해서 화답했다.
신부 대기실로 향했다.
신아영이 흰 드레스를 입고 곱게 화장한 채 앉아 있었다. 하객들과 사진을 찍다가, 시혁을 발견하고는 활짝 웃었다.
“원장님! 이제 오셨어요? 얼른 이쪽으로 와요. 사진 찍어야죠!”
웨딩 드레스를 입었어도 사람 성격은 어딜 가지 않나 보다. 여전히 활발함이 묻어나왔다.
같이 앉아 사진을 찍었다.
신아영은 시혁과 더 이야기를 하고 싶어 했지만 하객들이 워낙 많았다. 시혁은 간단히 사진만 찍고 물러나왔다.
뒤에서 신아영이 또 꺅꺅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 미라 언니! 오랜만이야! 못 올 줄 알았어!”
“그래,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기집애, 결국 나보다 먼저 결혼하는구나?”
“헤헤, 그러니까 언니도 얼른 남자친구 만들라니까.”
“그게 말처럼 쉽니?”
둘의 대화를 뒤로 하고 예식장 안으로 들어갔다.
구석에 혼자 앉아 있는데, 김미애가 시혁을 알아보고 옆에 와서 앉았다.
시혁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입니다.”
김미애가 투정하듯 말했다.
“원장님 얼굴 보기 정말 어렵네요. 이러다 얼굴 잊어버리겠어요.”
“하하, 그런가요?”
시혁은 그저 웃어 넘겼다.
그때였다.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들리더니 한 여성이 김미애의 옆에 앉았다.
이미라였다.
얼굴을 확인한 김미애의 눈이 커졌다.
“언니! 이게 얼마만이야!”
“아사달 가고 나서는 거의 처음이지? 잘 지냈어?”
“응응, 잘 지냈지!”
두 여인의 수다가 불 붙었다.
시혁은 멀거니 앞만 쳐다보았다.
어느새 예식이 시작되었다.
강찬이 입장하고, 그 뒤를 이어 신아영도 입장했다. 그때마다 경쾌한 음악이 울리고,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쏟아졌다.
한 가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혼주석이 없었다.
설마……
한편, 옆에 앉은 두 여인이 눈물을 글썽이며 결혼식을 지켜보았다.
“정말 잘 됐다.”
“그러게. 둘이 엄청 고생했잖아.”
“앞으로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당연히 그래야지.”
예식은 흥겹게 진행되었다.
사회자가 하는 말마다 뻥뻥 터졌다. 원래 개그 실력이 충만한 사람인가 싶었는데, 알고 보니 유명 개그맨이라고 했다. 심지어 축가도 시혁이 TV에서 몇 번 봤던 가수가 와서 불렀다.
주례는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수녀가 맡았다. 여자가 주례를 하는 것은 처음 봐서 의아했는데, 김미애와 이미라의 말을 듣고 의문이 풀렸다.
“베아트릭스 수녀님이 주례 보시네?”
“찬이 오빠랑 아영이한테 부모님 같은 분이잖아. 베아트릭스 수녀님 아니었으면 둘 다 어떻게 됐을지 몰라.”
“그건 그래.”
속사정은 간단했다.
강찬과 신아영은 고아고, 베아트릭스 수녀가 운영하는 고아원에서 자랐다는 것.
고아원은 한때 자금난으로 운영이 어려웠지만, 지금은 둘이 운영을 거의 책임지고 있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들으니 가슴이 뭉클했다.
둘이 행복하게 살기를 빌며, 예식을 지켜보았다.
예식이 끝나고 둘이 첫 행진을 시작했다.
박수와 함성이 쏟아졌다.
“잘 살아야 돼!”
“아영이 누나 울리면 가만 안 놔둘 거야!”
“부부 싸움은 하지 말고! 아영이 누나가 한 대 치면 찬이 형 죽을 지도 몰라!”
펑! 펑!
폭죽이 터졌다.
천장에서 꽃잎이 흩날렸다. 강찬과 신아영은 활짝 웃으며 사람들 사이를 걸었다.
행진이 끝났다.
부케는 같은 고아원 출신의 한 일반인 여성이 받았다. 동글동글 복스러운 얼굴이 인상적인데, 내년 초에 남자친구와 결혼한다고 했다.
그 다음에는 사진 촬영.
시혁은 이능력자들 사이에 끼어 사진을 찍었다. 축하객들이 하도 많아서 사진을 찍는데만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한세훈이 시혁의 어깨를 툭 쳤다.
“원장님! 식사 아직 안 하셨죠? 밥 먹으러 가요.”
“그러죠. 일은 다 끝났습니까?”
“찬이 형네 고아원 동생들한테 물려줬어요. 걔들이 알아서 하겠죠.”
한세훈만 아니라 김미애와 이미라도 따라 붙었다.
식사는 뷔페식이었다. 광주에서 가장 유명한 호텔답게, 시혁이 가봤던 예식장들과는 비교를 불허했다.
밥을 먹으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했다.
슬슬 배가 찰 무렵, 한복을 입은 강찬과 신아영이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역시 인물은 잘 나고 볼 일이다.
화폭에서 튀어나온 것 같았다. 단아하고 맵시 있는 한복이 둘과 아주 잘 어울렸다.
둘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인사를 했다. 시혁이 앉아 있는 곳에도 다가오더니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았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음식은 입맛에 맞으세요?”
“네. 정말 맛있네요. 역시 호텔은 호텔입니다.”
“이능력자가 되고 우연히 여기 호텔 뷔페에 온 적이 있습니다. 신세계였지요. 그때부터 제 꿈은 이곳에 손님들을 초빙하여 잔치를 여는 것이 되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됐네요.”
강찬이 감회 어린 얼굴로 말했다.
신아영이 말없이 강찬의 손을 잡아주었다.
둘이 서로를 마주 보는데, 따스하면서도 부드러운 시선이 오갔다.
그걸 보니 좀 부러웠다.
시혁에게도 언젠가 저런 시선을 나눌 사람이 생길까?
모를 일이다.
강찬과 신아영은 좀 앉아 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시혁이 중요한 손님이긴 하지만, 다른 손님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한세훈이 둘이 멀어지는 걸 보면서 말했다.
“옛날 생각나네요. 아영이가 사지마비 되어서 입원했을 때는 진짜 아찔했는데…… 만약 아영이가 낫지 못했으면 저는 저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했을 거예요.”
김미애도 동감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원장님 아니었으면 진짜 큰일 났을 거야. 어휴, 그때 생각하면 지금도 소름이 돋는다니까? 난 몸에 탈나면 너한테 안 맡길 거야. 그냥 원장님 찾아갈래.”
“쳇, 마음대로 해.”
둘의 대화를 듣고 시혁은 쓰게 웃었다.
처음 병원에서 만났을 때, 신아영이 한세훈에게 이능 치료를 받고 더 악화된 상태였다는 것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이미라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그렇게 대단하셔?”
옆에 시혁이 있다 보니 목소리를 낮춘다고 낮췄는데, 결국은 다 들렸다.
김미애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좀비 사태도 원장님 혼자 해결한 거나 다름이 없잖아. 뉴스에서 과장한 것처럼 보이지? 절대 과장한 게 아냐! 얼마나 대단했다고! 이번에 광주에서 발생한 광기 사건도 마찬가지야. 원장님이 없었으면 몇 달은 더 끌었을 걸?”
“그래?”
이미라가 솔깃한 표정을 지었다.
자기 배를 한 번 문지르더니, 슬쩍 시혁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그럼 나도 진찰이나 한 번 받아볼까? 요즘 소화가 잘 안 되는지 속이 좀 답답한데……”
“진짜? 언니 강화 계열이잖아? 그런데 왜?”
“스트레스성 아닐까? 아직 병원에 안 가봐서 모르겠어.”
“잘 됐다. 기왕 온 김에 진찰 받아 봐. 어려운 거 아니잖아. 원장님, 그렇죠?”
김미애가 시혁을 돌아보았다. 그러면서 묘한 눈짓을 보내는 게, 뭔가 꿍꿍이속이 있는 모양이었다.
왜 저러지 싶었다.
그러면서도 이미라의 병력을 청취하고, 손을 잡아 촌관척 부위를 진맥했다.
TV에서나 볼 성 싶은 미녀 아닌가.
시혁도 남자라 미녀 앞에서는 곧잘 관대해지곤 했다. 잠깐 상태를 봐 주는 거야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손을 잡아볼 기회이기도 하고.
맥을 짚자, 힘이 부드럽게 박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정상맥.
그렇게 알고 손을 떼려는데, 맥이 살짝 변했다.
부드럽게 물결치는 가운데, 흡사 구슬이 굴러가는 것처럼 미약한 반발감이 전해졌다. 마치 기름종이 위에 작고 도톰한 구슬을 두고 손으로 굴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여성 환자들을 진찰하면서 몇 번 본 적이 있는 맥이다.
활맥(滑脈).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지만, 이렇게 젊은 여자 환자라면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게 있다.
바로 임신이다.
< 결혼식 > 끝
ⓒ 산호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