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 세계의 한의사-67화 (67/250)

< 진리 진영 –3- >

“어쩌지?”

“마나 공유를 끊어야 하나?”

“만물 탐구자의 이적만으로는 저들을 저지할 수가 없다.”

“병력을 나눌까?”

“아니. 그랬다간 이도 저도 안 된다.”

군대를 이끌던 두 영웅은 일순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드워프 군대가 예상보다 더욱 선전을 하는 까닭이었다. 설마 이적 세례를 몸으로 받아낼 줄은 몰랐나 보다.

시혁은 두 영웅을 노려보았다.

이럴 때일수록 기민하게 움직여서 대처를 해야 한다. 그런데 진리 진영에서 연구만 주구장창 하다가 영웅이 되어서 그런지 빠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별 수 없다.

시혁이 나섰다.

정중하면서도 당당한 태도로 영웅들을 불렀다.

“두 분, 제게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영웅들이 시혁을 돌아보았다.

떨떠름한 감정이 그들의 눈에 깃들었다.

이건 뭐하는 물건이냐는 표정으로 시혁을 쳐다보고 있었다.

“뭐야? 학자인가?”

“학자치곤 복색이 좀 이상한데……”

그러다 불현 듯 시혁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여자 영웅이 탄성을 질렀다.

“생명 진영의 의학자로군! 전향한 건가?”

시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원래 권세 진영의 치료사였고, 생명 진영 의학자를 거쳐 진리 진영 현자가 되기 위해 전향했습니다.”

그 말을 듣자, 영웅들의 얼굴에서 의아함이 씻은 듯 사라졌다.

2번째 전직을 앞두고 있을 정도면, 최소한 맹탕은 아니라는 뜻이니까. 이제 갓 영웅이 된 이들보다는 더 많은 경험을 했을 수도 있었다.

“말해 보시오. 시간이 없소.”

말투까지 바뀌었다.

시혁은 군대의 절반을 차지하는 마법 생명체들을 가리켰다.

가고일, 골렘, 호문쿨루스, 키메라, 그림자 병사 등등.

소환자가 아니었다. 제한된 이성을 가진, 일종의 인형에 불과했다.

“저는 저들을 광폭화시킬 수 있습니다. 전투력이 상당히 늘어나니까, 꽤 도움이 될 겁니다.”

광폭화.

거장이 되면서 생긴 특기였다.

그것을 확인하자, 기분이 참 묘했다.

야만 군주에게 했던 일이 대단하긴 대단했구나 하는 생각과, 이것 때문에 지구에 핏빛 광기가 나타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함께 들어서였다.

영웅들이 눈을 반짝였다.

“광폭화라고? 좋소. 해보시오.”

만물 탐구자도 셋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사용하는 이적을 바꾸었다.

직접적인 타격을 입히는 대신 시간 정지와 둔화, 대규모 공포와 군중 혼란 등 시간을 버는 이적을 주로 썼다.

그러자 산중군주가 엉뚱하게도 진리 진영 군대 뒤쪽에 이적을 퍼부었다. 늪 생성과 함정 설치 이적이었는데, 아마 후퇴하려는 줄 안 모양이었다.

덕분에 천금 같은 시간을 벌었다.

시혁은 인공 생명체와 마법 생명체들을 불러 모았다.

“어서 이쪽으로 와라! 시간이 없다!”

광폭화를 사용했다.

시혁의 몸에서 훅 하고 붉은 안개가 뛰쳐나왔다. 붉은 안개가 마법 생명체들을 덮치더니, 그 정신을 흐리게 만들었다.

대번에 피부가 빨갛게 변하고, 두 눈에서 핏빛 안광이 터져 나왔다.

“쿠어어어!”

“크르르!”

마법 생명체들이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돌진했다.

만물 탐구자가 드워프 군대의 속도를 늦춘 보람이 있었다. 이제야 지척에 도달했다. 결국 드워프 군대와 마법 생명체들이 거세게 부딪쳤다.

마법 생명체들은 밀리지 않았다. 비록 전력에서는 형편없이 뒤떨어지지만, 어쨌든 드워프 군대의 발목을 붙잡는데 성공했다.

그것으로 전투의 향방이 결정되었다.

만물 탐구자가 아껴두었던 마나를 몽땅 소모했다. 수십 가지의 이적이 드워프 군대를 두들겼다. 전면에서 돌진했던 드워프들이 더 이상은 버티지 못하고 하나둘 쓰러졌다.

아군도 완전히 무사하진 못했다.

후방에 위치한 대형 병기에서 공격이 날아온 까닭이었다. 각자 방어 마법을 사용하여 막긴 했지만, 바로 인근에 위치한 드워프 군대에 시선을 빼앗겼다가 마법을 늦게 쓰는 경우가 생겼다.

시혁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책상물림이어도 그렇지, 이건 좀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어쩔 수 없이 시혁이 진영 곳곳을 돌아다녔다.

죽지만 않았으면 치료할 수 있었다. 현자와 학자들은 치료 능력이 있지만, 그들은 그냥 만물 탐구자에게 마나를 공급하게 놔뒀다.

이윽고 전투가 끝났다.

드워프 군대는 대부분의 전력을 잃은 채 패주했다. 대형 병기는 남아 있으니 수성은 가능할 법 한데, 당분간 공격해 오기는 힘들 터였다.

[후퇴하라.]

만물 탐구자도 군대를 물렸다.

목적지는 인근에 위치한 마나 집중점.

지금 끝장을 낼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하기야 진리 진영의 반신은 이적 승리를 하는 게 가장 이익이라고 하니까.

마나 집중점에는 이미 하인들이 몰려와 추출탑을 건설 중이었다. 추출탑을 보호할 요새도 함께 올라가고 있었다. 마법 포탑과 마법 수정 등 다양한 방어 시설도 함께 보였다.

일단 이렇게 진리 진영이 방어를 굳히면 다른 진영에서 뚫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더구나 만물 탐구자는 본성과 이곳 마나 집중점을 차원문을 이용해 연결해 버렸다. 유지하는데 마나가 꽤 들겠지만, 이렇게 승리를 굳히려는 것 같았다.

차원문을 이용하여 본성으로 돌아왔다.

지식의 전당에서 밀린 공부를 시작했다. 전방에 다녀와서 그런지, 외워뒀던 것을 꽤나 잊어버린 뒤였다.

“하아……”

흐름이 끊겨서 그런지 다시 불을 붙이기도 쉽지 않았다. 몇 시간이나 앉아 끙끙거린 다음에야 정신을 집중할 수 있었다.

시간이 하염없이 흘러갔다.

전방에서는 드워프 군대가 계속 공격해 오는 듯했다. 하지만 대부분이 막 소환되어 1레벨에 불과했다. 규모는 상당했지만, 적절하게 방어 이적을 쓰는 만물 탐구자의 요새를 뚫지는 못했다.

그러는 사이 만물 탐구자가 충분한 마나를 모았다.

본성 중앙, 진리의 탑이 투명한 빛을 뿜으며 진동하기 시작했다.

애써 무시하고 공부를 더 하려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리더니 안으로 들어왔다.

“이보게. 곧 만물 탐구자께서 승천하실 것 같은데 여기 이렇게 있을 텐가?”

수염이 덥수룩한 중년의 남자.

처음 지식의 전당에 들어왔을 때 얘기를 나눈 인물이면서, 몇 번 식사를 같이 한 인물이었다.

시혁은 어깨를 으쓱였다.

“아직 마나학도 제대로 못 끝냈습니다. 구경하러 갈 시간이 없어요. 한 글자라도 더 봐야 합니다.”

“어허, 이 사람 기껏 우리 진영에 와 놓고 아는 게 없어도 너무 없구먼. 그런 소리 하지 말고 얼른 따라 나오게. 그냥 구경하는 게 아냐. 승천 이적을 눈으로 보고 그 힘의 파장을 느끼는 것은 모든 소환자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네.”

“긍정적인 영향이요?”

“그래. 말로 표현하긴 힘드니 직접 경험해 보는 게 좋을 거야.”

이렇게까지 말을 하는데 더 고집을 부리긴 힘들었다.

못 이기는 척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진리의 탑 앞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마나 집중점에 배치되었던 소환자들까지 와서, 발 디딜 틈 하나 없었다.

겨우 자리를 잡았다.

웅웅웅웅.

진리의 탑이 진동하는 게 갈수록 심해졌다.

날렵하게 쭉 뻗은 탑 끄트머리에 문득 금색 빛이 어렸다.

금색 빛은 점차 영역을 넓혔다.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더니, 어느덧 작은 태양처럼 변했다. 탑에 매달린 채 찬란한 빛을 세계 전역으로 뿌렸다.

막대한 힘이 느껴졌다.

빛이 존재하는 것만으로 세계가 비명을 질렀다. 하늘의 격자무늬가 뭔가에 얻어맞은 것처럼 쉴 새 없이 출렁였다. 바람이 미친 듯이 불어오며 공기가 마구 찢어졌다.

“시작됐다.”

누군가 그렇게 읊조렸다.

빛이 폭발하듯 분출되었다. 한 자루의 검처럼 솟구쳐서, 어스름한 하늘을 단번에 쪼갰다.

신기한 광경이 보였다.

쪼개진 하늘. 그 너머로 한 행성이 보였다.

아르거스.

수천 조각으로 쪼개진 상태.

그나마 절반 정도가 복구되어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거대한 반구가 떠 있고, 그 주변으로 소행성들이 떠다니는 것 같다.

아르거스 행성 주변으로 거대한 공허가 넘실거렸다. 마치 행성을 공격하는 듯한 형상인데, 공허 속에 특징적인 열다섯 개의 빛이 숨어 있었다.

황홀하게 반짝이며 아르거스를 비추는 여덟 개의 빛.

아직 태어나지 않아 가능성만 간직한 일곱 개의 빛.

저것들은 대체 뭘 뜻하는 걸까.

알 수는 없었다.

아니, 의문조차 가지지 못했다.

부서진 행성 아르거스를 본 순간, 어떤 깨달음이 시혁의 영혼을 덮쳤기 때문이다.

깨달음?

그렇게 표현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지식의 향연.

의학자로서 아르거스를 방문할 때와 비슷했다. 온갖 지식이 시혁의 머릿속으로 파고들었다.

다만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었다.

주입되어 남는 게 아니라, 물결처럼 시혁의 영혼을 스치고 지나갔다. 개중 일부는 파편화되어 남았지만, 대부분은 순간의 법열 이후 스르륵 빠져나갔다.

그 과정에서 남는 것도 엄청났다. 워낙 다양한 방면에 걸쳐 있고 파편화되어 단편적인 지식이라서 그렇지, 지구인 기준으으로 일반인이 평생 공부해도 못 쌓을 정도로 많았다.

이제 좀 이해가 됐다.

현자 시험이 왜 그렇게 많은 지식을 요구하는지.

원래 신입부터 거장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자주 패하고, 반복적인 작업만 하면 더더욱 그렇다.

그 시간 모두를 공부하는데 쓰고, 때때로 반신의 승천을 목격하여 단편적인 지식이나마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그렇게 따지면 아주 터무니없는 조건은 아니었다. 거장이 된 후 수습만 잘 하면 될 테니까. 물론 학문 융합 및 세계 지식 등재라는 항목이 남아 있지만.

시혁의 몸이 흐려졌다.

옆에 있던 학자가 손을 내밀었다.

“반가웠소. 기회가 된다면 또 봅시다. 진리 진영의 소환자는 수가 많지 않으니, 운이 좋으면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요. 내 이름은 슈발츠라고 하오.”

“그 동안 감사했습니다. 최시혁입니다. 다음에 또 뵐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의식이 멀어지며, 시혁의 영혼이 지구로 복귀했다.

지구에서는 별 일이 없었다. 매일같이 똑같은 하루가 반복되었다.

지구에서는 한의원 운영에 열중하고, 아르거스에서는 지식의 전당에서 공부하고……

그러면서 현자 시험 분야를 확정했다.

주 분야는 의학과 마법.

보조 분야는 마나학과 생물학, 부여 마법과 통찰 마법.

이것들에 통달한다면 시혁이 처음 목표했던 것은 다 이루게 된다.

마법으로 개인적인 무력을 어느 정도 확보하는 한편, 마나학과 생물학으로 지구에서 부족한 재료를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가 있다.

물론 쉽지는 않았다.

특히 마법 쪽이 그랬다. 마나학이나 생물학은 그나마 좀 익숙한데, 마법은 매우 생소했기 때문이다.

그 덕에 시간이 많이 걸렸다.

의학, 마나학, 생물학은 주말 동안 끝을 냈다. 시험을 봤고, 통과하기까지 했다.

생물학을 공부하면서, 시혁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참 기괴한 생물이 많았다.

인간 처녀와 꿈속에서 교합하여 임신시키는 몽마, 희생자의 뇌를 파먹고 희생자인 양 육체를 조종하는 뇌벌레, 뽑으면 치명적인 비명을 지르는 만드라고라 등등.

지구에 출현하면 대번에 난리가 날 생물들이다.

학문 분야는 이렇듯 성취가 괜찮은데, 마법 분야는 1주가 더 지나가도록 감도 잡지 못하고 있었다.

다행히 진리 진영의 반신은 승률이 높았다. 그 덕에 승천을 몇 번이나 구경했고, 그때마다 얻은 지식 파편에 의해 마법적 지식도 어느 정도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어느덧 9월 초.

드디어 6개의 시험을 모두 통과하는데 성공했다.

참으로 길었다.

거의 한 달 가까이 시간을 소요한 것이다. 매일 출근 도장을 찍었으니, 실 소요시간을 따지면 수십 배는 더 되었다.

하지만 이제 겨우 한 발을 내딛었을 뿐이다.

가장 중요한 게 남아 있었다.

학문 융합 및 세계 지식 기재.

예전에 회혼순천탕이나 복원괴목고, 작오탕, 세신탕을 만들었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때는 명확한 대상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없었다. 더구나 이 세계에 크나큰 파장을 던질 수 있는 물건이나 지식이라야 했다.

뭐가 좋을까.

시혁은 길고 긴 고민에 빠졌다.

< 진리 진영 –3- > 끝

ⓒ 산호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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