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 세계의 한의사-66화 (66/250)

< 진리 진영 –2- >

엘프의 지식을 접할 때도 경외심을 느꼈지만, 진리 진영의 지식은 생명 진영과는 그 차원이 달랐다.

생명을 살리는 것으로만 따지면 엘프 의학이 더 낫다.

반면 인체에 대한 이해는 마도 의학이 뛰어났다. 마도 의학은 인체를 연구하여 진리에 도달하는 것에 그 목적을 두기 때문이다.

덕택에 공부해야 할 게 많았다.

마법과 여러 학문에 대한 광범위한 이해가 없다면, 마도 의학을 익혀봤자 수박 겉핥기 수준에 불과했다. 그저 만들어진 기계를 통해 병을 치료하는 정도에 머무르게 된다.

괜히 주 분야와 보조 분야로 나눠놓은 게 아니다.

시혁은 지식의 전당 내에 작은 방을 하나 받았다. 거기에 틀어박혀서 마법 등불을 들여다보았다. 식사 때만 잠깐 나와 밥을 먹고 공부에 시간을 보냈다.

식당에서 마주친 한 학자가 그런 시혁을 보고 혀를 찼다.

“고생이 많으십니다. 저희는 소환될 때마다 지식의 전당에서 공부를 하니 거장이 될 때쯤에는 목표 병종 시험에 응시할 실력을 갖출 때가 많습니다. 그래도 시험에서 많은 사람들이 떨어지는데, 전향하신 후 갑자기 준비를 하시려면 많이 힘드실 겁니다.”

“어쩔 수 없지요. 그래도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생명 진영에서 많이 배웠으니까요.”

“원래 생명 진영에서 시작하신 게 아닙니까?”

“처음에는 권세 진영 치료사였습니다.”

시혁은 둥근 귀를 만지며 말했다.

학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허어, 그럼 2번째 전직이십니까?”

“예. 그렇게 됐지요.”

“권세 진영 치료사에 생명 진영 의학자, 진리 진영 현자라…… 이것 참 영웅으로 진화하시면 최고의 지원 영웅이 탄생하겠습니다.”

학자가 혀를 내둘렀다.

시혁은 그저 웃기만 했다.

밥을 먹은 다음에는 배정받은 연구실로 돌아왔다. 마법 등불을 보며 의학 공부를 했다.

특히 일반 질병에 집중했다.

마법과 저주는 마법과 마나학을 배운 뒤로 미뤄두었다. 지금은 봐도 이해가 잘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반 질병은 지구에서 배운 지식을 바탕으로 쉽게 이해가 가능하니, 쉬운 것부터 하기로 했다.

마도 의학에서 쓰는 약물과 조제법, 기구 조작법을 외우는 것도 시간이 오래 걸렸다. 작용 원리도 외워야 하니 더 그러는 것 같았다. 하도 외울 게 많아서, 엘프의 육체가 그리웠다.

그나마 거장 계급이라 기억력이 좋아져서 다행이었다. 시혁의 원래 기억력이었다면 이것들을 익히는데 시간이 몇 배는 더 걸렸을 테니까.

의학을 적당히 본 후, 마나학으로 넘어갔다.

모든 마도 학문의 기본이자 시작.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굉장히 구체적으로 서술이 되어 있었다.

하기야 아르거스에서는 마나의 움직임을 생생하게 관찰하는 게 가능하다. 지구에서처럼 뚱딴지 같은 소리만 늘어놓는 게 더 이상했다.

한동안 마나학에 파묻혀 살 때였다.

갑자기 반신의 명령이 내려왔다.

[진리의 탑 앞으로 모여라.]

이게 무슨 일이지?

궁금증을 찾고 밖으로 나갔다.

현자와 학자들이 삼삼오오 걷는 것이 보였다.

시혁을 알아보고 간단한 인사를 건넸다.

“오, 의학자님. 시험 준비는 잘 되어 갑니까?”

“고생이 많으십니다.”

“그냥 그렇지요. 지금은 마나학부터 보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아, 별 거 아닙니다. 둘 중 하나지요.”

“둘 중 하나라고요?”

“예. 적들이 쳐들어 왔거나, 최후 전투를 벌이거나. 마나 집중점이 남아 있다면 거길 차지하려고 군대를 출정시킬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미 이 지역의 다섯 곳 중 두 곳을 차지했으니 그럴 리는 없지요.”

현재 전투에 참가한 반신은 총 셋이다.

만물 탐구자, 산중군주, 야만왕.

지금은 산중군주와 야만왕이 치열하게 맞붙어 싸우고 있었다. 드워프와 오크, 고블린의 전쟁인데, 슬슬 그 결과가 나오는 것 같다고 했다.

산중군주의 승리.

마나 집중점을 두 개 가져간 영향이 컸다. 군대를 더 불리는 한편, 무기와 갑옷을 강화하는데 힘쓴 것이다. 지금은 거의 야만왕의 본성까지 육박했다고.

그냥 놔두면 산중군주가 맹렬하게 군대를 육성할 터였다. 진리 진영은 대등한 전투에서는 약한 면모를 보이니, 그렇게 놔둬선 안 된다.

만물 탐구자의 군대가 진리의 탑 앞에 결집했다.

마도사, 현자, 마법 기사로 대표되는 병종들.

어째 분위기가 좀 헐렁했다. 전투를 하러 가는 게 아니라, 소풍을 가는 듯한 느긋한 공기가 진리의 탑 앞에 만연해 있었다.

시혁은 안면이 있는 학자에게 속삭였다.

“진리 진영은 전투를 앞두고 있어도 분위기가 다른 곳과는 좀 다르네요?”

학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사실 저희가 하는 일은 별로 없어서요. 전투는 반신들이 거의 다 합니다.”

“그래요?”

시혁은 기억을 더듬었다.

진리 진영과 상대해 본 적은 드물었다.

시혁은 대부분 의학 나무에서 약을 만들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진리 진영의 군대가 어떻게 싸우는지 보지 못했다.

곧 그 말뜻을 알 수 있겠지.

군대가 행군을 시작했다.

특이하게도, 대부분의 병종들이 자동 마차와 마법 수레 등 다양한 탈것을 타고 이동했다. 시혁도 자리가 남는 마법 수레에 얻어 탈 수 있었다.

또 한 가지.

만물 탐구자의 군대에는 고급 병종과 상급 병종의 비율이 높았다. 거의 절반은 되는 것 같았다. 기본 병종과 중급 병종은 모두 마법 생명체로 이뤄졌는데, 그저 호위만 했다.

기동력이 빨랐다. 승차감도 훌륭했다. 수레에 타 마나학을 반추하고 있노라니 어느새 전방에 도착했다.

커다란 요새가 보였다.

돌로 쌓고, 금속으로 겉면을 보강한 요새였다. 언뜻 보기에도 굉장히 튼튼해 보였다. 표면에 마법 문자가 떠다니는 게 마법 공격에 대한 방어 능력도 있는 듯했다.

군대를 이끌던 두 명의 영웅이 코웃음을 쳤다.

“땅꼬마들, 건축 능력은 제법이야.”

“그래봤자 우리 앞에선 모래성에 불과하지.”

“시작해볼까? 만물 탐구자께서도 우리를 주시하고 계신다.”

“좋아. 가지.”

둘 다 마법사 영웅이었다.

나란히 서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마나가 뒤틀리며, 강렬한 힘의 파동이 세상 전역으로 번졌다.

일반 소환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마법을 쓸 것도 없이 마나만 뿜어냈다. 그 힘이 소용돌이치며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아울러 상공에서도 마나의 힘이 투사되었다. 반신이 개입한 것 같았다.

드워프 요새에서도 반응이 있었다.

방어막을 보강하는 한편, 초대형 쇠뇌를 쏘아댔다. 비록 모조리 막히긴 했지만, 그냥 당하지는 않겠다는 의지가 드러났다.

이윽고 진리 진영의 공격이 완성되었다.

군대가 뿜은 마나와 하늘에서 투사된 마나가 서로 엉켰다. 거대한 불꽃이 되더니, 인정사정 보지 않고 드워프 요새를 향해 내리꽂혔다.

꽈과광!

드워프 요새의 방어막이 단번에 박살이 났다.

금속으로 보강한 벽도 소용이 없었다. 형편없이 우그러졌다. 공포에 물든 비명소리가 처절하게 울려 퍼졌다.

한 방으로 끝내지도 않았다.

불꽃에 이어 눈보라, 또 번개 폭풍이 휘몰아쳤다. 그렇게 세 번을 연타하자 드워프 요새가 있던 곳은 그저 돌무더기만 남고 말았다.

영웅 하나가 생명체 탐지 마법을 사용했다.

“좋아. 청소 끝났다. 진입하도록 하지.”

마법 생명체와 인공 생명체들이 추가로 수색을 했다. 위험이 없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야 군대가 요새를 지나쳤다.

몇 개의 요새가 더 나타났다. 그때마다 반신과 군대의 협력으로 박살을 내고 진입했다. 자연히 만물 탐구자의 군대는 전력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었다.

시혁은 혀를 내둘렀다.

다른 반신들 같았으면 전투 1번에 이적 1개를 쓰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만물 탐구자는 3번을 때려 박으니 당해낼 도리가 없다.

이윽고 산중군주의 본성 지척에 도착했다.

진군하는 사이 야만왕은 전투에서 패배했다. 하늘이 한 차례 회색으로 물들고, 드워프 군대가 되돌아 와 본성을 보호하는 요새에 진을 쳤다.

여기까진 쉬웠지만 지금부터는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철 진영의 방어 능력은 아르거스에서도 정평이 나 있으니까.

창과 방패의 대결이다.

과연 누가 이길까 궁금해지는데, 만물 탐구자가 뜻밖의 명령을 내렸다.

[진지를 구축하고, 방어에 주력하라. 섣불리 전투를 벌이지 마라.]

왜 여기서 멈춘 거지?

시혁은 금방 그 이유를 알아차렸다.

산중군주와 만물 탐구자의 사이에 마나 집중점이 하나 있었다. 그걸 점령하려는 듯했다.

그럼 마나 집중점의 격차가 3대 2로 벌어진다. 이후 방어를 굳히면서 마나를 모으면, 도저히 뒤집을 수가 없게 된다.

당연히, 산중군주가 택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거대 요새의 문이 열렸다.

철의 군대가 천천히 문을 빠져나왔다.

작고 옹골찬 군대였다. 수가 부족한 것은 각종 기계 장비로 보완했다. 공성 대포, 기계 거인, 연발 쇠뇌 같은 것들이 뒤쪽에서 따라왔다.

군데군데 제사장과 장로의 모습이 보였다. 이제부터는 그냥 당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그들을 보자 만물 탐구자의 군대도 긴장하여 진형을 짰다.

동등한 상황에서 맞붙으면 필패이니까. 능력으로는 밀릴 게 없지만, 전투 경험에서 엄청나게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뿌우우우.

드워프 군대 쪽에서 길게 나팔 소리가 들렸다.

한 판 일전을 벌일 모양이다.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다. 요새 몇 개를 그냥 내준 산중군주가, 이번 전투에는 총력을 기울이려는 것이다.

[이적을 발현하겠다. 마나를 공급해라.]

만물 탐구자의 지시가 내려왔다.

모든 소환자들이 정신을 집중했다. 그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마나가 반신의 마나에 섞이며 더욱 강한 힘을 냈다.

시혁만 멀뚱멀뚱 서 있었다. 진리 진영에 전향은 했어도 소속 병종은 아니다 보니 마나가 섞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지켜보다가 부상자들을 치료하는 게 최선이었다.

하늘 위에 모인 마나가 구체적인 형체를 드러냈다.

거대한 번개 폭풍.

드워프 군대가 금속 갑옷과 무기로 무장한 것을 감안한 선택이었다.

그때, 산중군주의 조소가 들렸다.

[고작 생각한다는 게 번개냐?]

드워프 군대에서도 이적이 발현되었다.

잿빛 방어막이 드워프 군대를 보호했다. 아주 얇아서, 금방 깨져버릴 것만 같은 방어막이었다.

동시에 드워프 제사장과 장로들이 방어막을 보강했다. 제사장은 방어막에 특수한 성질을 부여하고, 장로들은 피뢰침을 하늘 높이 세웠다.

번개 폭풍이 그 위를 때렸다.

거의 대부분이 흩어졌다. 미리 대비한 것처럼, 방어막이 번개를 몽땅 땅으로 흘려보냈기 때문이다. 덕택에 만물 탐구자에 비해 훨씬 적은 마나로 방어에 성공했다.

수 싸움에선 산중군주가 앞선 것이다.

자존심이 상한 만물 탐구자가 온갖 이적을 쏟아 부었다.

불의 비가 내리고, 눈보라가 몰아치고, 지진이 일어나고, 회오리바람이 덮치고, 우주 너머에서 맹렬한 파괴 광선이 날아와 마구 폭격을 했다.

이적 전투로 넘어가면 산중군주가 확연히 불리하다. 철 진영 자체가 이적 전투에 그리 능숙하지 않으니까.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돌격하라, 용맹한 전사들이어!]

드워프 군대가 함성을 지르며 달려 나왔다.

그 위에 회색 섬광이 몇 번이나 내려앉았다. 대부분 보호 이적으로, 만물 탐구자의 이적에서 군대를 보호하기 위한 거였다.

보고 있던 시혁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드워프들은 악을 쓰며 돌진하고 있었다. 이적이 그들의 머리를 두드리지만, 심각한 피해를 입으면서도 어찌어찌 버텨냈다. 최소 절반은 죽겠지만, 나머지 절반은 만물 탐구자의 군대에 만신창이가 되어서라도 도달하게 생겼다.

다른 소환자들도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한 번 뒤섞여 혼전을 벌이면, 드워프들의 상대가 되지 않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 진리 진영 –2- > 끝

ⓒ 산호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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