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낙인 –3- >
“힘이 난다!”
“다 때려 부수자!”
병상에서 일어난 오크들이 함성을 질렀다.
고블린들도 특유의 교활한 눈빛을 번뜩이고 있었다. 다만 시혁을 향해 의심스러운 시선을 보내는 게, 자기들이 먹었던 약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들이 의심하는 것을 눈치 채고도, 시혁은 당당하게 행동했다.
이미 호랑이 등에 오른 참이다.
더 속도를 내야 했다. 들킬 것 같다고 속도를 늦췄다간 호랑이에게 잡아먹히기 십상이었다.
‘그래도 조심해야지.’
시혁은 스스로를 세뇌하기로 했다.
주술사나 주술 스승이 몰래 시혁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걸 토대로 야만 군주에게 참소를 하고, 야만 군주가 의심을 품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시혁의 계획이 들통 날 테니까.
시혁은 한 가지 생각만 했다.
야만 군주의 위대함.
거기에 경도된 자신.
거룩하고 훌륭하신 야만 군주의 승리를 위해서라면, 이 한 몸 불살라도 전혀 아깝지가 않다.
그렇게 생각하며 환자들을 치료하며 돌아다녔다. 다른 생각은 아예 하지 않았다.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질 때면 아예 치료에만 정신을 쏟고 모든 생각을 중지했다.
그래서였을까.
고블린들은 시혁에게서 의심스러운 점을 찾는데 실패했다.
이윽고 군대가 출정했다.
전투가 격화되고 있었다. 흡혈 귀부인이 탈락하면서, 세계 생명과 거울 여왕이 불안감을 느낀 탓이었다. 특히 양측에서 야만 군주를 두들겨 대서 정예 병사 하나가 아쉬웠다.
소문을 들으니 거의 2대 1로 싸우고 있다고 했다. 선전하고는 있지만, 아무래도 좀 밀리는 형국이라던가.
[더 강한 약은 없느냐?]
“더 이상은 힘듭니다. 전부 일회성 약입니다.”
야만 군주의 물음에 시혁은 난색을 표했다.
한 번 써먹고 일반 소환자를 죽게 만드는 건 낭비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야만 군주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상관없다. 모든 소환자에게 먹일 생각은 없으니까. 일부에게만 사용할 거다. 지속 시간은 좀 짧아도 좋으니 효과가 10배 정도 강했으면 좋겠구나.]
“으음, 그러시다면야……”
하긴 오크 100명 정도만 광전사로 변이시켜서 돌격시켜도 효과가 좋을 것이다. 유격전이라면 모를까, 평원의 회전에서는 절대적인 위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좀 부족할 것 같았다.
지금 시혁은 오로지 야만 군주의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있었다. 거울 여왕은 오크 광전사로 짓밟을 것 같은데, 세계 생명은 도망치면 그만 아니겠나.
정 뭐하면 최종 병기를 동원하면 된다.
아무리 악독한 마약을 먹여 변이시켜도 최종 병기의 공격 한 방이면 모조리 쓸려나가니까.
이때, 시혁은 야만 군주 진영에 부족한 것을 알았다.
영웅과 최종 병기.
전투가 치러진지 오래라 영웅들 모두 50레벨을 달성했다. 최종 병기도 이미 소환한 뒤였다. 따라서 전장의 주역은 영웅과 최종 병기라고 할 수 있었다. 군대가 변수 역할을 할망정, 그 격차를 뒤집기는 힘들었다.
“야만 군주시어, 야만 괴수에게도 약을 먹이면 어떻겠습니까?”
[야만 괴수에게?]
“예. 초록용과 그림자 마왕이 힘을 합치지 않는 한 약을 먹은 야만 괴수를 이기지는 못할 겁니다. 사실상 승리를 확정지을 수 있지요.”
[으흠! 그도 그렇군. 그런데 야만 괴수에게 통하는 약이 있느냐? 내가 알기로 야만 괴수를 강화시키는 건 반신의 이적 밖에 없다고 알고 있다만.]
“예, 엘프의 지식 중에도 독약 밖에 없습니다만, 그것들을 응용하면 괜찮은 게 나올 것 같습니다. 대신 독약이 기본이니, 오래 운용하기는 힘들어 질 겁니다.”
[그래? 생각 좀 해봐야겠다. 일단 방금 말한 일회용 마약부터 만들어라.]
“예, 그리 하겠습니다.”
시혁은 새로운 약을 만들어 냈다.
먹는 순간 전신의 근력이 폭발하며 평소의 10배에 달하는 힘을 낸다.
지속 시간은 단 30분.
그 후에는 근섬유가 몽땅 찢어진다. 치료도 불가능하고, 고통스러워하다가 죽는 신세가 된다. 고급 병종이 달라붙으면 치료할 수 있지만 이전 상태로는 절대 못 돌아간다. 폐인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야만 군주가 한 가지 술수를 부렸다.
일꾼들을 동원한 것이다.
기존의 약을 모두 먹이고 주술사들에게 강화 주술까지 걸게 했다. 그리고 시혁이 새로 만든 광전사의 죽음을 먹이자, 허약한 일꾼들이 상급 병종을 압도하는 위력을 뽐냈다.
시혁도 그 소식을 듣고 혀를 내둘렀다.
일꾼 소환에는 마나도 얼마 들지 않는다. 10레벨까지 올린 정예 병력을 소모하느니, 1레벨 일꾼을 찍어내어 돌격시키는 게 훨씬 이득이다.
그러나 전황은 지지부진했다.
군대와 군대의 싸움에서는 야만 군주가 항상 압도하곤 했다. 문제는 최종 병기나 영웅들이 개입할 때였다. 그때가 되면 피해가 커져 별 수 없이 뒤로 물러야 했던 것이다.
결국 야만 군주가 시혁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한 판 승부를 벌여야겠다. 네 제안을 받아들이마. 야만 괴수에게 먹일 약을 만들도록 해라.]
기다리던 순간이다.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저와 제 천막을 전방으로 옮겨주시지 않겠습니까? 지금까지 없던 약이라 어떤 부작용이 나올지 모릅니다. 일반 병종도 아니고, 최종 병기인데 탈이 날까 두렵습니다. 제가 근처에 있으면 상황에 바로 대처할 수 있을 겁니다.”
[그도 그렇구나. 좋다, 그렇게 해주마.]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야만 군주가 비룡기수 편대를 호출했다. 시혁과 치료사들, 일꾼들, 도구들을 등에 짊어지고 전방으로 가게 했다.
시혁은 익숙한 오크의 등 뒤에 탔다.
전문 비룡기수, 가브노크.
다름 아닌 시혁을 붙잡아 야만 군주 진영으로 데려온 녀석이었다.
가브노크가 시혁을 보더니 씨익 웃었다.
“얼굴이 많이 좋아졌는데? 야만 진영에 온 소감이 어때? 요새 댁 덕분에 우리가 아주 잘 나가고 있어. 고블린들은 댁을 좀 싫어하는 것 같긴 한데, 오크들 사이에선 인기 최고라니까? 짝짓기 축제에 나가면 암컷들이 엉덩이를 발랑 깔 거야.”
시혁은 눈살을 찌푸렸다.
짧고 굵게, 한 마디를 했다.
“좀 닥쳐라.”
“뭐?”
“입 냄새 난다. 이 더러운 오크 새끼야.”
“뭐라고? 새끼 고블린만도 못한 엘프 놈이 어디서 감히!”
가브노크가 격노했다.
멱살을 잡자 숨이 턱 막혔다.
아랑곳하지 않았다. 깔보는 눈으로 쳐다보기만 했다.
가보느크는 제 풀에 지쳐 손을 놓았다. 성질 같아선 시혁을 이 자리에서 결딴내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경우 후환이 두려웠던 것이다.
대신 으르렁거리며 시혁에게 경고했다.
“위대한 분의 총애를 받으니 눈에 뵈는 게 없나 보구나. 건방진 놈 같으니. 전쟁이 끝나는 날, 네놈은 반드시 내 손에 죽을 것이다.”
시혁은 콧방귀만 꼈다.
가브노크가 앙심을 품은 탓에, 전방까지의 비행은 순탄치 않았다.
난데없이 곡예비행을 하거나, 급정거하듯 속도를 줄이고, 하늘 높이 올라갔다가 급강하를 하곤 했다.
아찔했지만 겨우 평정심을 유지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비명을 마구 질러대고 싶었다.
하지만 그게 가브노크가 원하는 것 아닌가. 녀석에게 약한 꼴을 보여주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다. 좀 과격한 롤러코스터를 탔다고 생각하고 스릴을 즐겼다.
목적지에 도착한 후, 가브노크가 한 마디를 했다.
“독한 놈.”
그 말을 남겨놓고, 비룡을 타고 후방으로 사라졌다.
시혁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거대한 주둔지였다. 인간이나 엘프 종족과는 다르게, 목책 같은 방어 시설은 보이지 않았다. 군데군데 감시탑이 서 있는 게 전부였다.
주둔지 안에는 천막이 가득 차 있었다. 천막마다 오크와 고블린이 누운 채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꼭 군대 주둔지가 아니라 환자들 집합소 같다.
멀쩡히 돌아다니는 자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나마 좀비처럼 얼빠진 얼굴을 하고 어슬렁거렸다.
적당한 공터에 도착한 일꾼들을 시켜 천막을 쳤다.
그 사이, 주둔지 뒤쪽에 있는 거대한 우리로 걸어갔다.
“쿠오오!”
야만 괴수가 시혁을 보고 적의를 드러냈다.
초록용보다 덩치가 훨씬 더 컸다. 작은 산을 보는 듯했다.
갈색 몸통에 세 개의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적색, 청색, 녹색이었는데 각장 화염과 냉기, 산성 숨결을 뿜곤 했다.
전신이 근육질에, 앞발과 어깨가 비대하게 발달했다. 유사시 뒷발로 몸을 일으키고 앞발을 휘저으며 싸웠다. 완력으로는 최종 병기 중에서도 최상급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시혁은 야만 괴수를 직접 보며 지식을 열람했다.
신체가 극도로 강건했다. 그 덕에 어지간한 약과 독은 통하지 않았다. 한 방울로 코끼리를 죽이는 극독을 들이부어도, 이게 웬 별식이냐며 다 먹어치우곤 했다.
일반적인 독이 아니라 특별한 약을 써야겠다.
과유불급이라고 했지.
야만 괴수는 체내의 마나 속성이 매우 편중되어 있었다.
조화 따윈 집어치웠다고 할까. 말 그대로 혼돈, 그 자체였다. 그러면서도 일말의 질서가 있어 생명을 유지시키니 참 희한한 생명체였다.
그 질서를 제거하여 혼돈의 힘을 더욱 증폭시키면 어떻게 될까.
당장은 몇 배로 강화될 것이다. 대신 야만 괴수의 몸이 시시각각 무너지겠지.
다만 재료가 좀 희귀한 것들이 필요했다.
용의 심장이니, 심해의 진주, 대지모신의 눈물 같은 것들.
구하기 힘들 줄 알았는데, 야만 군주는 별 것 아니라는 듯 반응했다.
[내 창고에 있는 것들이구나. 알았다. 곧 소환해주마.]
잠시 후, 비룡기수들이 요청한 물건을 가지고 날아왔다.
가브노크가 선두에 서 있었다. 시혁을 보더니 송곳니를 드러내며 위협했다.
무시했다.
구상한 대로 약을 만들었다.
재료는 분명 좋은 것들만 들어갔는데, 냄새가 아주 구렸다. 오크와 고블린의 대변 냄새와는 비교도 안 되어서, 시혁은 임시로 코를 막고 작업을 했다.
완성된 약을 보고 야만 군주가 감탄했다.
[대단하구나! 초록용이나 그림자 마왕 정도는 가볍게 찢어버릴 수 있겠다.]
반신이라 약의 효능을 바로 알아챈 모양이다.
하긴 효과만 놓고 보면 아주 좋았다. 부작용이 커서 문제지. 야만 군주가 생각하는 대로 단기전으로 끝낼 수 있다면 모든 단점이 사라진다.
글쎄, 정말로 그럴까?
이 약을 복용하고 시간이 조금 지나면 야만 괴수는 이성을 잃는다. 반신의 명령조차 따르지 않게 된다. 오직 본능에 따라 움직인다.
식욕.
가까이 있는 초록용부터 집어삼킬 것이다. 그림자 마왕은 형체가 없으니 놔두고.
그 다음은 영웅을, 영웅들까지 다 잡아먹은 다음에는 제일 강한 집단을 공격하겠지.
강하면 강할수록 더 맛있어 보일 테니까.
바로 마약을 먹은 오크와 고블린 군대를.
마약 때문에 도망도 안 간다. 저 죽을 지도 모르고 야만 괴수와 맞서 싸우게 된다.
그렇게 되면 모두 파멸.
복수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윽고 최후 전투의 날이 밝았다.
야만 군주가 대량으로 소환한 일꾼들이 가장 앞에 진을 쳤다. 그 수만 1천에 달했다. 그들 바로 뒤에 야만 괴수가 서서 흉악한 눈빛을 빛내고 있었다.
전력 차이가 너무 심했다. 결국 세계 생명의 엘프 군대와 거울 여왕의 도플갱어 군대가 힘을 합쳤다.
도플갱어들이 전면으로 나서고, 엘프들은 양익을 차지했다. 초록용과 그림자 마왕이 하늘에 떠 있고, 영웅들이 요소요소에 자리를 잡았다.
시혁도 전투에 참가했다.
오늘을 위해 따로 만들어둔 약들을 챙겼다.
마나 회복 물약, 마나 재생 비약, 현인의 영약 등등.
지금까지 시혁을 따르던 일꾼들이 커다란 가마를 만들었다. 그 위에 오르자, 워낙 커서 전장 전체가 다 보였다.
선두에 선 오크 일꾼들이 약을 복용했다. 그들의 머리 위로 온갖 강화 주술이 쏟아졌다.
그것을 신호탄 삼아, 양측 군대가 격돌했다.
< 낙인 –3- > 끝
ⓒ 산호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