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 세계의 한의사-57화 (57/250)

< 낙인 –2- >

“야만 군주시어. 명령하신 대로 약을 만들려고 하는데 재료와 도구가 너무 부족합니다.”

[감히 항명하는 것이냐?]

“항명이라니요? 저는 사실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엘프 의학 나무에 있는 정교한 도구들은 꿈도 꾸지 않습니다. 그래도 최소한 어느 정도는 있어야 야만 군주께서 원하시는 약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냥 하라고 명령하시면 기꺼이 따르겠습니다만, 제가 아무리 노력한들 원하시는 수준의 약은 나오지 않을 겁니다.”

[음!]

야만 군주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주변의 오크와 고블린들이 시혁에게 눈을 부라렸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할 것이지, 어디서 감히 따박따박 말대꾸를 하느냐는 눈빛이었다.

야만 진영와 생명 진영의 차이일까.

생명 진영에서는 가끔 일반 소환자들이 반신에게 더 나은 의견이 있으면 거리낌 없이 건의를 하곤 했다. 그러면 반신은 숙고한 후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었다.

물론 일반 소환자를 장기판의 말로 대하는 것은 똑같지만, 무조건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지는 않는 것이다.

한참 시간이 지난 후, 야만 군주가 천천히 말을 했다.

[예전에 진리 진영 공학자도 그렇고, 엘프 의학자도 그렇고 참 까탈스러운 족속들이로군. 그래, 좋다. 정확히 뭐가 필요하다는 거냐?]

“여러 가지가 필요하지만, 자질구레한 것을 다 챙겨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게 오크와 고블린 일꾼 5명씩만 부릴 권한을 주십시오. 모든 필요한 약재와 도구를 제가 직접 수급해서 약을 만들겠습니다.”

치료사 시절부터 몇 번이나 해본 일이었다.

야만 군주가 잠시 말을 아끼더니,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좋다. 네 제안을 받아들이지. 전문 계급 이상의 일꾼 10명, 아니 20명을 붙여주겠다. 다른 시설도 협조하도록 조치를 취해주마.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성과를 내지 못하면, 그때는 각오해야 할 것이다.]

시혁은 허리를 깊이 숙였다.

“감사합니다.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어찌나 허리를 숙였는지 코가 땅에 닿을 듯했다.

그러나 땅에 박힌 두 눈이 살벌하게 빛나고 있었다.

시혁의 설계, 그 첫 단추를 제대로 꿰맨 것이다.

야만 군주는 약속을 지켰다. 전문 계급 이상의 일꾼들로 정확히 20명을 붙여 주었다.

시혁은 그들을 10명, 5명, 5명으로 나누었다.

10명은 작은 천막을 짓게 했다. 다른 오크나 고블린의 간섭을 최소화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5명은 솥이나 맷돌, 절구 등 필요한 도구를 모으게 했다. 마지막 5명을 데리고는 본성 준변을 살폈다.

약재를 채취하기 위해서였는데, 안타깝게도 그 종류가 턱없이 부족했다.

엘프는 숲을 보존한다. 아니, 오히려 더 키운다. 그곳에서 풍부한 산물을 얻는데 오크는 그와 반대였다. 숲이라는 숲은 모조리 베어내거나 불 질러 버리곤 했다.

‘동물성 약재를 써야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오크는 수렵과 목축에 최적화된 종족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본성 근처에 큰 벌판이 있어 사냥을 하고, 소나 양 같은 가축들을 대량으로 키웠다.

당장 얻을 수 있는 약재로 만들 수 있는 약을 몇 가지 떠올렸다.

그래도 대충 십여 가지는 되었다.

치료제, 강화제, 해독제 등 다양한 방면에 걸쳐 있었다. 최소한의 구색은 맞추는 것이다.

일꾼들을 시켜 필요한 동물의 부위를 얻어오게 했다.

늑대 발톱, 외뿔 곰의 쓸개, 원숭이 뇌수, 소의 위와 심장, 양의 허파와 혀 등등.

보기만 해도 끔찍했다.

그것들을 완성된 천막 한쪽에 쌓아놓으니, 저절로 비위가 상해 속이 울렁였다.

냄새가 지독했다.

엘프의 몸이라 특히 심하게 반응하는 것 같았다.

반면 오크나 고블린들은 태연한 얼굴을 하고 돌아다녔다. 개중에는 부산물을 보고 입맛을 다시는 족속도 있었다.

필요한 도구는 다 마련이 되었다. 비록 지금도 좀 불만족스럽긴 하지만, 아쉬운 대로 물약과 환약을 만드는 건 가능했다.

‘처음부터 독을 만들면 안 되겠지.’

시혁 자신의 입지를 넓히는 게 급선무다. 오크와 고블린을 중독 시키는 것은 천천히 해도 좋았다.

약을 만들기 시작했다.

시혁의 손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재료를 절구에 넣어 빻고, 맷돌에 넣어 갈았다. 그렇게 낸 가루를 큰 철판 위에서 볶았다. 마지막으로 꿀을 좀 첨가해서 둥글게 빚자 작은 환약이 완성되었다.

천막에 치료소 구축 특기부터 썼다. 마나 회복 효과를 누리기 위해서였다. 그 다음 대량 조제와 급속 치료를 번갈아가며 사용했다.

그러자 일꾼들이 가져온 재료가 순식간에 소모되었다. 기계로 찍어내는 것처럼 환약이 튀어나오자, 일꾼들이 입을 헤 벌리고 그 광경을 구경했다.

그게 눈에 거슬려 따끔하게 한 마디를 했다.

“이봐, 당신들! 놀고만 있을 거야? 거기 당신들은 재료 좀 더 얻어오고 거기 당신이랑 당신은 절구 좀 찧어! 아니, 고블린 당신 말고 그 옆에 오크 당신 말이야. 고블린이 떡메를 들 수나 있겠어? 맷돌이나 열심히 갈아.”

윽박지르듯 일꾼들을 몰아붙였다.

오크와 고블린은 좋은 말로 해서는 잘 움직이지 않았다. 가끔은 엉덩이를 걷어차야 했다. 그나마 채찍을 쓰거나 몽둥이를 휘두르진 않아서, 일꾼들이 뒤에서 과연 엘프라 무르다느니 어쩌느니 하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혁은 2종의 물약과 3종의 환약을 무한정 찍어냈다.

회복 물약, 재생 물약, 곰의 힘 환약, 마법 저항 환약, 범용 해독 환약.

야만 군주 진영에서 유용하게 쓸 약들이었다.

쉬지 않고 일해 약을 공급하자, 시혁을 대하는 야만 군주의 태도가 확연하게 부드러워졌다.

일꾼을 더 배치해주었다. 어디서 노획했는지 엘프식 약제 도구를 몇 개 얻어다주기까지 했다. 덕분에 일하기가 편해졌다.

소문을 들으니 시혁이 공급한 약 때문에 이득을 많이 봤다고 했다. 그 세력이 4명의 반신 중에서 거의 선두를 다투고 있다던가.

시혁이 노리던 때가 온 것이다.

“핏물 억새는 아직 멀었습니까? 지옥풀은? 종말꽃은?”

“가, 갑니다!”

“거의 준비 됐습니다!”

시혁은 새로운 약을 준비했다.

핏물 억새, 지옥풀, 종말꽃이 합쳐져 만들어지는 독.

적색 죽음.

오크와 고블린, 두 종족에게만 선택적으로 작용하는 독이었다. 효과가 느린 게 특징인데, 발동하면 위장관 출혈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출혈이 적어 발견하기 힘들고, 발견한 다음에는 이미 위장관 전체의 점막이 녹은 뒤라 치료하기 힘들었다.

주술사와 치료사가 어떻게든 고급 병종과 상급 병종까지는 살려내겠지. 그러나 기본 병종과 중급 병종이 다 죽어 자빠지면 뭘 어쩔 것인가.

바로 독을 만드는 어리석은 짓은 저지르지 않았다.

대신 세 약재를 기존의 약에 섞었다. 그 결과 기존 약들의 효과가 크게 증강되었다. 의학자로서의 지식을 활용한 까닭이었다.

하지만 세 개의 약재가 합쳐지는 순간 적색 죽음이 군대를 덮칠 터였다. 아마도 1달이 지나기 전 야만 군주의 군세가 반 토막 나겠지.

야만 군주는 여기에 대해선 까맣게 몰랐다. 시술된 낙인만 믿고 있었다. 오히려 좋은 약을 만들었다고 크게 시혁을 치하하곤 했다.

[훌륭하다. 대단하구나. 더 효과가 좋은 약은 없느냐?]

왜 없겠나.

시혁은 밑밥을 던졌다.

“있기는 합니다만 쓰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러느냐?]

“부작용이 심합니다. 일종의 마약이니까요. 심한 금단 현상에 시달릴 겁니다.”

[금단 현상? 하하, 그런 건 상관없다. 약만 제때 더 공급해주면 되는 거 아니냐.]

“그야 그렇습니다만……”

[이번 전투에서만 써먹으면 된다. 만들어라. 재료는 얼마든지 공급해주마.]

시혁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지금 말한 걸 그냥 일반적인 마약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야만 군주는 모를 것이다.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시혁이 선택한 것은 핏빛 광기라는 마약이었다. 복용하면 몸이 부풀고 피부가 빨갛게 변하며 짧은 시간 초월적인 힘을 발휘하는데, 그 직후에는 탈진 상태에 빠진다.

사실 이 때까지는 괜찮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

의존성이 심각했다. 더 많은 양을 복용해야 하고, 언젠가 약으로는 부족할 때가 온다. 종국에는 이성을 잃고 폭주하여, 같은 중독자들을 잡아먹는다.

결국 핏빛 광기를 먹이는 순간, 자기들끼리 싸워 자멸하는 운명을 예약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야만 군주의 패배가 눈앞에 보였다.

‘이거 이상하네.’

다만 핏빛 광기에 한 가지 약점이 있었다.

눈을 가려놓으면 상황 파악을 못해 상대적으로 얌전해진다는 것이다. 이성은 마비되고, 시각을 제외한 감각들이 제 기능을 못 해서 그런 듯했다.

뭐, 그럴 일이 과연 얼마나 있겠나.

가볍게 가려서는 안 되고, 아예 빛을 완전히 차단해야 되는데.

단점 따위 잊고, 마나를 쥐어짜 약을 만들었다. 힘든 줄도 모른 채 급속 치료와 대량 조제를 번갈아가며 사용했다.

그걸 보고 야만 군주는 시혁을 더 믿는 기색을 보였다. 자신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줄 알았나 보다.

착각은 자유.

쩌저정!

그럴 즈음, 하늘에 붉은 파장이 몇 번 떠돌았다.

남은 네 반신 중 흡혈 귀부인이 탈락한 것이다.

오크와 고블린 군대가 승리의 노래를 부르면서 돌아왔다. 어찌나 시끄럽게 떠드는지, 천막 안까지 노랫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약재를 손보던 일꾼들이 엉덩이를 들썩였다.

“엘프님, 저기 안 가보실 겁니까?”

“응? 저기는 왜 가?”

“군대가 돌아오잖습니까? 이번 소환자들은 특히 용맹한 자들이 많답니다. 화살이 쏟아지든, 창날이 겨누든 아랑곳하지 않고 공격해서 몽땅 돌파했다는데요? 아주 승승장구하고 있답니다.”

“흠.”

거절하려다가 마음을 고쳐먹었다.

지금쯤 상태를 한 번 확인하는 게 좋았다. 만에 하나 독이 제대로 듣지 않았을 경우도 있으니까.

어슬렁어슬렁 걸어 나왔다.

일꾼들이 시혁의 뒤를 따라왔다.

처음에 배속되었을 때만 해도 시혁을 경원시 했었지만 이제는 공경하는 태도를 보이곤 했다. 실력으로 증명했기 때문이다. 현재 반신들의 세력 균형을 무너뜨린 게, 시혁이 만든 약에서 시작되었으니까.

“저기 보입니다!”

고블린 일꾼 하나가 촐랑거리며 소리쳤다.

시혁도 이미 보고 있었다. 시력은 오크나 고블린보다 훨씬 더 좋았으니까.

못해도 수천이 넘는 군대.

그들을 확인한 시혁의 입가에 언뜻 차가운 미소가 맺혔다.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눈가는 동태 눈깔이 되었다. 입가는 게게 풀려 침을 줄줄 흘렸다. 터질 듯이 부풀어 있던 근육은 다 말라비틀어졌고, 소변과 대변을 실금하여 바지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뭔가 이상했다.

군대를 본 오크와 고블린들이 웅성거렸다.

“뭐야, 왜 저래?”

“뭐 저주라도 당한 거 아냐?”

“사악한 뱀파이어들이 이상한 짓을 벌인 게 틀림없어!”

그렇게 오해해 주니 고맙다.

야만 군주는 진실을 알고 있었다.

은밀히 시혁을 불러놓고 말했다.

[약의 부작용이 심한 것 같다. 좀 줄일 수 있는 방법이 없느냐?]

격리해 놓고, 상당히 오래 치료를 해야 한다. 흡혈 귀부인의 영역을 차지했다고 하니, 적절한 허장성세를 곁들이면 그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혁이 그걸 원하지 않는다는 게 문제.

별 거 아니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 며칠 제가 치료하면 됩니다. 대신 나중에 금단 증상이 더 심하게 몰려올 테니, 그 점만 염두에 두셨으면 합니다.”

[약을 복용하면 상관없지 않느냐?]

“그야 그렇습니다.”

시혁은 오크와 고블린들을 눕혀놓고 치료를 했다.

뜸을 대량으로 떴다. 왕뜸을 소환해서 아랫배에 뜨고 돌아다녔는데, 처음에는 반응이 없다가 하루가 지나자 그들의 눈에 총기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몸에 퍼진 약 기운을 정화하는 한편, 몸 전체의 힘을 북돋워 주었으니까. 여기에 침 치료까지 병행하자 사흘 만에 원상복구 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장기와 골수에 들어간 약 기운까지는 어쩌지 못했다. 그걸 해독하려면 약침으로 내부를 보호하는 한편 해독제를 오래 복용시켜야 하는데, 시혁이 미쳤다고 거기까지 치료를 해주겠나.

< 낙인 –2- > 끝

ⓒ 산호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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