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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수 세계의 한의사-56화 (56/250)

< 낙인 –1- >

시혁은 마음을 비웠다.

‘끝났구나.’

육중한 거체가 벼락처럼 내리꽂히고 있었다.

아무리 엘프의 몸을 가지고 있다한들 피할 수가 없다.

기적과도 같은 치료 능력?

즉사해버리면 무슨 소용이냐.

차라리 주교로 전직할 걸 그랬을까? 그랬다면 최소한 보호막이라도 걸어서 즉사는 면했을 텐데.

부질없는 생각이다.

시혁은 이미 선택했고, 의학자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마음을 비웠다.

비룡의 발톱이 크게 확대되는 순간,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강렬한 통증이 전신을 관통할 줄 알았는데, 그저 역한 냄새만 코앞에서 풍기고 있었다.

슬며시 눈을 떴다.

비룡이 시혁의 바로 앞에 서 있었다.

날개는 펼치고, 살짝 엎드린 채 시혁과 눈을 맞췄다. 짐승 특유의 광기 어린 눈에 순간적으로 놀랐지만, 이내 진정하며 그 위를 올려다보았다.

금속 갑옷을 입은 오크가 시혁에게 창을 겨누고 있었다.

“너, 의학자로군.”

오크가 그런 말을 했다.

그게 왜?

의문 어린 눈으로 오크를 보자, 오크가 갑자기 씩 웃었다.

“저번에는 드워프 장인을 잡아가서 크게 상을 받았지. 엘프 의학자를 잡아가면 야만 군주께서 얼마나 기뻐하실까? 너, 내 포로가 되어야겠다.”

뭐라고?

시혁이 뭐라고 말을 할 새도 없이, 오크의 팔이 움직였다.

투창이 그대로 시혁의 허벅지를 관통했다.

“크윽!”

순간적으로 눈앞에 불이 번쩍였다.

화끈한 통증에, 자칫 정신을 잃을 뻔 했다.

시혁은 스스로를 다스렸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그랬다.

여기서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치거나, 정신을 잃고 축 늘어지는 건 오크가 바라는 일일 것이다.

눈에 힘을 주고 오크를 노려보았다.

칼날처럼 예리한 눈빛에, 오크가 의외라는 듯 시혁을 쳐다보았다.

“엘프치고는 대가 센데? 그래봐야 낙인이 찍히면 노예 신세지.”

오크가 허리에 감아 놓은 줄을 던졌다.

줄이 뱀처럼 시혁의 몸에 휘감겼다. 그걸 들어 올리더니 비룡의 등에 태우고, 꼼짝하지 못하게 칭칭 묶었다.

졸지에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게 되었다.

창에 꿰뚫린 허벅지에서 피가 줄줄 흐르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콧노래를 부르며 비룡을 띄우더니, 야만 군주의 본성이 위치한 남서쪽을 향해 날기 시작했다.

재갈을 물려놓아 자살할 수도 없었다.

시혁은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무식한 놈!’

속으로 오크를 욕하면서, 한편으로는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아 머리를 굴렸다.

자신을 잡아가서 뭘 하려는 건지는 이미 눈치 챘다.

낙인을 찍고 노예로 부리려는 것이다.

오크에겐 의학자가 없으니 엘프 의학자가 꽤 유용하겠지.

탈출할 방법은 없었다.

안장에 꽁꽁 묶인 신세니까. 몸이라도 움직일 수 있으면 몸을 굴려 자살을 시도할 텐데, 그것도 불가능했다.

꼼짝없이 잡혀가야 했다.

시혁의 눈이 칙칙해졌다.

‘오크 새끼들, 그냥 당해줄 줄 알아? 어디 두고 보자.’

문제는 낙인.

그게 찍히면 본인 의지대로 행동할 수 없게 된다. 반신에게 소환된 것과 같이, 야만 군주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

‘반신이 직접 낙인을 찍지는 않겠지?’

그럴 가능성은 적었다.

고급 병종도 아니고, 겨우 상급 병종이니까.

영웅, 혹은 고급 병종인 주술 스승이 낙인을 찍을 확률이 높았다. 주술사에게 맡기기에는 좀 불안하지 않겠나.

그렇다면 기회는 반드시 온다.

물의 힘은 보호.

그걸로 정신을 보호한다면, 한 가닥 의지를 보존할 수 있을 것이다.

다행인 점은 야만 진영에는 죽음 진영이 쓰는 불사의 역병처럼 현실까지 영향을 미치는 마법이 없다는 것 정도.

시혁이 신음을 참는 사이, 비룡이 야만 군주의 본성에 도착했다.

엘프나 인간 종족과는 다른 건축 양식.

거대한 짐승의 뼈를 기둥으로 쓰고, 짐승 가죽을 외벽으로 삼았다. 덕택에 언뜻 보면 누덕누덕한 천막을 보는 듯했다. 실제로 1층 건물이 대부분이고, 아주 커봐야 3층 건물이 한계였다.

중앙에는 기괴하게 생긴 거대 괴수의 뼈가 놓여 있었다.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복구한 듯, 조립이 된 채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 형태였다. 그 두개골에서 섬뜩한 빛이 뿌려지는 게, 예사롭게 보이지가 않았다.

비룡은 본성을 들어가 그 뼈 앞에 내려앉았다.

오크가 뛰어내리더니 공손히 절을 했다.

“야만 군주시어! 엘프 의학자를 잡아왔습니다.”

그릉그릉한 울음이 들렸다.

뭔가 대답을 하는 모양.

시혁은 들을 수가 없었다. 그저 자신에 대한 처우를 지시하는 것이리라고 짐작만 했다.

야만 군주의 대답을 들은 오크가 흉측하게 웃었다.

“예, 야만 군주시어! 그대로 이행하겠나이다!”

몸을 날리더니, 단번에 비룡 위로 올라왔다.

허리에 찬 칼을 뽑아 휘둘렀다. 그 서슬에 시혁을 얽매고 있던 줄이 토막이 났다.

시혁이 자유로워졌지만, 뭔가 해보기는 힘들었다.

오크가 시혁의 멱살을 잡더니 딱딱한 바닥에 내리꽂은 것이다.

“컥!”

등부터 떨어지니, 그 충격이 엄청났다.

자칫 정신을 잃을 뻔했다.

시혁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겉으로는 기절한 척 했다. 몸에 힘을 빼고 게거품을 물자, 오크가 다가와 시혁을 들쳐 업었다.

그 바람에 오크의 등이 훤히 드러났지만, 섣불리 공격을 해서 경각심을 일깨우지 않았다. 불을 쏘든 약침을 꽂든 제대로 상처를 입히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대신 다른 걸 했다.

몰래 약침을 소환했다. 그걸 스스로의 뒷목에 꽂아 넣었다. 혈자리도 아니고 생살에 찔렀으니 무척 따끔했지만, 이 정도야 참을 만 했다.

“크흠?”

뭔가 이상한 것을 느낀 오크가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시혁은 이미 약침 자입을 마친 뒤였다. 빈 약침을 역소환하여 증거도 없앴다. 약침을 찌른 자리에 핏방울이 맺혀 있긴 했지만, 오크가 그런 걸 확인할 정도로 섬세한 종족이 아니었고.

시혁은 스스로의 정신이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도 기절한 상태를 연기했다. 부디 보호의 힘이 부족하지 않기만 바랄 뿐이었다.

오크는 고개를 한 번 갸웃하더니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이미 제압되어 붙잡힌 엘프다. 뭔가 수작을 부리더라도 결국은 노예가 될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오크는 시혁을 본성 구석으로 데려갔다.

커다란 건물이 하나 있었다.

천장이 없는 특이한 형태였는데, 모닥불을 곳곳에 피워놓았다. 불에 뭘 첨가했는지 녹색이나 청색으로 불타고 있는 게 신기했다.

고블린 주술사가 오크를 보고 퉁명스레 물었다.

“뭐냐?”

“엘프 의학자요. 내가 포로로 잡아왔지. 낙인을 찍어서 노예로 쓰면 쓸 만 할 거요.”

“오호, 의학자라고? 또 한 건 했군. 좋아. 바로 시술하지. 죽은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그냥 기절시켰소. 허약한 엘프라, 바닥에 한 번 패대기쳤더니 바로 기절하더군.”

“잘 했다. 마나를 아낄 수 있겠어. 안 그래도 부적을 더 많이 만들라고 야만 군주가 심하게 닦달하는데, 물고기처럼 퍼덕거리는 놈을 제압하려면 힘 좀 써야 했을 거야.”

“크흠!”

야만 군주에 대한 존경심이 느껴지지 않는 발언에, 오크가 심기가 불편하다는 기색을 나타냈다.

주술사가 흥 하고 비웃음을 보냈다.

그 입장에서는 일족의 장도 아니고, 자신을 일회성으로 소환한 반신에게 충성을 바치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닥에 내려놓은 시혁에게 다가오더니, 지팡이 끝을 시혁의 이마에 갖다 댔다.

불에 달군 듯 뜨거운 열기가 파고들었다.

“크아악!”

이건 참을 수 없었다.

시혁은 미친 듯이 비명을 질렀다.

이마에 새겨져 있던 의학자의 문양이 사라졌다. 대신하여 불그죽죽한 뭔가가 나타나더니, 천천히 꿈틀거리며 어떤 문양을 형상화하기 시작했다.

다름 아닌 야만 군주의 문장.

아까 본성 중앙에서 본 괴수의 뼈를 보는 듯했다.

주술사가 흉측하게 웃더니, 근처에 있던 오크 일꾼들에게 손짓을 했다.

“됐다. 제대로 걸렸다. 감옥에 저놈을 쳐 넣어라. 시간만 지나면 낙인이 제대로 자리를 잡아 야만 군주의 충실한 수족이 될 것이다.”

“예, 주술사님.”

오크 일꾼들이 시혁의 팔다리를 잡고 들어올렸다.

상처가 자극을 받자 시혁이 신음을 흘렸다. 그러나 거기에 신경 쓰는 오크는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낄낄대며 짐짓 시혁의 몸을 더 흔들기만 했다.

덕분에 시혁이 정신을 차렸다.

이마에서 느껴지는 통증은 지금도 심했다. 그래도 좀 익숙해지니 견딜 만 했다.

오크 일꾼들은 인근의 작은 우리에 시혁을 던져 넣었다. 사방이 밀폐되어 있어 탈출은 불가능했다.

“엘프놈, 깨어나면 새 세상이 펼쳐질 거다.”

“야만 군주의 노예가 된 것을 영광으로 알아라.”

시혁을 조롱하며 오크 일꾼들이 자리를 떴다.

실눈을 뜨고 주위를 살폈다.

시혁에게 신경을 쓰는 오크는 아무도 없었다. 우리가 워낙 외진 곳에 위치한 탓이다.

그래도 누가 감시하고 있을지 몰랐다.

슬쩍 드러누웠다. 옆으로 누운 채 뒷목에 약침을 몇 번이나 찔러 넣었다. 그때마다 청량한 기운이 머릿속으로 스며들며, 이마에 박힌 낙인과 싸우기 시작했다.

이마는 뜨겁고, 머릿속은 차갑고.

화염 지옥과 빙하 지옥을 오가는 듯했다. 더욱이 허벅지의 상처가 덧나는 바람에 죽을 지경이었다. 허벅지에 침을 놔서 상처를 회복시킨 다음에야 좀 견딜 만 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오크들의 눈치를 살피며 쉬지 않고 약침을 놨다. 그 덕에 이마의 뜨거운 기운이 조금씩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허억, 허억.”

시혁은 주술이 완료된 것을 깨달았다.

겉으로 보기에 시혁은 훌륭한 노예다. 이마에 분명 낙인이 찍혔으니까. 야만 군주가 다른 오크나 고블린에게 그러하듯 자신의 의지를 시혁에게 전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의지가 시혁의 행동을 강제할 수는 없었다. 뇌까지 그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까닭이었다.

악전고투 끝에, 자유 의지를 가진 채 살아남은 것이다.

[치료 천막으로 가라.]

그르렁대는 듯한 목소리가 시혁의 머릿속으로 파고들었다.

존재감은 무시무시했지만, 꼭 따라야 한다는 압박감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굳이 벌써부터 반항할 필요는 없었다. 나중에 결정적일 때 반기를 들어 야만 군주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혀야 하지 않겠나.

무력이 약한 의학자가 뭘 어떻게 할 수 있냐고?

간단하다.

약을 쓰면 된다.

평범한 약이 아니라, 강력한 독약을.

아니면 마약을 써서 오크와 고블린 전체를 중독시켜도 좋고.

기껏 엘프 의학자를 잡아 왔는데 치료사처럼 부상자들 치료만 시킬 리 없었다. 분명 약을 만들게 할 터였다. 그러면 반드시 이 수모를 갚아줄 기회가 온다.

자살해서 지구로 돌아가는 거?

그것도 좋지만 당한 만큼은 갚아줘야 하지 않겠나. 시혁은 빚지고는 못 사는 성미였다.

야만 군주는 시혁이 예측한 대로 움직였다.

치료 천막에 배치한 후, 솥을 하나 주더니 약을 만들라고 했다. 그것도 세계 생명 진영에서 통용되는 강화제와 비슷한 성능으로.

기가 막혔다.

달랑 솥 하나 가지고 뭘 하라는 거냐? 거기다 약재를 제대로 공급하지도 않으면서?

그걸 얘기하자, 고블린 치료사가 시혁을 을러댔다.

“야만 군주께서 바라는 일이다. 감히 야만 군주의 명을 어기겠다는 거냐?”

시혁은 코웃음을 쳤다.

“야만 군주께서 바라는 일은 내 약으로 군대가 강해지는 거지, 허접한 약을 만들어 먹으나 마나한 효과를 보는 게 아니다. 가서 말씀드려라. 약재가 더 필요하다고. 그리고 솥 하나로는 안 된다. 최소한 맷돌이랑 절구, 널찍한 그릇 정도는 더 있어야 한다.”

고블린 치료사가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캬학! 시끄럽다! 노예 주제에 불평하지 말고, 약이나 만들어라!”

시혁은 추한 얼굴의 고블린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노예?

낙인은 반신에 대한 충성심과 복종심을 강제한다. 그러나 해당 진영의 모든 병종에게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말이 안 통하는구나. 좋다, 야만 군주께 직접 말씀드리지.”

“뭐라고? 이놈! 어딜 가는 거냐?”

치료 천막을 나가려고 하자, 고블린 치료사들이 그 앞을 가로막았다.

당치도 않는 짓거리.

가볍게 몸을 날렸다. 엘프 특유의 가벼운 몸 덕에, 고블린 치료사들의 머리 위를 뛰어넘었다. 고블린 치료사들이 악을 쓰며 쫓아오지만, 시혁은 이미 오크와 고블린 사이를 가로질러 야만 군주의 앞에 도달했다.

야만 군주가 노여움에 차 호통을 쳤다.

[이게 무슨 소란이냐!]

“히익!”

“요, 용서해 주십시오!”

“엘프 노예의 버릇을 다스린다는 게 소란을 일으켰습니다. 죽을 죄를 졌습니다!”

야만 진영의 반신들은 휘하 소환자들을 가혹하게 다루기로 이름이 높다. 뭔가 수틀리면 바로 고문을 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시혁은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꿇릴 게 없었으니까.

고문?

할 테면 해라.

결국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지 못하곤 못 배길 거다.

소리를 높여 필요한 사항을 말했다.

< 낙인 –1- > 끝

ⓒ 산호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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