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 세계의 한의사-54화 (54/250)

< 최종 병기 –1- >

전문 계급 때 특화는 연구 특화를 선택했다.

예전 같았으면 본인의 치료 능력을 더 중시 여겼을 텐데, 최근 들어 느낀 점이 있어서였다.

지식이 중요하다.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더 많은 지식을 알아내고 전파하는 게 필요했다.

한편, 대가가 되면서 치료소 구축이라는 특기가 생겼다.

어떤 장소든 치료소로 지정하여 마나 회복과 치료 효과에 이점을 얻는 능력.

수인족 도시에서 아무 보조 효과도 없는 엘프 나무에서 계속 치료를 했더니 이런 게 생겼나 보다.

[의학 나무로 가라.]

소환이 되자마자, 반신이 당연하다는 듯 그렇게 명령했다.

시혁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또 의학 나무?

오늘도 약이나 만들다가 끝날 모양이다.

“오, 새로운 의학자인가?”

의학 나무에 들어가자, 기존의 의학자들이 모여들었다.

꽤 많았다.

무려 10명.

지금까지 봤던 의학 나무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다.

더구나 거장 의학자도 소속되어 있었다. 대가 의학자도 둘이나 있어, 굳이 서열을 따지면 시혁이 4번째 정도 되었다.

의학 나무의 크기도 컸다. 시혁이 처음 전직했던 의학 나무와 비교하면 최소 5배는 됐다, 환자도 많고, 약도 다양한 것을 만드는지 구수한 냄새가 사방에서 풍겼다.

시혁은 정중히 인사를 했다.

“반갑습니다. 최시혁이라고 합니다. 의학 나무의 규모가 생각보다 크네요?”

“의학 나무만 아니라 모든 것이 다 크다네. 세계 생명은 신위 경쟁의 거의 막바지에 도달했거든. 조만간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신이 될지도 몰라.”

세계 생명은 현존하는 모든 병종을 소환할 수 있다고 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생명 진영의 최종 병기, 초록용도 거느리고 있었다. 아직 전장에는 소환하지 못했지만, 얼마 전부터 마나를 모으는 게 조만간 소환할 것 같다고 했다.

시혁은 눈을 빛냈다.

“초록용이라고요?”

“그렇다네. 덕분에 현재 전황은 소강상태야. 상대 반신들도 숨을 고르고 있거든. 내가 보기엔 그들도 자기네 진영 최종 병기를 소환하려는 것 같아.”

“최종 병기를요? 대단하겠습니다.”

“그래, 대단한 구경거리가 펼쳐질 거야. 거기 휩쓸리지 않게 조심해야지. 스치기만 해도 우리 같은 허약한 의학자는 끝장이니까.”

현재 이 전장에 있는 반신은 총 다섯이라고 했다.

세계 생명, 야만 군주, 해골왕, 흡혈 귀부인, 거울 여왕.

각자 엘프, 오크와 고블린, 언데드, 뱀파이어, 도플갱어를 주력 종족으로 삼고 있었다. 대부분 악 성향 진영이 많아 세계 생명의 처지가 썩 좋지만은 않다던가.

그래서 초록용을 소환 중이라고 했다. 초록용은 최종 병기 중에서는 약하다는 평가를 받지만, 엘프 군대와 함께하면 각종 보조 마법으로 그 전력을 몇 배로 강화시킬 수 있으니까.

‘초록용, 야만 괴수, 해골용, 시초 뱀파이어, 그림자 마왕……’

시혁은 다섯 진영의 최종 병기를 한 번씩 떠올려 보았다.

그렇게 많이 아르거스에 왔지만 최종 병기를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과연 어떤 위력을 보여줄지 기대가 되었다.

의학자들에게 합류한 후, 약을 만들기 시작했다.

세계 생명의 세력이 위축되어 있었다. 이걸 극복하려면 병력을 정예화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일환으로 초록용을 소환하고, 의학자들을 많이 모아놓은 것이다.

게다가 후방에서 레벨을 올리는 영웅 부대에는 엘프 신의도 많은 수가 포함되어 있다고 했다. 지금까지 시혁을 소환한 반신 중에서도 가장 강대한 반신이라고 볼 수 있었다.

약 조제 속도는 굉장히 빨랐다.

급속 치료만 쓰던 때도 다른 의학자보다 훨씬 빨리 약을 만들곤 했다. 여기에 대량 조제까지 더해지자 상상하기 힘들 정도가 되었다. 약 성능만 두고 보면 좀 떨어져도, 양으로 따지면 거장 의학자보다 더 많이 만들어 내고 있었다.

거장 의학자가 놀라워했다.

“자네 조제 특화였나?”

“아뇨, 연구 특화입니다.”

“허, 연구 특화인데 그 정도야? 정말 대단해.”

지루한 일상이 이어졌다.

다가올 전투를 대비하여 치료약과 해독제, 강화제를 수도 없이 찍어냈다. 그 종류도 다양해서, 의학자마다 다른 약을 만들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시혁이 점차 지루함을 느낄 때쯤, 묘한 분위기가 세계 전체에 내려앉았다.

공기가 떨리고 있었다.

어스름한 검은색의 하늘이 연녹색으로 물들었다. 유독 진한 초록색의 연기가 구름처럼 하늘 아래를 떠돌았다. 오직 본성 중앙, 세계수의 상공만 검은 하늘이 남아 있어 꼭 검은 구멍처럼 보였다.

거장 의학자가 허리를 폈다.

“초록용이 소환되나 보군. 잠깐 볼까?”

의학 나무의 상층으로 올라갔다.

밖으로 나가는 통로에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용이 꿈틀대듯, 하늘이 천천히 회전하고 있었다. 녹색의 기운이 서서히 소용돌이치며 둥근 원을 만들었다.

꾸아앙!

환상처럼, 짐승의 울부짖음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녹색 기운이 급속도로 압축되었다.

검은 구멍의 주변으로 모이더니 거대한 원을 만들었다. 마치 거대한 초록 반지를 허공에 띄워놓은 듯했다.

그 원이 짜릿한 빛을 뿜었다.

압도적인 광량에, 전장에 소환된 이들 모두가 눈을 감았다.

세계가 비명을 지르며, 어떤 존재가 원 안에서 나타났다.

거대한 용.

서양에서 말하는 드래곤이다.

머리부터 꼬리까지 그 길이가 족히 백여 미터에 달했다. 무슨 유람선 한 척이 허공에 떠 있는 듯했다.

비늘의 색은 녹색. 두 눈은 세월을 초월한 지혜를 머금어 부드럽게 빛났다. 두 쌍의 날개가 하늘을 품을 듯 펼쳐졌고, 묘한 녹색의 기류가 몸통을 휘어 감고 있었다.

꿀꺽.

시혁은 초록용을 보고 침을 삼켰다.

존재감이 무시무시했다.

단지 보는 것만으로도 다리가 떨렸다. 지금까지 봤던 영웅들이나 괴수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과연 최종 병기라고 할까.

병종이라고 하지도 않았다. 일반 소환자가 전직을 수십 번을 해도 되는 게 불가능하니까.

[진격하라!]

반신의 명령이 떨어졌다.

시혁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약을 워낙 잘 만드는 까닭에, 의학 나무에 남아 있으라고 한 것이다.

2명은 남고, 10명은 차출되었다.

시혁은 부러운 눈으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별 수 없었다.

반신이 내린 명령을 거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약간의 재량권은 있지만, 말 그대로 약간이었다.

초록용이 날개를 펴고 서쪽으로 날아갔다.

엘프 군대가 초록용을 따라 진군했다. 멈췄던 전쟁이 재개된 것이다.

하지만 시혁이 하는 일에는 변화가 없었다.

의학 나무에 틀어박혀서 약을 만드는 게 하는 일의 전부였다. 이러려고 엘프 의학자가 됐나 싶어 회의감까지 들었다.

그렇게 또 며칠이 지났을까.

중간에 하늘이 여러 가지 색으로 물들었다.

다른 반신들도 최종 병기를 소환한 모양이었다.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50레벨 영웅들과 최종 병기들의 싸움에 전방이 초토화되고 있다고 했다.

설마 본성을 공격해 오진 않겠지?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방어 시설은 남겨뒀지만, 대부분의 전력이 전방으로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지금은 휑한 느낌까지 들었다. 잠시 한숨 돌리려고 상층으로 올라가 밖을 봤더니, 본성 안이 텅텅 비어 있던 것이다.

“최시혁 의학자님. 이상하지 않습니까? 본성 방어가 너무 취약한 것 같습니다.”

“세계 생명도 바보는 아니니, 뭔가 노림수가 있을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유일하게 같이 남은 의학자가 불안한 듯 말했다.

시혁은 그 의학자를 안심시켰다.

본성이 파괴되면 전쟁에서 패배한다. 반신의 화신이 바로 본성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 위험을 감수할 거라고는 보기 어려웠다.

그러나 곧, 세계 생명의 의도를 알게 하는 일이 벌어졌다.

의학 나무의 내부가 흐린 녹색 광채에 휩싸였다.

녹색 광채는 의학 나무를 위부터 아래까지 천천히 훑어 내렸다. 그때마다 의학 나무 내부의 잡기가 하나둘 사라졌다. 각종 조각은 물론, 약재와 미리 만들어놓은 약까지 허공으로 녹아 없어지는 것이다.

“어어, 저거!”

동료 의학자가 깜짝 놀랐다.

시혁은 눈을 가늘게 떴다.

몇 번 본 적이 있는 광경이다.

마나가 모자랄 때 반신은 건물의 일부 혹은 전체를 마나로 환원할 수 있다. 그 효율은 썩 좋지 않지만, 급할 때 쓰기에는 좋았다.

시혁은 급히 의학 나무 상층으로 올라갔다.

다른 건물들을 살펴보았다.

마찬가지였다. 희미한 녹색 광채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거리가 가까워서 알 수 있지, 멀리서는 알아차리는 게 불가능했다.

왜 건물을 마나로 환원하는 걸까?

금방 그 이유를 눈치챘다.

시혁은 신음처럼 한 마디를 내뱉었다.

“천도……”

천도 이적.

본성을 다른 성으로 옮기는 이적이었다.

물론 본성 안의 시설을 다 옮길 수는 없다. 반신이 깃든 세계수를 비롯, 반신이 지정한 몇 개만 옮겨갔다.

그렇게 지정한 것 중 의학 나무는 없을 터였다. 옮겨갈 거면 이렇게 내부 시설을 마나로 환원할 필요도 없지 않겠나.

이게 무슨 소리냐고?

세계 생명이 자기 본성을 미끼로 내놓았다는 뜻이다. 본성을 노출시켜서 적의 핵심 전력을 끌어들이고, 그 사이 이익을 취하려는 의도겠지.

시혁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약은 많이 만들어 놨다는 건가?

미끼로 자신을 던져 놓은 세계 생명에 대해서,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났다.

“어, 어떻게 하죠?”

의학자가 공포에 질려 말했다.

이제 겨우 수습 의학자. 전직을 한 것도 아니라고 했다. 마음이 여린지 툭하면 눈물짓곤 했다.

시혁은 마음을 굳게 먹었다.

까짓 거 최악의 경우에도 한 번 죽으면 될 것 아닌가.

하지만 얌전히 죽음을 맞이할 생각은 없었다.

반항할 것이다.

몸부림치고 또 몸부림쳐, 결국에는 생존과 승리를 거머쥘 것이다.

“살아야죠.”

“어떻게요?”

“어떻게 해서든요.”

시혁은 주위를 살폈다.

다른 건물에서도 배치된 소환자들이 나와 있는 게 보였다.

시혁은 의학 나무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나무와 나무 사이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공터에 자리를 잡았다.

소환자들에게 손짓을 하자, 소환자들이 잠시 망설이더니 공터로 모여들었다.

많지는 않았다.

기껏해야 백여 명 정도.

중급 병종이 대부분이고, 상급 병종이 몇 보였다. 고급 병종은 없었다. 의외로 기본 병종은 적은 편이었다.

“세계 생명이 우릴 버렸습니다.”

“엘프 출신 반신이지만, 실로 명예도 모르고 승리에 눈이 멀었다고 밖에 말 할 수 없는 작자입니다.”

“엘프 출신이라는 것도 의심스럽습니다.”

세계 생명의 눈이 보고 있겠지만 거칠 것이 없었다. 선량한 엘프들이 모였는데, 곳곳에서 세계 생명을 성토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지나치게 분위기가 과열된 것 같았다.

시혁은 짐짓 화제를 돌렸다.

“조만간 악신들의 군대가 쳐들어 올 겁니다. 대책을 강구해야 합니다. 어쩌면 용이 날아올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용이라……”

“그럴 가능성이 더 높겠습니다. 여기까지 군대가 오기는 힘들 테니까요.”

반항은 불가능하다.

도망쳐야 했다. 그것만이 살 길이었다.

문제는 본성이 직접 공격당하기 전까지 도망칠 수가 없다는 점이다. 본성 내부를 돌아다니는 것 정도가 한계였다. 그나마 세계 생명이 옥쇄를 명령하면 죽을 때까지 배치된 건물에 남아 있어야 할 판이고.

군대가 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다른 반신의 최종 병기가 공습하는 것을 상정하여 대비를 했다.

곳곳에 땅굴을 팠다.

잠시 몸을 숨기기 위해서였다. 용이 쳐들어와 숨결이라도 뿜으면, 겉만 그럴 듯한 건물 안에 있는 것보다 거기 숨는 게 더 나을 테니까.

시간만 충분했다면 다른 방법도 강구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너무 모자랐다.

겨우 땅굴만 팠을 뿐인데, 정령들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아아악!]

[무서운 존재가 날아와요!]

[도망쳐요, 도망쳐!]

우려했던 사태가 발생했다.

시혁은 서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검은 점 하나가 빠르게 접근해오고 있었다. 엘프의 시력을 가진 탓에, 점의 정체를 금방 꿰뚫어 보았다.

해골용이다.

전체적인 윤곽은 초록용과 비슷했다. 크기는 더 큰데, 뼈만 남은 탓에 더 빈약해 보였다. 대신 어두운 기운을 후광처럼 두르고 있었다. 기본 병종 정도는 닿기만 해도 좀비로 만들어 버린다는 사악한 기운이었다.

해골용이 접근함에 따라 공기가 서서히 얼어붙었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죽음, 그것에 대한 근원적인 공포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 최종 병기 –1- > 끝

ⓒ 산호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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