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원 –1- >
다음날, 시혁은 눈 뜨자마자 집을 나왔다.
오늘도 정장에 넥타이 차림이었다. 보건복지부에서 받은 한의사 면허증과, 이번에 이능부에서 받아온 발현자 등록증도 챙겼다.
뭐 때문이냐고?
다름 아니라 은행을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한의원을 개원하려면 자금이 필요하니까.
얼마나 대출할까?
5억? 10억?
돈은 이제 문제가 안 된다. 얼마를 빌리든 갚을 자신이 있었다.
문제는 시혁 본인의 역량이 어느 정도냐는 것.
대책 없이 크게 차렸다가 파리만 날릴 수는 없지 않나.
시혁은 냉정하게 생각했다.
‘괴수 질병 전문으로 나가는 게 좋겠지?’
당연하다.
일반적인 요통이나 경추통 같은 것은 시혁이 다른 한의사들에 비해 강점을 가진다고 보기 어려웠다. 어쩌면 더 떨어질 수도 있었고.
그렇다면 대부분의 한의원이 그러는 것처럼 외래 위주로 나가는 것보다는 입원실을 갖추는 게 낫겠지. 괴수 질병 환자는 거동하기 힘든 환자가 많으니까.
입원실이라……
시혁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외래 진료만 하는 것보다 입원실을 갖추는 게 당연히 비용이 많이 든다. 공간도 확보해야 하고, 당직 간호사는 물론 식사와 청소에도 신경을 써야 하니까.
그래도 10억 원 정도면 구색을 맞추지 싶었다.
일단 그 정도 대출하고, 부족하면 추가로 대출을 받아야겠다. 아니면 제약 회사와 계약하는 것을 서두르던가.
시혁은 발걸음을 빨리 했다.
집 근처 사거리에 위치한 일광 은행 지점으로 들어갔다.
대기표를 뽑고 기다렸다. 손님이 많지는 않아서, 얼마 기다리지 않아 시혁의 차례가 되었다.
창구 직원이 사무적인 어조로 말했다.
“안녕하세요. 무슨 일로 오셨어요?”
“예, 대출을 좀 받으려고 왔는데요.”
“저희 은행의 대출 조건은 좀 까다로운 편인데…… 얼마 정도 생각하세요?”
“일단 10억 정도 대출을 받으려고 합니다.”
“예? 10억이요?”
창구 직원이 깜짝 놀랐다.
지금까지 시혁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있다가, 퍼뜩 고개를 들어 시혁을 쳐다보았다. 유독 옷매무새와 손목을 유심히 살피더니, 시혁의 얼굴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긴가민가 하는 기색을 보이면서도, 일단 입을 열었다.
“그렇게 많이 대출을 받으시려면 담보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혹시 준비해 오신 게 있으신지요?”
“담보는 없고, 서류는 몇 개 가져왔습니다.”
시혁은 준비해 온 발현자 등록증과 한의사 면허증을 창구 직원에게 내밀었다.
창구 직원이 그걸 확인했다.
서류에 적힌 이름과 시혁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최시혁 씨? 정말 최시혁 씨에요?”
“예, 맞습니다.”
“맙소사! 잠깐 여기 앉아 계시겠어요? 지점장님을 모셔 올게요!”
지점장실은 창구 바로 뒤에 마련되어 있었다.
창구 직원이 그 안으로 들어가기 무섭게, 풍채 좋은 중년의 남자가 튀어나왔다.
시혁에게 다가오더니, 허리를 거의 직각에 가깝게 굽혔다.
“처음 뵙겠습니다. 일광 은행 염주지점장 공호일입니다.”
“반갑습니다. 최시혁입니다.”
“대출을 받으러 오셨다고요? 이쪽으로 오시죠. 천천히 이야기를 해보는 게 좋겠습니다.”
시혁은 지점장실로 들어갔다.
넓었다.
병원에서 봤던 원장실을 연상시켰다. 업무용 책상과 의자는 물론, 장식용 책장과 접대용 소파도 놓여 있었다.
지점장이 시혁에게 자리를 권했다.
소파에 앉자마자, 젊은 여직원이 커피를 내왔다.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10억 정도 대출을 원하신다고 하셨지요? 적은 돈이 아닌데, 혹시 담보 같은 건 없습니까?”
“없지요. 발현자는 대출 우대를 받는다던데, 그것으로는 안 됩니까?”
“안 될 리가요? 당연히 됩니다. 절차상 여쭤보는 것뿐입니다. 뭐, 발현한 능력에 따라 한도가 차이가 납니다만, 선생님에게는 10억이 아니라 그 두 배, 세 배도 대출해 드릴 수 있습니다.”
발현자가 좋긴 좋다.
하긴 다 주판을 튕겨보고 하는 말이겠지. 지금이야 시혁이 가진 돈이 없지만, 조만간 막대한 돈을 벌 게 확실하니까.
상담을 하여 대출 조건을 결정했다.
거치 3년, 상환 5년으로 잡았다.
일이 안 풀릴 경우를 대비한 거였다. 어차피 중도 상환도 가능했으니, 시혁은 돈을 버는 대로 대출부터 갚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상담을 마무리 짓고, 지점장이 지나가는 듯한 어조로 물었다.
“병원을 세우시나 보죠? 10억 가지고는 많이 모자랄 텐데요. 제 친구가 북구에 요양 병원을 하나 세웠는데, 150억이 들었답니다.”
“병원을 꽤 크게 했나 보네요. 전 그 정도까진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저 입원실이 있는 한의원을 개원하려고 합니다.”
“한의원에도 입원실이 있습니까?”
“보통은 없지요. 외래 진료만 하니까. 그래도 수지타산이 안 맞아서 입원실을 안 만드는 거지, 입원실을 못 만드는 건 아닙니다.”
“아하, 몰랐습니다. 그럼 이 부근에 개원하실 생각입니까?”
“글쎄요. 지금은 상무지구 쪽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그쪽이 번화가니까요. 고속도로랑 가깝고, 공항이랑 고속철도도 멀지 않아서 입지 조건이 괜찮은 것 같습니다.”
“하긴 상무지구가 좋지요. 번화가라 땅값이 비싸고, 유흥 시설이 많은 게 흠입니다만.”
“그야 어쩔 수 없지요. 수완지구와 송정역 근처도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상무지구에 개원하는 게 가장 좋겠습니다.”
“하하, 상무지구 땅값 올라가는 소리가 들리네요. 몇 년 후에는 괴수 질병 치료의 메카가 될 거 아닙니까? 이거 미리 작은 건물이라도 하나 사둬야겠습니다.”
“하하, 그렇게 되면 좋겠습니다.”
지점장은 그 자리에서 시혁의 통장에 10억 원을 이체시켜주었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겨우 몇 백만 원이 전부였는데, 한 순간에 수백 배로 불어난 것이다.
인사를 나누고, 은행을 빠져나왔다.
지점장이 문 앞까지 나와 인사를 했다. 앞으로도 자기 지점을 많이 애용해달라는 것이다.
택시를 잡아탔다.
상무지구까지는 멀지 않았다. 채 20분도 지나지 않아 도착했다.
미리 얘기를 해둔 부동산 사무실에 들어갔다.
상무지구는 현재 광주광역시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다. 자연히 각종 병원과 의원들이 난립해 있는데, 잘 되는 곳도 있지만 안 되는 곳도 많아 매물이 자주 나왔다.
그 중 시혁이 눈독들인 곳은 운천 저수지 근처, 7층짜리 건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건물 2층부터 7층까지 전부 의원으로 채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5층은 한의원이고 6층은 내과가 있었는데, 둘 다 환자가 없어 원장들이 양도를 원하는 상황이었다.
2개 층을 계약하여 5층은 진료실로, 6층은 입원실로 쓰면 좋겠다.
사무실에 들어가자, 주인이 반색하며 시혁을 맞았다.
“최 선생님! 오랜만에 오셨습니다그려. 그 동안 정말 대단한 일을 하셨던데요?”
시혁은 어깨를 으쓱였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참, 저번에 여쭤봤던 매물은 아직 남아 있습니까?”
“있지요. 상무지구에 워낙 한의원도 많고 의원도 많아서 요샌 개원하려는 원장님들이 별로 없습니다. 뭐더라, 레드 오션이라고 하던가요? 몇 분이 알아보러 오시긴 했는데, 그 말씀하시면서 그냥 가시더라고요. 어떻게, 결정하신 겁니까?”
“예, 제가 인수하겠습니다.”
시혁의 말에, 주인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5층으로 하시겠습니까? 한의원 원장님이 보증금이랑 장비 양도금까지 7천 말씀하시던데요. 규모도 크고, 장비도 꽤 많은 곳이니 그게 좋지 싶습니다. 6층에 내과는 인테리어도 새로 해야 하지 않습니까?”
인테리어 비용만 해도 만만치 않다.
평당 150에서 200정도가 든다고 했다. 지금 시혁이 인수하려는 게 50평 한의원인데, 거의 8천에서 1억 가까이 아끼는 셈이다.
시혁은 담담하게 말했다.
“한의원, 내과, 두 개 모두 인수하겠습니다.”
주인이 눈을 크게 떴다.
“두 군데 전부요?”
“예. 전 괴수 질병 전문으로 나갈 건데, 그러려면 입원실이 필요해서요. 5층은 외래 진료 및 치료실로 쓰고, 6층에는 입원실을 만들 겁니다.”
“두 군데 다 하시면 보증금만 6천에 월세가 7백에 가까운데, 괜찮겠습니까?”
“괜찮긴 한데 건물주 분께 연락해서 좀 깎으면 좋겠네요. 제가 알기로 두 곳 모두 안 나간 지 오래 됐다고 하던데, 제가 한꺼번에 인수하는 것이잖습니까?”
“그야 그렇지요. 한 번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밀고 당기기 끝에, 보증금 5천 5백에 월세 6백으로 타협을 보았다.
많이 깎진 못했지만 이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5층은 장비 양도금도 지불했다. 대신 6층은 완전히 비우라고 했다. 내과 장비 대부분을 시혁이 쓸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인테리어 업체와 계약도 끝냈다.
아는 선배에게서 소개 받은 업체였다. 평당 180만원을 불렀는데, 비싸긴 해도 그러자고 했다. 업체가 기존에 시공했던 한의원의 인테리어가 시혁의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6층과 5층 일부만 바꾸면 되니 좀 아낄 수 있었다.
여기까지 들어간 돈이 벌써 2억.
대출한 금액의 20%를 쓴 셈이다. 이쯤 되자 커 보였던 10억이 괜히 불안스러워졌다.
어쨌든 한의원 공간은 확보했다.
인테리어 기간은 2주 정도 걸린다고 했다. 그 동안 보건소에 개설 신고도 하고, 한의원에서 근무할 간호사도 뽑아야 할 것이다. 입원 환자들 식사를 제공할 업체와도 계약하고, 환자복과 간호사복도 맞춰야겠지.
“복잡하네……”
시혁은 고개를 흔들었다.
간호사는 몇 명이나 뽑아야 할까?
무턱대고 고용하는 게 아니다. 각 의료 기관마다 보는 환자 수에 따라 최소 인원이 정해져 있었다.
시혁의 목표는 입원 환자를 15명에서 20명 사이로 유지하고, 외래 환자를 하루 30명 정도 보는 거였다. 그렇다면 간호사 6명이 필요하고, 그 중 절반을 간호조무사로 충당할 수가 있다.
잠깐.
한의사는?
외래만 본다면 60명까지 한의사 1명만 있어도 된다. 문제는 입원 환자의 경우, 한의사 1명이 20명까지만 인정된다는 것.
시혁 말고도 한의사 1명이 더 필요하다는 뜻이다.
원무과 직원도 고용해야 한다. 접수와 수납부터 시설물 관리, 물품 관리, 병실 관리 등 다양한 업무를 수행할 터였다. 작은 한의원이면 아예 안 뽑는 경우도 있지만, 시혁의 한의원은 입원실도 있으니 2명 정도가 적당하겠다.
총 10명.
살며시 걱정이 되었다.
인테리어가 완료되면 바로 개원하려고 했는데, 그때까지 필요한 사람을 갖출 수 있을지 모르겠다.
빠르게 움직였다.
우선 한의사 커뮤니티에 채용 공고를 냈다. 스스로의 상황을 상세히 밝히고, 괴수 질병 전문 한의원이 될 거라는 점을 명시했다.
주된 업무는 5층 외래 진료. 대부분의 한의원처럼, 일반 질병 치료가 주가 될 것이다.
시혁이 본인임을 인증한 탓에, 당장 한의사들의 관심을 끌었다.
[정말 최시혁 선생님 맞습니까?]
[결국 개원하시네요!]
[이야, 근처 원장님들 긴장하셔야겠습니다. 환자 엄청 끌고 가시겠어요.]
[그래서 페이는 얼마나 되나요?]
고민하다가 [email protected]를 제시했다.
세후 450이다. 그리고 부원장 본인이 올린 비보험 매출 중 20%를 인센티브로 주니,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야간 당직도 없고, 본인이 입원시킨 환자가 없으면 병동 전화를 받지도 않으니까. 주 6일 근무지만 6시에 정시 퇴근하고, 토요일은 1시까지만 근무하니 주당 44시간 근무하는 셈이다.
질문이 하나 달렸다.
[원장님 한의원에서 근무하면 괴수 질병에 대해 배울 수 있나요?]
< 개원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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