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족 불임 -3- >
한의학도, 엘프 의학도 그 분야에 특화되어 있지 않나.
애초에 저주가 강하지 않아 가능한 방법이었다. 한 번 부셔졌다가 다시 조립한 장난감처럼, 어딘가 모르게 어설픈 느낌이 들었다.
뭐 좋다.
시혁에겐 잘된 일 아니겠나.
가벼운 걸음으로 엘프 나무에 돌아왔다.
어느새 환자들이 몰려 있었다. 남아 있던 치료사가 땀을 뻘뻘 흘리며 진료하다가 시혁을 보고 반색했다.
“의학자님! 이제 오십니까?”
“예. 많이 바쁘셨나 보죠?”
“이제 막 환자들이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참, 가신 일은 잘 되었습니까?”
“잘 됐습니다. 다른 분들은요?”
“거의 다 오셨습니다. 2층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시혁은 양해를 구하고 2층으로 올라갔다.
분위기가 썩 좋지 않았다.
표정 변화가 적은 엘프 종족이지만, 좌절한 기색이 뚜렷하게 드러나 있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그렇게 묻자, 엘프들이 분분히 일어나 시혁을 맞이했다.
“오셨습니까? 일이 좀 힘들어질 것 같습니다.”
“저는 신마대전이라도 벌어진 줄 알았습니다. 고작 필멸자들 때문에 아르거스가 저렇게 되었을 거라고 누가 알았겠습니까?”
“열다섯 마법사라니…… 도무지 말이 안 나옵니다.”
이들도 출산율 저하의 원인에 대해 알아온 모양이다.
치료사 하나가 한탄을 했다.
“저주를 치료하는 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수인족을 몇 명 살펴봤는데, 마나를 주입해 저주를 몰아내려고 해도 불가능했어요. 좀 약해지다가도 다시 강해지곤 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안 잡힙니다.”
단순히 마나 주입으로는 당연히 안 되지.
치료를 시작하는 순간, 주변에서 저주의 기운이 몰려들어 다시 악화시키니까.
시혁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어차피 치료 못 하면 여기서 끝입니다. 잡다한 병만 보다가 끝나는 거예요. 어떻게든 저주를 해결해야 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리긴 해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물론이죠. 다만 몇 가지 약재가 필요한데, 그걸 구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꽤 많이 필요했다.
성별에 따라, 연령에 따라 복용해야 할 약이 다르기 때문이다.
어릴 때는 선천지기를 보해주는 약을, 청소년기에는 생식기의 발달을 촉진시키는 약을, 성인이 된 후에는 생식 기능을 지킬 수 있게 하는 약을 복용시켜야 한다.
최소한 여섯 가지 약이 필요한 셈.
약마다 겹치는 약재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약재가 훨씬 더 많았다. 과연 인근 숲에서 채집하는 것만으로 그걸 보충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본성에 한 번 다녀와야겠습니다.”
시혁은 그렇게 말을 했다.
일반 소환자는 반신과 실시간 교신이 안 된다는 게 아쉬웠다. 뭔가 의사 표명을 하려면, 반신이 먼저 말을 걸거나 반신이 깃든 세계수 앞으로 가야 했다.
케흐가 자청하고 나섰다.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케흐 님이요?”
시혁은 못 미더운 얼굴로 케흐를 보았다.
케흐는 기껏해야 신입 순찰자다. 전향 및 전직을 하고 첫 전투였던 것이다. 차라리 이동 관련 특기를 가진 숙련 계급 이상의 순찰자를 동원하는 게 낫지 싶었다.
그런 시선을 느낀 걸까.
케흐가 어깨를 펴고 힘을 주어 말했다.
“저 이래 뵈도 은신 특기와 신속 이동 특기가 있습니다. 다른 분들이 움직이다가 괴물 놈들이나 천사 놈들한테 잡히면 안 되잖습니까? 차라리 제가 다녀오는 게 나을 겁니다.”
“은신이랑 신속 이동이요? 영 틀린 말은 아니네요.”
시혁은 고개를 돌려 알라니엘을 쳐다보았다.
알라니엘은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사이는 껄끄럽지만, 지금 있는 엘프 중에서는 가장 낫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렇다면 시혁도 반대할 이유가 없다.
“좋습니다. 필요한 약재 목록을 적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생명 영령께 저한테 한 번 말을 걸어달라고 전해주세요. 긴히 할 말이 있습니다.”
“저한테 말씀하셔도 되는데요?”
“그러다 다른 반신의 소환자들에게 붙잡히기라도 하면 큰일 납니다. 생명 영령께 직접 말하겠습니다.”
“끄응. 알겠습니다.”
시혁의 확고한 말에 케흐는 입맛만 다셨다.
그러더니 한 가지를 건의했다.
“참, 세계 생명에게 요정들을 소환해 달라고 하면 어떻습니까? 더 빠르게 연락할 수도 있고, 약초를 수색할 때도 도움이 될 텐데요.”
“일 리가 있습니다. 저도 편지에 적도록 하지요. 케흐 님도 세계 생명을 대면한 자리에서 건의해주시기 바랍니다.”
“헤헷, 좋아요.”
시혁은 종이에 약재 이름을 썼다. 간단한 편지도 기입한 후, 케흐에게 종이를 건넸다.
“케흐 님. 여기 있습니다. 최대한 빨리 본성으로 보내주셨으면 합니다.”
“걱정 붙들어 매세요. 금방 다녀올 테니까!”
케흐가 바람처럼 엘프 나무를 뛰쳐나갔다.
과연 언제쯤 도착할까 싶었다. 아무리 은신과 신속 이동 특기가 있어도, 수인족 도시에서 세계 생명의 본성까지는 상당한 거리가 있으니까.
시혁은 1층으로 내려와 진료에 복귀했다.
환자가 많이 쌓여 있었다. 시혁과 다른 치료사가 합류한 다음에야 그게 해소되기 시작했다.
얼마 후 거대한 음성이 들렸다.
[나를 찾았다고?]
반신 생명 영령.
생각보다 빨랐다. 이곳에서 본성까지 거리가 상당한데, 케흐가 하루도 되지 않아 그 거리를 주파한 것이다.
시혁은 치료를 마무리하고 조용한 방으로 물러나왔다.
[예. 수인족들에 대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사정은 나도 들었다. 내 성역의 원주민들이 출산율이 낮다고 생각은 했는데, 이런 이유가 있을 줄은 몰랐다. 내 성역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다.]
성역에서도 같은 문제가 있는 모양이다.
먼저 거기에 대해 질문을 했다.
[보시기에 성역의 원주민들과, 이 전장의 수인족들의 출산율이 비슷한 것 같습니까? 수인족들을 성역으로 받아들일 경우, 출산율이 올라갈까요?]
[내 백성은 대부분 엘프들이고, 요정들이 일부 있으니 직접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최근에 엘프 아기들이 다수 태어난 것을 보면 단지 성역에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될 것이다. 내 성역은 생명의 마나로 가득 차 있으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네 계획에 대해서는 들었다. 네가 만들 약과 내 성역의 힘을 합치면 불임의 저주는 더 이상 수인족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다. 그대로 진행하도록 해라. 나는 천상 주시자와 파괴 제왕을 상대하기 바쁘니, 네게 전권을 위임하도록 하겠다.]
[예, 생명 영령이시어.]
영웅이라도 한 명 왔으면 좋겠다.
하지만 생명 영령의 영웅들 모두 변경에서 전투를 벌이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수인족 도시에 배치된 엘프들끼리 일을 치러야 했다.
대담 이후, 시혁은 자신감을 가졌다.
곧 도착할 약재를 이용하여 약을 만들 준비를 서둘렀다. 엘프 나무를 더 확장시키고, 수인족에게 부탁하여 각종 약제 기구를 얻어왔다.
며칠 후 약이 도착했다.
놀랍게도, 현재 두 명 뿐인 영웅 중 한 명이 직접 수송 부대를 지휘했다.
정령사 잉니그.
두 번째로 소환된 영웅이면서, 상당히 강력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엘프 시민들이 분주히 짐을 내리는 사이, 잉니그가 시혁에게 다가왔다.
“그대가 최시혁 의학자인가?”
사뭇 고풍스러운 말투다.
시혁은 정중히 잉니그에게 인사를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의학자 최시혁입니다.”
“얘기는 많이 들었네. 이번 계획을 세운 것도 자네라면서? 일이 잘 되었으면 좋겠군. 지금 변방의 사정도 좋지 않아서, 수인족 도시에 기대를 걸고 있거든.”
“전력이 부족한 겁니까?”
“그런 것은 아냐. 마나 생산이 부족한 까닭에 병력을 쉽게 보충할 수가 없어서 문제지.”
“하긴 그렇겠습니다.”
“이런, 시간이 많이 지났군. 난 먼저 돌아가 보겠네. 셰일 경 혼자 변방을 감당할 수는 없으니까.”
“예, 조심히 가세요.”
잉니그는 엘프 시민들, 그리고 요정 두 명을 남겨놓고 병종들과 함께 수인족 도시를 떠났다.
케흐도 데려갔다.
듣자 하니 세계 생명의 지시라고 했다. 케흐의 성격을 볼 때, 수인족 도시보다는 야전에서 도움이 될 것이라나.
수인족 도시에 머물던 엘프들에겐 다행스러운 일.
더구나 인력이 크게 보충되면서, 엘프 나무도 활기를 띄었다.
엘프 시민의 존재가 컸다.
약을 조제할 때 보조 인력이 있느냐 없느냐는 크게 차이가 나니까. 지금은 채집꾼도 없어 순찰자와 파수꾼이 손을 빌려주고 있었다.
요정도 그렇다.
전투 능력은 없어도 투명화 능력과 공간 이동 능력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었다. 약초 채집은 물론, 본성과 연락하기에도 좋을 것이다.
시혁은 정신없이 지시를 내렸다.
“자, 모두 시작합시다! 요정 분들은 숲으로 들어가서 태양 물방울 꽃과 달 수염 풀이 있는지 찾아봐주세요. 시민 분들은 짐 좀 먼저 창고에 넣어주시고요. 빨리빨리 움직이세요! 이번 전장의 승패가 우리 손에 달려 있어요!”
본격적으로 약을 만들기 시작했다.
수인족 도시에 들어오고 벌써 1달이 지나가고 있었다. 자연히 엘프 나무가 상당히 커진 상태였다. 장로 회관은 물론 옆에 위치한 천상 건물이나 파괴 천막 보다 훨씬 컸다.
천상 진영이나 파괴 진영도 놀고 있지는 않았다. 파괴 진영은 수인족 전사와 사냥꾼을 거의 끌어들였고, 천상 진영도 수인족 주민의 1/5 이상을 개종시켰다.
시혁이 반격을 개시한 것은 바로 이 시점.
방문하는 환자들에게 넌지시 한 마디를 흘렸다.
“조만간 여러분 종족에 걸린 불임의 저주를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환자들, 특히 젊은 수인족들이 시혁의 떡밥을 덥석 물었다.
“엘프님, 그게 정말입니까?”
“열다섯 마법사가 남긴 저주인데요, 그걸 어떻게 풀지요?”
많은 이들이 불신을 표했지만, 시혁은 자신 있게 웃었다.
“저주 자체를 아예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지요. 하지만 약화시킬 수는 있습니다. 곧 정상적으로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겁니다.”
흡사 꿈과 같은 이야기였다.
시혁이 장담한 까닭에, 이 내용이 순식간에 도시 전체로 퍼졌다. 도시 어딜 가든 수인족들끼리 모여 생명 영령에 대해 대화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사실일까?”
“생명 진영 반신이잖아. 정말로 가능할지도 몰라.”
“마지막 발정기가 얼마 안 남았는데, 나도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
“가서 물어보자!”
수인족 부부 몇 쌍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엘프들을 찾아왔다.
시혁은 성심껏 치료를 해주었다.
만들어 놓은 약을 복용시키는 것은 물론, 자침을 하고 뜸도 떴다. 마침 발정기를 앞둔 부부들이라 현재 간직한 정자와 난자의 힘을 북돋워주는데 특히 신경을 썼다.
하늘이 도운 것일까, 작은 기적이 일어났다.
시혁이 치료한 부부들 중 두 쌍이 임신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작은 소란이 벌어졌다.
남편들이 자기 아내를 껴안고 빙글빙글 돌았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시혁을 들어 헹가래를 치려고 해서, 시혁은 기겁하여 달아났다.
시간이 많이 지나, 반신들이 귀환할 때가 다가온 시점.
결말은 다음 방문 때 보게 되지 않을까 추측했는데, 결론부터 얘기해서 시혁의 생각이 빗나가고 말았다.
수인족 포고꾼들이 돌아다니며 외쳤던 것이다.
“사흘 후 밤, 대회의를 개최하오! 네 살 이상 열여덟 살 이하의 성인들은 빠짐없이 사흘 후 자정에 대광장으로 모이시오! 세 반신의 사자들이 도착한지 오랜 시간이 지났으니, 귀순 문제를 결정지을 것이라 하오!”
시혁은 반사적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길었던 회유 경쟁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 종족 불임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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