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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수 세계의 한의사-45화 (45/250)

< 종족 불임 -1- [무료 마지막] >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었다.

엘프들이 눈에 불을 켰다.

“실로 어처구니가 없군!”

“아무리 후안무치한 종족이라고 하나 어찌 저럴 수가!”

당장이라도 들고 일어나 화살을 날릴 태세였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우거 파괴자는 머리를 드러낸 채 히죽대며 웃기만 했다.

시혁은 냉정한 눈으로 오우거 파괴자를 노려보았다.

자기들도 치료할 방법이 있을 것이다. 저번 일을 생각해 보면, 굳이 엘프들에게 찾아와 치료해달라는 건 뭔가 노림수가 있다고 봐야 했다.

냉정하게 전후 관계를 따졌다.

오우거 파괴자 주위를 감싼 수인족들을 보자, 머릿속을 스치는 한 가지 생각이 있었다.

‘그렇구나.’

사냥을 하다가 다쳤다고 했다.

분명히 수인족과 함께 나간 사냥이었을 것이다.

덩치와 힘이 있으니 분명 오우거 파괴자가 앞장섰을 텐데, 그러다 상처를 입었나 보다.

수인족 입장에서 보면 오우거 파괴자는 좋은 사냥 친구. 그런 이가 치료를 부탁했는데 욕을 하면서 쫓아낸다?

사정을 모르는 수인족들로서는 엘프들이 좋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시혁은 속으로 입맛을 다셨다.

어쩔 수 없었다.

여기서 화를 내면 이번 일을 주도했을 오우거 파괴자의 의도에 말려들어간다. 이후 엘프들의 입지가 계속 좁아지고, 결국은 승리에서 더욱 멀어지겠지.

시혁은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오, 아니 거기 엎드리세요. 당신은 키가 커서 진료실 안으로 못 들어오겠습니다.”

“의학자님!”

엘프들이 반발했지만, 시혁은 손을 들어 막았다.

“여긴 생명 영령의 영역이 아니라 수인족의 도시 안입니다. 외부라면 모를까, 우리 마음대로 환자를 선별하면 되겠습니까? 우리와 싸우다 저렇게 된 것도 아니고요. 자, 얼른 이쪽으로 오시죠.”

“흐흥, 말이 통하는 엘프로군.”

오우거 파괴자가 콧김을 불더니 엘프 나무로 다가왔다.

널찍한 공터를 하나 골라 천천히 엎드렸다. 워낙 무게가 무거운 탓에 쿵 하고 땅이 울렸다.

다급한 표정을 짓고 있던 수인족들이 달라붙었다.

조심스럽게 갑옷을 벗겼다. 뭐에 얻어맞았는지 등 갑옷이 박살나다시피 해서, 갑옷을 벗기는 데만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시혁은 눈살을 찌푸렸다.

상처가 심각했다.

깨진 갑옷 파편이 오우거 파괴자의 등가죽에 빼곡히 박혀 있었다. 거기서 피가 줄줄 흘러 땅바닥을 붉게 물들였다.

인간이나 엘프였다면 진작 숨통이 끊어졌을 정도.

오우거가 대단하긴 대단했다.

시혁은 예리하게 갈아놓은 단검을 들었다.

“시작하겠습니다. 좀 아플 겁니다.”

“아픈 건 이골이 났으니까 치료나 해라.”

단검을 쭉쭉 내리그었다.

다른 것보다도 갑옷 파편을 빼내는 게 우선이었다.

손으로 더듬으며 갑옷 파편의 위치를 파악했다. 의학자인 이상 체내를 훤히 들여다볼 수 있으니, 이 정도쯤 식은 죽 먹기였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생살을 찢고 갑옷 파편을 빼냈다. 워낙 가죽이 두꺼워 좀 힘들긴 했지만, 마나를 부여하자 칼날이 예리해져 어찌저찌 잘라내는 게 가능했다.

‘응?’

그 와중에도 시혁은 한 가지 의문을 가졌다.

생명의 마나를 부여한다고 칼날이 예리해지진 않을 텐데?

하지만 그 의문을 가진 순간 단검이 원래대로 돌아갔다. 결국 생각하는 것은 나중으로 미루고, 정신을 집중하여 갑옷 파편을 빼내는데 골몰했다.

시간이 꽤 걸렸다.

갑옷 파편이 너무 많은 까닭이었다. 옆에 천을 깔고 늘어놓았는데, 그 수가 족히 수백 개는 되는 듯했다.

시혁은 마지막 파편을 빼고 이마의 땀을 닦았다.

“휴우, 도대체 뭘 잡았기에 갑옷이 이 지경이 된 겁니까?”

옆에 있던 살쾡이 인간이 대답했다.

“숲 깊은 곳에 있는 검은 늪의 지배자를 공격하다가 당했습니다. 그나마 고르코드 님께서 있어서 다행이었지, 아니었으면 형제들이 떼죽음을 당했을 겁니다.”

위기의 순간 고르코드가 몸을 날려 공격을 받아냈다고 한다. 오우거이니 즉사하지는 않았지만, 저 지경이 되어 겨우 달아났다고.

“그렇습니까? 대단하네요.”

“대단하다는 말로는 부족하지요! 고르코드 님은 진정한 투사요, 우리의 형제입니다!”

살쾡이 인간은 감격한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주변의 수인족들도 마찬가지였다. 함성을 지르며 손을 치켜드는데, 그 분위기가 사뭇 열광적이었다.

이로서 파괴 진영이 또 앞서나가는 셈.

시혁은 단검을 고르코드의 뒷목에 꽂아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그거야말로 고르코드가 원하는 것 아니겠나. 적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줄 수는 없었다.

자침을 하여 치료를 마무리 지었다. 만신창이가 되었던 고르코드의 등이 순식간에 회복되었다.

고르코드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거대한 몸을 몇 번 틀어보더니, 이상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크게 함성을 질렀다.

“우어어어!”

“우오오!”

“고르코드 님이 살아나셨다!”

“고르코드 님이야말로 불멸이며, 투사 중의 투사이다!”

“와아아!”

수인족들이 난리를 피웠다.

하도 시끄러워서 시혁은 나무 안으로 들어왔다. 엘프들 모두 들어온 뒤 문을 닫자 좀 조용해졌다.

알라니엘이 우려 섞인 얼굴로 시혁을 보았다.

“의학자님. 어째서 저 오우거를 치료해주신 겁니까? 우리의 적이거니와, 지금 상황을 보니 차라리 내버려 두는 게 좋았을 것 같습니다.”

시혁은 고개를 저었다.

“제가 치료하지 않았어도 분명 살아났을 겁니다. 치료하면서 상태를 봤는데, 내장까지 박힌 파편은 없었어요. 고작해야 근육이 다친 게 다인데, 그것 때문에 죽을 리가 없지요. 오히려 갖은 고난 끝에 살아나는 장면을 연출해서, 수인족들과의 관계를 끈끈히 묶었을 겁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알고 보면 간단합니다. 설명해드리지요.”

시혁은 자신이 간파한 고르코드의 속셈을 설명했다.

엘프들의 얼굴이 침중해졌다.

그 설명에 일리가 있기 때문이었다. 몇몇은 자기들도 그렇게 생각했다며 동의하기도 했다.

알라니엘이 한숨을 쉬었다.

“문제입니다. 지금 이대로 갔다간 파괴 제왕이 승리하고 말 겁니다. 생명 영령께서는 뭘 하고 계신 걸까요? 지원이 절실한데요.”

“듣기로 숲 외부에서도 전투가 치열하다고 합니다. 천상 진영이나 파괴 진영에서도 지원군을 거의 보내지 못하잖습니까? 일단 최대한 우리끼리 잘 해봅시다. 여기서 더 밀려서는 안 됩니다.”

“휴, 그래야겠습니다.”

모두 머리를 맞댔다.

사태를 뒤집을 획기적인 방책을 모색하기 위해서였다.

한참이나 의논했지만 딱히 이거다 싶은 방법은 나오지 않았다. 그저 환자를 더 친절히 보자, 각종 강화제를 만들어서 무료로 나눠주자, 같은 어설픈 계획만 나왔다.

알라니엘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수인족들은 뭘 원할까요?”

“네?”

“그렇잖아요? 수인족들이 원하는 걸 제공해줘야 좋아하지 않겠어요? 아무거나 퍼줘 봤자 별 감흥이 없을 거예요. 저 멍청한 오우거도 괴물의 공격을 자기 몸으로 받아냈다고 하잖아요? 자기들끼리 사냥하는 거였으면 절대 그렇게 하지 않았을 거예요.”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시혁은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제 생각에는 애초에 수인족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고, 전략도 잘못 짰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무료로 치료해준다 한들, 눈물 흘리며 귀순할 거라고 보기는 힘들죠. 죽기 직전에서 구해준 것도 아니고, 대체제가 없는 것도 아니니까요. 지금 수인족들은, 우리가 있으면 편리하지만 없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야 우리에게 귀순해 올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다들 옹이 의자에 앉아 한숨만 쉬었다.

그러다 순찰자 하나가 엉뚱한 소리를 했다.

“끄응, 중립 종족 때문에 이게 무슨 고생인지…… 차라리 괴물들처럼 때려잡을 수 있으면 좋겠네요.”

통상적인 엘프들의 가치관과 맞지 않는 말.

“케흐 님!”

알라니엘이 경고하듯 뾰족하게 소리쳤다.

케흐가 불퉁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이 그렇잖습니까? 참내, 엘프 티를 내고 싶으면 고향 세계에서나 그러던가. 같잖은 평화주의는 참 우스워서……”

“지금 해보자는 겁니까?”

무표정하던 알라니엘의 얼굴에 금이 갔다.

감정이 격화되는 것 같아, 시혁은 손을 들어 둘을 말렸다.

“두 분 다 그만하세요. 케흐 님, 저도 엘프 출신은 아닙니다만 현실적으로 수인족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게 이번 전장의 핵심 아니겠습니까? 마나 집중점 하나 없는 곳이니, 군대를 키우는 건 한계가 있어요.”

“끄응, 그건 그렇습니다만.”

“우리끼리 엘프 비 엘프 나눠봐야 승리에서 멀어지기만 합니다. 힘을 모아야 해요. 이번 전장의 승패는 오직 우리에게 달려 있다는 걸 잊지 마세요.”

“쩝, 알겠습니다. 알라니엘 님, 죄송합니다. 제가 머리가 아파서 실수를 했습니다.”

“알았어요. 앞으로 조심하세요.”

알라니엘의 얼굴이 차가웠다.

아닌 게 아니라 케흐는 최근 실수를 여럿 했다. 얼마 전에는 수인족들과 친해지겠다고 술을 마시다 주먹다짐까지 벌였던 것이다.

다행히 큰 문제로 번지지는 않았지만 뒷소문이 안 좋게 났다. 알라니엘이 그걸 수습하려고 계속 뛰어다녔었지.

케흐는 사과를 하고도 개운치 않은 표정을 지었다.

이래서야 될 일도 안 되겠다 싶어 시혁이 뭐라고 하려던 순간, 누군가 엘프 나무의 문을 두드렸다.

“아, 들어오세요.”

다름 아닌 처음 엘프 나무를 방문했던 꼬마 곰이었다.

꼬마 곰이 머리를 삐죽 들이밀더니 헤헤 거리며 웃었다.

“안녕하세요! 숲에 나갔다가 맛좋은 꿀을 발견해서 가져왔어요!”

치료를 받고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상태가 썩 괜찮았다. 가끔 근처 숲에 나가 꿀을 따오기도 했다.

누가 곰 인간 아니랄까 봐 꿀을 매우 좋아했다. 특히 벌집째 씹어 먹는 재미가 일품이라며, 이렇게 엘프들에게 가져다주는 것이다.

그 씹는 맛이 엘프들에겐 고역이지만, 천진난만한 아이를 실망시킬 수 없어 억지로 받곤 했다.

시혁은 어색하게 웃으며 벌집을 받아들었다.

“매번 고맙다. 이렇게 안 줘도 돼. 우리 엘프들은 소식하는 종족이니까, 차라리 네 약에 넣어 먹으렴.”

“헤헤. 제 약에 넣을 꿀은 많이 있는 걸요? 요즘 엘프님들 수도 늘었잖아요. 더 많이 갖다드릴게요!”

꼬마 곰이 밝게 웃었다.

그 많은 꿀과 벌집을 처리할 생각에 암담했지만, 차마 거부하진 못하고 같이 웃고 말았다.

꼬마 곰은 벌집만 전해주고 의학 나무를 떠났다.

한숨을 내쉬며 벌집을 창고에 박아두려고 할 때, 문득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막 수인족 도시에 도착했을 때.

구경 나온 수인족 중 아이가 적었다. 있어도 안색이 다들 좋지 않았다. 지금까지 도시에 머무르며 목격했던 바, 수인족 전체가 그러했다.

뭔가 이유가 있지 않을까?

그 말을 하자, 엘프들도 이상하다며 목소리를 모았다.

“의학자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수인족은 수명이 짧고 다산하는 종족이라 아이가 많아야 하는데, 오히려 노인들보다 더 적었습니다.”

“대재앙 때문에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대재앙 전의 수인족입니다. 어떻게 변했을지 알 수가 없습니다.”

케흐가 반론했지만, 시혁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쳤다.

“그렇다면 그걸 복원해 줘야지요. 후대에 대한 열망은 어느 종족이나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게 성공한다면, 수인족들이 앞으로의 진로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만들 수 있어요.”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게 좋겠습니다.”

하나둘 찬성을 표했다.

툴툴대던 케흐도 더 말이 없었다. 원래 어떤 종족인지는 모르겠는데, 꼭 한 번씩 딴죽을 걸어야 직성이 풀리는 것 같았다.

정보를 탐문하기 위해 엘프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마침 수인족이 고르코드에게 몰려 환자가 없는 참이었다. 만약을 대비해 치료사 한 명만 남겨 두었다.

‘이상하네.’

시혁은 눈살을 찌푸렸다.

수인족의 출산율 저하에 대해 알아보려고 지식을 열람했는데, 뜻밖에도 아무 지식도 알아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마치 누군가 정보를 차단해 놓은 것처럼.

하다못해 단편적인 단어들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르거스에 와서 지식 열람에 대해 배운 뒤로는 처음 겪는 일이라, 잠깐 동안 어찌할 바를 몰랐다.

< 종족 불임 -1- [무료 마지막] > 끝

ⓒ 산호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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