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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수 세계의 한의사-44화 (44/250)

< 수인족 도시 -2- >

수인족의 도시가 보였다.

두터운 목책이 도시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도시라곤 해도 고층 건물이 없이 단층이나 이층의 목조 건물이 고작이었다. 따라서 목가적인 분위기를 풍길망정 위압감을 느낄 수는 없었다.

“정지! 누구냐!”

경비병이 일행을 멈춰 세웠다.

늑대 인간이다.

털이 복슬복슬한 팔과 다리, 얼굴을 그대로 드러낸 상태였다. 몸통만 가리는 가죽 갑옷을 입고, 작은 쇠뇌와 도끼로 무장했다.

시혁이 앞으로 나섰다.

“생명 영령께서 보낸 사절입니다. 그대들에게 귀화를 권유하기 위해 왔습니다.”

“그래? 들어와라. 안 그래도 언제 도착할지 궁금해 하고 있었다. 다른 반신들보다 꽤 늦었군.”

경비병이 문을 열어주었다.

엘프 일행은 수인족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

조금 걷자, 곳곳에서 호기심에 찬 눈길이 쏟아졌다.

수인족들이 삼삼오오 모여 엘프들을 구경했다. 다행히도 적대적으로 보이진 않고, 얼굴에 호의가 담겨 있었다.

“저기 봐, 엘프들이야!”

“생명 영령도 사절을 보낸 모양이야.”

“어떤 반신에게 귀화하게 될까?”

“모르지. 장로님들께서 잘 정하시지 않겠어?”

향후 일족의 미래를 결정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 자연히 주민들에게도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이 있었다.

구경하는 수인족 중, 어린아이는 별로 없었다는 점이다.

어느 종족이든 어린아이가 호기심이 강할 테니, 구경하러 나올 법도 한데?

기껏해야 몇 명.

그것도 안색이 대부분 좋지 않았다. 쿨룩쿨룩 기침을 하는 아이도 많았다.

의아함을 느꼈지만, 시혁은 부지런히 발을 놀렸다.

목적지는 도시 중앙.

주변 수인족들이 그쪽으로 가라고 안내해줬기 때문이다. 과연 어느 정도 걷고 나니, 유난히 큰 건물이 하나 보였다.

장로회관이라 부르는 곳이었다. 저곳에 수인족의 장로들이 모이고, 일족의 대소사를 회의를 통해 결정했다.

“음?”

시혁은 문득 걸음을 멈췄다.

장로회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이질적인 양식의 건물 두 채가 마주 보고 서 있었다.

흰 대리석으로 만들고, 붉고 푸른 장식을 넣은 둥근 형태의 건물이 하나. 나무 기둥을 세우고 짐승 가죽을 늘어뜨린, 뾰족한 우산 모양의 천막이 또 하나.

다름 아닌 천상 진영과 파괴 진영의 건물이었다.

얼핏 봐도 규모가 상당했다.

“수인족들이 상당히 드나드네요.”

알라니엘이 두 건물을 보며 말했다.

그 말대로였다.

수인족들이 쉬지 않고 양 진영의 건물을 들락거렸다. 천막에는 주로 무장한 전사들이 들어가고, 둥근 건물에는 비무장한 민간인들이 들어갔다.

이미 상당한 신망을 쌓은 모양인데, 과연 엘프들이 이들을 따라잡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장로회관에 도착했다.

수인족의 일곱 장로들이 엘프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곰, 늑대, 살쾡이, 멧돼지, 사슴, 너구리, 토끼.

장로들은 정중한 태도로 엘프 일행을 맞이했다.

“어서오시오, 생명 영령의 사절들이어.”

“편히 앉으시지요.”

“헌데, 여러분이 전부입니까? 천상 주시자나 파괴 제왕은 상당히 많은 수를 보내셨습니다만……”

너구리 장로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알라니엘이 곧이곧대로 대답하려는 것을, 시혁이 선수를 쳤다.

“저희는 선발대입니다. 저희가 먼저 자리를 잡으면 후발대를 더 보내시기로 하셨지요.”

“아, 그렇습니까?”

장로들은 시혁의 말을 믿는 눈치였다.

이곳 전장에서 승리하려면 수인족을 반드시 끌어들여야 한다. 그러니 고작 열세 명이 사절의 전부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알라니엘은 왜 거짓말을 하느냐는 얼굴로 시혁을 쳐다보았다.

답답했지만, 굳이 설명해 주진 않았다.

여기로 오다가 전투가 벌어져 절반이 넘게 죽었다고 하면 수인족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나. 생명 영령이 다른 두 반신보다 약하다고 볼 게 뻔했다. 그러면 회유하기가 더 힘들어질 것이다.

장로들이 기대어린 눈으로 엘프들을 쳐다보았다.

“생명 영령께서는 어떤 것을 약속하셨습니까? 자비롭기로 유명한 생명 진영의 반신이시니, 저희도 기대하는 바가 큽니다.”

시혁은 자신의 이마에 그려진 풀꽃 문양을 가리켰다.

“저는 의학자입니다. 제 능력을 활용하여 여러분 종족의 환자들을 치료하겠습니다. 병이면 병, 독이면 독, 모두 다룰 수 있습니다.”

“으음, 그러십니까?”

장로들의 얼굴이 떨떠름하게 변했다.

어째 반응이 이상하다?

토끼 장로가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치료는 천사들한테도 받을 수 있는데, 차라리 정령사를 보내주지……”

시혁이 눈을 번뜩였다.

천상 진영에서도 수인족의 환심을 사려고 천사들을 파견한 모양이다. 천사들은 대개 온갖 신성 마법에 능통하니 의학자와 분야가 좀 겹쳤다.

“험, 험.”

장로 중 하나가 헛기침을 했다.

“생명 영령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안 그래도 주민들의 건강이 안 좋던 참인데, 엘프 의학자님께서 도와주신다면 금방 회복이 될 겁니다. 거점으로 쓰실 곳이 필요하시겠지요? 미리 준비해 두었습니다. 글루타 대장이 안내해 드릴 겁니다.”

엘프들이 거점으로 쓸 곳은 다른 진영의 건물 근처에 마련되어 있었다.

이제 보니 세 진영이 딱 삼각형을 이루었다. 의도한 것인지, 단지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박 터지게 경쟁하게 생겼다.

공터로 안내 받은 후, 알라니엘이 본성에서 가져온 씨앗을 중앙에 심었다. 엘프들이 씨앗 심은 자리를 둘러싸고 정신을 집중하자, 금방 싹이 트고 한 그루 나무가 성장했다.

엘프들끼리 만든 거라 크기가 작았다. 작은 통나무집 정도밖에 안 되었다. 그나마 2층까지 있어 체면치레는 했다.

시혁은 엘프들에게 말했다.

“저는 1층에서 진료를 하겠습니다. 저 혼자 다 할 수는 없으니까, 여러분이 좀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저희가 도움이 되겠습니까? 정령도 쓸 수 없고, 치료에는 완전히 문외한인데요.”

“환자를 옮기고, 잡무 정도만 처리해 주셔도 좋습니다. 더 이상은 안 바랍니다.”

“그 정도는 가능할 것 같습니다.”

원래대로라면 동행한 치료사들이 했어야 할 일이지만, 아쉬운 대로 엘프들에게 맡겼다.

나머지 엘프들은 숲에 나가 약초를 캐오기로 했다. 수가 적으니 많이는 캐오지 못할 것이다. 시혁의 특기 중 대량 조제가 막힌 셈이라고 할까.

자리를 잡고, 나무의 출입구 앞에 작은 팻말을 걸었다.

[진료 중]

그러자 늙은 곰 인간 하나가 꼬마 곰을 데리고 눈치를 보며 들어왔다.

“콜록, 콜록.”

아기 곰이 계속 기침을 했다.

감기에 걸린 걸까?

시혁은 1층 한쪽 벽, 마치 의자처럼 튀어나온 나무옹이에 늙은 곰과 꼬마 곰을 앉게 했다.

“아이가 귀엽네요. 감기 걸려서 온 겁니까?”

“예. 어릴 때부터 허약하게 태어나서 그런지, 계속 기침을 해서 걱정입니다. 좋다는 약초는 다 캐서 먹여 봤지만 그 때 뿐이고……”

“천사들한테는 안 찾아가 보셨어요?”

“그게, 축복을 받으면 완치된다고는 했는데 대신 천신에게 귀의해야 한다고 해서 망설이던 중입니다. 저흰 대대로 사냥의 신을 믿는 집안이어서요.”

사실 수인족 대부분이 그랬다.

주로 달의 신, 사냥의 신, 짐승의 신을 믿었다. 대대로 믿어온 신을 버리고 한 순간에 개종하라고 하니 꺼림칙한 모양이었다.

시혁에게는 잘 된 일.

꼬마 곰을 자세히 관찰했다.

수인족 전공은 아니지만, 또래들보다 상당히 약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맥도 약하고, 성장이 늦되어 덩치가 작은 편이었다.

시혁은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했다.

성장을 도와줄 보약을 구상하려고 그런 거였는데, 늙은 곰이 엉뚱한 오해를 했다.

“호, 혹시 많이 안 좋은 겁니까?”

“예? 하하, 그런 거 아닙니다. 지금 당장 치료를 하는 건 쉬운데, 앞으로 잔병치레를 하지 않게 할 약을 알려드리려고 그러는 겁니다.”

시혁은 꼬마 곰을 침대처럼 생긴 옹이 위에 눕게 했다.

침을 꺼내 들자, 꼬마 곰이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아픈 거 아니에요?”

“응? 하나도 안 아프니까 걱정 마렴.”

시혁은 빙긋 웃었다.

굳이 옷을 걷을 것도 없었다. 수인족들은 팔과 다리를 그대로 내놓고 있으니까. 합곡과 열결 등 손목 주변에 위치한 혈자리와 코 옆 영향혈에 침을 찔렀다.

생명의 마나가 흘러들어갔다.

꼬마 곰의 얼굴이 대번에 좋아졌다. 기침도 하지 않고, 코 끝에 맺혀 있던 말간 콧물도 사라졌다.

시혁은 늙은 곰을 보며 말했다.

“이 근처 숲에도 황금 풀, 등불 나무, 별빛 미나리 정도는 있죠?”

“예, 아주 흔한 약들이지요.”

“황금 풀 전체, 등불 나무 껍질, 별빛 미나리 뿌리를 1대 1대 1 비율로 물에 넣고 우리면 뽀얀 황색 액체가 될 겁니다. 거기다 꿀을 조금 넣고 졸이면 젤리처럼 변할 텐데, 그걸 하루에 딱 3번만 아이 손가락 하나 크기만큼 먹이세요. 그렇게 장복하면 더 잔병치레하지 않고 건강히 자랄 겁니다.”

“아이쿠, 이런 귀한 지식을!”

늙은 곰이 감격했다.

시혁에겐 별 것 아닌 지식이지만, 꼬마 곰에게는 어떤 효능을 발휘할지 몰랐다. 그것을 그냥 가르쳐주었으니, 늙은 곰이 감격할 만도 했다.

솔직히 지금 당장 증상만 완화시켜 줬어도 됐을 일 아닌가.

시혁은 넉넉하게 웃어 보였다.

“뭘요. 별 것 아닙니다. 정 고마우시면 이웃들에게 여기 와서 치료 한 번씩 받아보라고 하세요.”

“예, 엘프님. 저희 손주를 치료해주시고, 소중한 지식까지 가르쳐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늙은 곰이 꼬마 곰의 손을 잡고 떠났다.

꼬마 곰이 시혁을 보며 앙증맞게 손을 흔들었다. 시혁도 기껍게 손을 마주 흔들어 주었다.

한 번 수인족들이 이용하고 떠나자, 다른 수인족들도 하나둘 엘프 나무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수인족들은 다양한 질병을 호소했다.

근골격계 질환이 가장 많았다. 숲을 뛰어다니며 사냥을 주로 하다 보니 몸을 다치는 게 비일비재했던 것이다. 그 다음은 뭘 잘못 주워 먹고 병이 걸린 이들이 많이 방문했다.

가끔은 시술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굉장히 심하게 다쳐서 팔이나 다리 하나를 잘라야 하거나, 내부 장기에 기생충이 가득한 경우였다.

그럴 때는 짧은 칼을 이용해 잘라낸 뒤 침을 놓아 회복시켰다. 엘프 의학자는 약 조제에 강점이 있지만, 칼로 환부를 도려내지 못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휴우!”

시혁은 이마에 난 땀을 닦았다.

혼자 환자들을 다 보는 것은 힘들었다. 급속 치료를 활용해도 그랬다. 건물의 지원을 받지 못하니, 마나 회복 속도가 느리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다.

이렇게 치료를 한다고 수인족이 생명 영령에게 귀순하려고 들까?

확신할 수 없었다.

더구나 시간이 지날수록 격차가 벌어졌다. 중간에 엘프들이 좀 보충되었어도 그랬다. 세 진영 중 생명 진영이 가장 뒤떨어졌다.

선두는 단연 파괴 진영.

수인족들과 함께 사냥을 하며 신뢰를 다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천상 진영과 비등비등했는데, 생명 진영이 그 영역을 갉아먹은 게 컸다. 병에 걸리면 꼭 천사들을 찾아갈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흥! 지상의 의술 정도로 천상의 신성 마법을 따라올 것 같으냐?”

가끔 마주치는 천사들이 그런 말을 했다.

파괴 진영의 오우거나 트롤보다, 오히려 엘프들에게 더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엘프들이 없었더라면 지금도 파괴 진영과 비슷했을 테니까.

이제야 왜 오우거 파괴자가 자신들을 살려 보냈는지 알 것 같았다.

“교활한 놈……”

시혁은 입맛을 다셨다.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파괴 제왕의 승리로 끝날 터.

대책이 필요했다.

환자들을 치료하면서도, 시혁은 그 생각에 골몰했다.

그러던 때, 뜻밖의 손님이 엘프 나무를 찾아왔다.

오우거 파괴자 고르코드.

수인족 도시로 오던 때 엘프 일행을 공격했던 자가, 사냥하다가 다쳤다고 치료해달라며 방문한 것이다.

< 수인족 도시 -2- > 끝

ⓒ 산호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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