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 세계의 한의사-43화 (43/250)

< 수인족 도시 -1- >

눈을 떠보니 아르거스다.

이번에 소환된 전장은 참 특이했다.

전장이 거대한 원형인 것은 이전과 같다. 그곳에 생명 영령, 천상 주시자, 파괴 제왕이 삼각 형태로 자리를 잡고 세력을 다투었다.

다른 곳에서는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마나 집중점이 이곳에는 없었다. 대신 중앙 지역에 강력한 중립 세력이 존재했다.

수인족.

늑대 인간, 살쾡이 인간, 곰 인간 등 다양한 종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주민들의 수만 3만을 넘고, 정규 병력도 수천에 이르니 이곳 전장에서는 가장 강력한 세력이라 할 만 했다.

“원주민들은 모두 아르거스 행성에 있는 것 아니었습니까?”

시혁은 동료 의학자에게 그렇게 물었다.

의학자는 어깨만 으쓱였다.

“저도 그런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는 않은가 봅니다. 뭐, 원주민들이 세력을 이룬 게 특이하긴 하지만 다른 전장도 따지고 보면 사정은 비슷합니다. 우리가 중립 괴물이라고 부르는 것들도 문명만 만들지 못했다 뿐이지 원주민이라고 볼 수 있으니까요.”

“듣고 보니 그렇습니다.”

시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6월 말이 된 현재, 시혁은 숙련 의학자가 되었다.

치료사 때보다는 좀 느렸다. 의학 나무에 배치되어 약만 주구장창 만든 탓에, 다양한 경험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특기는 이런 게 생겼다.

대량 조제.

급속 치료와 병행해서 쓸 경우 약을 거의 찍어내다시피 했다. 거장 의학자라고 해도 약을 만드는 양만큼은 시혁을 따라오지 못할 것이다.

시혁은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중앙 지역을 수인족들이 차지하고 있으면 전투를 치르기도 어렵겠는데요?”

“그렇지요. 일단 세 반신 모두 수인족을 몰아내기는 불가능합니다. 마나 집중점이 없어서 군대를 소환하는 것도 한계가 있고요. 더구나 수인족이 차지한 영역이 전장의 절반 이상이어서, 그들을 피해 다른 반신을 공격하기도 힘듭니다.”

“그럼 수인족들을 회유해서 같은 편으로 끌어들여야겠네요?”

“제가 보기에도 그렇습니다. 생명 영령이 우리부터 소환한 이유가 있지요.”

생명 영령의 본성은 규모가 작았다.

반신이 깃드는 세계수 주위로 의학 나무와 치료 나무, 그리고 전사의 나무와 지킴이 나무 등 필수 건물들만 서 있었다. 군대의 규모도 크지 않아 1백도 되지 않고, 영웅도 소환되지 않은 듯했다.

의학자는 소환자들이 늘어나는 전투 후반에 그 진가를 발휘한다. 따라서 이렇게 작은 진영에 소환된 것은 시혁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수인족들을 회유하기 위해서였다. 이들을 설득하여 끌어들인다면, 다른 두 반신을 가볍게 압도할 테니까.

[수인족 도시로 가라.]

아니나 다를까.

생명 영령의 명령이 들렸다.

“가시죠.”

대화하던 의학자, 클락이 몸을 일으켰다.

의학 나무 밖에서 순찰자들과 파수꾼, 치료사들이 둘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나를 쥐어짜서 소환한 두 의학자이니, 호위 병력을 붙여주는 것이다.

그들과 함께 천천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미 한 차례 의학자 일행이 습격을 받아 사망한 적이 있다고 했다. 덕택에 수인족들과의 사이가 다른 반신들에 비해 얼마 진전되지 못했다던가.

순찰자 조장에게 현재 정세에 대해 더 들을 수 있었다.

“천상 주시자와 파괴 제왕은 수인족 도시에 자기 세력을 꽤 심어 놓았습니다. 벌써 그들에게 넘어간 주민들도 꽤 있는 모양입니다. 섬길 반신을 정하고, 충성을 바쳐 그들의 성역에 편입되어야 한다고 주장이 제기되었다고 합니다.”

“그들의 마음을 얻는 게 급선무겠습니다.”

“예. 생명 영령께서도 두 의학자님께 기대가 크다고 들었습니다. 저희도 그렇고요.”

쉽지는 않을 것이다.

당장 두 적대 반신이 온갖 훼방을 놓을 테니까. 수인족들과의 관계에서 양강 체제가 정착이 되고 있는데, 새로운 경쟁자가 부상하는 것을 두고 볼 리가 없다.

과연 그러했다.

본성에서 출발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숲의 공기가 별안간 무거워졌다.

정령들이 부산을 떨었다.

[조심해! 조심!]

[괴물들이 오고 있어!]

[크고 무서워! 조심해!]

반응을 볼 때, 파괴 제왕의 병종들이 접근하는 듯했다.

순찰자 조장이 긴장한 얼굴로 손을 들었다.

“정지! 모두 나무 위로 올라간다.”

모두 엘프이니 나무를 타는 것쯤이야 쉽다.

시혁도 나무 위로 올라갔다. 라이터와 침을 소환한 채, 파괴 제왕의 병종들이 나타나길 기다렸다.

얼마 걸리진 않았다.

숲 한쪽이 들썩이더니, 못 생긴 거인들이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두 종류였다.

대머리에 우락부락한 근육질인 오우거와, 키가 멀대 같이 크고 녹색 피부를 가진 트롤들.

“크아아아!”

“우오오!”

그들이 나무 위에 오른 엘프들을 보고 고함을 질렀다.

시혁은 적잖이 긴장되는 것을 느꼈다.

수가 엘프들 보다 많았다. 무장도 충실했다. 정면 대결로는 대적하는 게 불가능했다.

선두에 서 있는, 커다란 전투 망치와 육중한 철제 갑옷으로 무장한 오우거 때문이다.

오우거 파괴자.

파괴 진영의 대표적인 상급 병종이었다.

“엘프들아, 돌아가라!”

오우거 파괴자가 소리를 쳤다.

“얌전히 돌아가면 목숨만은 살려주마! 내 경고를 무시하면 이렇게 만들어 주겠다!”

그러면서 망치로 옆에 있는 나무를 후려치자, 콱 하는 소리와 함께 나무가 단박에 두 조각이 났다.

엘프들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박살나는 순간 나무의 정령이 비명을 지른 까닭이었다.

순찰자 조장이 코웃음을 치며 외쳤다.

“어림도 없는 소리! 네놈들이야말로 비켜라! 비키지 않으면 머리통에 바람구멍을 내주마!”

“흥, 여리여리한 엘프 주제에 입만 살았구나!”

오우거 파괴자가 히죽 웃었다.

그러더니 오우거와 트롤들이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스스로의 힘을 믿는 듯, 넓게 퍼진 상태였다.

엘프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 정령으로 의사소통을 하며 곧 시작될 전투에 대비했다.

“쿠오오오!”

오우거 파괴자의 전투 함성과 함께 전투가 시작되었다.

길게 한 번 고함을 지르더니, 스스로의 힘을 폭발시키며 달려들었다. 그 기세에 먼지가 폴폴 날렸다. 다른 누구도 아닌, 시혁이 서 있는 나무가 오우거 파괴자의 진로 앞에 놓여 있었다.

시혁은 얼른 다른 나무로 옮겨 탔다.

꽈앙!

오우거 파괴자의 육중한 몸이 나무를 들이 받았다.

폭탄 터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나무가 단박에 쪼개지고, 흙먼지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죽여!]

파수꾼 조장이 날카로운 눈을 하고 소리쳤다.

화살들이 날아갔다.

파수꾼은 물론 순찰자들도 함께 화살을 날렸다. 엘프답게 예리하고 훌륭한 솜씨지만, 오우거 파괴자의 갑옷에 모조리 막히고 말았다.

시혁은 그걸 보고 혀를 찼다.

상급 병종과 중급 병종의 차이는 크다. 순찰자와 파수꾼으로는 오우거 파괴자를 당해내기가 힘들다.

순찰자 조장이 다급하게 외쳤다.

[눈구멍을 노려라! 나무에서 떨어지지 마!]

다른 오우거들도 나무를 미친 듯이 박살냈다. 트롤들은 자꾸 손도끼를 던졌다. 다들 중무장한 탓에, 엘프들이 아무래도 밀렸다.

현재 엘프들의 공격력으로는 일격에 오우거나 트롤을 쓰러뜨리기 어려웠으니까. 마법적인 힘이 필요한데, 의학자를 소환하느라 그쪽으로는 마나를 투자하지 못한 게 문제.

결국 피해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아악!”

파수꾼 조장이 어깨에 손도끼를 맞고 나무에서 떨어졌다. 대기하고 있던 오우거 약탈자가 즉각 달려들었다.

빠악!

단 일격이었다.

호쾌한 도끼질 한 방에, 파수꾼 조장의 상체가 으깨져 피를 뿌렸다.

그걸 본 엘프들이 눈에 띄게 동요했다.

“안 돼!”

“조장님!”

한 가지 악재가 더 겹쳤다.

파수꾼 조장의 죽음을 보고 놀란 사이, 의학자 클락이 딛고 선 나무가 오우거 파괴자의 공격을 받은 것이다.

기겁하여 몸을 날렸지만 이미 늦은 뒤.

무너지는 나무와 함께 추락했다. 자연히 근처에 있던 오우거 파괴자가 달려들었고, 손도 써보지 못한 채 머리가 부셔졌다.

오우거 파괴자가 기껍게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하! 이거야 식은 죽 먹기로군! 허약한 엘프놈들. 어딜 감히 파괴 제왕의 영역에 들어오려고 해?”

분위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엘프들은 분노하면서도 겁에 질렸다. 후퇴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눈초리로 본성이 위치한 방향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괴상한 일이 벌어졌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 기세를 높이던 오우거 파괴자가 별안간 무기를 거둔 것이다.

다른 오우거와 트롤들은 당혹한 얼굴로 오우거 파괴자를 돌아보았다.

오우거 파괴자가 뻐기듯 말했다.

“엘프놈들! 운이 좋은 줄 알아라. 이 고르코드 님께서 네놈들에게 특별히 자비를 베풀어주겠다. 목숨만은 살려줄 테니, 어디 한 번 잘 해 보아라!”

그러더니 몸을 돌려 숲 안으로 사라져버렸다.

오우거와 트롤들이 항의했지만 소용없었다. 오히려 화를 내며 후려치기까지 하자,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그 뒤를 따랐다.

이게 어찌 된 일이지?

엘프들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오우거와 트롤들이 사라진 쪽을 바라보았다.

“뭐죠?”

“오우거와 트롤들이 이럴 족속이 아닌데……”

이상한 일이다.

한 가지 짚이는 것이 있었다.

방금 전 오우거 파괴자, 육체는 오우거지만 그 영혼은 오우거가 아닐 것이다.

시혁도 그렇지 않나. 엘프 육체에 인간 영혼이니까.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오우거 파괴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일이겠지. 뭔가 노림수가 있어서 공격을 멈췄을 테니까.

일단 한 군데 모여 재정비를 했다.

다들 크고 작은 부상을 입고 있었다. 나무 위를 뛰느라 살갗이 쓸린 건 다반사고, 손도끼에 찍혀 어디 한 군데를 부여잡고 있는 인물도 많았다.

시혁은 그들을 치료했다.

피해가 컸다.

순찰자고 파수꾼이고 할 것 없이 절반 이상이 죽어 나갔다. 출발할 때는 서른 명이 넘었는데, 이젠 겨우 열세 명만 남았다.

그나마 치료사는 모두 죽었고, 동행했던 클락도 사망했다. 순찰자와 파수꾼 여섯 명씩만 살아남은 것이다.

순찰자 조장, 알라니엘이 막막한 얼굴로 시혁을 보았다.

“이제 어떻게 하지요?”

시혁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출발할 때 일행은 의학자 둘, 치료사 다섯, 순찰자 열둘, 파수꾼 열둘로 이뤄져 있었다. 이만하면 작은 병원을 꾸리는 것도 가능했다. 그런데 이토록 줄어들었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그 고민이 무색하게, 생명 영령이 명령을 내렸다.

[계속 가라. 지금이 기회다.]

기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별 수 있나.

까라는데 까야지. 아르거스의 법칙 상, 소환자는 반신의 명령을 절대적으로 따라야 하니까.

조심스럽게 전진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떤 소리를 들었다.

폭음과 무기 부딪치는 소리, 그리고 비명.

알라니엘이 잠깐 자리를 비우더니,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하고 돌아왔다.

“파괴 진영과 천상 진영이 서로 싸우고 있습니다.”

“그들이 왜요?”

“모르겠습니다. 우연히 마주친 것 아닐까요?”

한 가지 짚이는 게 있었다.

방금 전 오우거 파괴자가 천상 군대의 접근을 알아차렸던 게 아닐까.

그랬으니 병력을 뺐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보기도 어려운 게, 약간의 시간만 있었다면 엘프들을 전멸시키는 게 가능했다. 그 정도 여유도 가질 수 없을 정도로 천상 군대가 가깝게 접근했다고?

알 수 없는 일.

어쨌든 생명 영령의 말대로 움직이는 게 좋겠다. 전투가 끝나면 그들이 어떻게 행동할지 뻔하지 않나.

엘프들의 움직임이 급해졌다.

기척을 숨기고 달리던 것을, 이제는 나무 위를 휙휙 내달렸다. 혹시라도 천상 군대나 파괴 군대가 뒤를 쫓아올까 무서워 뒤로 돌아보지 않고 질주했다.

기동성 하나는 모든 종족 중 최고라는 엘프들이다.

덜미를 잡히지 않고, 전장의 중앙 지역에 도착하는데 성공했다.

“휴우!”

엘프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수인족 도시 -1- > 끝

ⓒ 산호초

작가의 말

Q : 아무리 그래도 한의산데, 무면허 의료 행위는 아니지 않나요?

A : 한의사든 의사든, 법적으로 본인의 면허 밖 의료 행위를 하면 무면허 의료 행위입니다. 면허가 없이 의료 행위를 하는 것만 무면허 의료 행위가 아니라, 면허 밖 의료 행위도 무면허 의료 행위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한의사가 쓸 수 있는 한약재는 식약처에서 고시한 대한민국약전외한약(생약) 규격집에 명시되어 있고, 그 처방이나 출전은 보건복지부에서 고시한 10종 한약서에 근거를 둬야 합니다. 아무리 한의사라도 산에 가서 자기가 써본 약초라고 아무 풀이나 뜯어와서 한약에 넣을 수는 없다는 얘깁니다.

작중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의사는 이계 생물을 마음대로 쓸 수가 없습니다. 그건 발현자와 이능력자의 영역이어서요. 단, 임상실험을 거쳐 효능을 입증하고 신약으로 등록한 다음에는 가능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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