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 세계의 한의사-42화 (42/250)

< 축하연 -2- >

시혁은 정중히 인사를 했다.

헤어질 때가 어떠했든, 송문식 원장과 홍기태 원장은 시혁을 가르쳤던 교수들이니까.

“오랜만에 뵙습니다. 잘 계셨습니까?”

“나야 잘 지냈지. 최 선생도 얼굴이 좋아 보이는 걸? 병원 그만두니 아무래도 스트레스는 덜 받는 모양이야.”

송문식 원장이 시혁의 어깨를 툭툭 쳤다.

홍기태 원장은 별 말이 없었다. 못 본 척 딴청만 피웠다.

둘이 여긴 어떻게 온 걸까?

금방 그 해답을 찾았다.

두 원장만 온 게 아니었다. 전주와 익산 소재 한방병원 원장의 얼굴도 보였다. 뒤에 보이는 정장 입은 사람은 재단에서 나온 것 같고.

창천대학교 재단 본부가 익산에 있다 보니 축하연에도 참석했나 보다.

시혁은 전주와 익산 한방병원 원장들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최시혁이라고 합니다.”

공손한 태도에, 원장들이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어, 그래. 우리 학교 출신이라며?”

“정말 대단하다. 우리 학교에서 자네 같은 인물이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어.”

원장들은 시혁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럴 만도 했다.

이번 사태로 인해 창천대학교의 명성이 높아졌으니까. 벌써부터 병원을 방문하는 환자가 늘어나고 있었다. 자기들이 가르쳤던 학생이 유명해진 거니 기꺼울 테고.

시혁은 별 거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그저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한 겁니다. 별 거 아니에요.”

“별 거 아니긴! 어디 그게 쉬운 일인가? 참다운 의사여야 가능할 일이지.”

“아무렴. 요즘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자기한테 이익이 없으면 손도 대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 같은 한의사가 그래서는 안 되지. 학부 시절에 제대로 배우고 나온 모양이야.”

시혁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학부 시절?

솔직히 말해서 그때 배운 건 아니었다.

아르거스에서 깨달은 거였다. 칠흑 처형인에 의해 불사의 역병에 걸리고, 희생자들과 함께 살아남고자 발버둥 치면서.

굳이 그 얘기를 할 필요는 없겠지.

시혁은 원장들의 말을 적당히 받아주었다.

그러던 중, 송문식 원장이 정장 입은 사람을 소개했다.

“참, 최 선생은 여기 이 분 누구신지 모르지? 창천 재단 이사장님이라네. 어서 인사하게.”

창천 재단 이사장?

어쩐지 원장들이 좀 약한 모습을 보인다 했다.

시혁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최시혁입니다.”

“반갑습니다. 김성도라고 합니다.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우리 창천대학교 한의학과 출신이시고, 광주 병원에서 근무하셨다고요.”

“예. 지금은 한의원 개원 준비 중입니다.”

“흠, 기왕에 전문의 과정을 시작하셨으면 그걸 끝내는 게 좋지 않았을까요? 제 주변에서 얘기 들어보면 꽤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고 하던데요.”

병원 얘기가 나왔다.

전주와 익산 병원장들도 한 마디씩 거들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의사들처럼 꼭 전문의를 따라는 법은 없지만, 병원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경험이 있지요.”

“당장 괴수 질병만 세상에 존재하는 병의 전부는 아니지 않나? 일반 질병에 대해 아는 것도 중요하지. 그래야 감별 진단이 가능하니까.”

그 말은 맞다.

아르거스의 의학이 만능은 아니니까.

기본적으로 마법과 마나가 존재하는 세상이라 거기에 의존하는 바가 컸다. 더구나 암이나 치매, 뇌졸중 같은 질병에 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빈약했다.

시혁은 쓰게 웃었다.

“당시에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상황이 급박해서요.”

“무슨 일이 있었나?”

“뭐 환자 문제 때문에 트러블이 있었다는 얘기는 들었다만……”

전주와 익산 병원장은 물론, 이사장도 자세한 사정은 모르는 모양이다. 시혁을 향해 호기심 어린 눈빛을 반짝였다.

시혁은 간략하게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그 동안 송문식 원장과 홍기태 원장은 먼 산만 보고 있었다. 당시는 그게 최선이라고 믿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썩 좋은 일처리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설명을 듣고, 이사장이 혀를 쯧쯧 찼다.

“일을 그렇게 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지금이 90년대도 아니고, 괴수도 있고 이능력자도 있는 세상인데 그러시면 안 되지요. 최고의 인재를 쫓아낸 셈 아닙니까?”

“으음, 사정이 좀 있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사정입니까? 한 번 들어나 봅시다.”

이사장이 둘을 노려보았다.

송문식 원장이 입을 우물거렸다.

몇 번 더 재촉한 끝에 겨우 말문을 열었다.

“당시에는 최 선생이 발현자라는 게 확실하지 않았습니다. 검증을 받은 적도, 능력을 보여준 적도 없었으니까요. 그러니 저희로서는 신중하게 판단해야 했습니다. 만에 하나 환자가 잘못되면 큰 일 아닙니까?”

“어차피 환자가 전신 마비 될 상황이었다면서요? 그럼 모험을 해볼 수도 있지 않습니까?”

가만히 듣고만 있던 홍기태 원장이 고개를 저었다.

“이사장님, 그게 그리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그렇게 했으면 무면허 의료 행위로 병원이 영업 정지를 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병원을 위해, 저희는 더 넓은 관점에서 보아야 했습니다.”

넓은 관점이라……

시혁은 동의할 수 없는 말이다.

병원의 입장보다, 환자의 생명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병원을 뛰쳐나가 자원 봉사 형식으로 신아영을 치료한 거였고.

송문식 원장이 홍기태 원장을 한 번 보고 말했다.

“사실 저도 이사장님 말씀에 찬성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저와 의견을 같이 하는 교수들도 있었고요. 하지만 반대하시는 교수님들도 계셔서 그럴 수는 없었습니다. 제가 원장이라고 해서 모든 일을 제 마음대로 하지는 못 하니까요.”

시혁은 당시 기억을 떠올렸다.

교수들이 크게 두 무리로 갈려 있던 게 기억났다.

내과 교수들은 시혁을 옹호하는 편이었고, 다른 과 교수들은 시혁을 믿지 못하겠다고 했지.

냄새가 났다.

사내 정치의 냄새가.

병원이라고 해서 사내 정치가 없지는 않다. 쥐꼬리만 한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더 치열하게 싸우곤 했다. 큰 병원이 아니라 작은 병원이라도 마찬가지였다.

저절로 시혁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사장이 짐짓 사람 좋은 얼굴로 말했다.

“그럼 이제부터라도 원래 자리로 되돌리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지금 최시혁 선생님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주목 받는 분인데요. 송 원장님, 홍 원장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둘이 크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제가 비록 최 선생과 마찰하긴 했습니다만 특별한 감정은 없습니다. 병원으로 돌아오겠다면 기꺼이 환영하겠습니다.”

이사장은 물론, 원장들의 시선이 시혁에게 모였다.

듣고 있던 시혁은 속으로 기가 찼다.

원래 자리로 되돌린다고? 누구 마음대로?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더니, 딱 그 짝이었다.

송문식 원장이 헛기침을 하더니 시혁을 보았다.

“최 선생. 병원으로 다시 들어올 생각 없나? 지난 몇 주 간 병원 나가 있던 것은 불문에 붙이마. 보고 싶은 환자가 있으면 볼 수 있게 조치도 취해주겠다. 어떠냐?”

홍기태 원장도 거들었다.

“지난 날, 최 선생의 말을 믿지 못한 것에 대해선 유감으로 생각한다. 이제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왔으면 좋겠다. 자네는 발현자로서는 어쩔지 모르지만, 한의사로서는 아직 배워야 할 게 많아.”

생각할 것도 없었다.

시혁은 나직이, 그러나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거절하겠습니다.”

“응? 어째서?”

거절할 줄은 몰랐다는 듯, 송문식 원장이 당황스런 표정을 지었다. 홍기태 원장만 그 사실을 예측했는지 무뚝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시혁은 송문식 원장을 빤히 쳐다보았다.

정말 몰라서 저러는 걸까? 아니면 모르는 척 하는 걸까?

“음…… 교수님.”

“왜?”

“제가 병원에 돌아가면 인턴이지요?”

“그야 당연하지.”

“방금 전 제가 어떤 제안을 받았는지 아십니까? 정연대학교와 상임대학교 이능과장님들이 자기들 병원으로 오라고 하셨는데, 최소한 과장급 대우를 약속하셨습니다. 저기 국회의원님은 자기가 아는 병원에 과장급으로 취직하지 않겠느냐고 하시고, 나중에 보건복지부에 공보의 티오를 신청해서 병역 문제까지 해결해주신다고 하셨고요. 그런데 제가 굳이 전문의 하나 때문에 병원에 돌아갈 이유가 있습니까? 솔직히 전문의 자격증 보다 발현자 등록증이 더 가치가 있는 게 사실인데요.”

“으음!”

“험, 험!”

원장들이 시혁의 말을 듣고 헛기침을 했다.

그 중 홍기태 원장은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과장 대우라고? 고작 그런 거에 정신이 팔린 거냐? 그럼 그렇게 해라. 처음부터 쉬운 길만 가면 좋을 줄 아냐? 결국은 한계가 있다. 의학의 길은 끝이 없어. 그런 식으로 눈앞에 보이는 이득만 추구하다 보면, 금방 그 밑천이 드러날 거다.”

시혁은 즉시 반박했다.

“글쎄요. 다른 병원 과장 대우는 눈앞에 보이는 이득이 맞습니다만, 그렇다고 창천대학교 한방병원에서 수련을 받는 게 장기적으로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은 안 듭니다.”

“뭐라고?”

홍기태 원장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걸 정면으로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렇잖습니까? 솔직히 배울 게 없는 걸요. 입원 환자라고 해봐야 몇 개 질환군이 전부고, 획기적인 치료 방법은 어디에도 없지 않습니까? 하던 대로, 과거에 그랬던 대로,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같은 치료법을 고수하고 계시지요. 다른 병원에선 이능력자를 유치한다, 발현자를 고용해서 새로운 치료법을 연구한다고 여념이 없는데요. 지금은 2016년입니다. 1996년이 아니고요. 20년 전과 지금을 비교했을 때, 달라진 게 뭐가 있습니까?”

“이, 이런……”

“허허, 말을 해도……”

원장들이 고개를 휘저었다.

내친걸음이었다. 작정하고 퍼부었다.

“더 말씀드릴까요? 병원 내부적으로도 문제가 많습니다. 교수님들이 권위적인 것은 그렇다고 쳐도, 사내 정치에 학위 장사, 논문 가로채기가 성행해 있지 않습니까? 그런 곳에서 제가 뭘 배우겠습니까?”

“이봐, 최 선생! 아무리 그래도 없는 이야기를 하면 안 되지!”

익산 병원 원장이 제지하고 나섰다.

그러면서 옆에 있는 이사장을 곁눈질하는데, 이사장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시혁은 차갑게 말했다.

“없는 이야기라니요? 석사나 박사를 하려면 꼭 실험 논문이어야 되고, 실험은 교수가 지정한 연구소에 맡겨야 하고, 그 과정에서 소개비 수백을 챙기면 그게 학위 장사 아닙니까? 논문도 그렇지요. 수련의가 쓴 논문을 본인이 쓴 것처럼 1 저자와 교신 저자 모두 가져가는데, 그게 논문 가로채기 아니면 뭡니까?”

시혁도 최근에 안 이야기.

병원에 있을 때는 그런 줄 몰랐다. 다른 낙후된 병원에서나 벌어지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병원을 뛰쳐나온 뒤 몇 명의 선배에게서 위로 차 전화가 왔고, 그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전해들을 수 있었다.

창천대학교 한방병원에서도 이런 일이 심심찮게 벌어졌다. 물론 그러지 않은 교수가 더 많지만, 지금 시혁의 앞에 서 있는 두 명은 해당사항이 없었다.

이사장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게 정말입니까?”

원장들이 급히 부인했다.

“그럴 리가요!”

“최 선생이 잘못 알고 있는 겁니다!”

시혁은 뚱한 표정으로 이사장을 쳐다보았다.

그런 것쯤은 다 알고 있을 텐데 왜 모르는 것처럼 행동하는 걸까?

40대 초반 젊은 나이지만 명색이 이사장 아닌가.

시혁은 이사장을 보며 말했다.

“요즘 병원들이 다 적자여서 힘드시지요? 제가 볼 때, 병원을 통째로 개조하지 않는 한 흑자로 돌리기는 어려울 겁니다. 적자라고 간호사와 수련의 숫자만 줄이는데, 그래서야 환자가 오겠습니까? 의료 서비스의 질이 계속 낮아지는데요. 악순환입니다, 악순환. 병원의 핵심은 스텝(전임의, 즉 펠로우 이상의 의사들)이고, 스텝이 바뀌지 않는 한 병원도 바뀌지 않습니다.”

이사장이 입을 앙다물었다.

불타는 듯한 눈으로 원장들을 노려보자, 원장들이 슬쩍 그 눈길을 피했다.

시혁은 마지막으로 송문식 원장과 홍기태 원장을 한 번씩 슥 보았다.

둘이 긴장했는지 멈칫했다.

또 뭔 소리를 할까 싶었나 보다.

씁쓸함을 느끼며, 다소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제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는 곳에서, 제 능력에 걸맞은 대우를 받으면서 일하고 싶습니다. 교수님들의 말씀은 열정 페이 받고 일하라는 말로밖에 안 들립니다. 부디 건강하시고, 2016년 현재에 어울리는 분이 되시기를 빕니다.”

더는 할 말이 없었다.

정중히 허리를 숙여 보이고 자리를 벗어났다.

연회장 구석진 곳이라 다른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 내밀한 얘기가 나올지도 몰라 살짝 자리를 옮긴 게 주효했나 보다.

낯익은 얼굴들을 향해 움직였다.

강찬과 신아영, 그리고 김미애와 한세훈.

초기 좀비 사태 진화에 힘을 썼던 이들이, 초대를 받고 축하연에 참석한 것이다.

신아영이 시혁을 보고 손을 흔들었다.

“선생님! 여기에요!”

역시 노회한 이들을 상대하는 것보다는, 또래의 이능력자들과 어울리는 게 더 좋다.

시혁은 그들 틈에 섞여 들었다.

축하연은 제법 즐거웠다.

시혁은 적잖이 술에 취했다. 원래 술을 즐기는 성품은 아닌데, 한 잔 두 잔 권하는 것을 받아 마시다 보니 그리 된 것이다.

비틀거리며 숙소로 올라왔다.

침대에 걸터앉자, 비로소 안도감이 들었다.

“끝난 거구나……”

지난 열흘 남짓, 무척 바빴었다.

특히 막바지에는 더 그랬다. 환자들의 심장이 안 좋아져서, 여기저기서 응급 상황이 발생했으니까.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 상황이 꼭 거짓말 같다.

이토록 편히 쉬는 게 대체 얼마만이더라?

히죽, 웃음을 지었다.

결국 해냈다.

아르거스에서 그랬던 것처럼 희생자들을 구한 것이다.

뿌듯했다.

뜨겁게 만족감이 느껴졌다.

‘부안에 오길 잘 했어.’

배가 불렀다.

음식을 많이 먹어서 그런 걸까, 이 차오르는 충족감 때문에 그런 걸까.

모르겠다.

시혁은 만면에 미소를 지은 채 천천히 눈을 감았다.

< 축하연 -2- > 끝

ⓒ 산호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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