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엘프 의학자 -1- >
[의학자로 전직하겠다고?]
반신, 생명의 지팡이가 시혁에게 물었다.
거대한 나무였다. 정령들이 그 나뭇가지를 휘감아 돌며 노래를 부르고, 사슴과 토끼 등 야생동물들이 몰려와 그늘에서 휴식을 취했다.
그 존재를 보니 스스로가 작아지는 것을 느꼈다. 시혁은 주눅이 드는 것을 겨우 뿌리치며 대답했다.
“예. 이제 시험만 치르면 됩니다.”
[의학자 전직이라…… 전직 자격을 갖춘 소환자가 온 것은 상급 병종에서는 처음이군.]
굵직한 목소리가 시혁의 머리를 울렸다.
시혁은 그 내용을 놓치지 않았다.
상급 병종 중에서 처음이라고?
그러고 보니 검은 용도 그렇고 생명의 지팡이도 그렇고 기본 병종과 중급 병종만 활용하고 있었다.
반신 중에서도 약한 반신인가 보다. 반신이라고 해서 다 똑같은 것은 아니니까.
생명의 지팡이가 침묵을 지켰다.
시혁은 조바심을 느꼈지만 꾹 참고 기다렸다.
현재 생명의 지팡이 진영에는 의학 나무가 없다. 의학자 소환이 불가능하니 아예 건설하지 않은 것이다. 시혁이 전직을 하려면 의학 나무가 필요한데, 그걸 만들려면 적잖은 마나가 소모되었다.
설마 안 만들어주진 않겠지?
시혁을 의학자로 전직시키면 생명의 지팡이도 추후 의학자 소환이 가능해진다. 당장 마나가 소모되어서 그렇지, 생명의 지팡이에게도 이익인 셈이다.
한참이 지난 끝에 생명의 지팡이가 답변을 주었다.
[좋다. 마나가 부족하긴 하지만 의학자를 소환할 수 있게 된다면 투자할 만하지. 의학 나무를 성장시키겠다. 반드시 전직에 성공하도록 하라.]
“예, 감사합니다.”
녹색 빛이 대지에 꽂혔다.
작은 싹이 움텄다.
싹이 순식간에 자랐다. 줄기가 올라오더니 금세 두터워졌다. 채 몇 분 지나지도 않아 아름드리나무가 되더니 다른 나무들처럼 고층 건물 크기까지 커졌다.
다만 다른 나무와 뚜렷하게 대비되는 점이 있었다.
줄기의 바깥 면에 갖가지 종족의 조각이 빼곡하게 양각되어 있었다. 인간이나 엘프는 물론, 다크 엘프나 뱀파이어 등 사악한 종족의 조각도 존재했다.
아래쪽에는 온전한 형태의 조각이었다. 그런데 위로 올라가면 기괴한 조각들이 나왔다. 배의 장기를 드러냈다거나,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것들이었다.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하나하나에 지식이 깃들어 있었다. 지식 열람을 사용해서 보면, 각 조각에 해당하는 생리적인 지식이나 각종 질병과 독에 대한 내용을 알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의학 나무 안쪽으로 들어가면 각종 약재의 조각들이 양각되어 있었다. 엘프 의학자는 질병은 물론, 약재도 알아야 했기 때문이다.
의학 나무가 완성되자, 생명의 지팡이가 시혁에게 한 마디를 했다.
[의학자 전직에는 시간이 꽤 걸리는 것으로 안다. 네가 원래 권세 진영이었다고 하니 더 오래 걸리겠지. 최대한 빨리 하도록 해라. 이걸 건설한 대가로, 내 세력이 당분간 검은 용에게 밀리게 생겼으니까.]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끝내지요.”
시혁은 의학 나무에 가까이 다가갔다.
통과해야 할 시험은 네 가지.
첫째, 아르거스에 존재하는 종족 중 엘프나 요정 중 하나를 포함한 세 가지 이상을 선택하여 그 생리를 통달할 것.
둘째, 아르거스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부상과 질병, 독물 중 1천 종 이상에 대해 암기할 것.
셋째, 아르거스에 존재하는 약재 중 1천 종 이상을 외우고 어떻게 어떤 약을 만드는지 숙지할 것.
넷째, 실제로 약을 빚어 질병 치료제와 해독제를 만들고, 더 나아가 외상 회복약과 각종 강화제를 제조할 것.
한의대 6년 과정과 맞먹었다. 아니, 인체에 대해서만 공부하는 게 아니고 3개 종족을 기본적으로 알아야 하니 더 어렵다고 봐야 했다.
“하아, 국시 본 것도 모자라서 또 공부를 해야 돼?”
시혁은 그렇게 푸념을 했다.
하지만 잘 됐다는 생각도 같이 들었다.
지식은 곧 힘이기 때문이다.
아르거스에 존재하는 모든 질병과 독, 저주, 약화 마법이 여기 있지 않나.
이것들이 지구로 가면 바로 괴수 질병이다.
의학 나무에 있는 것들만 모두 달달 외워도, 지구의 괴수 질병에 대한 의학 수준을 획기적으로 올릴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시혁도 많은 것을 얻을 것이다. 그게 명예든, 부든, 아니면 다른 무엇이든 간에.
시혁은 첫 번째 암기 항목을 선택했다.
세 종족.
인간, 엘프, 오크를 선택했다.
당연한 선택.
지구와 아르거스의 인간은 아주 흡사한 종족이었다. 약간의 차이가 있을망정 크지는 않았다. 자연히 지구에서 배운 지식이 아르거스에서도 대부분 통용되었다.
필수 종족 중에서는 요정보다 엘프가 나을 것 같았고, 나머지 종족에 대한 내용을 보니 오크의 신체 구조가 그나마 제일 인간과 유사했다. 그래서 이렇게 셋을 골랐다.
“좋아, 시작하자.”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
그나마 지금 시혁의 육체가 엘프의 것이라는 게 다행이었다. 지구의 몸 그대로였으면 이번 시험을 통과하는데 최소한 몇 달은 걸렸을 테니까. 엘프의 지능이 인간보다 훨씬 높았던 것이다.
세 종족의 생리부터 공부했다.
그냥 덮어놓고 몽땅 외웠다. 유급까지 포함하여 한의대에 7년이나 다녔기 때문에, 외우는 것에는 이골이 난 상태였다. 엘프가 되면서 지능이 높아진 상태라 더 쉬웠다.
세 종족에 대해 다 외운 것은 약 1주일이 지난 후.
즉각 시험에 응시했다.
이론 시험인데, 필기도 구두 시험도 아니었다. 시험을 시작하고 의학 나무 안에 앉아 있자 지식 열람을 했을 때처럼 머릿속에 저절로 문제들이 떠올랐다.
[인간 종족의 뇌로 들어가는 혈관 두 가지와, 두 개의 혈관이 만나고 분지하는 혈관을 정리하라.]
[심장은 어떻게 뛰는가.]
[피부 감각의 신경 분포와 척추, 척수, 대뇌의 관계는?]
대략 이런 것들.
질문이 떠오를 때마다 5초 내에 머릿속으로 체계적인 답변을 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실패로 돌아가며,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다행히 첫째 시험은 한 번에 합격했다.
지구에서 배웠던 게 도움이 되었다. 아르거스 식 대로 정리된 지식을, 시혁은 해부학이니 생리학이니 조직학이니 하는 식으로 분류하여 암기했던 것이다.
다음은 부상과 질병, 독극물에 대해 외울 차례. 어찌 보면 시혁에게 가장 중요한 항목이었다.
이번엔 좀 어려웠다.
지구에서 배웠던 의학적 지식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 게 워낙 많았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아르거스는 마법과 정령이 살아 있는 세계다 보니 똑같은 감기라도 다르게 변화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나마 외워야 하는 병이 딱 1천 종이라 할 만 했다. 당장 한의사 국가고시에서 다루는 병은 그보다 훨씬 많았으니까.
문제는 같은 병이라도 각 종족마다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이다. 어떤 병은 인간에게 치명적인데 엘프는 가벼운 감기처럼 지나가고, 그 반대의 경우도 얼마든지 존재했다.
이런 것 때문에 외우는데 시간이 꽤 걸렸다.
총 2주.
첫째 시험까지 하면 벌써 3주가 지나간 셈이다.
“하아……”
시혁은 불안한 눈으로 의학 나무 밖을 살폈다.
그 3주 동안, 생명의 지팡이 진영은 검은 용 진영에게 상당히 밀렸다.
예전에는 본성 먼 곳에서 전투가 벌어져서 싸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최근에는 공부를 하고 있노라면 칼과 칼이 마주치는 소리, 상처 입고 지르는 비명 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시혁은 조금 초조해지는 것을 느꼈다.
언제 또 이렇게 전직 기회를 얻을지 모른다. 반신이 허가하지 않으면, 시험을 치르기는커녕 의학 나무에 접근할 수도 없었다.
바로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이번에는 약재.
요령은 같았다. 지구에서 본초학 공부를 할 때를 떠올리며 외워나갔다. 덮어놓고 외우면 힘드니 속성별로 한데 묶어 암기했다.
불, 물, 땅, 바람, 생명, 죽음, 뭐 이런 식으로.
본초학도 청열지제, 보기지제, 보혈지제, 이렇게 정리가 되어 있었으니까.
이름 말고는 본초학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었다. 덕분에 쉽게 외웠다. 약 짓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꼭 방제학을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딱 3일.
시혁이 세 번째 시험을 통과하는데 걸린 시간이었다.
그러는 사이 다크 엘프들이 본성을 완전히 포위했다. 주변의 모든 성들이 격파되고, 이젠 본성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생명의 지팡이가 시혁에게 물었다.
[아직도 멀었나? 내 본성이 함락되기 전에 전직을 끝냈으면 한다만.]
체념한 듯한 목소리.
이미 이 지역에서의 승패는 포기한 듯했다. 대신 새로운 병종이라도 챙겨가겠다는 거겠지.
“이제 마지막 시험이 남았습니다.”
[그래? 알았다. 다음 전투에서는 우위를 점할 수 있겠군. 크윽, 이 굴욕은 반드시 갚아주고 말 테다.]
마지막 시험은 실제로 약을 만드는 것이다.
재료는 충분히 준비되어 있었다. 의학 나무의 뿌리 아래 거대한 창고가 있어서, 시혁이 외웠던 1천 가지 약재가 그 안에 저장된 것이다. 약재를 다듬고 실제 약으로 만드는데 필요한 도구들도 그러했고.
만들어야 할 약은 총 다섯 가지.
질병 치료제 1종, 해독제 1종, 외상 치료제 1종, 강화제 2종이었다.
쉴 새도 없이 시험을 시작하자, 약 다섯 개의 이름이 시혁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노을 포식 치료제.]
[푸른 물결 뱀 해독제.]
[무쇠부리 연고.]
[외뿔 곰의 힘.]
[유령의 손길.]
이 다섯 가지 약을 시간 내에 만들어야 한다.
“겨우 3시간?”
그것도 아주 짧은 시간 내에.
그냥 물에 넣고 끓이기만 하면 되는 약이냐면 그렇지도 않았다.
예를 들어 노을 포식 치료제를 보자.
이 약에는 총 5가지 약재가 들어간다.
태양 산삼, 하늘 꽃잎, 달의 힘을 담은 돌, 어둠 성수, 생명 소금.
여기서 태양 산삼을 잘게 썬 후, 기름에 달달 볶는다. 하늘 꽃잎은 별다른 처리가 필요 없고, 달의 힘을 담은 돌은 절구에 빻아 가루로 만든다. 그리고 이것들을 보자기 같은 것으로 감싸 어둠 성수에 넣어 팔팔 끓이며 생명 소금을 살살 뿌려준다. 이렇게 해야 노을 포식 치료제가 완성된다.
이거 하나만 만드는데 2시간은 족히 걸릴 터였다. 다른 4가지 약까지 만들려고 하면 시간이 얼마나 소요될지 모른다.
뭐 어쩌겠나.
이미 약이 제시된 이상 잘 만들어봐야지.
‘약 만드는 건 자신 없는데……’
많이 해보질 않았으니까.
본과 2학년 때 친구들과 경옥고를 만들어 본 게 다였다. 바로 며칠 전 지구에서 복원괴목고를 만든 것을 합쳐도 2건에 불과했다. 아르거스에서도 대개 인부들을 시켜 만들지 않았나.
그러나 손 놓고 있으면 아까운 시간만 흐를 뿐이다.
시혁은 이내 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행히 다섯 가지 약의 재료 중 겹치는 게 몇 개 있었다. 그것들부터 손질을 했다. 동시에 오랫동안 졸이거나 침전시켜야 하는 약들도 미리 손을 썼다.
시간이 부족했다.
환자를 치료할 때는 날아다니던 시혁의 손이 둔한 게 그 원인이었다. 벌써 1시간이 지났는데도 채 10%도 끝내지 못한 상태였다.
9시간을 2시간으로 줄여야 하는 것.
이미 틀렸다.
실패.
더구나 다시 시도해도 성공할 가능성은 희박했다. 지난 1달 동안의 고생이 무색하게, 마지막 문턱에서 좌절하게 생긴 것이다.
그나마 지금 한 번 이론 공부를 싹 했으니 다음 시도에서는 시간이 훨씬 단축될 거라는 점이 위안거리였다.
포기해야겠지.
약 조제 속도를 획기적으로 빠르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모를까, 그런 것도 아니니까.
‘급속 치료가 통하면 좋을 텐데.’
그런 생각을 했다.
스스로 피식 웃으며 손을 내려놓으려는데, 괴상한 일이 벌어졌다.
마나가 움직였다.
두 손으로 방출되더니, 한참 시혁이 빻고 있던 달의 힘이 깃든 돌을 일거에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응?”
갑작스러운 사태에 깜짝 놀랐다.
시혁은 자신의 손과 작은 절구 안의 흰 가루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단순한 우연일까?
아니면 설마, 시혁이 생각했던 급속 치료가 발동한 걸까?
시험해 보자.
옆에서 훈연하고 있던 바다 거인 미역에 손을 뻗었다. 미역을 대상으로 급속 치료를 사용하자, 생생하던 미역이 빠르게 마르며 특유의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걸 보고 시혁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급속 치료가 꼭 환자 상대로만 발동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직접적인 치료 행위인 침, 뜸, 약침 외에 약의 조제에서도 사용할 수가 있었다.
이렇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희망이 생겼다.
시혁의 눈이 번쩍이기 시작했다. 멈추었던 손을 다시금 놀리며 약을 만들었다.
‘급속 치료! 급속 치료! 급속 치료!’
시혁의 손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 엘프 의학자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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