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 세계의 한의사-31화 (31/250)

< 생명 진영 -2- >

급속 치료.

순찰자의 몸에 난 상처가 모두 회복되었다. 덕분에 계속 몰리던 것을 뒤집어 오히려 암살자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정식으로 눕혀놓고 침을 놓는 것보다는 못하지만, 이런 전투 도중에는 이 정도라도 큰 힘이 되었다.

몇 명 더 그렇게 스쳐지나가며 치료를 했다.

그러자 다크 엘프들의 시선이 시혁에게 모였다.

“치료사다.”

“그냥 치료사는 아닌 것 같다.”

“죽여!”

두 명의 암살자가 시혁에게 달려들었다.

그들과 맞붙으면 채 10초도 지나지 않아 살해당할 터.

엘프들이 눈에 불을 켜고 돌진했다.

“막아! 치료사님을 지켜라!”

“치료사님이 죽으면 다 끝이다!”

기습을 당하면서 전투가 시작된 상황.

거기다 다크 엘프들의 수가 더 많았다. 시혁이 개입하지 않는다면 엘프 종족이 필패할 터였다.

한바탕 혼전이 벌어졌다.

시혁도 몇 번 부상을 당했다. 단검이 등을 긋고, 독침이 허벅지에 박혔다. 그때마다 스스로를 치료하며 도망 다녔다.

“죽여라!”

“죽어!”

엘프와 다크 엘프들은 서로에 대한 격렬한 증오를 드러내며 맞부딪쳤다.

쉽지는 않았다.

특히 인근에 대기하던 다크 엘프 검사들이 달려오자 조금씩 밀리기 시작했다. 접근전이라면 아무래도 다크 엘프가 우위에 있는 것이다.

루크가 은밀히 전언을 보냈다.

[조금만 더 버팁시다. 근처에 있던 순찰대가 지원을 오고 있다고 합니다. 수가 많으니, 충분히 이놈들을 압도할 수 있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힘을 냅시다!]

엘프들의 전언이 어지럽게 날아다녔다.

시혁이 바빠졌다.

급속 치료를 쉬지 않고 시전 했다. 아직 1레벨에 불과해서, 금방 호흡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시간은 거의 안 걸리는 대신 마나 효율은 확실히 쥐약이었으니까.

그러나 시혁이 움직이지 않으면 부대 전체가 전멸할 판이었다. 스스로를 위험에 던지고 혹사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야 지금 위기를 무사히 넘길 테니까.

이윽고 지원 부대가 도착했다.

두 개의 순찰대.

그들은 숲을 빙 돌아서 다크 엘프들을 뒤에서 덮쳤다. 날카로운 화살이 다크 엘프의 몸을 뻥뻥 관통했다. 동시에 짧은 칼을 든 순찰자들이 덤벼들었다.

다크 엘프들이 이를 갈았다.

“크윽, 엘프 놈들!”

“저주 받을 지어다!”

“너를 기억하마. 검은 용께서 너를 단죄하여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꼴로 만드실 거다!”

다크 엘프들은 시혁을 저주하며 죽어나갔다.

그들도 아는 것이다.

시혁 하나 때문에 모든 일이 틀어졌다는 것을.

시혁이 없었다면 이미 전투가 끝났을 터였다. 진작 퇴각하여 몰려드는 순찰대를 위한 또 하나의 함정을 팠겠지.

엘프들은 묵묵히 다크 엘프의 목을 땄다.

거칠게 반항했지만 소용없었다. 엘프가 전력 면에서 다크 엘프를 압도하고 있었고, 설령 부상자가 발생해도 시혁이 달려들어 즉시 치료했기 때문이다.

“휴우!”

시혁은 이마에 난 땀을 닦았다.

참 힘들었다.

몸을 이토록 움직이며 치료하게 될 줄은 몰랐다. 더구나 코앞에서 칼이 부딪치고 화살과 독침이 날아다니니 칼날 같은 긴장감을 계속 유지해야 했다.

대신 레벨이 둘이나 올랐다. 생전 처음 겪는 상황이라 쌓이는 경험치도 높은 모양이었다.

루크와 헤라가 시혁에게 다가왔다.

엘프 식대로 멋들어지게 인사를 하고, 새가 지저귀듯 말을 했다.

“치료사님 덕분에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이제 마나 집중점을 점령하러 가야지요?”

“예. 지금이 절호의 기회 같습니다.”

간단히 재정비를 한 후, 세 개의 순찰대가 힘을 합쳐 마나 집중점을 점령했다.

아까 지원 왔던 검사들이 마나 집중점에서 나온 거였다. 따라서 방어력이 약해져 있었다. 그 결과 세 개의 순찰대와 비교하면 전력 면에서 확연히 떨어졌다. 다크 엘프들은 저주의 말을 뱉으며 마나 집중점에서 물러났다.

전력을 보강하는 대로 공격해 올 게 분명했다. 마나 집중점에 머무르며 방어 준비를 서둘렀다.

시혁도 바빴다. 부상자들을 치료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극독에 중독된 이들이 많아서, 뜸을 연거푸 몇 장씩 떠야 완전히 치료가 되었다.

한 차례 쭉 치료를 한 다음에야 여유가 생겼다. 엘프들이 나무 위에 만들어준 간이 치료소에 들어가 누웠다.

생명의 지팡이 진영에 소환되고 처음으로 갖는 여유.

비로소 전직에 대해 알아볼 수 있었다.

‘의학자로 전직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시혁이 권세 진영에서 의학자 전직을 하려고 했다면 꽤 쉬웠을 것이다. 그런데 생명 진영으로 전향한 까닭에, 상당히 복잡한 조건이 부여되어 있었다.. 다섯 가지 요건을 갖추고, 네 가지 시험을 통과해야 했다.

1만 명 이상의 환자를 치료.

치료소 근무 1천 시간.

야전 경험 1천 시간.

20가지 이상의 질병 치료 경험.

20가지 이상의 중독 치료 경험.

과연 이 중 얼마나 충족시켰을까?

스스로를 돌아보니 앞선 세 가지는 이미 끝이 났다. 문제는 질병 치료와 중독 치료 경험이 각각 17가지, 16가지로 부족했다는 점이다.

시혁은 입맛을 다셨다.

만약 엘프 종족에서 시작했다면 다섯 가지 요건을 모두 끝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 종족에서 시작한 까닭에 이 정도에서 끝이 났다. 상태 이상은 사제들이 주로 치료하기 때문이었다.

당분간은 계속 생명 진영에서 싸워야 할 모양이다.

기왕이면 오늘 다 끝낼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면 상황을 봐서 본성의 의학 나무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을 테니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쉬고 있는데, 바람의 정령 하나가 전언을 싣고 치료소 안으로 들어왔다.

[치료사님. 부상자들이 곧 도착할 겁니다.]

루크의 목소리였다.

시혁도 정령을 이용, 답변을 보냈다.

[부상자들이라뇨?]

[다크 엘프와 싸우다 부상을 입은 엘프가 많다고 합니다. 외상은 배정된 치료사들이 치료를 했는데, 다크 엘프들이 쓴 독까지는 해독을 못한 것 같습니다.]

[하긴 독하긴 했죠. 도착하는 대로 치료소로 들여보내 주세요. 숲에 눕혀 놓고 치료하는 것보다는 치료 효과가 더 좋을 겁니다.]

[예.]

채 몇 분 지나지 않아 중독 환자들이 도착했다.

다들 얼굴이 시꺼멓게 죽어 있었다. 간혹 치료사가 동행한 경우도 있었는데, 마나를 주입해도 그때뿐이었다.

시혁이 치료를 시작했다.

간단했다.

뜸을 쭉 뜨고, 상태가 안 좋으면 약침을 복부에 자입했다. 그러면 물의 보호와 불의 정화가 동시에 발동하며 환자들을 빠르게 회복시켰다.

엘프 치료사들이 경탄하는 얼굴로 시혁을 보았다.

“역시 거장다우십니다.”

“검은 눈물과 독사 올가미를 이렇게 쉽게 해결하시다니……”

시혁도 뜸과 약침으로 두 가지 속성의 마나를 더 다룰 수 있으니 이렇게 쉽게 해결하는 거지, 그렇지 않았다면 상당히 어려웠을 것이다.

더구나 이렇게 치료를 하다 보니 전직 자격 요건을 하나 더 채웠다. 환자들이 다채로운 독에 중독되어 있던 까닭에, 4가지 이상의 독을 치료했기 때문이다.

남은 것은 3가지의 질병을 치료하는 것뿐.

시혁은 잠깐 머리를 굴렸다.

다크 엘프는 독과 저주, 마법은 많이 써도 질병을 걸지는 않는다. 아마도 오늘은 힘들고 다음 상대를 숲이나 죽음 진영으로 골라야 할 성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밖에서 웅성이는 소리가 났다.

뭔가 싶어 고개를 내밀자, 하늘 위에 녹색의 빛이 긴 천처럼 어려 있는 게 보였다.

저게 뭐지?

시혁이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 녹색 빛이 춤을 추며 내려왔다.

빛이 샘 주변의 나무들을 감쌌다.

나무들이 폭발하듯 성장했다.

비 온 다음 날 죽순처럼, 하늘을 향해 푹푹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나무들이 서로 엉겨 붙었다.

마치 성벽과 같았다.

둥근 나무의 벽이 완성되었다. 나무 높은 곳에 오두막들이 저절로 생겨나고, 나뭇가지가 휘어져 그 위에 커다란 잎이 드리워졌다.

생명 진영의 성장 이적 중 하나.

마나를 동원하여 나무 요새를 마나 집중점에 만든 것이다.

엘프들이 기뻐했다.

“요새다!”

“이제 다크 엘프들이 아무리 몰려와도 방어할 수 있을 겁니다.”

“이곳이 이 지역의 중앙 지점입니다. 이곳만 잘 방어하고 있으면 다크 엘프들을 몰아내는 게 가능해요.”

그러려면 할 일이 많았다.

엘프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은신을 할 수 없게 별빛 나무를 심었다. 잎사귀를 한쪽에 쌓아 은신처를 만들고, 나무를 변형시켜 벽을 강화시키기도 했다.

치료소도 보강되었다.

예전엔 나뭇가지 사이에 해먹을 몇 개 놓고 주변을 덤불로 가린 게 전부였다. 이젠 어엿한 건물이 되었다. 요새 사령부를 제외하고는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했다.

덩달아 치료사도 3명이 더 배정되었다. 치료소가 감당할 수 있는 인원이 크게 늘어난 것이다.

요새를 두고 전투가 치열해졌다.

엘프 군대와 다크 엘프 군대가 일전일퇴를 벌였다. 처음에는 기껏해야 수십 규모였지만, 시간이 지나자 수백 단위까지 규모가 커졌다.

어둠 진영에는 생명 이적의 성장 이적처럼 단숨에 요새를 건설하는 이적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요새를 끼고 방어했더라면 아까처럼 쉽게 끝낼 수는 없었겠지.

하지만 어둠 진영에는 성장 이적이 없는 대신 강력한 저주의 힘이 있다.

요새를 건설하고 웅거한지 며칠 후, 까만 구름이 떴다.

엘프들이 비명을 질렀다.

“저주의 비다! 저주의 비가 온다!”

“모두 요새 안으로 들어가라! 저걸 맞으면 안 된다!”

“전투에 대비하라!”

“요새가 변형될 것이다. 최악의 경우, 요새를 버리고 동쪽으로 후퇴한다!”

엘프 지휘관들이 고함을 쳤다.

곧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갓 채취한 석유처럼 찐득찐득하고 검은 비.

생명체에게 치명적인 작용을 했다.

엘프들은 이미 요새로 다 피했다. 그래서 직접적인 영향은 받지 않았는데, 대신 나무 요새가 죽어가고 있었다.

온갖 저주가 나무 요새를 덮쳤다.

노화시키고, 무력화시키고, 감각을 차단하고, 끔찍한 고통을 가하는 저주들.

나무들이 빠르게 시들었다.

잎이 몽땅 떨어지고, 나무껍질이 바싹 말라비틀어졌다. 치밀하던 나무 벽에 구멍이 뻥뻥 뚫렸다. 투명하던 녹색 수액 대신 까만 수액이 흐르는데, 그 수액에서 지독한 악취가 났다.

생명 진영의 건물은 살아있는 나무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특히 저주의 비 이적에 취약했다.

엘프들이 분통을 터뜨렸다.

“사악한 검은 용 같으니!”

“영원히 심연에 갇혀 있기를!”

시혁은 초조하게 하늘을 살폈다.

생명의 지팡이가 설마 이대로 요새를 내어줄까 싶어서였다. 이 요새는 지역 중앙에 위치해 있고, 마나 집중점이 생산하는 마나의 양도 많았다. 한 번 빼앗기면 주도권을 넘겨줄 수도 있었다.

과연, 그냥 빼앗기지는 않았다.

녹색 빛이 내려왔다. 폭죽이 터진 것처럼, 지상에서 작은 섬광을 무수히 뿌렸다. 마치 하늘 위의 은하수가 지상으로 강림한 듯한 광경이었다.

그 아늑한 빛에 엘프들은 기분 좋은 표정을 지었다. 피로가 회복되고 상처가 치료되었다. 그것은 나무 요새도 마찬가지여서, 언제 죽어갔냐 싶게 원 상태로 돌아갔다.

생명의 번영.

단체 회복 이적.

검은 비와 초록 섬광이 잠시 힘겨루기를 했다.

승자는 없었다. 무승부로 끝이 났다.

나무 요새는 절반쯤 부서졌다. 많은 시설이 소실되었지만, 그 기능을 완전히 잃지는 않았다.

“공격!”

다크 엘프들이 밀려들었다.

“막아라!”

엘프들이 그에 맞섰다.

시혁이라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후방 치료는 다른 치료사들에게 맡겨놓고 전면으로 나섰다. 위험을 감수하고 엘프들 사이를 누비며 급속 치료를 사용했다.

처음에 전투를 했던 때와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엄청나게 위험했다.

“이크!”

조금만 방심하면 독침이 날아오고 그림자가 일어나 시혁을 덮쳤다.

“조심하세요!”

“치료사님!”

루크와 헤라가 시혁의 근접 경호를 자청하지 않았더라면 진작 사단이 났을 것이다.

나무 요새도 문제였다. 저주의 비를 뒤집어쓴 까닭에 곳곳이 변형되었다. 기생 식물이 갑자기 나타나 공격해오는 때도 있었다.

사실 시혁은 그 덕을 좀 보았다.

변형된 나무 요새에서 여러 질병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뾰족한 나뭇잎이 박히면 피부가 썩고, 수액이 피부에 닿자 얼마 지나지 않아 다발성 장기 부전이 발생했다.

의학자도 없고 사제도 없으니 이런 걸 치료하려면 시혁이 직접 손을 써야 했다.

그렇게 3개 남은 질병 치료 요건을 모두 완료했다.

“후퇴! 후퇴하라!”

하지만 전투에서는 지고 말았다.

나무 요새가 변형된 게 컸다. 비록 일부에 불과했지만, 안과 밖에서 공격이 가해지니 당해낼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엘프들이 썰물처럼 나무 요새를 빠져나갔다.

다크 엘프들이 그 뒤를 노려보았지만 추격해 오지는 않았다. 엘프들과 싸우면서 상당히 피해를 본 까닭이었다. 시혁처럼 거장 치료사가 있는 것도 아니니, 재정비 하는데 시간이 좀 필요했다.

[본성으로 복귀하라.]

반신의 명령이 떨어졌다.

비록 중앙 샘을 잃었지만, 반격하기 위해 전력을 결집하는 듯했다.

시혁에게도 좋은 소식이었다.

다섯 가지 요건을 충족시킨 뒤니까.

엘프들과 함께 본성에 복귀한 후, 의학자 전직을 신청했다.

< 생명 진영 -2- > 끝

ⓒ 산호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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