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화 >
공기가 차가워졌다.
시혁의 발언에, 홍기태 원장의 얼굴이 붉다 못해 아예 퍼렇게 변했다.
“선생님!”
조희영이 시혁을 소리쳐 불렀다.
홍기태 원장은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반항하는 거냐?”
“아닙니다, 교수님. 다만……”
“꼴도 보기 싫으니까 밖으로 나가!”
쩌렁쩌렁한 고함이 터졌다.
더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나.
시혁은 가볍게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면서 아주 조금 남아 있던 미련을 완전히 끊어 버렸다.
차라리 홀가분했다.
그래, 나가버리자.
병원 그만둔다고 큰 일 나는 것 아니지 않나.
그간 얻은 것도 많고 앞으로 얻을 것도 많다. 하지만 시혁을 제약하는 것도 많았다.
이거 안 된다, 저거 안 된다……
안 그래도 답답함을 느끼던 참이었다.
얼른 괴수 질병에 대한 지식을 전파하여, 많은 사람들을 고통 속에서 구하고 싶은데 병원에 남아 있으면 그게 힘들다.
사람들은 시혁을 한 명의 한의사로 보기보다, 그저 창천대학교 병원의 인턴으로 볼 테니까.
개원을 하는 게 낫겠지.
아니면 능력을 검증 받고 어디 연구소에 들어가던가.
“선생님, 무슨 일 있어요?”
의국 문을 닫자, 마침 6층에 있던 간호팀장이 숨을 죽여 물었다.
시혁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휘저었다.
“아무 것도 아니에요.”
“큰 소리가 나던데……”
“아무 것도 아니라니까요.”
곧 회진이 시작됐다.
시혁은 길잡이를 해야 하니 병실 안까지 따라 들어가진 않는다. 홍기태 원장은 시혁을 한 번 보지도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조희영과 눈이 마주쳤는데, 책망하는 눈빛을 보내서 시혁은 죄송하다고 살짝 고개를 숙였다.
마지막 방은 다름 아닌 601호.
홍기태 원장과 강찬이 얘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교수님. 우리 아영이 나을 수 있겠지요? 부디 잘 좀 부탁드립니다.”
“최선을 다하겠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진인사대천명이라고, 열심히 하면 효과가 있지 않겠습니까?”
“혹시, 힘들다는 말씀입니까?”
“글루마 코푸스는 전 세계적으로 치료 방법이 밝혀지지 않은 병입니다. 그저 최선을 다하는 방법밖에 없지요.”
“인턴 선생님은 치료가 가능하다고 하시던데요?”
“허허, 그건 인턴 선생이 뭘 모르고 한 말입니다. 그렇게 모든 병을 완치한다고 자신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잊어버리시고, 치료 잘 받으셔야 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목소리가 뚝 끊겼다.
침을 놓는지 작은 소음만 들렸다. 그리고 채 몇 분이 지나지 않아, 홍기태 원장이 병실 밖으로 나왔다.
“수고하셨습니다!”
시혁과 조희영이 크게 인사를 했지만, 홍기태 원장은 코웃음만 한 번 쳤다.
“수고는 무슨!”
기분 나쁘다는 듯 그 한 마디만 남겼다. 인사를 받지도 않고 근처에 있는 원형 계단을 통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조희영이 시혁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선생님! 아까 그 상황 같으면 무조건 잘못했다고 해야지 병원 나간다고 하면 어떻게 해요?”
“어쩔 수 없었습니다. 교수님이 안 된다고 했다고 포기하면, 신아영 님 인생은 말 그대로 끝 아닙니까? 완벽히 회복되는 것을 장담할 수 있는데, 그냥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하아, 선생님 완전 고집불통이네요.”
조희영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닫혀 있던 601호의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강찬이 고개를 내밀었다.
아마도 시혁과 조희영의 대화를 들은 모양이었다. 이능력자들은 대개 오감이 예민해서 일반인들이 듣지 못하는 소리도 듣곤 하니까.
강찬이 날카로운 눈으로 시혁을 직시했다.
“선생님. 아영이가 완벽히 회복될 수 있다는 게 정말입니까?”
조희영의 얼굴에 당황한 빛이 스쳤다.
뭔가 말을 하기 전, 시혁이 선수를 쳤다.
“예. 완벽히 회복될 수 있습니다. 장담합니다.”
“제가 자문을 구했던 모든 이능력자, 의사, 연구자들 모두 회복이 안 될 거라고 했습니다. 끽해야 1할 정도만 회복돼도 다행이라고요. 이건 아영이에게만이 아니라 제게도 아주 중요한 문젭니다. 다시 한 번 여쭙겠습니다. 정말 회복이 가능합니까? 일부가 아니라, 완벽하게?”
강찬은 마치 추궁하듯이 말을 뱉어냈다.
시혁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기관총처럼 퍼부어대는 강찬의 입장도 이해가 갔다. 당장 시혁 자신만 해도 같은 상황이라면 저렇게 행동했을 테니까.
다른 사람들의 눈에 비친 시혁은 임상 3개월 째의 햇병아리.
그런 햇병아리가 임상 경력 30년이 넘은 홍기태 원장도 치료하지 못하는 글루마 코푸스를 치료할 수 있다고 설쳐대니, 믿음이 가지 않는 게 당연했다.
시혁은 확신을 담아 말했다.
“충분히 가능합니다. 제가 말씀드릴 약재를 준비해주시기만 하면, 열흘 안으로 치료가 끝난다고 장담합니다. 단, 포진이 터지기 전에 치료를 시작했을 때 이야기입니다.”
“으음!”
강찬의 눈빛이 흔들렸다.
반신반의하는 얼굴로 시혁을 한참이나 쳐다보더니 또 질문을 했다.
“그런 좋은 약이 있다면 왜 선생님만 그 약에 대해 아는 겁니까? 여기 교수님도 꽤 유명하신 분이라고 들었는데, 그 분도 모르고 실피드 병원의 의사나 이능력자들도 모르는 약인 것 같습니다만.”
“간단합니다. 제가 꿈을 통해 알아낸 약이거든요.”
“예?”
강찬이 무슨 뚱딴지같은 말을 하느냐는 표정을 지었다.
시혁은 천천히 설명했다.
어제 구상했고, 오늘 홍기태 원장과 조희영 앞에서 얘기했던 내용.
꿈속에서 괴수 질병에 대한 정보를 찾아낼 수 있다는 것.
그 말을 하자, 강찬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정말입니까? 이능력자는 분명 아닌데…… 혹시 발현자십니까?”
시혁은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이미 다른 병을 통해 검증도 끝냈습니다.”
“다른 병이라니요?”
“전에 잉케산스 우스툴라티오란 병에 걸린 환자를 겪은 적이 있습니다. 희한하게도, 그 전날 꿈에서 정보를 얻었던 병이었지요. 덕분에 제대로 대처할 수 있었습니다.”
“아, 그때……”
옆에서 조희영이 아는 척을 했다.
비록 자기 과에서 벌어진 일은 아니었지만, 한때 유명했던 사건이니까.
강찬이 고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분명히, 분명히 낫는 거지요?”
“확실합니다. 보호자분은 잘 모르시겠지만 신아영 님을 치료하려면 전 병원을 그만 둬야 합니다. 그걸 각오하고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강찬의 눈이 흔들렸다.
“병원을 그만 둬야 한다니요?”
“과장님들 젖히고 인턴이 치료하겠다고 나서는 건데, 좋게 봐주실 분이 있겠습니까? 욕이나 안 먹으면 다행이지요.”
“으음……”
“어쨌든 전 가벼운 마음으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전문의를 포기할 각오를 했습니다. 그런 만큼 치료 효과도 장담할 수 있으니, 그 부분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금방 결정하기는 어렵겠지.
시혁은 살짝 열린 병실 문을 힐끔 보고는 연이어 말했다.
“충분히 생각해보시고 말씀해주세요. 시간이 많이 없으니 너무 늦게까지 고민하시지는 마시고요. 전 이만 해야 할 일이 있어서 가보겠습니다.”
가볍게 목례를 하고 몸을 돌리려는데, 강찬이 시혁의 팔을 잡았다.
결정을 내렸는지, 두 눈이 강하게 빛나고 있었다.
“좋습니다. 선생님에게 치료를 받겠습니다. 저희가 어떻게 하면 됩니까?”
다른 사람이 봤다면 미쳤냐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강찬은 스스로의 판단을 믿었다.
처음 시혁을 봤을 때부터 시혁 본인과 인턴 직책 사이의 괴리감을 느꼈으니까.
그 괴리감의 이유가 시혁이 발현자였다고 하면 충분히 설명이 된다. 발현자는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발현하는 능력의 종류가 많으니, 한 번 믿어 봐도 좋을 것이다.
“약을 만들 재료가 필요합니다. 괴수목의 기생 이끼, 잔뿌리, 수염, 뿌리껍질, 발바닥, 그리고 체액을 충분하게 마련해 오세요. 약을 만드는데 하루는 걸리니까 서두르셔야 합니다.”
“그런 걸 약으로 씁니까? 알겠습니다. 당장 구해오겠습니다.”
강찬이 스마트폰을 꺼내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괴수목이 흔한 괴수는 아닌데, 직접 사냥하기도 하는 만큼 구할 방도가 있는 모양이었다.
조희영이 시혁에게 슬쩍 다가왔다.
“선생님! 어쩌려고 그래요? 진짜 병원 그만 두게요?”
“필요하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어휴, 문제가 그것만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법적인 문제는 어떻게 하려고요? 한약재가 아닌 걸 쓰는 것도 문제고, 병원 나가더라도 의료 기관 개설하지 않고 환자 치료하는 것도 불법이에요. 선생님은 국시 본지 얼마 안 됐으니까, 저보다 더 잘 알잖아요?”
“그냥 한의사라면 그렇습니다만, 전 발현자니 상관없습니다. 아직 검증을 못 받긴 했어도 발현자와 이능력자에게는 긴급한 경우 자력 구제를 허용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의료 기관 개설하지 않아도 의료 행위는 가능합니다. 환자 요청 받아서 왕진가면 되고, 정 문제 될 것 같으면 대가를 받지 않고 봉사 형식으로 처리하면 끝입니다.”
기껏 병원을 나가면서 무료 봉사하는 것으로 끝이 나면 아쉽지 않느냐고?
한 사람의 인생이 달린 문제다.
돈은 아무래도 좋았다.
어차피 시혁은 치유 계열 이능력자로 각성하는 게 예약된 거나 마찬가지다. 일단 각성만 하면, 돈이 들어올 구석은 얼마든지 있다.
조희영이 시혁의 완고한 얼굴을 한 차례 쳐다보았다.
“정말 병원 나갈 거예요?”
시혁은 잠깐 침묵했다.
솔직히 말해서, 기왕이면 병원에서 인정 받으며 신아영을 고치고 싶긴 하다. 그 동안 힘들긴 했지만 정도 많이 들었고, 아직 시혁은 병원에서 배우고 싶은 게 많았으니까.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까.
“병원을 나가는 게 아니고, 신아영 님을 치료하기 위해 그러는 겁니다.”
“그 방법 밖에 없는 건 아니잖아요. 우리 원장님이야 이런 거에 예민하시니까 그렇다고 쳐도, 다른 교수님이랑 잘 얘기해서 전과한 다음 치료하는 방법도 있죠.”
“어느 과장님께서 그걸 용납하시겠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홍기태 교수님 반응이 일반적일 거라고 봅니다. 제가 홍기태 교수님 같았어도 똑같이 반응했을 겁니다.”
“후, 어쨌든 병원 나간단 말 하지 마요. 일단 제가 윤병태 선생님이랑 얘기해서 방법을 만들어 볼 테니까.”
“알겠습니다.”
과연 어떤 방법이 나올 수 있을까.
기대는 되지 않았다. 다만 조희영이 이렇게까지 말을 하니 두고 보기로 했다.
오전은 후딱 지나갔다.
오늘이 병원에서의 마지막 날이 될 수도 있었다. 일을 남겨서 동기들에게 부담을 주긴 싫었다. 언제든 인계할 수 있도록, 오전 내에 모든 일을 끝냈다.
남은 것은 오후의 1내과 회진과 저녁 보고 뿐. 그 외에 신환이 들어오면 차트를 작성하는 것이 있겠다.
점심시간 직전, 시혁은 동기들에게 말했다.
“저 병원 나가게 될 것 같습니다.”
“네?”
“그게 무슨 소리야?”
“갑자기 왜?”
“무슨 일 있으세요?”
다들 놀란 표정을 지었다.
시혁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냥 그럴 일이 있어요. 나중에 시간 날 때 자세히 말씀드릴게요.”
“무슨 일인지 말해 봐. 우리가 도움이 될 수도 있잖아.”
“조희영 선생님한테는 말씀 드렸어? 뭐라고 하셔?”
말을 하는 게 좋을까?
그래, 그게 낫겠다. 유건정은 몰라도, 다른 세 명의 동기들은 지난 몇 달 간 동고동락을 했으니까.
아침에 안이피 의국에서 있었던 일을 아는 동기도 있을 테고.
막 입을 열어 자세한 사정을 설명하려고 할 때였다.
시혁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조희영이었다.
[선생님. 지금 원장실로 내려오세요. 교수님들 모여계세요.]
< 불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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