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현자 [1권 끝] >
깨어난 즉시 몸을 일으켰다.
가벼운 마음으로 침대를 벗어났다. 간단히 씻은 후, 가운을 걸치고 병동으로 나왔다.
처음에는 기운차게 걸었는데, 가면 갈수록 그 발걸음이 느려졌다.
현실이 시혁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시혁은 인턴이다. 인턴에게는 처방 권한이 없다. 더구나 거대 괴수목의 잔해를 활용하는 게 법적인 문제에 걸릴 수도 있었다.
또, 이 처방을 어디서 알아왔냐고 하면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모두 어려운 문제다.
“쉬운 일 하나 없구나……”
저절로 한탄이 나왔다.
생각건대, 정상적이고 합법적인 경로를 통해 신아영을 치료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능력자도 아니고, 누가 시혁을 믿고 처방하게끔 해주겠나.
잠깐, 이능력자?
시혁은 걷던 것을 멈췄다.
뭔가 생각이 날랑 말랑 했다.
그래, 이능력자!
세상에는 에테르 파동을 뿜는 이능력자만 있는 게 아니다.
발현자도 있다.
이능력자만은 못 해도 여러 신기한 능력을 사용하는 존재.
간단한 마법을 부린다거나, 염동력이나 투시력 등 초능력이 생기기도 한다. 근력이 크게 강화되는 자도 있고, 지능이 극도로 상승하는 이도 있었다.
예전에는 왜 발현자가 생기는지 몰랐는데 이제는 안다.
아르거스에서 얻은 특기가 모종의 이유로 지구에서 나타나는 게 발현자다. 소환자가 갖는 특기가 다양한 만큼, 발현자가 보이는 능력도 천차만별이었다.
시혁 본인이 꿈을 통해 괴수 질병에 대한 지식을 알아내는 발현자라고 하면 어떨까.
말이 안 되지는 않는다. 사실이니까.
그런데 이걸 어떻게 납득시키지?
몇 번 입증을 해야겠지. 그렇게 신뢰를 쌓으면, 신아영도 시혁의 처방을 받아들이지 않겠나.
병동을 돌고, 601호에 들어갔다.
이른 아침인데도 신아영이 깨어 있었다. 작은 거울을 벽에 걸어놓고, 침대에 기대어 하염없이 거울만 들여다보았다.
“신아영 님. 잘 주무셨어요?”
말을 걸어보지만 대답이 없었다.
몇 번 더 부른 다음에야 신아영이 시혁을 보았다. 처연한 두 눈동자 깊이 고통의 기색이 역력했다.
“선생님? 언제 오셨어요?”
“방금 왔습니다. 뭐 하고 계셨어요?”
“그냥, 이것저것 생각하고 있었어요.”
혼이 나간 사람 같았다.
시혁이 짐짓 농담을 건넸지만 소용없었다. 신아영의 얼굴은 풀어질 줄을 몰랐다.
복원괴목고에 대해 얘기하려던 것도 그만두었다.
여지만 좀 남겼다.
“어쩌면 좋은 방법을 찾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금방 결과가 나올 것 같으니, 그때 말씀 드릴게요.”
신아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럴 것 같았다. 시혁도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회진 때에도 뭔가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홍기태 원장이 들어가더니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거의 30분이 지난 다음에야 나와서, 다른 환자들 발침까지 늦어지고 말았다.
주치의 조희영이 지나가듯이 말했다.
“신아영 님 곧 퇴원할 지도 모르겠어요.”
“서울로 가신대요?”
“실피드 병원 생각하고 계신가 봐요. 거기가 크긴 크니까……”
결국 이렇게 되는 걸까.
기껏 아르거스에 갔다 온 보람이 없다.
시혁은 옅은 씁쓸함을 느꼈다.
오후에 강찬이 병원을 방문했다.
외래에서 상담을 한 뒤였다. 지금 당장 퇴원을 하겠다고 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우연히 신아영과 마주쳤다. 신아영은 얼굴을 드러내기 싫은지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아직은 보행이 가능했던 것이다.
“지금 퇴원하세요?”
“아, 네. 그 동안 감사했습니다.”
“실피드 병원으로 가신다고 하셨죠? 치료 잘 받으시고, 정 안 되면 다시 오세요. 저희도 방법을 찾아 놓겠습니다.”
시혁은 묵직한 태도로 말했다.
진실을 담은 말에, 강찬이 시혁을 쳐다보았다.
고작 인턴일 뿐인데, 볼 때마다 사람의 시선을 잡아끄는 뭔가가 있었다.
방금 한 말도 그렇다.
강렬한 진실의 향기가 느껴졌다.
강찬 본인의 이능이, 이 사람은 자신의 말에 확신을 가지고 있다고 속삭였다.
어째서일까?
전 세계를 통틀어도 글루마 코푸스를 치료할 수 있는 것은 딱 2명뿐인데.
강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기억해 두겠습니다.”
강찬이 누리 공격대를 만들 때, 저격 이능보다는 통찰 이능의 도움을 더 많이 받았다.
그런 경험이 있으니, 시혁을 그냥 무시하기 힘들었다.
머릿속에 기억해둔 뒤, 엘리베이터를 타고 떠났다.
시혁은 그 모습을 보다 몸을 돌렸다.
이렇게 일단락이 된 줄 알았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다음날 새벽 5시, 외래가 열리기도 전 신아영이 연장진료실을 통해 재입원한 것이다.
눈을 비비며 601호로 올라갔더니, 얼굴과 팔 다리에 붉은 포진이 잔뜩 핀 신아영이 시혁을 기다리고 있었다.
잠이 확 깼다.
어제는 분명히 걸어 나갔는데, 이젠 아예 팔과 다리가 완전히 마비되어 버렸다.
저 정도면 글루마 코푸스의 최종 단계였다. 곧 포진이 터지면서 꽃가루가 방출되고, 돌이킬 수 없는 후유증을 낫게 된다.
어떻게 하루 만에 저 지경까지 병이 진행될 수 있지?
가능성은 하나 뿐.
“설마, 실피드 병원에서 이능 치료를 한 겁니까?”
옆에 있던 강찬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입원하자마자 이능력자 하나가 치료를 하더군요. 저흰 안 된다고 말렸는데 자기보다 괴수 질병에 대해 잘 아느냐고 큰 소리를 떵떵 쳐서…… 알고 보니 각성한지 두 달 밖에 안 된 햇병아리였습니다.”
시혁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각성하고 두 달?
세상 전부가 자기 것인 줄 알고 날뛸 만도 했다.
그러나 제반 지식 없이 무턱대고 치료만 하다간 언젠가 파국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신아영이 그나마 움직이는 오른손으로 눈가를 훔쳤다.
“치료할 수 있겠죠?”
“걱정 마세요. 분명히 치료될 겁니다.”
“위로 안 해주셔도 돼요.”
“전 허튼 소리는 안 합니다. 후유증 없이 완전히 치료될 테니 걱정 마세요.”
시혁은 힘을 주어 말했다.
신아영은 그냥 그러려니 하는 얼굴이었다.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한 말이라고 생각한 듯했다.
반대로, 강찬은 시혁의 말을 흘려듣지 않았다.
얘기를 나누고 밖으로 나오자, 시혁을 따라왔다.
“선생님. 혹시 정말 방법이 있는 겁니까?”
처음 볼 때부터 예사롭지 않았으니,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질문을 했다.
시혁은 말을 아꼈다.
“나중에 말씀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치료가 가능합니다. 그건 장담할 수 있습니다.”
강찬이 묘한 눈으로 시혁을 쳐다보았다.
대체 무슨 자신감일까?
둘 중 하나다.
미치광이이거나, 정말로 뭔가가 있거나.
만약 전자라면, 응분의 대가를 치러줄 것이다.
그러나 벌써부터 그런 내색을 할 필요는 없겠지.
강찬은 깊이 허리를 숙였다.
“선생님, 우리 아영이 잘 부탁드립니다. 불쌍한 아이입니다. 꼭 좀 치료해 주십시오.”
“걱정 마시고, 좋은 소식 기다리세요.”
시혁은 아침 보고를 위해 병동을 돌았다.
아침 보고를 하면서 신아영에 대해 얘기하자, 전화 너머로 조희영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어쩐지 느낌이 쌔하더라니…… 벌써 고름이 다 찼다고요? 그럼 이삼일 내로 터지겠는데요?]
[제가 보기에도 그렇습니다.]
[진짜 난감하네요. 어떻게 하지? 고름 찼으면 이미 끝난 거라던데…… 아 진짜 실피드 병원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병원이면서도 왜 그렇게 했대요? 미치겠네, 진짜.]
조희영은 어찌 할 바를 몰라 했다.
한동안 넋두리를 듣다가 입을 열었다.
[선생님. 신아영 님 관련해서 드리고 싶은 말이 있는데 잠시 괜찮으십니까?]
[신아영 님 때문에요? 뭔데요?]
[전화로 말씀 드리기는 조금 그렇습니다. 시간을 내주실 수 없겠습니까?]
[그래요? 좋아요. 8시 10분에 의국으로 들어오세요. 문 열어 놓을게요.]
[예, 감사합니다.]
시혁이 선택한 것은 정공법이다.
주치의와 과장을 모두 설득하여 자기 식대로 신아영을 치료하는 것.
평상시 같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실 지금도 조희영과 홍기태 원장이 어떻게 반응할지는 모르겠다.
최악의 경우, 시혁은 병원을 나간 뒤 개인 자격으로 신아영을 치료할 생각도 하고 있었다.
병원 수련?
솔직히 말해서 받아도 그만, 안 받아도 그만이다.
전문의를 따지 않아도 시혁은 한의사고, 이능력자로 각성하면 그 위상이 어마어마하게 높아진다.
매일 아르거스에 가는데, 영웅으로 진화하는 것은 시간문제 아니겠나.
굳이 병원에 목을 맬 필요가 없었다.
똑똑.
“들어오세요.”
안이피 문을 두드리자 조희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으로 들어가자, 조희영이 컴퓨터에 글루마 코푸스 관련 자료를 띄어놓고 들여다보는 게 보였다.
조희영은 시혁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러더니 거두절미하고 질문을 던졌다.
“할 말이 뭐에요? 혹시 좋은 생각이라도 있나요?”
시혁은 목을 가다듬었다.
지금부터가 중요했다.
“글루마 코푸스의 치료약을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뭐라고요?”
조희영의 눈이 커졌다.
자기도 모르게 상체를 앞으로 쑤욱 내밀었다.
“어떻게 하면 되는데요?”
“나무 거인, 아니 괴수목의 기생 이끼, 잔뿌리, 수염, 뿌리껍질, 발바닥을 까맣게 될 때까지 토초(土炒)하고, 괴수목의 체액에 넣어 술과 함께 졸이면 까만 고약이 되는데, 그걸 환부에 발라주면 1주일 안에 완치됩니다.”
“지금 농담하는 거죠?”
조희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괴수목의 기생 이끼? 체액?
그런 것으로 약을 만들다니, 생전 들어보지 못한 소리였기 때문이다.
시혁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선생님. 절대 농담하는 것도, 장난치는 것도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린 약은 확실하게 글루마 코푸스를 치료할 수 있습니다.”
“선생님. 그 말, 책임질 수 있어요?”
“예. 책임질 수 있습니다.”
조희영은 나직이 침음성을 삼켰다.
내용만 들어서는 거짓말 같다. 괴수목이 어쩌고 하는 순간부터, 황당한 감정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시혁의 얼굴을 보라.
강철과도 같은 신념이 깃들어 있지 않나.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나올 수가 없는 표정이다.
주치의라고 해봐야 이제 겨우 임상 2년차. 조희영으로서는 시혁에게 압도될 수밖에 없었다.
시혁의 눈을 피하며, 웅얼거리듯 말을 했다.
“일단 원장님께 말씀 드려 보죠. 그 다음 환자들하고 상의해 보고, 그래도 좋다고 하면 그렇게 해보도록 해요.”
“예, 선생님.”
시혁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약 30분 후, 홍기태 원장이 6병동으로 올라갔다.
항상 하던 대로, 먼저 의국으로 들어갔다. 조희영에게 환자들에 대한 보고를 듣기 위해서였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며 조희영이 고개를 내밀었다.
“선생님, 잠깐 안으로 들어오세요.”
“예.”
치료약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나 보다.
시혁은 어깨를 당당히 펴고 안으로 들어갔다.
과장과 환자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지금이 처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기할 정도로 긴장이 되지 않았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
야전을 넘나들며 피와 죽음에 익숙해진 것은 물론, 작은 치료소를 운용하여 아군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안기기도 했으니까.
“안녕하십니까.”
“어, 그래. 거기 앉아.”
들어가서 인사를 하자, 홍기태 원장이 의자 하나를 가리켰다.
“얘기는 들었다. 글루마 코푸스의 치료법을 안다고?”
“예.”
“어디서 찾은 거냐? 나도 논문을 찾아보고, 지인들에게 물어봤다만 다들 힘들다고만 하던데.”
“꿈에서 찾았습니다, 원장님.”
“뭐 그게 무슨 소리야?”
홍기태 원장이 황당하다는 얼굴을 했다. 조희영도 뜨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시혁은 시종일관 진지했다. 홍기태 원장의 얼굴을 직시하며, 한 마디 한 마디 힘을 주어 말했다.
“농담처럼 들리시겠지만 절대 장난하는 게 아닙니다. 미친 것도 아닙니다. 원장님, 저는 발현자입니다.”
“뭐라고? 발현자?”
목소리가 컸다.
상당히 놀란 모양.
시혁은 목소리를 낮췄다.
“저는 꿈을 통해 괴수 질병에 대한 정보를 수집할 수 있습니다. 증상, 예후, 기전, 치료 방법 모두 해당됩니다. 비록 부정확할 때도 있지만, 글루마 코푸스는 확실하게 정보를 수집할 수 있었습니다.”
“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거참, 이런 소리를 하려고 병원에 들어왔나? 헛소리 집어치우고, 밖으로 나가!”
홍기태 원장이 벌컥 화를 냈다.
예상했던 반응이다.
그저 평범하게 인턴으로 일하던 이가 갑자기 발현자라고 밝히면 누가 곧이곧대로 믿겠나.
자신을 놀렸다고 생각하고, 화를 내는 게 당연했다.
시혁은 동요하지 않았다.
대신 홍기태 원장의 눈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믿기 힘드실 겁니다. 하지만 교수님, 저는 결코 거짓말을 하거나 허풍을 떠는 게 아닙니다. 분명한 진실입니다. 제가 말씀드린 약은 글루마 코푸스를 완벽히 치료할 수 있습니다.”
“허!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아무래도 시혁의 말이 통하지 않을 모양이다.
홍기태 원장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목에 핏대까지 서는 게, 화를 억지로 참고 있는 것 같았다.
조희영이 끼어들었다.
“원장님. 최시혁 선생님이 저렇게 자신 있어 하는데, 기회라도 한 번 줘보면 어떨까요?”
“기회는 무슨 기회! 햇병아리 주제에 지가 손만 대면 다 나을 줄 알고 저러는 거 아냐! 병이 꼭 네 생각대로만 반응하는 줄 알아? 발현자? 꿈? 그딴 헛소리할 거면 병원 나가! 그딴 짓거리는 네 한의원에서 해!”
홍기태 원장이 노성을 질렀다.
그 입장이 이해가 되면서도 한 편으로는 실망스러웠다. 시혁의 말을 냉정하게 듣고 판단한 게 아니라, 자신의 고정 관념에 따라 행동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다. 말을 해도 듣지 않을 테니까.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
그걸 고르기에 앞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정말 병원을 나가도 괜찮은가?
몇 가지 문제가 생기긴 할 것이다.
우선 지난 수십 일 동안 일을 한 게 수포로 돌아간다. 다른 병원에 취직하기도 힘들다. 한의계는 좁고, 소문이 금방 퍼지니까.
그러나 그게 뭐 어떻단 말이냐?
한 사람의 인생이 걸려 있다.
평생 일급 장애인으로 사느냐, 전도유망한 이능력자로 사느냐가 지금 시혁의 행동에 의해 결정된다.
당연히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이런저런 문제들?
고민할 가치조차 없다.
고개를 들었다.
두 눈이 강렬한 빛을 뿜었다.
홍기태 원장을 직시했다.
여전히 불쾌하고 화가 난 얼굴.
그 앞에 대고 선언했다.
“알겠습니다. 병원을 나가겠습니다.”
“뭐?”
“신아영 환자, 병원을 나가서라도 제가 직접 치료하겠습니다.”
폭탄이 떨어졌다.
[1권 끝]
< 발현자 [1권 끝]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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