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더기 껍질 -2- >
꼭 병이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인체의 생명력을 갈취했다. 신경계에 뿌리를 박은 상태라 운동 신경과 감각 신경에 장애가 생겼다. 그 후 피부로 올라와 꽃을 피우니 적색의 포진이 돋았다.
꼭 신체 절반에 아주 작은 나무가 수천 그루가 자라난 것 같은 장면이었다.
이러니 사제들도 치료하는데 시간이 걸린다. 피부병이면 아예 대패 밀 듯 긁어내면 그만이지만, 신경까지 뿌리가 들어가니까.
아까 치료소에서 잠깐 봤던 것으로는 알 수 없었던 모습.
이걸 어떻게 해야 치료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지만, 정말 막막하기만 했다.
기본적으로는 사제의 치료 방법을 모방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으로는 인체를 소생시키고, 밖으로는 누더기 껍질을 공격하는 것이다.
결국 원점이다.
누더기 껍질을 직접적으로 공격하려면 앞서 알아냈던 3종류의 약재 중 하나가 필요하다. 그 외에 대체할 수 있는 약재는 많지가 않았다.
시혁은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해야 지구에서 쓸 치료법을 만드나 생각하는데, 문득 이질적인 장면이 하나 보였다.
복사들이 돌아다니며 맑은 액체를 환자들에게 발라주고 있었다. 그러면 붉은 포진이 가라앉고, 끙끙대던 환자들의 얼굴도 한결 편해졌다.
성수라도 바르는 걸까?
그런데 묘한 냄새가 났다. 수산시장에서 그러하듯, 비린내가 살짝 풍기는 것이다.
베네딕트 주교에게 질문을 했다.
“저게 뭡니까?”
“회색 수염의 체액을 정화한 다음 희석시킨 거라네. 정화하기 전엔 독이지만, 정화시키면 치료약이 되지. 양만 많으면 그것만으로 치료가 가능할 텐데, 불가능한 얘기야. 누가 가서 회색 수염의 체액을 대량으로 구해 오겠나? 목숨이 아깝지 않고서야. 그나마 현장에 남은 걸 좀 채취하는 게 전부야.”
“다른 나무 거인의 체액으로는 불가능합니까?”
“불가능해. 일반 나무 거인들은 회색 수염의 체액에만 포함된 성분을 갖고 있지 않아. 다른 영웅 나무 거인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숲 대모 진영에도 영웅 나무 거인은 딱 하나, 회색 수염밖에 없다네.”
슬슬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시혁은 회색 수염의 체액을 연구용으로 내달라고 요청했다.
정식으로 사령부에 요청서도 제출하고, 이웰 주교를 찾아가 부탁도 했다.
“많이는 안 바랍니다. 가장 작은 병으로 딱 한 병이면 됩니다.”
이웰 주교는 회의적인 표정이었다.
“한 병? 그걸로 되겠나? 내가 알기로도 확보해 놓은 게 좀 있어서 그 정도는 연구용으로 내줄 수 있을 것 같네만, 그냥 버린 셈 치기에는 그 가치가 상당한 물건일세.”
중급 병종이라서 그럴까.
고작 체액 한 병을 건네는 것도 생색을 낼 모양이다.
시혁은 힘을 주어 말했다.
“절 믿고 한 번 투자해 보십시오. 저는 회색 수염의 체액에 준하는 약을 만드는 게 목표입니다. 그렇게 한 번 만들어 놓으면 지금만 아니라 앞으로도 크게 도움이 될 겁니다. 당장 베네딕트 주교님이 2층 환자들을 돌보는데 손을 보태는 게 가능해지지 않겠습니까?”
“흠! 그렇게만 된다면 더 바랄 게 없지.”
이웰 주교가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내 한 번 사령관님께 건의해 보도록 하지. 일이 제대로만 된다면 앞으로 숲 진영 반신들을 상대하는 게 수월해 질 테니까.”
“예, 감사합니다.”
다음날, 이웰 주교의 추천에 힘입어 작은 병 하나가 야전 치료소로 배달되었다.
기껏해야 엄지손가락 하나 크기.
걸쭉한 액체가 가득 차 있었다. 병이 워낙 작은 까닭에, 마신다고 치면 반 모금도 안 되어 보였다.
롯뜨와 반이 호기심을 드러냈다.
“치료사님, 그게 뭐에요?”
“회색 수염의 체액입니다.”
“그건 왜요?”
“이걸 누더기 껍질의 치료제로 쓸 수가 있거든요.”
시혁은 일반 나무 거인의 체액을 동일한 분량을 가져오게 했다. 나란히 앞에 세워두고 두 체액을 동시에 관찰했다.
일반 나무 거인의 체액은 투명한 연녹색이다. 또한 그 거대한 몸을 유지하기 위해서 생명의 마나가 풍부했다. 여차하면 물 대신 마시는 것도 가능했다.
반면 회색 수염의 체액은 탁한 황토색에, 걸쭉하기도 굉장히 걸쭉했다. 손가락을 넣었다가 빼면 꽤나 많이 묻어나올 것 같았다. 더구나 생명의 마나 외에도, 다른 속성의 마나가 뒤섞여 잡탕처럼 느껴졌다.
그걸 보며 지식을 열람했다.
쉽지는 않았다.
성분이 바로 파악되지가 않는 것이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땅의 마나구나!’
순수한 땅의 마나는 아니다.
흙, 모래, 진흙, 바위, 광물 등 다양한 것이 뒤섞였다.
혼돈스러운 가운데 조화를 이루었다. 그것들이 하나의 도도한 흐름이 되어 생명의 마나와 함께 흘렀다. 흡사 생명의 마나를 감싸고 보호하는 듯했다.
회색 수염의 꽃가루는 그 안으로 쉽게 들어갔다. 땅의 마나에게 보호를 받으며 일종의 씨앗 역할을 했다. 신경계에 뿌리를 박고 싹을 틔워 피부로 뚫고 나왔다.
이걸 정화하면 어떻게 될까.
시혁은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걸쭉하던 회색 수염의 체액이 맑아졌다. 그 결과 갈색 같기도 하고, 녹색 같기도 한 액체가 신비한 빛을 뿌렸다.
신중하게 그 변화를 지켜보았다.
혼탁하던 땅의 마나가 순수하게 변했다. 자연히 부피가 줄어들었다. 단위 부피 당 마나의 양이 과도해지자 한 가지 변화가 일어났다.
땅의 마나 중심에서 다른 속성의 마나가 탄생한 것이다.
투명하고 차가우며, 칼날처럼 날카로운 마나.
얼핏 보면 죽음의 마나와도 비슷했다. 다만 약간의 차이는 있었다. 죽음의 마나는 늪처럼 질척질척했는데, 이 마나는 강철처럼 굳건했다.
쇠의 마나.
이래서 누더기 껍질을 약화시키는 모양이었다. 누더기 껍질은 나무의 속성을 가지고 있고, 쇠의 마나는 나무의 마나에 대해 상극이니까.
그럼 이걸 어떻게 재현해야 하나.
시혁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혼탁하되 양이 많은 땅의 마나.
거기에 불을 가하여 정화한다.
그러면 땅의 마나가 순수하게 변하며 쇠의 마나가 태어난다. 이 쇠의 마나가 누더기 껍질에 특효약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시혁은 즉석으로 한 가지 처방을 고안했다.
“나무 거인 기생 이끼, 나무 거인의 잔뿌리, 나무 거인 수염, 나무 거인 뿌리껍질, 나무 거인의 발바닥이 필요합니다. 빨리 받아오세요.”
오로지 나무 거인에게서 얻는 재료로 구성한 처방.
다른 재료는 배제했다. 포자 버섯 수염이나 아귀 구렁이 쓸개를 쓰면 효능이 더 좋아지겠지만, 지구에서 구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어서였다.
나무 거인으로만 만든 약이라면, 지구의 거대 괴수목을 응용해서 재현이 가능하지 않겠나.
다섯 가지 재료를 큰 솥에 넣었다. 그 위를 흙으로 덮은 후, 까맣게 탈 때까지 불을 때웠다.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탄 재료를 나무 거인의 체액과 함께 섞었다. 거기에 황금 풀을 고스란히 뭉텅이로 넣고, 독한 술을 듬뿍 뿌린 후 끓이기 시작했다.
얼마나 걸릴까?
시혁이 만들려고 하는 것은 고약이다. 회색 수염의 체액처럼, 그냥 피부에 바를 수 있게 만드는 게 목표였다.
적어도 24시간은 졸여야 약이 완성될 터.
인부 몇을 배정한 후 당부를 했다.
“나무 막대기로 계속 저으세요. 잘못하면 눌어붙으니까 조심하시고요. 아마 내일 전투가 끝날 때까지는 시간이 필요할 겁니다.”
“그렇게 오래 걸립니까?”
“예. 이번 약은 그렇습니다. 아, 30분에 1번씩 술 치는 것 잊지 마세요.”
지구에서는 불의 마나를 주입하는 게 불가능하다. 그걸 술을 뿌리는 것으로 대체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는 사이, 전투가 시작되었다.
또 회색 수염이 난입한 모양이다. 아슬아슬한 순간이 지나갔다. 그 다음날에는 야전 치료소가 있는 곳까지 한 차례 밀렸다.
숲 대모가 성검 공작의 주둔지를 계속해서 공격한 게 효과가 있는 모양이다. 시혁이 그렇게 치료소의 효율을 끌어올렸어도, 알음알음 사망한 이가 많은 듯했다.
슬며시 걱정이 되었다.
최소한 글루마 코푸스의 치료제를 찾을 때까진 버텨줘야 할 텐데……
약이 완성되자, 바로 야전 성당으로 보냈다.
다 만들어놓고 보니 아주 걸쭉했다. 그냥 썼다간 그 약기운 때문에 피부가 다 망가질 터였다. 따라서 나무 거인의 체액과 물, 고약을 4:5:1의 비율로 희석시켜 쓰라고 가르쳐 주었다.
몇 시간 후, 뜨리옹 사제가 놀란 얼굴을 하고 찾아왔다.
“치료사님! 그 약은 대체 어떻게 만드신 겁니까?”
“왜요? 잘 안 듣던가요?”
“그럴 리가요! 엄청났습니다!”
뜨리옹은 떠벌떠벌 고약을 칭찬했다.
알려준 대로 희석시켜 환부에 얇게 발랐다. 한 나절 정도 시간을 보낸 후 질병 치료와 회복 주문을 걸었다. 거기서 한 나절이 더 지나면 언제 그랬냐 싶게 완전히 치료가 된다는 것이다.
치료에 필요한 시간은 약 하루. 그러나 한 나절만 마법을 유지하면 되니, 그 강도가 훨씬 더 줄어들었다.
베네딕트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고 했다. 아울러 양이 너무 적으니 최대한 많이 만들어 달라고 했다. 회색 수염이 난동을 부리고 있어서, 누더기 껍질 환자들이 자꾸 발생하기 때문이었다.
시혁도 빙긋 웃음을 지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참, 저희도 지금부터 누더기 껍질 환자를 받겠습니다. 하루 만에 치료하긴 힘들어도, 사제님들의 부담을 덜어드릴 수는 있을 겁니다.”
“그래 주시겠습니까? 감사합니다. 그럼 시범적으로 10분 정도만 맡아주시지요.”
“좋습니다.”
당장 누더기 껍질 환자 10명이 치료소로 들어왔다.
시혁은 직접 치료를 하며 상태를 살폈다.
질병 치료와 회복 주문은 없다. 대신 시혁에겐 여러 종류의 치료 도구가 있었다. 그것들을 적재적소에 활용하며 환자들을 치료해 나갔다.
결국 누더기 껍질 환자를 치료하는데 성공했다.
“성공이네요!”
“치료사도 누더기 껍질 치료가 가능하네요! 주교만 되는 줄 알았어요!”
시혁은 빙긋 웃었다.
불사의 역병 때처럼 시혁의 시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도 않았다. 재료만 충분하고, 약만 제대로 만들면 누구든 치료가 가능했다. 고약을 계속해서 얼굴에 붙이고, 나무 거인의 체액을 기본으로 한 보약을 주기적으로 복용하면 되는 것이다.
그럴 경우 회복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약 1주일.
사제의 치료보다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마나가 적게 든다는 장점이 있었다. 인부 하나만 간병인으로 붙여주고, 치료사 하나가 경과를 관찰하면 되지 않겠나.
약의 이름은 복원괴목고(復元怪木膏)라고 지었다. 이것도 세계 지식에 등재되었고, 앞으로 치료소 계열 병종은 누구든 열람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으로 아르거스에 방문한 목적은 다 이뤘다.
더구나 기쁜 소식이 있었다.
회색 수염이 쳐들어와 치열한 방어전을 벌이고 있을 때, 하늘 높은 곳에서 웅장한 소리가 들린 것이다.
한 차례 들은 적이 있는 소리.
전신이 진동했다.
소리를 들은 즉시, 몸이 울리며 더 이상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시혁은 물론 롯뜨와 반, 야전 치료소 바로 근처에서 난동을 부리던 회색 수염 모두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반이 눈물을 글썽이며 외쳤다.
“우리가 이겼어요!”
첫 승리.
시혁은 사실 좀 얼떨떨했다. 그저 죽어라 치료만 하고 있었더니 갑자기 진영 승리가 떴으니까.
그 이유는 간단했다.
주둔지가 잘 버텨줬기 때문이다.
덕분에 다른 방면에서의 공세를 강화할 수 있었다. 차곡차곡 전진하며 임시 요새를 쌓았고, 숲을 불태워 숲 대모의 본성으로 향하는 길을 뚫었다.
숲 대모는 회색 수염을 제외한 영웅 전부를 불러들였지만 버티지는 못했다. 성검 공작 측에서 50레벨 영웅이 출현한 까닭이었다.
시혁의 존재가 나비 효과를 일으켰다고 할까.
롯뜨가 환하게 웃었다.
“최시혁 치료사님, 고생하셨습니다. 정말 많은 것을 배웠어요!”
“저도 두 분과 함께 해서 즐거웠습니다. 다음에도 뵐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 저도 최시혁 치료사님과 함께 할 날을 고대하겠습니다.”
“다시 뵐 때까지 만신의 축복이 함께 하기를!”
몸이 투명해졌다.
흰 빛이 시혁의 몸을 감쌌다.
나비처럼 날아올라, 흰 불길에 삼켜진 회색 수염을 멀리하고 저 높은 하늘로 귀환했다.
< 누더기 껍질 -2- > 끝
ⓒ 산호초
작가의 말
Q : 세신탕에서 귀신 신神이 아니라 몸 신身을 써야 하지 않나요?
A : 神에는 귀신이라는 뜻만 있는 게 아니라 정신이란 뜻도 있습니다. nerve도 神經이라고 하잖아요? 神은 한의학에서 여러가지 의미를 가지는데, 세신탕에서 쓰인 것을 말씀드리자면 [일체의 정신 활동]입니다. 그래서 몸 신이 아니라 귀신 신이 맞습니다.
Q : 뇌졸중이 아니라 뇌졸증 아닌가요?
뇌졸중(中)이 맞습니다. 뇌졸증(症)이 아닙니다. 많이 혼동하시는 대목인데, 졸중풍(卒中風)에서 유래한 단어입니다. 갑자기 졸(병사 졸X), 맞을 중(가운데 중X), 바람 풍(정확히 말하면 한의학에서 말하는 風邪)를 씁니다. 그래서 뇌졸중이지, 절대 뇌졸증이 아닙니다.
Q : 한의사세요?
한의사 맞습니다. 4년 동안 병원 수련 받고 한방내과 전문의도 땄고요, 그러면서 대학원 다녀서 석사까지 했습니다. 박사는 굳이 할 필요 있나 싶어서 나중으로 미뤘고요.
따라서 병원 파트는 제 경험이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환자들 액팅(사혈, 부항, 뜸, 테이핑)하고 다니던 기억이 나네요-_- 뭐... 그렇다고 제가 시혁처럼 멋진 한의사는 아닙니다만 ㅋㅋ
아, 청구 관련해서 어떤 독자분이 침과 부항, 뜸 3술은 한꺼번에 안 된다고 하시던데 초기 3주까진 괜찮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 뒤에는 부항이랑 뜸은 2~3회만 인정된다고 하더라고요. 한방병원, 특히 입원 환자는 그 이내 환자인 경우가 많아서 그냥 다 깔아버렸습니다. 부작용이야 뭐, 하루에 10번도 넘게(인턴 3번 주치의 2번 2,3년차 1~2번 간호사 3~4번) 확인하니 별 걱정 없고요. 매일 환자 상태 확인하는 게 컸죠. 어떤 병원은 입원 환자는 2번까지 청구되니까 하루에 2번 침, 부항, 뜸 다 하는 경우도 있고요.(제가 수련 받은 병원도 침은 평일에 2번 놨습니다)
사실 청구도 좀 웃긴 게, 3주 이내가 아니라 4주 지나가도 삭감될 것 각오하고 할 거 다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로컬에 나가 있는 친구들이랑 얘기해보면 삭감에 아주 민감하던데, 병원은 삭감될 때 되더라도 일단 하고보자는 식이었거든요. 청구한 거 100% 삭감되도, 환자 자기 부담금(20%였나...)도 있으니 어쨌든 이득이라는 겁니다.
뭐 수련의만 고생하면 되니까요. 정확히 말하면 인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