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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수 세계의 한의사-23화 (23/250)

< 누더기 껍질 -1- >

보자마자 알아차렸다.

지구에서 봤던 사진들과 똑같았으니까.

“누더기 껍질이라……”

바로 지식 열람에 들어갔다.

나무 거인에게서 비롯되는 병이었다.

하지만 모든 나무 거인이 그 병을 전염시키진 않았다. 어디까지나 일부, 대개는 영웅들에게서 전염되었다.

누더기 껍질 환자의 진술도 그러했다.

“회색 수염이 돌진해 오자 방어선이 단번에 박살났다오. 난 지휘관으로서 그 자를 저지할 책임이 있었지. 내 몸을 던져 그 자를 공격했소. 별로 효과는 없었소. 몇 번 공방을 나누다가, 어느 순간 정신이 혼미해지더니 몸 절반이 마비되더군.”

“흠. 뭔가 더 생각나는 것은 없습니까?”

“회색 수염의 몸에서 노란 가루 같은 게 흩날리는 것을 봤소. 마지막 순간에는 크게 상처를 입고 체액까지 뿌렸고. 그게 치명적인 독이란 것은 알았지만, 피해가며 싸울 수는 없었지.”

범인은 회색 수염의 꽃가루와 체액이다.

신아영과 같았다. 신아영도 일선에서 거대 괴수목과 싸우다가 꽃가루를 흡입하고, 체액을 뒤집어썼으니까.

그래서 약은 무얼 써야 할까.

그 질문에 답변하듯 몇 가지 약재의 이름이 떠올랐다.

[칼날 사마귀의 체액]

[강철 소나무의 솔방울]

[황동 버섯]

죄다 금속 속성을 가진 약재들이었다.

하긴 누더기 껍질은 한의학적으로 따지면 목(木)에 해당하는 증상을 보인다. 피부가 꼭 나무껍질처럼 변하니까. 따라서 금속 속성의 약재들이 유효할 것이다.

시혁은 약재를 확인하고 생각에 잠겼다.

당연한 말이지만 지금 주둔지에서 구할 수 있는 품목은 존재하지 않았다.

금속 속성 치료 도구를 한 번 소환해 볼까?

아니다.

지구에서도 쓸 수 있는 치료 방법을 찾는 게 중요했다. 당장 아르거스에서만 통하는 치료 방법만 알아내서는 굳이 여기까지 온 보람이 없으니까.

시혁은 인부들을 불렀다.

“여기 이 분은 야전 성당으로 보내주세요. 여기서 치료하기는 힘듭니다.”

그 말에 환자가 불안한 듯 눈을 굴렸다.

“심각한 병이오?”

“네? 아뇨. 누더기 껍질이란 병인데 마나 주입으로는 치료하기가 힘듭니다. 병을 더 진행되게 만들거든요. 최소한 주교님들에게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글루마 코푸스가 이능 치료시 빠르게 진행되는 것과 같다. 누더기 껍질도 단순히 생명의 마나를 주입하면 병이 그 마나를 흡수하여 더 악화되곤 했다.

따라서 누더기 껍질을 치료하려면 주교가 나서야 했다. 질병 치료 주문과 회복 주문을 동시에 걸어야 한다던가.

시혁은 몇 명의 환자를 더 지목했다. 초파리 알 환자들 사이에 낀 누더기 껍질 환자들이었다.

더불어 접수실의 인부들에게 말했다.

“앞으로 누더기 껍질 환자들은 제가 다시 말할 때까지 야전 성당으로 보내세요. 지금은 치료할 수가 없어요.”

“저기, 어떻게 구별해야 합니까?”

“간단해요. 초파리 알은 신체 한 곳, 혹은 여러 곳에 얼룩처럼 피부 증상이 생기잖습니까? 누더기 껍질은 한쪽 얼굴과 몸에 동시에 증상이 나타납니다. 띄엄띄엄 생기지 않고, 다 이어져 있고요. 그걸 기준으로 삼으세요.”

지구라면 뇌졸중 같다고 한 마디만 하면 된다. 그런데 인부들은 어느 세계에서 왔는지 몰라도 지적 수준이 좀 떨어지는 편이었다. 결국 몇 마디를 더 늘어놓아야 했다.

시혁은 입원실로 돌아왔다. 다시 중독 환자와 질병 환자를 보기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누더기 껍질에 대한 지식을 열람했다.

목표는 지구에서도 쓸 수 있는 처방이나 약을 알아내는 것.

아까 알아낸 약재가 지구에도 있다고 장담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지구와 아르거스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으면 좋겠는데.’

매일 방문이 가능하다면 문제가 없다. 신아영이 하루 만에 어떻게 되지는 않을 테니까.

그걸 장담할 수가 없으니 오늘 많은 것을 알아가야 한다. 오늘은 시혁의 의지로 아르거스 방문에 성공했지만, 한 번 그랬다고 앞으로도 쭉 그럴 거라고 보기는 힘들지 않겠나.

이럭저럭 하는 사이 전투가 끝났다.

지금까지의 전투 결과로, 시혁은 10레벨에 도달했다.

롯뜨와 반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야전 치료소의 시설이 낙후되긴 했어도, 3명 다 10레벨이면 최소한 마나가 부족할 일은 없었다.

“전 잠시 야전 성당에 다녀오겠습니다.”

“야전 성당에는 왜요?”

“누더기 껍질에 대해 알아보려고 합니다. 그걸 우리가 치료할 수 있으면 좋잖습니까?”

“그거 치료사는 치료할 수 없는 병 아닌가요?”

“맞아요. 속성이 비슷해서 치료하기 힘들죠. 하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을 거라고 봅니다.”

치료사의 속성은 생명이다. 나무 거인의 속성은 숲이다. 따라서 둘 사이에 서로 통하는 부분이 있었다.

그래서 가끔 이런 식으로 치료하기 힘들 때가 있었다. 인체를 살리려고 주입한 마나가 엉뚱하게도 병세에 작용하기도 하니까.

사제들의 속성은 빛.

따스한 햇볕은 숲을 살찌운다. 반면 불길을 싹틔울 정도로 강한 빛은 숲을 불살라 버리곤 했다. 따라서 주교 이상이라면 치료하는 게 가능했다.

걸음을 놀려 야전 성당으로 이동했다.

규모가 컸다.

아예 돌로 웅장한 건물을 쌓아 놓았다. 주둔지 중앙의 사령부보다 더 큰 것 같았다. 뾰족한 탑이 모서리마다 서 있고, 중장보병들이 눈을 번뜩이며 순찰을 돌았다.

시혁은 속으로 혀를 찼다.

주둔지의 건물들을 대개 나무로 지어졌다. 그런 가운데 유독 야전 성당만 이질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아무리 성검 공작의 주력이 성기사와 사제라고 해도,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닌가 싶었다.

그 생각을 굳이 입 밖으로 낼 필요는 없다.

조용히 야전 성당을 향해 걸어갔다.

중장보병들이 앞을 막았다.

“이곳은 야전 성당입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시혁은 입고 있는 흰 예복을 흔들었다.

“야전 치료소의 전문 계급 치료사 최시혁입니다. 잠깐 견학 좀 하려고 왔습니다.”

“견학이요?”

중장보병들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한 얼굴로 시혁을 보았다. 본인 일도 바쁠 텐데 왜 여기까지 왔냐는 것 같았다.

시혁은 지그시 그들을 마주 보기만 했다.

중장보병 중 하나가 고개를 살짝 숙이더니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사제님들께 여쭤 보겠습니다.”

“그러시지요.”

잠시 후, 허락이 떨어졌다며 중장보병이 시혁을 안으로 안내했다.

사실 시혁은 자유롭게 성당의 치료실 같은 것을 보려고 했다. 그런데 성당 측은 사제와의 면담을 요청했다고 생각했나 보다.

야전 성당에 배치된 10명의 사제 중 말석의 사제가 시혁을 맞이했다.

근엄하게 생긴 중년 남자였다.

“반갑습니다. 수습 사제인 뜨리옹이라 합니다. 치료사 분께서 성당에는 어쩐 일입니까? 전문 치료사라 들었는데, 전직하시려면 아직 멀지 않았습니까?”

모든 병종은 거장 계급이 되면 세 개의 길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영웅으로 진화하거나, 상위 병종으로 전직하거나, 다른 진영으로 전향하거나.

전직 시에는 영웅이 되는 게 그만큼 멀어진다. 대신 그만큼의 장점도 있었다. 특기도 더 얻을 수 있고, 나중에 더 강한 영웅으로 진화하기 때문이다.

다른 진영으로 전향하는 것도 그렇다. 진영마다 특색이 강하기 때문에, 여러 진영을 겪을수록 강한 영웅이 탄생한다.

시혁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전 이제 전문 계급인데요? 거장이 되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흠, 그럼 무슨 일 때문입니까? 귀하가 소환된 뒤 야전 치료소에서 중독 환자와 질병 환자까지 치료하느라 일이 바쁘다고 들었습니다만.”

“별 건 아니고, 그저 견학하려고 들렀습니다. 오늘 전투에서 누더기 껍질 환자는 모두 이쪽으로 보냈는데, 그게 알고 보니 저희가 치료하기 힘든 병이어서요. 사제분들은 어떻게 치료하는지 알고 싶어서 왔습니다.”

“누더기 껍질이요? 흠, 그야 질병 치료 주문과 회복 주문을 동시에 쓰면 되는데…… 아마 치료 장면을 봐도 별 도움이 안 되실 겁니다. 주교님들이나 가능한 일이어서요. 전문 치료사면 상세하게 지식 열람이 가능할 텐데, 차라리 그걸 이용해 보시죠?”

이미 다 해본 뒤였다.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만약 저희 치료소에서 누더기 껍질 치료가 가능해지면 사제님들도 더 여유가 생기실 겁니다. 저희 치료소가 중독 환자와 질병 환자를 보기 시작했을 때 그랬던 것처럼요.”

“으음!”

시혁이 소환되고 가장 혜택을 많이 받은 것은 다름 아닌 주둔지의 사제들이었다.

사제들은 질병과 중독을 마법 주문으로 치료한다. 따라서 아무리 가벼운 질병이나 중독이라고 해도 상당한 양의 마나를 소모해야 했다.

자연히 예전에는 모두 격무에 시달렸다. 괜히 야전 성당이 이렇게 커진 게 아니었다. 이 정도 규모가 아니고서는 사제들이 곧 탈진해 쓰러질 판이었으니까.

지금은 여유롭게 다과 시간도 즐기곤 했다. 전방으로 파견되는 인원도 늘었지만, 그만큼 아군의 전력이 증가했으니 감수할 수 있었다.

뜨리옹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잠시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제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주교님께 여쭤 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야전 성당에는 2명의 주교가 있다. 그 중 숙련 계급 주교가 야전 성당의 전반적인 업무를 처리한다고 했다.

허락은 금방 떨어졌다.

시혁과 몇 번 안면이 있는 인물이었다. 가끔 사령부로 불려가 몇 가지 지시를 받곤 했었으니까. 성검 공작은 치료소를 성당 집단의 지휘를 받게 했던 것이다.

숙련 계급 주교, 이웰이 근엄한 얼굴로 물었다.

“그래, 누더기 껍질 치료를 참관하고 싶다고?”

“예. 저희 치료소가 바쁘긴 하지만 약간의 여력은 있으니, 몇 명이라도 누더기 껍질 환자를 감당하려고 합니다.”

“쉬운 일은 아닐 텐데…… 하긴 그대가 소환되고 이룬 일들 모두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되었지. 그렇게 하세. 마침 베네딕트 주교가 누더기 껍질 환자들을 보살피고 있다고 들었네. 가서 한 번 보고 가게나.”

누더기 껍질은 사제들에게도 쉬운 병은 아니었다. 시혁의 말대로 몇 명이라도 치료소에서 데려가면 크게 도움이 된다. 자연히 시혁의 요청을 수락했다.

뜨리옹이 시혁을 안내했다.

치료실은 2층과 3층에 마련되어 있었다. 그 중 한 곳으로 들어갈 줄 알았는데, 거길 지나쳐 야전 성당 뒤쪽에 있는 다른 건물로 들어섰다.

뜨리옹은 움직이며 간단히 설명을 해주었다.

“누더기 껍질은 치료하는데 시간이 좀 걸립니다. 일반 병종이 아니고, 영웅 병종이 퍼뜨린 병이니까요. 적어도 이틀은 걸린다고 봐야 합니다.”

“이틀이라……”

“그 동안 질병 치료 주문과 회복 주문을 동시에 유지해야 합니다. 베네딕트 주교님께서 전담하고 계신데, 절대 쉬운 일이 아니죠. 치료사분들이 중급 병종까지 책임지고 치료해주지 않으셨으면 인력 부족 때문에 포기했을지도 모릅니다.”

둘이 들어선 건물은 2층짜리 작은 건물이었다.

1층에 누더기 껍질 환자들이 주르륵 누워 있었다. 2층에는 누더기 껍질 보다 더 심각하고, 더 치료하기 힘든 환자들이 있다고 했다. 숙련 주교가 직접 돌본다던가.

환자들을 살피던 주교가 고개를 들었다.

“뜨리옹 사제? 여기엔 어쩐 일인가? 그 치료사는 누구고?”

얼굴이 초췌했다.

며칠째 면도를 못했나 보다. 얼굴 전체에 수염이 덥수룩하게 나 있었다. 눈 밑에 검은 기운이 짙고, 눈은 심각할 정도로 충혈된 상태였다.

뜨리옹이 경건한 태도로 인사를 했다.

“베네딕트 주교님. 여기 이 분은 야전 치료소를 담당하시는 전문 치료사 최시혁 씨입니다. 누더기 껍질의 치료를 보고 싶다고 하셔서 모셔 왔습니다. 이웰 주교님께서도 허락을 하셨습니다.”

베네딕트는 탐탁지 않다는 얼굴을 했다.

“누더기 껍질 치료를? 그거 봐서 뭐하시게? 나도 치료사 출신이오만, 치료사와 사제는 확연히 다르오. 봐도 별로 얻는 게 없을 거요. 차라리 숲에 잠입해서 황동 버섯을 캐오는 게 낫지.”

“황동 버섯은 구리가 매장된 산의 숲에서 자생한다는데, 저 숲에 있겠습니까?”

“아, 그렇지 참. 어쨌든 이웰 주교님께서 허락을 하셨다니 마음대로 하시구려. 난 내 할 일을 할 테니.”

베네딕트가 홱 몸을 돌렸다.

침대 사이를 누비며 환자들을 살폈다. 두 마법이 잘 유지되는지 확인하고, 약해진 마법이 있으면 다시 걸었다.

뜨리옹은 돌아가고, 시혁은 조심스럽게 환자들을 관찰했다.

마나의 움직임을 살피니, 지구에서는 알 수 없었던 특징이 보였다.

< 누더기 껍질 -1- > 끝

ⓒ 산호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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