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 세계의 한의사-22화 (22/250)

< 숲의 군대 -3- >

시간이 많으면 여러 가지를 가르쳤을 텐데, 안타깝게도 그럴 여유가 없었다.

시혁은 몸을 털고 일어났다.

롯뜨와 반을 향해 한 가지를 지시했다.

“전 잠시 보급관에게 다녀오겠습니다. 두 분은 큰 솥이랑 장작, 볶음용 철판을 준비해 주세요.”

“그것들은 왜요?”

“인간 곰팡이 환자와 덩굴 신경 환자는 결국 치료하지 못했잖습니까? 약만 있으면 가능합니다. 다음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준비를 해놔야지요.”

보급관은 주둔지 중앙, 사령부에 있었다.

정신없이 바빴다. 곧 벌어질 전투에 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화살과 식량을 보급하고, 목책을 지을 통나무를 나르는데 모든 신경을 쏟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시혁의 요청을 듣고 콧방귀만 뀌었다.

“뭐? 약재를 보급해달라고? 자네 미쳤나? 우리 본성에는 약초밭이 하나 밖에 없다는 거 몰라? 약초 지원은 못 하니까, 그렇게 알게!”

사실 시혁도 보급관이 이런 반응을 보일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성검 공작의 주력은 성기사와 사제.

모든 자원이 그쪽으로 집중되기 때문이다.

미리 생각해뒀던 차선책을 제시했다.

“그렇다면 인부 10명만 추가로 배정해 주십시오.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기본 병종과 중급 병종을 모두 치료소에서 감당하면 성당의 부담이 덜어질 겁니다. 그러면 배치된 사제를 일선으로 파견할 수 있으니, 전투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게 됩니다.”

“음!”

인부 10명이라는 소리에 보급관이 솔깃한 표정을 지었다.

빠듯하지만 그 정도 인력은 되기 때문이었다. 사실 인부와 기본 병종을 좀 후방으로 보내고 성기사나 사제를 한 명 더 지원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자네 뜻대로 해주지. 하지만 명심하도록 하게. 이번 일은 오롯이 자네 책임일세. 인부를 부리는 만큼, 소기의 성과를 내야 하네.”

“걱정 마십시오.”

인부를 데리고 뭘 할 수 있을까?

보급관은 속으로 의아해 하면서도 인부 10명을 추가로 배정해 주었다.

시혁은 얼른 인부 10명을 데리고 나왔다.

인간 곰팡이와 덩굴 신경을 치료하기 위해 필요한 약재는 총 9가지다. 이 중 주둔지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은 딱 하나, 황금 풀의 뿌리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다른 곳에서 조달을 해야 한다.

숲?

그 안으로 들어가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숲 진영이 점거하고 있으니 불가능했다.

방법은 하나.

방금 전까지 주둔지를 공격하던 숲의 군대가 남긴 시체를 활용하는 거였다.

적당히 조를 나눈 뒤 가져올 시체를 할당해 주었다. 나무 거인처럼 크기가 크면 시체를 다 가져올 것 없이, 부위 별로 적당히 챙겨오도록 했다.

인부들은 영문을 모르면서도 시혁의 말을 충실하게 따랐다. 후방으로 시체를 옮기던 이들에게 끼어들어 시체를 몇 구씩 얻어 가지고 왔다.

야전 치료소 앞 공터에 시체 수십 구가 차곡차곡 쌓였다.

롯뜨와 반도 상황을 모르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뭘 하느냐는 얼굴로 시체가 쌓이는 것을 구경했다.

“두 분은 불 피우고 그 위에 솥 걸어서 올려놓으세요. 물은 적당히 채우고요. 아, 최소 두 개는 걸어야 합니다. 약을 두 개는 만들어야 하니까.”

“설마 요리를 하시는 건 아니죠?”

“요리요? 하하, 약을 만드는 겁니다. 자, 일단 해체부터 합시다.”

시혁은 이런 쪽에는 문외한이다. 지구에서는 이미 다듬어진 약재를 썼으니까. 그나마 학창 시절 본초학 교수의 인솔 하에 산행을 몇 번 간 게 전부였다.

“저한테 맡겨주세요!”

반이 앞으로 나섰다.

아주 능숙했다. 순식간에 늑대와 외뿔 곰, 검치호의 내장을 꺼내 종류 별로 분류하고 두개골을 잘라 뇌까지 들어냈다.

그러면서 인부들을 부려 다른 시체도 해체시켰다.

검은 말벌의 날개과 독침을 떼고, 구렁이의 독니와 독주머니를 분리하고, 포자 버섯의 팔 신경 조직과 근육 조직을 채취했다.

시혁은 그것들을 종류 별로 모았다.

약재로 쓸 수 있는지 확인했다. 불가능한 부위는 버리고, 가능한 부위는 비슷한 속성끼리 분류했다.

완벽히 기존 약재를 대체하는 부위는 찾을 수 없었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대체가 가능해서, 시혁이 처음 구상했던 약의 70% 효능을 내는 약을 짓는 게 가능했다.

시혁은 옆에 있는 롯뜨에게 약재 목록을 불러 주었다.

“저기 솥에는 마법 부엉이의 눈, 나무 거인의 껍질, 포자 버섯 근육, 외뿔 곰의 뿔 가루, 황금 풀의 뿌리를 각각 3대 2대 1.5대 1.5대 1의 비율로 넣으세요. 그 약재들이 물에 완전히 잠길 정도로 물을 붓고요. 아, 부엉이 눈은 술로 볶고, 곰의 뿔은 직화로 까맣게 태워서 넣어야 합니다.”

“3대 2대 1.5대 1.5대 1…… 부엉이 눈은 술로 볶고, 곰의 뿔은 까맣게 태운다…… 네, 그리고요?”

“다른 솥에는 검치호 송곳니 가루, 말벌 독을 100대 1로 희석시킨 물, 아귀 구렁이의 가죽을 삶은 물, 나무 거인의 꽃가루, 황금 풀의 뿌리를 2대 3대 1대 1대 1.5 비율로 넣으세요. 황금 풀의 뿌리만 흙에 재운 채 좀 달궈서 넣어야 합니다. 대충 뿌리가 노래지면 돼요.”

“뭔가 의미가 있나요?”

“당연히 있죠. 지금은 바쁘니 나중에 얘기합시다.”

벌써 시간이 꽤 지났다.

다들 바쁘게 움직였다.

야전 치료소의 인부들까지 수십 명이 달라붙었다. 빠르게 포제를 끝내고 솥에 넣고 끓이자, 어째 퀴퀴한 냄새가 야전 치료소 주변으로 온통 퍼졌다.

주변을 지나던 병사들이 코를 감쌌다.

“아이고, 무슨 냄새야?”

“저기 천막에서 냄새가 난다.”

“치료소잖아? 뭐 독이라도 만드나?”

“숲의 군대는 독에 대한 저항력이 강한데……”

곱지 않은 시선이 쏟아졌다.

동물성 약재를 많이 써서일까. 냄새가 지구에서 맡던 한약 냄새보다 더 독했다.

롯뜨와 반이 안절부절 못했지만, 시혁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결과로 보여주면 될 일이니까.

뿌우우우!

약이 거의 완성되었을 때, 예의 나팔 소리가 들렸다.

“자, 나머지는 안에 들어가서 합시다. 걸러내기만 하면 끝이 납니다.”

방법은 간단하다.

광목을 넓게 펼치고, 그 아래 항아리를 받친다. 광목을 항아리 입구에 고정시키고 위에 솥의 내용물을 붓기만 하면 된다. 그럼 약재는 광목에 남고, 약물만 광목을 통과해 항아리로 들어간다.

전통 방식과는 꽤 차이가 있었다. 대량으로 동일한 약을 짓다 보니 이런 방법을 고안해 낸 것이다.

환자들이 들어오기 전, 두 종류의 약이 완성되었다.

시혁은 살짝 웃음을 지었다.

‘인간 곰팡이 약은 작오탕(灼汚湯), 덩굴 신경 약은 세신탕(洗神湯)이라고 하자.’

불사의 역병을 치료할 때와는 달리, 환자 체질과 병증 상태를 고려하지 않고 똑같이 만든 약이다.

하지만 그 정도는 시혁이 침과 뜸으로 보완할 수 있었다. 아르거스에서는 뭐든 빠르고 효율적으로 하는 게 미덕이니 이렇게 하는 게 더 나았다.

“환자들이 옵니다!”

약이 완성되기 무섭게, 환자들이 수십 명씩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이젠 다들 능숙했다.

시혁이 뭐라 지시를 할 필요도 없었다. 환자가 들어오는 즉시 2개의 진료실과 2개의 입원실로 딱딱 배정이 되었다.

새로 배정 받은 인부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여러분은 아까처럼 약을 계속 만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이미 같이 해봤으니까 어렵지는 않을 겁니다. 재료는 주둔지 후방에 쌓여 있으니 부족하면 거기서 갖고 오시고요. 아셨지요?”

“예, 치료사님.”

모두 자기 할 일을 찾아갔다.

시혁은 먼저 중독 입원실에 상주했다. 중독 환자가 들어오는 대로 뜸과 침을 써서 회복시켰다.

질병 입원실로 건너 간 것은 시간이 꽤 지나 환자들이 거의 절반 정도 찼을 때였다.

시혁은 입원실의 인부들에게 말했다.

“약부터 먹여 주세요. 인간 곰팡이 환자들은 1번 약, 덩굴 신경 환자들은 2번 약입니다. 안 헷갈리게 조심하세요. 환자들이 잘 못 삼킬 테니, 숟가락으로 떠먹이는 게 좋을 겁니다.”

초파리 알 환자부터 우선적으로 치료를 했다.

그 사이 인부들이 환자들에게 약을 먹였다. 환자들 상태가 좋지 않아 절반 넘게 흘렸지만, 필요한 만큼은 되는 것 같았다.

이제 시혁이 나설 차례.

요령은 불사의 역병 때와 같았다. 약 기운이 최대한 회복되도록 도왔다.

“으으음……”

환자들의 얼굴이 편해졌다.

하지만 다 끝난 것은 아니었다. 약기운이 충분히 흡수된 다음, 마지막 처치를 해야 했다. 초파리 알 환자를 쭉 치료한 다음에는 인간 곰팡이 환자를 살폈다.

불사의 역병 때와 비슷했다.

인간 곰팡이가 주로 침습하는 곳은 소화기, 그 중에서도 소장과 대장이었다.

따라서 하복부에 깊숙이 장침을 찔러 넣었다. 뜸을 침병에 커다랗게 매달고 불을 당기자, 불의 마나가 스며들어 음습한 기운을 소멸시켰다.

다만 덩굴 신경은 온침으로 치료하기가 어려웠다.

신경계 자체가 덩굴로 변하는 병이기 때문이다. 온침으로 불의 마나를 깊숙이 투사했다간, 덩굴로 변한 신경계가 치명적인 손상을 입을 수도 있었다.

침 치료를 추가로 하면 되긴 하지만, 굳이 그렇게 손을 한 번 더 쓸 필요가 뭐 있나.

한 번에 다 처리하면 될 것을.

시혁은 새로운 치료 도구를 소환했다.

약침.

한약재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얻은 약액을 경혈에 자입하여 치료하는 방법이다.

지구에는 그 종류가 상당히 많다. 그런데 시험 삼아 여러 가지를 소환해 보았더니, 소환된 약침은 딱 한 종류였다.

완전히 순수한 물.

물의 마나가 풍부했다. 따라서 약침에 담긴 물의 양은 많지 않아도, 충분히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다.

시혁은 덩굴 신경 환자들을 옆으로 눕히게 했다. 그리고 목 뒤, 7번 경추 극돌기의 바로 아래 위치한 대추혈에 약침을 찔러 넣었다.

물의 마나가 환자의 신경계 전반을 촉촉하게 씻었다.

그 힘은 보호.

모든 삿된 것으로부터 생명을 보호했다. 본연의 저항력을 강화하여, 병을 몰아내는데 도움을 주었다.

시혁이 새로 구성한 세신탕에는 검은 말벌 독과 아귀 구렁이의 독이 포함된다.

그것들이 덩굴 신경을 공격하여 이미 노곤하게 만들어 놓았다. 그리하여 물의 마나와 생명의 마나가 동시에 쏟아지자, 환자의 신경계가 언제 덩굴로 변했냐 싶게 원 상태로 복구되었다.

시혁은 씩 웃었다.

덩굴 신경을 그냥 마나만 주입해서 치료하려면 막대한 마나가 든다. 예전 신봉자의 성에서 겪었던 소각의 저주와 비슷했다.

그걸 겨우 1/100 정도 마나로 해결했으니, 아주 효율적으로 일을 처리한 것이다.

시혁의 몸에서 빛이 반짝였다.

레벨도 올랐다.

지식 열람에도 변화가 있었다.

인간 곰팡이와 덩굴 신경의 치료법으로, 작오탕과 세신탕이 당당히 등재된 것.

회혼순천탕도 그렇고 작오탕과 세신탕도 그렇고, 시혁이 소환된 자신의 진영만이 아니라 세계 전체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이다.

이곳 주둔지에서도 마찬가지.

현재 이곳 치료소에 있는 거라고는 큰 천막 하나와 치료사 셋이 전부였다. 하지만 이 큰 주둔지의 기본 병종과 중급 병종을 전부 감당하는데 성공했다.

더 이상 야전 성당으로 환자를 보내지 않았다. 일단 천막 안으로 들어오는 환자는 모두 완치시켜 일선으로 복귀시켰다.

자연히 야전 성당에 걸리는 부담이 줄었다.

며칠이 지난 후에는 상급 병종 중 일부도 야전 치료소로 들어왔다. 치료사가 증원되진 않아 힘들었지만, 세 치료사 모두 레벨이 올라간 다음이라 버틸 수 있었다.

전투는 날이 갈수록 치열해졌다.

한 번은 적의 나무 거인 영웅이 고함을 지르며 뛰어들기도 했다. 그 바람에 방어선 일각이 붕괴되었는데, 아군 영웅들이 나서서 겨우 막았다.

부상자들이 몰려들었다.

그들 틈에서 익숙한 증상을 발견했다.

근육 마비에 동반되는 신경통과 붉은 포진.

바로 글루마 코푸스와 아주 흡사한 증상이었다.

< 숲의 군대 -3- > 끝

ⓒ 산호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