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 세계의 한의사-20화 (20/250)

< 숲의 군대 -1- >

시혁은 얼떨떨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간절히 바랐지만, 한 편으로는 기대하지 않았던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돌로 쌓은 성벽, 건물, 거인 석상, 무장한 사람들.

아르거스다.

시혁도 방문 주기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기뻤다.

남들보다 더 빨리 계급을 올리고, 영웅도 쉽게 되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신아영을 구할 기회를 얻었으니까.

홀로 기쁨을 만끽하고 있을 때, 거대한 명령이 시혁에게 떨어졌다.

[저쪽으로 가라!]

반신의 뜻이다.

지시한 곳으로 가면서, 스스로의 상태를 확인했다.

1레벨 전문 치료사.

전문 계급이라고?

저번 방문 당시 시혁은 겨우 수습 치료사였다. 그런데 2계단이 한 번에 올라 전문 계급이 된 것이다.

더불어 두 가지 항목이 활성화되었다.

[특기 : 다중 속성 치료.]

[특화 : 선택 요망.]

다중 속성 치료가 뭔지는 금방 눈치 챘다.

뜸에 깃든 불의 마나를 이용, 강력한 정화의 힘을 발휘했던 것을 말했다. 한의사의 치료 방법이 침과 뜸만 있는 게 아니니,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겠다.

그리고 특화?

거기에 시혁의 의식이 머물자, 선택 가능한 항목들을 저절로 알게 되었다.

다양했다.

외상이나 내상은 물론 질병, 진단 등등 여러 가지 항목이 존재했다.

시혁은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질병 부문을 선택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의 선택이 나중에 영웅으로 진화하여 지구에서 이능력자가 될 때에도 영향을 미친다. 당장 아르거스에서 써먹기는 외상 특화가 더 좋지만, 지구에서는 질병 특화가 더 낫다.

이동하던 시혁의 몸에 녹색 빛이 한 차례 감돌았다.

시혁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왜 전문 계급이 되었는지는 짐작이 갔다.

불사의 역병을 치료해서였을 것이다.

한낱 수습 치료사가 불사의 역병을 치료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불사의 역병에 걸린 이가 10여 명이나 되면 더더욱  그러하다.

더구나 시혁 스스로도 불사의 역병에 걸려 골골대지 않았나. 세계 전체가 죽음의 마나로 가득 차, 극도로 절망스러운 상황이었고.

자연히 거기서 얻은 경험이 엄청나다.

다른 이들이 아르거스에 10번 넘게 온 것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많다고 봐야 할 것이다.

또 한 가지.

시혁은 의외의 사실을 발견했다.

불사의 역병 항목에 새로운 지식이 추가되었다.

다름 아닌 회혼순천탕.

당당히 불사의 역병 치료약으로 기재되어 있었다. 정립된 조제 방법을 따라 만든 후, 1달 정도 복용하기만 하면 된다고.

“이런 식으로 세계 지식이 추가가 되는구나.”

기꺼운 마음이 들었다.

이제 다른 희생자들도 자신의 인생을 지킬 가능성이 높아진 거니까.

성검 공작이 시혁에게 가라고 한 곳은 넓은 평야였다.

평야 한쪽에는 거대한 숲이 있었다. 그와 대치하듯, 인간 군대가 토벽과 목책을 쌓아놓고 주둔 중이었다.

숲을 본 시혁의 눈이 강렬한 빛을 뿌렸다.

나무들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언뜻 보면 거대한 인간처럼 생긴 나무들. 가지를 팔처럼 휘두르고, 뿌리를 다리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몸통과 얼굴이 따로 구분 되지는 않았다. 몸통 위에 옹이구멍 같은 눈과 길게 찢어진 입이 달렸다. 껍질은 우중충한 갈색인데, 녹색 이끼가 잔뜩 끼었다. 군데군데 기묘하게 생긴 노란 꽃이 피어 희한한 냄새를 풍겼다.

나무 거인.

지구에서는 흔히 거대 괴수목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차이점이 있었다.

거대 괴수목의 꽃가루와 체액이 글루마 코푸스를 유발하는데, 나무 거인의 꽃가루는 독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미용에 좋았다. 아르거스가 온전했던 시절에는 귀족들 사이에서 인기리에 팔렸다고 한다.

뭔가 차이가 있을 텐데, 그걸 지금부터 확인해봐야겠지.

지식 열람으로 간단히 알아내면 좋은데, 글루마 코푸스를 아르거스에서 뭐라고 부르는지 몰라 잘 되지 않았고.

나무 거인을 보며, 시혁은 눈을 가늘게 떴다.

잠자리에 들며 빌었던 두 가지 기원이 모두 이뤄진 까닭이었다.

단순히 우연의 일치일까?

아니면 시혁이 가진 특수한 능력일까?

아르거스에서의 기억을 온전히 보존하고 있는 것에 더해, 한 가닥 의혹이 시혁의 마음속에 깃들었다.

천천히 걸어 주둔지 안으로 들어갔다.

파수병들이 때를 맞추어 문을 열었다. 그 안으로 들어가자, 추가적인 명령이 내려왔다.

[야전 치료소로 가라.]

주둔지 한쪽에 커다란 천막이 세워져 있었다.

시설은 열악했다. 천막 안에 담요를 주르륵 늘어놓은 게 고작이었다. 칸막이도 기대하기 힘들고, 통풍도 제대로 되지 않아 눅눅한 냄새가 났다.

시혁은 눈살을 찌푸렸다.

주둔지의 규모에 비해 너무 낙후되어 있었다. 이래서야 밀려드는 부상자들을 치료하기가 힘들다.

“새로 오신 치료사 분이세요?”

먼저 와 있던 치료사 둘이 엉거주춤 일어났다.

통통하게 생긴 아줌마 하나와 어린 소년 하나.

시혁은 그들을 보고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1레벨 전문 치료사 최시혁입니다.”

그 말에 둘의 눈빛이 달라졌다.

“전문 치료사요?”

“휴! 이제 좀 숨통이 트이겠네요.”

“저흰 둘 다 수습 치료사에요. 저는 롯뜨, 이 아이는 반이라고 하고요.”

“반갑습니다. 그런데 어째 치료소가 좀 허름하네요. 주둔지에서 발생하는 환자들을 다 수용할 수가 있습니까?”

치료소의 상태는 꽤 중요하다.

그 안에 배치된 치료사들을 보조하기 때문이다. 마나가 빠르게 회복되고, 더 효율적인 치료가 가능하게 했다.

이건 다른 건물들도 마찬가지. 건물마다 배치된 소환자들에게 다른 이점을 부여했다.

그런데 이 정도 치료소로는 시혁을 비롯한 세 치료사의 능력을 제대로 이끌어 낼 수가 없다. 아마도 마나 회복 속도만 조금 빨라질 것이다.

어린 소년 치료사 반이 씁쓸하게 웃었다.

“저희는 보조적인 역할만 하니까요. 진짜 위험한 부상자나 상급 병종들은 전부 야전 성당으로 가요. 사제들이 거기 배치되어 있어서 순식간에 치료하곤 하죠.”

“아하, 그렇습니까?”

야전 성당이 있다면 그럴 만하다.

단지 치료 능력만으로 따지면 치료사가 사제에 비해 우위에 있다. 하지만 사제에겐 저주 해제와 마법 해제, 보호막 생성 등 다양한 능력이 존재했다.

게다가 이번 반신의 칭호를 보라. 성검 공작이 아닌가.

그런 만큼 성기사와 사제에게 더 친숙할 터였다. 치료사를 괄시할 만 했다.

사실 권세 진영 반신들이 많이 보이는 행태였다. 권세 진영은 치료소 계열 병종보다 성당 계열 병종에게 더 강점이 있으니까. 치료소 계열 병종은 상급 병종까지만 존재하는데, 성당 계열 병종은 고급 병종도 존재하고.

시혁은 근처의 담요 위에 주저앉았다.

치료사들의 낮은 위상을 보여주듯, 의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럼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뭡니까? 보병들이나 궁병들 부상만 치료해주면 됩니까?”

“중급 병종까지는 이쪽으로 와요. 단순 부상이면 우리가 치료하고, 그게 아니면 야전 성당으로 보내죠. 독이나 각종 질병 같은 것들이요.”

“마법이나 저주가 아니고요?”

“숲의 대모는 마법과 저주를 잘 쓰지 않아서요. 숲의 식물과 동물을 부리는데 힘을 집중하고 있어요.”

다만 거기서 비롯되는 독과 질병이 무섭다고 했다. 잘못 대처하면 이 주둔지 전체가 간단히 쓸려버린다나.

거기까지 들은 시혁이 얼굴을 찌푸렸다.

시간이 되기 전 아르거스에 돌아온 이유가 뭐냐.

다름 아닌 신아영 때문이었다. 신아영이 앓는 글루마 코푸스를 치료할 방법을 찾기 위해서.

그런데 이 천막에 들어앉아 외상만 보고 있으면 그 방법을  찾기가 불가능하다.

“중급 병종까지의 외상만 본다라……”

시혁은 생각에 잠겼다.

사실 꼭 그렇게 할 필요는 없다.

성검 공작이 직접 지시한 사항이라면 모를까, 롯뜨와 반이 협의하여 그런 체계를 만든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시혁은 둘을 보며 말했다.

“지금부터 이 치료소는 제가 지휘하겠습니다. 혹시 이의가 있습니까?”

“아뇨.”

“없습니다.”

한 치료소에 여러 치료사가 있을 경우, 계급이 가장 높은 치료사가 지휘를 맡는 게 관례였다. 아무래도 경험이 제일 많고, 치료 능력도 뛰어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었다.

시혁은 빙긋 웃음을 지었다.

“좋습니다. 두 분께서 흔쾌히 수락해 주시니 마음이 든든하네요. 앞으로 우리 치료소의 운영 방식은 간단합니다. 기본 병종과 중급 병종은 우리 치료소에서 모두 책임집니다.”

“예?”

“농담이시죠?”

롯뜨와 반이 입을 쩍 벌렸다.

지금까지 단순 부상자만 보는 것만으로도 허리가 휘는 줄 알았다. 한 번 전투가 벌어지면 며칠 동안은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치료를 했다.

이제 시혁이 왔으니 좀 편해지려니 했는데, 기본 병종과 중급 병종을 모두 책임진다고?

끔찍했다.

편해지기는커녕, 몇 배는 더 바빠질 것이다.

당장 반대하고 나섰다.

“최시혁 치료사님. 너무 무리한 일입니다.”

“맞습니다. 여기 오는 부상자 중 질병이나 독에 당한 이들이 적어도 그 중 1/3은 됩니다. 저나 반은 아직 경험이 일천해서 최시혁 치료사님께서 그들을 대부분을 봐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수가 너무 많습니다.”

하지만 시혁의 의지는 이미 확고했다.

“물론 상태가 심각한 이들은 사제들에게 넘길 겁니다. 1명만 붙잡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도 우리 능력으로 가능하다면 우리 셋이서 치료하는 게 좋습니다. 저주나 마법이라면 모를까, 질병과 독이라면 우리 치료사들의 영역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두 분도 얼른 경험을 쌓아서 승급하셔야지요. 백날 외상 치료만 해봐야 승급하는 건 요원한 일입니다. 고생스러워도 참고 견디세요.”

“끄응!”

두 치료사도 시혁의 의지가 확고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뒤로 더 빼기는 어려웠다. 이미 시혁의 지휘에 동의한 이상, 세계의 법칙에 따라 강제력이 발생하니까.

롯뜨가 조용히 말했다.

“그러다 환자들이 밀리면 성검 공작께서 화를 내실 지도 모릅니다.”

“걱정 마세요. 안 밀리게 잘 조절하면 되니까. 애초에 치료사를 왜 한 명 더 소환했는지 잘 생각해보세요. 이곳 야전 치료소가 성검 공작의 생각대로 잘 돌아가지 않으니까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하아, 글쎄요.”

“자, 그럼 준비합시다. 언제 또 전투가 벌어질지 모릅니다. 일단 전투가 시작되면 부상자들이 어마어마하게 몰려들 겁니다.”

시혁은 인부들을 시켜 청소부터 했다.

먼저 쫙 환기를 했다. 통풍구를 몇 개 만들어 공기가 잘 통하게 했다. 이렇게 꽁꽁 싸매고 있어서야, 없던 병도 생기기 마련이었다.

시혁도 구경만 하고 있진 않았다. 라이터를 이용, 불을 뿜어 소독을 했다. 담요나 천막에 불이 붙을 법도 한데, 희한하게도 불줄기가 오염된 곳만 정화하고 있었다.

예전이라면 힘들었을 행동이다. 전문 계급이 되어서 가능했다. 불의 마나를 더 섬세하게 조절할 수 있었으니까.

롯뜨와 반은 놀란 눈으로 시혁을 쳐다보았다.

“롯뜨 님. 전문 치료사는 저런 것도 가능하나요?”

“글쎄. 내가 봤던 전문 치료사들은 저런 능력까진 없었는데……”

대략적인 준비는 얼마 지나지 않아 끝이 났다.

시혁은 인부들과 두 치료사를 불렀다.

“자,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을 잘 들으세요. 전투가 시작되면 부상자들이 어마어마하게 몰려들 겁니다. 그런데 지금 같은 구조로는 효율적으로 치료를 할 수가 없습니다. 동선이 너무 길고, 부상자들이 누워 있으면 거치적거리니까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구조를 바꿔야죠.”

일단 담요를 다 걷게 했다.

그 후, 병사들에게 긴 기둥을 여러 개 받아와 땅에 박았다. 기둥 사이에 담요를 고정시켜 연결하자, 넓은 천막 안이 몇 개의 구획으로 나뉘었다.

지구의 감각으로 얘기하자면 입원실과 진료실, 그리고 환자 대기실과 접수실로 구분한 것이다.

“환자가 오면 먼저 대기실에 눕히세요. 그럼 대기실 담당 분들이 접수실로 데려옵니다. 접수실 담당 분은 도착한 순서대로 롯뜨 님과 반 님의 진료실로 데려가되, 응급 환자가 있으면 순서 무시하고 그 분부터 데려가세요. 혹시 질병이나 중독 환자가 있으면 입원실로 데려오는데 이쪽 구역에는 질병, 이쪽 구역은 중독 환자를 넣으시면 됩니다. 질병과 중독이 난이도가 더 높으니, 기본적으로는 제가 담당하는 것으로 하지요. 단, 진료실 환자가 좀 줄면 두 분 중 한 분이 저를 도와주시고요.”

롯뜨와 반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굳이 그렇게 복잡하게 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그냥 삼열로 눕혀놓고 셋이서 쭉쭉 치료해 나가면 될 것을.

사실 거기에 문제가 있었다.

인부들은 무턱대고 빈 자리에 환자를 눕히기만 했다. 중독인지 질병인지 확인하지도 않았다. 더구나 응급 환자와 비응급 환자가 뒤섞였다. 아까운 목숨을 버리거나 호미로 막을 문제를 가래로 막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시간과 인력의 손실이 일어났다. 일은 일대로 하면서, 제대로 효과를 내지 못하는 것이다.

< 숲의 군대 -1- > 끝

ⓒ 산호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