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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수 세계의 한의사-18화 (18/250)

< 이능력자 -1- >

입국식 후에는 주요한 변화가 몇 가지 있다.

가장 큰 것이 자침.

주말 자침은 이제 인턴들에게 넘어온다. 딱 두 군데, 침구과와 재활과만 주치의들이 계속해서 놨다.

그리고 현황표가 넘어온다. 지금까지는 주치의들이 매일 수정을 했는데 이젠 인턴이 해야 한다. 그만큼 환자를 더 잘 파악하라는 얘기였다.

대신 총의국이 풀렸다. 더 이상 처치실에 숨어 쉴 필요가 없었다. 총의국에 있는 긴 의자를 이용, 낮잠을 자도 괜찮았다.

오늘이 지구에서의 첫 자침이지만, 시혁은 별로 부담스럽지 않았다.

당연했다.

아르거스에서 지겨울 정도로 침을 놨으니까.

다만 그 방법은 달리해야 했다. 아르거스에서는 아무데나 침을 놔도 생명의 마나가 전달되어 치료가 되지만, 지구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철저히 한의학적 이론에 따라 자침을 해야 한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사실 시혁도 대부분의 경우에는 배운 대로 침을 놓았으니까. 그러면 생명의 마나를 효율적으로 쓸 수 있고, 병을 더 효과적으로 다스릴 수 있었다. 자침에 따라 마나의 움직임도 조금씩 달라지곤 했으니, 상당한 경험이 있다고 봐야 했다.

510호부터 차례대로 침을 꽂았다. 둥근 원통 형태의 침관도 쓰지 않고 쑥쑥 찔러 넣었다.

조금 답답하긴 했다.

아르거스와 달리, 마나의 움직임을 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저 그때의 경험을 반추하며 자침하는 게 고작이었다.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겨우 2시간 만에 모든 환자의 자침을 끝냈다.

시혁은 손이 빨랐으니까. 더구나 1내과와 안이피 환자들은 아르거스에서 시혁이 겪어본 병을 앓고 있었다. 자신감을 가지고 침을 놓자, 안 그래도 빠른 속도가 더 빨라졌다.

남은 시간에는 부항과 뜸을 떴다. 아침에 몇 명 미리 해둔 뒤라서, 오후쯤에는 모든 일을 끝낼 수 있었다.

더 이상 할 일이 없었다.

총의국으로 빨리 내려왔다. 그리고 한쪽 벽면의 서가에 쌓아 놓은 각종 한의학 서적에 주의를 돌렸다.

2달 하고 열흘 만에 갖는 꿀맛 같은 휴식 시간이다.

하지만 시혁은 이 시간을 그냥 쉬면서 보내지 않기로 했다.

불사의 역병을 치료하면서 보냈던 1달.

그 기간 동안 스스로의 부족함을 뼈저리게 느끼지 않았나.

조금만 더 인체에 대한 이해가 깊었더라면, 여러 치료 방법에 대해 제대로 숙지하고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두툼한 책을 한 권 빼어들었다.

동기들이 놀리듯 말했다.

“뭐야, 공부하게?”

“헐, 너 학교 다닐 때는 안 그러더니 갑자기 유난 떠는 거 아냐?”

두 달 동안 동고동락을 했더니 격의없이 말을 하곤 했다. 농담하듯 말을 한 까닭에 기분 나쁘지도 않았다.

시혁은 어깨를 으쓱였다.

“병원에서 일 해 보니까 내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11월부터 우리가 주치의잖아. 그 전에 공부 좀 해야겠어. 아무 것도 모른 상태에서 환자 치료할 수는 없으니까.”

“그야 그렇지.”

“하, 나도 공부는 해야 되는데……”

동기들은 처음에는 긴 의자에 누워 잠을 청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공부에 열중하는 시혁을 몇 번씩 쳐다보더니 자세를 고쳐 앉았다. 침구학 책을 꺼내든 김상아를 시작으로, 하나둘 지망하는 과의 책을 보기 시작했다.

시혁은 속으로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동기들에게 굳이 압박을 넣을 생각은 아니었는데, 경쟁심에 불이 붙은 것 같았다.

하지만 마음 편히 공부할 팔자는 아니었나 보다.

오후 5시, 6병동에서 전화가 왔다.

신규 입원 환자가 올라왔다는 것이다.

[연장진료실에서 입원한 겁니까?]

[네. 곧 올라온대요. 젊은 여자 환자라는데요? 22살이래요.]

[22살이요? 진짜 어리네요. 무슨 관데요?]

[안이피요. 당직 선생님 말로는 벨 마비(특발성 안면 신경 마비) 같대요.]

[그 나이에 벨 마비요? 알겠습니다. 곧 올라갈게요.]

시혁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주변에서 쉬고 있던 동기들이 시혁을 돌아보았다.

“신환이야?”

“응. 벨 마비 환자라는데?”

“많이 안 좋대? 일요일인데 입원을 하게.”

“아, 그런 건 아니고 22살 여자 환자래. 그래서 입원하는 것 같아.”

“그래? 하긴 얼굴에 민감할 때니까. 치료 잘 해 줘! 많이 놀랐겠다.”

“그래야지.”

시혁은 적당히 준비를 하고 6층으로 올라갔다.

환자는 이미 병실로 들어갔다고 했다.

601호, 1인실이었다.

차트를 들고 병실로 향했다. 간호사가 병실에서 나오더니, 시혁을 보고 말했다.

“선생님! 120에 80, 6도 5부, 20, 1분에 72에요. 아주 정상이네요.”

“에이, 22살이라면서요. 바이탈이 흔들리면 그게 이상한 거죠.”

“그렇죠? 얼른 들어가 봐요. 예쁘던데 안 됐어요. 보호자들도 완전 미남 미녀라서 연예인들이 몰려온 줄 알았다니까요?”

“그래요?”

“선생님 여자 친구 없다고 했죠? 잘 해 봐요. 왜 가끔 보면 입원한 환자랑 연애해서 결혼하는 선생님들도 있잖아요.”

“하하. 치료가 우선이죠.”

시혁은 그저 웃어 넘겼다.

간호사가 불러준 숫자를 차트에 차례대로 기입했다. 각각 혈압, 체온, 호흡, 맥박이었다. 그 다음 열린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20대 초반의 여성 하나가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미인이었다.

불룩하게 솟은 가슴부터 눈에 들어왔다. 팔 다리가 시원스럽게 쭉쭉 뻗었다. 피부는 백옥처럼 희고, 또렷한 이목구비가 뭇 남성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얼굴 왼쪽이 완전히 마비되어 균형이 뒤틀어졌다는 것.

그것만 아니었어도 완벽했을 텐데……

환자, 신아영만 미인이 아니었다.

그 주변에 둘러선 이남일녀도 그러했다. 저마다 개성적인 외모를 뽐내고 있었다.

연예인 지망생들이라도 몰려온 걸까?

그들을 보며, 시혁은 묘한 느낌을 받았다.

자신의 감각을 자극하는 뭔가가 있었다. 마치 이들의 몸에서 어떤 파동이 일어나, 병실 전체로 퍼지는 듯했다.

몇 번 겪어본 적이 있었다.

다름 아닌 아르거스에서.

처음 갔을 때 만났던 힘센 남자와, 앰버튼 경을 대면할 때 비슷한 느낌을 받았던 기억이 났다.

퍼뜩 이 힘의 정체를 깨달았다.

‘에테르 파동이구나!’

아르거스에서는 영웅의 고유 기태라고 부르는 것.

이능력자로 각성하면 자신도 모르게 어떤 기운을 내뿜게 된다. 그 힘은 제법 강렬해서, 아주 둔감하지 않은 바에야 일반인도 감지할 수가 있었다.

더구나 몸의 골격이 변화하여 외모가 이상적으로 변하는 경우가 많았다. 얼굴과 몸의 좌우 균형이 완벽하게 맞아지고 피부가 아기처럼 고와지니, 어지간해서는 미남 미녀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다.

무협 소설에서 흔히 나오는 환골탈태를 한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이능력자가 여기까진 왜 온 것일까?

그 이유가 궁금했지만 지금 생각에 잠기진 않았다. 언제나 하던 대로, 환자의 병력부터 조사했다.

“안녕하세요. 신아영 님이시죠?”

“네, 맞아요.”

신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혁은 차트 뒤쪽에 끼워진 연장진료 기록지를 확인했다. 대략적인 증상과 발병 일자, 그리고 과거력이 쓰여 있었다.

“왼쪽 얼굴이 마비되셨고…… 오늘 아침에 갑자기 그러셨다고요? 귀 뒤가 아프거나 하지는 않으세요?”

“네. 그러진 않아요. 마비만 됐어요.”

“최근에 감기 걸리거나 하신 적은 없으세요? 대상포진 앓으신 적도 없고요?”

“네, 없어요.”

시혁은 꼼꼼하게 이것저것을 물어보았다.

젊은 환자라 그런지 아주 건강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병원에 입원한 적이 꽤 많았다.

최근 3년 동안에만 10번이 넘게 입원한 것이다.

시혁은 고개를 갸웃했다.

“병원에 그렇게 많이 입원하셨어요? 무슨 일로 입원하신 겁니까?”

“아…… 그런 것까지 말해야 하나요?”

신아영이 문득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시혁은 힘주어 머리를 끄덕였다.

“네. 그래야 저희가 환자분 상태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으니까요. 정확히 말씀해주셔야 약을 쓸 때도, 침 치료를 할 때도 정확하게 할 수 있습니다.”

“알았어요. 다른 건 아니고, 부상 때문에 입원하곤 했어요.”

“부상이요? 음……”

시혁은 단번에 그 이유를 눈치 챘다.

조심스럽게 신아영에게 질문했다.

“혹시, 강화 계열 이능력자신가요?”

신아영이 한숨을 폭 쉬었다.

“맞아요.”

“이능력자는 면역력이 강해서 병에 잘 안 걸린다고 들었습니다만……”

그 중에서도 강화 계열은 더 그러했다.

괴수들과 전면에서 싸우는 이들이니까. 화염을 뒤집어써도 멀쩡하고, 독을 마셔도 가래침 몇 번 뱉으면 괜찮아진다. 그런 이들이 벨 마비에 걸리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웠다.

신아영이 얼굴을 찌푸렸다.

“저도 모르겠어요. 각성한 다음에는 이런 적이 없었는데, 오늘 갑자기 그러더라고요.”

“마비되고 다른 치료 같은 건 안 받으셨어요?”

“네. 집에 있다가 여기부터 왔어요.”

“흠, 동료 분들에게 이능 치료를 받으신 적도 없고요? 치유 계열 이능력자도 있는 것 같은데……”

시혁이 보호자들 중 한 남자를 살폈다.

머리가 곱슬머리에, 눈꼬리가 쳐져 꼭 강아지처럼 생긴 남자였다. 몸이 아담하고 여리여리해서, 여성들의 보호 본능을 일으키게 생겼다.

그 남자에게서, 익숙한 느낌이 전해졌다.

따스하면서 부드러운 파동.

생명의 마나.

아르거스에서 시혁이 마구 주물렀던 그것이, 남자의 몸에서 약하게 발산되고 있었다.

남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라, 어떻게 아셨어요? 맞습니다. 전 치유 계열 이능력자입니다. 한세훈이라고 합니다.”

“예전에 이능력자를 본 적이 좀 있어서요. 치유 계열 이능력자시면 이능 치료를 하진 않으셨습니까? 제가 알기로 안면 마비는 뇌졸중이 아닌 한 간단히 치료할 수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아, 그게 제가 손을 대자마자 아영이 얼굴이 더 심하게  마비되어서요. 제가 뭔가 실수를 한 것 같습니다. 여기가 구안와사를 잘 본다고 들어서 얼른 데리고 왔죠.”

“이능 치료를 시도했는데 실패했다는 겁니까?”

“네. 그게 뭐 안 좋은 건가요?”

한세훈은 눈만 끔뻑거렸다.

뭐가 문제냐는 그 태도에, 시혁이 오히려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이능 치료가 통하지 않는다?

그것만큼 두려운 소리가 없었다. 일반적인 질병이라면, 무턱대고 치유 이능을 발현하기만 해도 백이면 백 모두 좋아지기 때문이다.

이능 치료에 반응하지 않거나, 되레 악화된다면 딱 한 가지를 의심해야 한다.

괴수 질병.

시혁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신아영 님, 혹시 가장 최근에 괴수 사냥을 하신 게 언제입니까?”

“2주 전에 거대 괴수목을 잡은 게 마지막인데요, 왜 그러세요?”

“안면 마비를 유발하는 질환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알려진 질환 모두 이능으로 치료가 됩니다. 무슨 병인지 몰라도 상관이 없지요. 이능만 발휘하면 되니까요. 그런데 이능 치료를 하고 더 악화된 건 이상한 일입니다.”

“어…… 사냥하고 했던 검사에서는 이상이 없다고 나왔었어요. 방역도 받을 건 다 받았고요. 혹시 세훈이 쟤가 실수한 게 아닐까요? 쟨 질병 치료에는 정말 재주가 없거든요. 외상 치료는 진짜 잘하는데.”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어쨌든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것 같습니다.”

시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괴수 질병을 아예 배제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주치의가 알아서 할 일이었다. 인턴인 시혁의 권한은 한계가 뚜렷했다.

일단 들은 대로 상세하게 차트를 작성했다. 신아영에게 환자복으로 갈아입을 것을 권한 후,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보호자 중 키가 후리후리하게 큰 남자가 따라 나왔다.

“선생님. 잠시 얘기 좀 할 수 있겠습니까?”

“아, 네. 그러시죠.”

중앙 계단 앞 휴게실로 이동했다. 601호에서는 거리가 꽤 머니 둘의 이야기를 신아영이 듣지는 못할 것이다.

남자는 스스로를 누리 공격대의 대장, 강찬이라고 소개했다.

한 자루 총을 이용, 원거리 저격이 장기라던가.

주위를 한 번 살피더니,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우리 아영이, 나을 수는 있습니까? 저 상태로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죠?”

시혁은 아는 대로 대답했다.

“일단 무슨 병인지 아는 게 중요합니다. 단순한 안면 마비는 예후가 좋아요. 아무 치료를 하지 않아도 10명 중 7명은 완전히 회복되니까요. 하지만 안면 신경이 얼마나 마비 됐는지에 따라 차이도 심하고, 괴수 질병의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는 상황입니다. 일단은 지켜보면서 치료를 해보는 게 좋겠습니다.”

“휴, 알겠습니다. 혹시 저희가 할 일은 없을까요? 세훈이가 정국대학교 출신이라 서울에 실피드 병원이랑 업무 협약을 맺고 있는데, 전문적인 이능 치료나 검사가 필요하면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그 문제는 제가 뭐라고 말씀드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 차후에 주치의 선생님과 의논해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아, 주치의 선생님이요?”

“네. 전 인턴입니다. 주치의 선생님도 곧 보실 수 있을 겁니다.”

강찬은 고개를 갸웃했다.

단지 인턴이라고 하기엔 시혁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십 년을 임상에 종사한 이들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몸짓 하나하나에서 여유와 자신감이 느껴졌다. 임상에 나선지 불과 몇 개월 지났을 인턴에게선 느낄 수가 없는 것들이었다.

강찬은 더블 A급 이능력자다.

A급 이능력자이되, 두 개의 이능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하나는 저격.

또 하나는 통찰

이건 괴수에게도 유용하게 쓰였지만 사회생활을 할 때도 유용하게 쓰였다. 상대의 능력과 의도를 어느 정도 읽어낼 수 있었으니까.

시혁을 처음 봤을 때, 강찬은 최소한 꽤 높은 년차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인턴이라고 하니, 속으로 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시혁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병실에 들어가서 쉬고 계세요. 생각보다 별 일 아닐 수도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진  마시고요.”

“알겠습니다. 주치의 선생님은 언제 오실까요?”

“글쎄요. 저도 확실히는 모르겠습니다. 한 번 여쭤보고 알려드리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시혁은 몸을 일으켰다.

병동 전화로 주치의 조희영에게 보고를 했다.

보고 내용을 다 들은 조희영의 목소리가 심각해졌다.

[괴수 질병이 의심된다고요?]

< 이능력자 -1- > 끝

ⓒ 산호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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