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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수 세계의 한의사-16화 (16/250)

< 회혼순천탕 -2- >

시혁은 저장해 둔 약재와 식량의 양을 가늠해 보았다.

보름 분량 정도는 있었다. 풍족하진 않아도 어떻게든 버티는 것은 가능했다.

“혹시 시체 제조자가 저흴 사냥하려고 하지는 않을까요?”

그렇게 묻자, 생존자들이 고개를 저었다.

“이미 고향 세계로 돌아갔을 겁니다. 다른 소환자들도 마찬가지고요. 성역에 편입된 후에야 원주민들이 들어오니까, 조금은 시간이 있습니다.”

“하긴 저 별까지 가는데 시간이 좀 걸릴 테니까요.”

“그렇지요.”

자연히 시혁과 생존자들에게 약간의 여유가 생겼다.

하지만 다들 무척 고생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세계에 꽉꽉 들어찬 죽음의 마나 탓이었다.

우선 먹을 것을 구할 수가 없다. 물을 마실 때도 반드시 정화해서 마셔야 했다. 게다가 갖가지 질환이 발생하여 그들을 괴롭혔다.

“쿨럭! 쿨럭!”

“허억, 허억, 허억.”

신음소리가 유령 표범 동굴 주변에 흘러넘쳤다.

시혁도 몇 가지 증상으로 고통 받고 있었다.

안면마비, 요통, 손가락 관절염, 소화 장애, 배뇨 장애, 변비, 만성 비염 같은 것들.

그나마 시혁은 상태가 나았다. 다른 생존자들은 훨씬 더 심각했다. 페렴, 간경화, 신부전, 협심증, 뇌졸중, 췌장암, 극심한 골다공증으로 인한 복합 골절 등 심각한 병을 달고 있었다.

“하아!”

시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까지 포함해도 거동이 가능한 이가 겨우 두셋에 불과하다. 이 정도로는 식량과 식수를 구하는 것도 힘들었다.

그러나 이런 건 아무래도 좋다.

생존자들이 문제였다.

방금도 협심증 환자가 발작을 일으켰다. 협착이 진행되던 심장 혈관 중 하나가 막혀 심근경색이 발생한 것이다.

심폐소생술을 해서 겨우 살렸다. 시혁이 가진 생명의 마나가 흘러들어 막힌 혈관이 뚫리긴 했는데, 협착이 너무 심해 조만간 또 막힐 성 싶었다.

지구였다면 스텐트 시술로 재발을 막았을 텐데, 참 답답한 노릇이었다.

하다못해 시혁의 계급이 높았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터.

하지만 지금 시혁은 수습 치료사에 불과하고, 타인의 몸을 마나로 진찰하는 것과 치료하는 것 모두 한계가 있었다.

시혁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자, 방금 살려놓은 생존자가 천천히 시혁의 손을 잡았다.

“치료사님. 왜 그렇게 표정이 안 좋으십니까?”

얼핏 표정 관리를 못했나 보다.

시혁은 애써 웃어 보였다.

얼굴 절반이 마비된 탓에 한쪽 얼굴은 웃고 한쪽 얼굴은 무표정한, 참 기괴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걱정 마세요.”

생존자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래서 더 마음이 아팠다.

건장한 체구의 중장보병. 예전 같았으면 돌이라도 으깼을 텐데, 지금은 어린아이가 살짝 감싸는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때만큼 의학 지식이 일천한 게 한스러울 때가 없었다.

비록 아르거스에서의 계급이 낮아도, 의학 지식이 많으면 분명 도움이 됐을 텐데……

지금 시혁이 할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였다.

생명 연장.

불사의 역병에 걸린 동안 죽으면 만사휴의다. 현재 불사의 역병이 매우 약해졌다는 것에 기대를 거는 수밖에 없었다.

힘들었다.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자기 혼자 거동을 하던 생존자들까지 모두 쓰러졌기 때문이다. 자연히 시혁에게 가해지는 부담이 컸다. 간병과 치료를 혼자 해야 하니 몸이 세 개여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시혁이 건강한 것도 아니었다. 손의 관절염이 심해져 침을 놓을 때마다 극심한 고통을 느꼈다.

시체 제조자가 승리하고 2주가 지났을 때, 시혁은 결단을 내렸다.

생존자들 앞에서 말했다.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피치 못할 선택이다.

식량, 식수 모두 떨어졌다. 약도 오늘 먹을 분량밖에 없었다. 불사의 역병이 충분히 약해지기도 했거니와, 이런 이유 때문에라도 오늘 끝을 내야 했다.

생존자들은 푸석푸석한 얼굴로 시혁을 올려다보았다.

다들 병이 말기까지 진행되어 있었다. 지구 같았으면 의사가 보호자들을 불러놓고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을 지경이었다.

저격수 하나가 앙상하게 마른 손을 들어 자기 가슴을 문질렀다.

“흐흐흐, 드디어 결판이 나겠습니다. 이놈이 끝장나든, 제가 끝장나든 간에요.”

“참 길었습니다.”

“치료사님. 고생하셨습니다.”

“인사는 나중에 다 나은 다음 하지요. 시작하겠습니다.”

시혁이 가장 먼저 한 저격수를 택했다.

폐렴으로 생사의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긴 상태였다. 전신 상태가 너무 나빠서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자연히 이 저격수를 첫 시술 대상으로 삼았다.

약을 먹였다.

태반은 흘렸다. 중간에 한 번 약이 기도로 넘어갔는지 격렬하게 기침을 해서, 시간도 꽤 많이 소요되었다.

시혁은 신중하게 저격수의 상태를 살폈다.

약 기운이 모두 흡수된 것을 확인하고, 약을 먹이면서 놨던 침을 모두 뽑았다.

침을 소환했다.

지금까지 썼던 호침이 아니다.

장침.

길이 약 9센티미터에, 굵기도 더 두꺼웠다.

그걸 신중하게 박았다.

임독맥과 12경락, 361개 경혈은 무시했다. 철저하게 해부학적 구조에 입각하여 장침을 밀어 넣었다. 갈비뼈와 갈비뼈 사이를 통과하여, 심장 근처까지 닿게 거의 10여 개를 찌른 다음에야 멈췄다.

시혁은 잠깐 심호흡을 했다.

이번에는 뜸을 소환했다. 병원에서 흔히 쓰던 간접구였다. 그걸 장침 끝에 꽂은 뒤,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온침(溫鍼).

뜸의 열기를 체내에 직접 전달할 수 있었다. 이 경우에는 시혁이 가진 생명의 마나가 불의 마나와 섞여 불사의 역병을 직접 타격한다.

예전 같았으면 불사의 역병이 그걸 받아들여 죽음의 마나와 얼음의 마나를 생산했을 것이다. 지금은 많이 약화되어서, 이것으로 충분히 소멸시킬 거라고 생각했다.

시혁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어디까지나 시혁이 계산한 바에 의하면 그렇다는 얘기였다. 불사의 역병이 되레 온침으로 전달하는 마나를 잡아먹을 가능성도 있었다.

뜸이 타올랐다.

쑥 타는 냄새와 함께, 두 종류의 마나가 뒤섞이며 침을 통해 전달되었다.

시혁은 스스로의 감각을 최대한으로 열었다.

환자의 심장 주변, 얼룩처럼 남아 있는 검은 기운이 보였다. 그곳을 향해 녹색과 적색의 빛 무리가 춤을 추며 돌진했다.

세 부류의 기운이 정면으로 부딪쳤다.

처음에는 비등비등했다. 불사의 역병은 생명을 죽음으로, 정화를 오염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오랜 기간 그 힘이 약해진 까닭에, 한 번에 변환하는 힘에 한계가 있었다.

10여 개의 장침이 동시에 열을 뿜어내자 밀리기 시작했다.

시혁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장침 모두에 커다랗게 쑥뜸을 뭉쳤다. 라이터로 불을 붙이자, 간접구가 타는 것보다 훨씬 더 빠르게 타올랐다. 자연히 불의 마나가 몇 배는 강하게 투사되었다.

창을 든 기사들이 사방에서 돌진하는 것과 비슷했다.

불의 창이 불사의 역병을 난타했다.

어두운 기운이 한 차례 몸을 뒤틀었다. 그와 함께 불의 마나에 잡아먹히더니, 그 존재를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으로 끝.

1달 동안 시혁을 그렇게 괴롭혔던 병의 최후치곤 참 허무했다.

“커헉! 커허억!”

그러나 환자에게는 부담이 많이 가는 치료였다.

생각해 보라.

심장 근처까지 침만 꽂아도 위험한데, 뜸으로 가열하기까지 하면 어떻게 되겠나.

그것도 건강한 사람도 아니고, 중증 페렴 환자에게.

저격수가 숨이 넘어갈 듯 기침을 했다. 눈을 까뒤집기까지 했는데, 시혁은 물론 다른 생존자들 모두 엉뚱하게도 저격수를 축하해주고 있었다.

“축하합니다!”

“이겨냈네요!”

“다음에 언제 만날지 모르지만, 그때 또 잘 부탁합니다!”

저격수도 눈을 떴다.

비쩍 마른 몸이 천천히 투명해지고 있었다.

자신의 세계로 귀환하는 것이다.

저격수도 그것을 확인했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미소를 짓더니, 시혁에게 손을 내밀었다.

“치료사님, 감사합니다. 치료사님 덕에 괴물이 되지 않고 제 집으로 돌아갑니다.”

“별 말씀을요. 지금까지 잘 견디셔서 가능했던 일이죠. 나중에 또 같은 진영으로 만나면 모른 척 하지 마세요.”

“당연하지요. 언제든 이 은혜를 갚겠습니다.”

“에이, 은혜까지야……”

저격수는 만면에 웃음을 지은 채 눈을 감았다.

투명해지며 사라지는 저격수가 누워 있던 자리에, 환상처럼 흰색으로 빛나는 가루가 흩날렸다.

인간인 채 죽은 것이다. 만약 언데드가 되었다면 질척한 검은색의 어둠이 빛 대신 남았겠지.

시혁은 다음 생존자 치료를 서둘렀다.

방법은 같았다.

약을 먼저 먹인다. 장침을 심장 근처까지 찌른다. 온침을 시술한 뒤 추이를 지켜보다가, 결정적인 순간 뜸을 더 강하게 뜬다.

모두 성공적이었다. 시혁은 두 명을 더 집으로 돌려보냈다. 이쯤 되자 시혁도 체력이 바닥나 버렸다.

약만 남아 있어도 며칠에 걸쳐 생존자들을 귀환시켰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남은 약간의 약이 마지막이었다. 오늘 모든 것을 끝내야 했다.

마침내 마지막 생존자의 치료까지 끝냈다.

마지막 생존자가 눈물을 글썽였다.

“치료사님.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합니까? 이번 일은 절대 잊지 못할 겁니다.”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네요. 조심히 돌아가시고, 다음에도 또 함께 할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 치료사님도 치료 잘 하시고, 건강히 돌아가시길 빕니다.”

생존자는 고통 속에서도 웃음을 지었다.

금방 육신이 투명하게 변했다. 빛과 함께 사라져, 자신의 세계로 돌아갔다.

뿌듯하면서도 허탈한 느낌이 들었다.

1달 동안 복작복작했던 유령 표범 동굴이 텅 비었기 때문이리라. 내내 유지하고 있던 긴장감이 풀어진 것도 한 몫을 했다.

이제 시혁만 남았다.

잠시 휴식을 취했다. 손에 통증이 너무 심해서, 스스로 침을 놓고 뜸을 뜨자 통증이 좀 가라앉았다.

허리가 못 견디게 아팠다. 한쪽 다리 바깥쪽으로 땅기는 느낌이 드는 게, 그저 근육통이 아니라 추간판 탈출증으로 변화한 듯했다.

얼마 동안 누워 있다가, 짧은 한숨을 토했다.

“시작해볼까……”

이제 시혁도 이 세계를 떠날 때가 된 것이다.

약을 복용한 후, 스스로의 가슴에 침을 박았다.

아주 화끈했다.

아무리 가늘다고는 해도 침은 바늘의 일종이다. 그걸 가슴에 침체가 다 들어갈 정도로 찌르는데 아프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했다.

하지만 이것은 약과.

진짜는 시작도 하지 않았다.

시혁은 심호흡을 하고 침병에 꽂은 뜸에 불을 붙였다.

“크으윽!”

침이 달궈지자, 맹렬한 열기가 가슴을 콕콕 찔렀다.

혼백이 달아날 정도로 아팠지만 견뎌냈다. 적당한 시점에 뜸을 더 붙여야 했기 때문이다.

눈에서 불똥을 튀기며 스스로의 육체를 들여다보았다.

마나의 움직임이 선명하게 시혁의 감각에 잡혔다.

다른 생존자들을 치료할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마나의 질과 양, 속성, 움직임을 낱낱이 파악하는 게 가능했다.

거기에 더하여 이미 다섯 건의 임상 경험도 있었다. 시혁이 정신을 잃지만 않는다면, 스스로의 치료에 실패할 가능성 자체가 없었다.

과연 그러했다.

치료를 시작하고 약 10분 후, 시혁은 불사의 역병을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시혁의 가슴에 새겨져 있던 해골 문양이 스르륵 사라졌다.

몸이 가벼워지며, 유리처럼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끝났구나……”

시혁은 새삼스럽게 유령 표범 동굴 안을 둘러보았다.

지난 1달 간 고생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밀려왔다.

생존자가 심장 마비를 일으켜 심폐소생술을 하던 때, 폐렴으로 열이 들끓어 잠도 자지 못하고 생존자에게 침을 놓던 때, 다발성 골절로 극심한 통증을 호소하는 것을 뜸으로 진정시켰을 때 등등.

힘들고 고된 나날이었다.

그만큼 보람도 있었다.

한의사로서, 한 명의 의료인으로서 이토록 삶과 죽음의 경계에 가까이 가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

사실 시혁은 지금까지 한의사라는 직업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다.

대학교를 선택했을 때도 그랬다. 환자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한의학을 발전시켜 인류 전체의 건강 증진을 도모하겠다는 숭고한 이유는 시혁의 머릿속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잘 먹고 잘 살려고 간 거였다.

의대를 갈 성적도 되었다.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피를 보기 싫어서였다.

자연히 배움에 열의가 없었고, 예과 2학년 때 한 번 유급도 했다. 병원 수련을 받은 것은 어디까지나 이대로 임상에 나가기가 두려워서 그랬던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생존자들을 살리고,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아등바등 했던 1달.

그 후의 시혁은, 그 전의 시혁과는 확연히 달랐다.

더 이상 햇병아리가 아니다.

어엿한 한 명의 한의사다.

어쩌면, 삶과 죽음을 대하는데 있어 누구보다도 진지한 태도를 가지고 있을 지도 몰랐다.

많은 것을 느끼고, 경험했으니까.

비로소 알 껍질을 깨고 나온 것이다.

시혁도 그것을 느꼈다.

자신의 속에 있던 뭔가가 변화했다.

변화?

아니, 탄생이라고 하는 게 맞겠다.

보석과도 같은 영롱한 어떤 것이 시혁의 마음속에 자리를 잡았다. 어느 순간 태어나, 찬연한 빛을 뿌렸다.

그것을 느끼며, 시혁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눈을 떴을 때, 익숙한 장소로 돌아왔음을 깨달았다.

인턴 숙소.

1달 동안 그리워하고 또 그리워했던 그곳이었다.

< 회혼순천탕 -2- > 끝

ⓒ 산호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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