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사의 역병 -2- >
어떻게 한다?
시혁은 자신의 의견을 냈다.
“일단 남쪽으로 이동하지요. 여기 죽치고 있어 봐야 죽도 밥도 안 됩니다. 칠흑 처형인의 동태도 살펴야 하니, 백색 군주의 영역 가까이 가는 게 좋겠습니다.”
“아.”
“칠흑 처형인……”
“설마 이대로 전쟁이 끝나는 것은 아니겠지?”
다들 두려움에 떨었다.
후방으로 침투한 50레벨 영웅은 가공할 만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 50 명의 병사들이 그 뒤를 받치면 성 몇 개쯤은 가볍게 박살낸다.
원래는 백색 군주가 하려고 했던 짓.
지금은 역으로 당하고 말았다. 설마하니 벌써 50레벨 영웅이 출현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으니까.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칼날 산의 정상에 선 순간, 시혁은 믿기 힘든 광경을 목격했다.
“맙소사……”
세상이 불타고 있었다.
백색 군주의 영역 곳곳에서 시꺼먼 연기가 솟구쳤다. 요소요소를 틀어막은 성들이 무너지고, 누군가 불을 지른 것이다.
저격수가 눈을 가늘게 뜨고 자세히 보았다.
“젠장. 칠흑 처형인이야. 이미 어둠의 숲을 빠져나가서 분탕질을 치는 것 같은데?”
“벌써요? 이제 겨우 몇 시간 지나지도 않았습니다만.”
“이적 아니면 마법서를 썼겠지. 진군 속도를 올려주는 건 흔하니까.”
생존자들은 멍하니 남쪽만 바라보았다.
또 성이 박살났나 보다. 검은 연기가 한 줄기 올라왔다.
게다가 멀리 동쪽에서도 대규모의 군대가 이동하는 게 보였다. 칠흑 처형인이 후방을 교란하는 것과 동시에, 정면으로 슬슬 압박을 넣는 것이다.
총력전이다.
시혁과 생존자들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이미 백색 군주는 패배했다. 앞으로 벌어질 전투는 정해진 결과를 확인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빌어먹을!”
중장보병이 자신의 방패를 내팽개쳤다.
의미가 없었다.
생존자들이 어둠의 숲을 지나 백색 군주의 영역에 도착할 때쯤이면 끝이 났거나 최종 전투가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불사의 역병을 치료해 줄 리가 없다.
성직자 영웅이 소환되었어도, 성자가 존재해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결국 불사의 역병에 희생되어 괴물이 될 운명이었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중장보병이 시혁에게 매달렸다.
“이보게. 좋은 수가 없나? 이제 자네 밖에 희망이 없어.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우리 모두 괴물이 되고 말아!”
“잠시만, 잠시만 시간을 주세요.”
시혁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사실 공터에서 출발할 때부터 계속 방법을 찾고 있었다. 먼저 남하한 칠흑 처형인이 자신들이 쉽게 백색 군주의 영역으로 돌아가게 내버려둘 거라고 보긴 힘들었으니까.
그 결과 한 가지를 떠올렸다.
한의학 치료 방법 중 하나.
약.
일침(一鍼) 이구(二灸) 삼약(三藥)이라는 말이 있지 않나.
이 말은 다양한 뜻으로 해석할 수가 있지만, 한의학 치료 방법을 크게 정리한 것으로 봐도 무방했다.
침과 뜸을 썼으니 약을 쓸 차례.
더 정확히 말하면 세 개의 방법을 총동원하여 스스로의 몸을 치료할 때였다.
“모두 가슴 좀 보여주세요.”
일단 각자의 상태를 확인했다.
불사의 역병은 멈춰 있었다. 그러나 가슴 중앙이 계속 짙어지는 게, 얼마 후면 다시 활동을 재개할 듯했다.
시혁은 생존자들을 보고 말했다.
“지금부터 숲에 들어가서 약초를 캐오세요.”
“약초를?”
“네. 독초도 상관없습니다. 눈에 띄는 대로 닥치는 대로 가져오세요. 버섯, 이끼, 풀, 나무껍질, 나무 열매든 뭐든 전부 다요. 혹시 짐승들 만나면 사냥해서 가져오시고요.”
“알겠소.”
“잠시만 기다리시오.”
생존자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시혁은 자리에 앉아 숨을 골랐다.
자신만만한 태도로 지시를 내렸지만, 속으로는 굉장히 긴장하고 있었다.
생존자들이 숲의 산물을 가져오면 뭐하나.
시혁이 언뜻 둘러보기에도 아르거스의 식생은 지구의 것과 달랐다. 한의학에서 다루는 인삼이나 부자, 감초 같은 대부분의 약재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사군자탕? 우귀음? 소속명탕?
구성 자체가 불가능하다. 사실 이런 약을 먹는다고 해서 불사의 역병이 낫는다고 보기는 어렵고.
시혁은 눈을 부릅뜨고 자신의 가슴을 노려보았다.
불사의 역병, 그 자체에 대해 통찰했다.
10레벨이 되어서일까. 더 민감하게 느낄 수가 있었다. 흡사 제 3의 눈이 열린 것처럼 마나의 움직임이, 그 성질이 확연히 느껴졌다.
불사의 역병을 이루는 것의 대부분은 죽음의 마나였다.
차갑고, 날카로우며 본능적인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한 가지 특성이 삽입되어 근간을 이루었다.
원래대로라면 죽음의 마나와 마주한 생명은 그 즉시 사멸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이 특성 때문에 사멸하는 대신 죽음을 거부하는 종족, 언데드로 되살아난다.
‘어쨌든 대부분은 죽음의 마나라 이거지. 숙살지기(肅殺之氣)가 금(金)에 속하니까, 화극금(火克金)이라고 했으니 불에 약한 것도 당연한 거구나.’
그렇다면 처방할 약도 뜨거운 성질을 갖는 게 좋겠지.
일단 그렇게 생각하고 더욱 자세히 살폈다.
한 가지 사실을 더 알아냈다.
불사의 역병은 그 뿌리가 시혁의 심장 주위에 맺혀 있었다. 그것도 굉장히 옹골차서, 흡사 돌이 굳은 것을 보는 듯했다. 거기서부터 가지처럼 죽음의 마나가 뻗어 나왔다.
거기까지 파악하자, 비로소 불사의 역병을 규정짓는 특성이 어떤 것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거스름(逆)이다.
뒤집힘(反)이다.
음과 양을 뒤집고, 생명과 죽음을 바꾸어 버린다. 생명의 마나로 생존하는 게 아니라, 죽음의 마나로 생존하게 만드는 것이다.
자연히 그 끝은 언데드로 향한다. 생전의 힘을 방향성만 바꾼 채 되살아난다.
역병의 정체를 파악한 후, 시혁은 기가 질렸다.
이런 걸 어떻게 치료한단 말인가?
당초 생각처럼 뜨거운 성질을 가진 약을 처방해도 헛되다. 죽음의 마나를 태울 수는 있어도, 이 특성을 없애기는 불가능했다. 나중에는 그렇게 들이부은 약의 성질을 뒤집어 더욱 차가워질 것이다.
시혁이 한숨만 내쉴 때, 생존자들이 저마다 채집한 것을 가지고 도착했다.
“도착했소! 뭐가 약초인지 몰라서 그냥 다 가져왔지!”
“나는 곰과 늑대를 잡아왔소!”
“이곳 산에는 희한한 목초가 많습니다. 그 중 영성을 가진 것만 가져왔습니다.”
시혁은 생존자들이 가져온 것들을 확인했다.
다행히 지식 열람이 가능했다. 주시하고 있으면 이름을 알고, 곧 성질과 맛, 효능 및 작용 부위를 아는 식이었다.
대부분은 쓸모가 없었다. 약초도 독초도 아닌, 잡초에 불과했으니까.
몇 가지만 챙겼다.
“안 되겠습니다. 제가 직접 찾아야겠습니다.”
“차라리 그게 좋겠소. 우리는 봐도 모르겠으니까.”
생존자들을 이끌고 인근의 숲으로 들어갔다.
약으로 쓸 수 있는 것은 모조리 채취를 했다. 종류를 가리지 않았다. 다만 성질 별로 나눠 놓았다. 주로 물, 땅, 바람, 생명 속성의 마나를 가진 약초가 많았다.
시혁은 적당한 공간을 찾았다. 모은 약초를 바닥에 늘어놓은 뒤 고민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하나다.
불사의 역병이 가진 특성을 어떻게 제거할 것이냐?
한참을 고민하고 있는데, 생존자들이 시혁을 불렀다.
“이보게, 이것 좀 보게.”
그러더니 윗도리를 젖혀 자기들 가슴을 보여주었다.
불사의 역병이 또다시 진행되고 있었다. 급히 확인해보니, 시혁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누우세요.”
빠르게 뜸을 떴다.
그런데 아까 전과 비교하여 효과가 좋지 않았다.
어느새 뜸에 적응을 한 것이다.
결국 9장을 연달아 뜬 다음에야 불사의 역병을 억제할 수 있었다.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라, 시혁은 물론 생존자들 모두가 기운이 빠졌다.
“우리 나을 순 있을까요?”
누군가 그렇게 묻자, 시혁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아야지요. 반드시 나을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시혁은 불사의 역병을 다시 한 번 살폈다.
역병의 근간은 심장 주위를 한 마리 뱀처럼 감싸고 있었다. 매우 딱딱하게 굳어 있긴 하지만, 형체가 있냐면 그러지는 않았다. 어디까지나 무형, 순수한 힘으로 이루어졌다.
힘?
잠깐만.
이거 이상하다.
불사의 역병이 가진 특성이 거스름이며 뒤집힘이라는 사실은 알겠다. 그렇다면 시혁의 몸을 공격하는 죽음의 마나는 어디서 나왔단 말이냐.
저번에 봤던 소각의 저주는 불, 그 자체였다. 따라서 인체에 있는 생명의 마나를 양분 삼아 덩치를 키웠다.
반면 불사의 역병에는 따로 죽음의 마나를 생산하는 게 보이지 않았다. 시혁이 언데드도 아니고, 어떻게 죽음의 마나를 보충하는 것일까.
답은 간단했다.
심장이다.
심장은 일종의 펌프다. 산소와 영양을 실은 혈액을 전신에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 아르거스 식으로 말하면, 생명의 마나를 몸에 뿌리는 셈이다.
생명의 마나를 거꾸로 뒤집으면 어떻게 될까.
바로 죽음의 마나가 된다. 불사의 역병은, 피해자의 생명력을 이용해 피해자를 나락에 떨어뜨리는 사악한 질병이었던 것이다.
시혁의 눈이 번쩍 빛났다.
드디어 실마리를 잡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독제독, 이열치열이라는 말이 있다.
만약 심장 주위의 기운에 생명의 마나가 아닌 죽음의 마나를 공급하면 어떻게 될까?
자연히 생명의 마나가 생성된다.
그렇게 생성된 생명의 마나를 다시 심장 주위의 기운에 공급한다면?
거대한 순환이 완성된다.
심장 주위의 기운을 중심으로 하여, 생명의 마나와 죽음의 마나가 그리는 하나의 원이.
적당한 시점에 죽음의 마나만 공급해주면 끊어지지도 않겠지.
불사의 역병이라고 해서 영원하지는 않다. 언젠가는 소멸하게 된다. 단지 지금까지는 역병이 소멸하기 전에 피해자를 언데드로 만들었을 뿐이다.
서로 상반되는 속성의 마나를 번갈아 변환하기가 어디 쉽겠나. 부담이 될 테고, 수명이 그만큼 짧아질 것이다.
시혁은 약초들을 살펴보았다.
안타깝게도, 죽음의 마나가 담긴 약초는 없었다.
생존자들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죽음의 마나를 가진 약초?”
“만드라고라 같은 걸 찾아봐야 하나?”
“맞아. 아까 어둠의 숲에서 유령 표범을 잡은 동굴이 있었잖아? 거기에 시체 버섯들이 자생하는 걸 봤어. 그거라면 분명히 죽음의 마나를 갖고 있을 거야.”
“유령 표범 동굴이라면 꽤 먼 곳이오. 서둘러야겠소.”
다음 발작은 뜸만으로는 억제하기 힘들 가능성이 컸다. 그 전에 시체 버섯을 채취하고, 탕약을 지어야 한다.
산을 내려가 어둠의 숲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유령 표범 동굴은 산에서 가까운 곳에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짓무른 회백색의 버섯이 곳곳에 자생하고 있는데, 죽음의 마나를 충분히 머금고 있었다.
시혁은 시체 버섯만이 아니라 그 주위에 있던 황토색 이끼도 채취했다. 특이하게도 땅의 마나와 죽음의 마나를 골고루 가진 이끼였는데, 이름이 무덤 이끼라고 했다.
가장 중심이 되는 군약(君藥)은 시체 버섯. 그리고 보조적인 역할을 할 신약(臣藥)이 무덤 이끼였다.
이 두 가지만 넣으면 맹독이 된다. 따라서 몇 가지 약을 더 넣었다.
인체를 보호할 황금 풀의 뿌리, 심장을 보호할 홍옥화의 꽃, 약 기운을 심장 주변으로 인도할 핏빛 덩굴의 줄기, 시체 버섯과 무덤 이끼의 독을 중화할 달빛 장미의 가시.
총 여섯 가지 약재.
시체 버섯과 무덤 이끼는 약재가 노래질 정도로 볶았다. 독성이 강해서 술에 볶을까 생각도 했지만 그만 두었다. 그 독성, 즉 죽음의 마나가 처방의 핵심이었으니까.
다른 것들은 더 오래 볶았다. 황금 풀의 뿌리는 소화기와 비뇨기, 생식기에 잘 작용하는 물건이라 아예 술과 함께 볶았다. 그러면 위로 올라가는 성질이 생겨서 심장과 폐를 보호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한의학에서 포제(炮製), 혹은 법제(法製)라고 부르는 행위.
이로써 준비가 끝났다.
신중하게 비율을 맞춘 후 달이기 시작했다.
잠시 후 역겨운 냄새가 흘러나왔다.
병원에서 맡던 냄새와는 확연히 달랐다. 그도 그럴 것이, 이건 결코 몸에 좋은 약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생존자들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 마셔도 괜찮소?”
“어째 독약 같소만……”
“그럼 제가 먼저 마실 테니 결과 보고 드세요.”
시혁은 침과 뜸, 약을 한쪽에 늘어놓았다.
적잖이 긴장이 되었다.
스스로의 인생이 지금 눈앞에 있는 약에 달려 있으니까.
만약 불사의 역병을 치료하지 못한다면?
생각하기도 싫었다.
손이 저절로 떨렸다. 입 안이 바싹바싹 탔다.
그러나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법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불사의 역병은 시혁의 몸을 갉아먹고 있으니까.
이제는 시작해야 할 때.
잠깐 숨을 골랐다.
마음을 굳게 먹고 손을 뻗었다.
치료를 시작했다.
< 불사의 역병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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