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웅 부대 -1- >
병원은 평화로웠다.
여전히 병상은 가득 차 있고, 때때로 응급 상황이 터졌지만 어쨌든 죽는 사람은 없었다.
시간은 잘도 갔다.
2월 20일에 인턴 업무 교육을 받고, 21일에 업무를 시작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4월 말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에 따라 인턴들의 관심은 온통 한곳으로 쏠렸다.
“유건정 선생님은 언제 온대?”
“오늘 소집 해제래. 하루 쉬고 23일 오후에 들어온다던데?”
“23일? 토요일이니까 딱 3일 남았네?”
“이제 진짜 얼마 안 남았구나……”
“그러게. 다음 주에는 입국식도 하니까 그거 하고 나면 많이 편해질 거야.”
“유건정 선생님은 좋겠다. 가장 힘든 때를 패스한 거잖아. 요즘은 환자도 적고 응급도 별로 없으니까 완전 할 만하지.”
“진짜. 되는 사람은 뭘 해도 된다더니……”
3월 말, 4월 초에는 병원의 130 병상이 꽉 차 있었다.
그러던 게 저번 주 금요일부터 썰물처럼 환자들이 빠져 나갔다. 하루에 열 명, 스무 명씩 마구 퇴원을 했다. 그 결과 지금은 90 병상 정도만 남았다.
자연히 업무 강도가 엄청나게 내려갔다. 잠도 잘 만큼 자고, 예전처럼 정신없이 뛰어다니지 않아도 되었다.
여기에 유건정이 합류하면 더 편해질 것이다. 어쩌면 낮잠 시간이 생길지도 몰랐다.
원래 이번 기수 인턴은 총 다섯 명.
다만 유건정이 공중보건의로 대체 복무 중이라 4월 말까지는 유건정을 제외한 네 명이서 버텨야 했다. 그래서 더 힘들었고, 그 날이 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렸다.
하지만 시혁은 유건정보다는 다른 것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오늘은 4월 20일 수요일이다. 내일은 21일이 된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간단하다.
시혁이 처음 아르거스에 갔던 게 2월 21일 새벽이다. 두 번째는 3월 22일 새벽이고.
2016년은 윤년이니, 정확히 30일 차이가 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3월 22일에서 30일 후면 언제냐.
2016년 4월 21일.
바로 내일 새벽이다.
시혁은 만반의 준비를 했다.
소형 적외선 카메라를 자신의 얼굴을 비추게끔 설치했다. 밤 동안 뭔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혹시 아르거스에서 도움이 될까 싶어 여러 종류의 침과 부항 세트, 뜸과 라이터, 약침 등을 껴안고 잠자리에 들었다.
과연 그러했다.
잠든 시혁의 시신경을 타고 흰 빛이 번쩍였다. 영혼이 그 빛에 이끌리며, 아득히 먼 공간을 뛰어넘었다.
세 번째.
이젠 익숙했다.
생경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지만, 시혁은 담담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중세 유럽식 건물들이 빼곡하게 서 있었다.
[집결하라.]
시혁은 본인의 의식 깊은 곳에서 어떤 명령이 부상하는 것을 느꼈다.
이곳 진영의 반신이겠지.
어디로 가야 할지는 자연스럽게 알아차렸다. 지금 시혁의 소환된 성의 구석에 위치한 연병장이었다.
저기는 왜?
일단 명령에 따랐다. 그러면서 스스로의 내면을 들여다보았다.
수습 치료사 1레벨. 2번의 아르거스 경험으로 신입 딱지를 뗀 것이다.
특기와 특화는 아직 미정이었다. 강화 사항은 없었고, 이번에는 백색 군주 진영에 속했다.
연무장에는 일단의 병사들이 모여 있었다.
많지는 않았다.
기껏해야 수십 명 정도.
대신 그 질이 대단히 높았다. 기본 병종인 보병이나 궁병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최소한 기병과 중장보병, 저격수로 이뤄져 있었다. 기사나 마법사도 종종 보였다.
시혁은 자세히 수를 세어 보았다.
기사 3명, 마법사 2명, 사제 2명, 기병 10명, 중장보병 20명. 저격수 10명, 치료사 2명.
도합 49명이었다. 보급품을 실은 커다란 마차 몇 대가 옆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콧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기사가 시혁을 보고 말했다.
“다 모였군. 잠시 기다리게. 곧 성광 질주, 앰버튼 경께서 나오실 걸세.”
성광 질주, 앰버튼 경?
시혁은 곧 자신의 의문을 풀 수 있었다.
잘생긴 백인 남자 하나가 연병장을 향해 다가왔기 때문이다.
푸른 갑옷을 챙겨 입었는데 갑옷에 상감된 신성한 문자가 흰 빛을 뿌렸다. 등에는 사각 방패를 짊어지고, 허리에는 황금색의 검을 찼다. 오른손으로 용의 머리를 형상화한 창을 들었는데, 창에서 쉬지 않고 흰 불꽃이 뿜어졌다.
아울러 남자의 몸에서 창창한 기파가 흘러나왔다. 그 기파가 몸을 훑고 지나가자, 시혁은 스스로의 몸이 가벼워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영웅만 가지고 있다는, 고유의 기태(氣態). 간단히 오오라(Aura)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병사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능란 계급 영웅 소환자라는 것이다.
일반 소환자의 계급이 여섯 단계로 구분되듯, 영웅 소환자의 계급은 일곱 단계로 구분 된다. 능란은 그 중 세 번째 계급이었다.
앰버튼 경은 49명의 병력들을 한 번 둘러보았다.
“나쁘지 않군. 대부분 수습 계급과 숙련 계급이라 좀 그렇긴 한데 10레벨에 도달하면 쓸 만하겠지.”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앰버튼 경!”
“암, 그래야지. 모두 날 따라오도록.”
앰버튼 경은 자신의 애마, 바투스의 등에 올랐다.
일반적인 말보다 2배는 덩치가 큰 말이었다. 전신에 은빛 마갑을 두른 탓에 위압감이 상당했다.
앰버튼 경은 바투스를 몰아 성문으로 다가갔다. 그 뒤를 시혁을 비롯한 병사들이 따라갔다.
시혁은 옆에 있는 치료사에게 물었다.
“우린 어디로 가는 겁니까?”
“음? 자네 영웅 부대에 속해 본 적이 없나?”
“영웅 부대라니요?”
“아르거스에 온지 얼마 안 됐나 보군. 저기 앰버튼 경이 영웅 소환자라는 건 알겠지? 영웅들은 반신의 군대 중 일부를 조직해서 부대로 만들 수가 있다네. 그렇게 만들어진 부대는 영웅의 영향을 받아 평소보다 더 강한 힘을 발휘하지. 우리는 앰버튼 경의 지휘에 따라 주변의 괴물들을 소탕하고, 레벨을 올린 다음 결정적인 전장에 투입될 걸세.”
시혁은 치료사의 말을 차분히 곱씹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갔다.
지구의 컴퓨터 게임에서도 흔히 도입되는 개념이었으니까. 적과 대치하는 한편 정예 부대를 키우고, 그걸 이용하여 전황을 뒤집는 것은 아주 흔했다.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그러려면 전문 이상 계급의 소환자를 키우는 게 좋지 않습니까? 1레벨에는 비슷해도 10레벨이 되면 차이가 크다고 알고 있는데요.”
“백색 군주의 휘하에 영웅이 한 명만 있는 건 아냐. 뭐, 그렇게만 알아두게.”
“아하.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치료사는 앰버튼 경의 눈치를 보며 말을 아꼈다.
백색 군주의 휘하에 능란 계급 이상의 영웅이 있는 모양이었다. 아마도 그 영웅에게 전문 계급 이상의 소환자를 몰아줬겠지. 시혁이라도 그렇게 했을 테니까.
앰버튼 경은 부대를 거느리고 들판을 가로질렀다.
그 끝에는 거대한 숲이 하나 보였다. 워낙 숲이 울창하게 우거져 햇볕이 제대로 들지 않았다. 덕분에 매우 음침했고, 실제로도 사악한 존재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이쪽으로.”
앰버튼 경은 자신의 부대를 숲에 난 길로 인도했다. 마차 하나가 겨우 지나갈 넓이였는데, 숲에 들어가자마자 묘한 감각이 시혁을 자극했다.
뭔가 자신을 주시하는 듯한 느낌.
당장이라도 길 양 옆의 나무들이 일어나 공격해 올 것 같았다.
부대의 마법사 중 하나가 떨떠름한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생명의 마나가 사악한 마나에 침식당해 괴상하게 변질되었습니다. 모두 주의하세요. 언제 타락한 나무 정령이나 변이한 짐승들이 튀어나올지 모릅니다.”
시혁도 긴장했다.
앰버튼 경의 부대에 속한 병종 중 가장 약한 존재가 치료사다. 기적적인 치료 능력을 발휘하지만, 공격력과 방어력 모두 약해빠졌으니까.
지능이 있는 존재라면 당연히 대열 중간의 치료사부터 공격할 터였다.
바로 지금처럼.
“크아앙!”
거대한 맹수들이 나무 사이에서 튀어나왔다.
늑대.
그러나 단순한 늑대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눈에는 혈광이 맺혀 있고, 몸의 근육이 기이할 정도로 크게 부풀어 있었기 때문이다. 등에는 고슴도치의 것과 같은 가시가 빼곡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헉!”
시혁은 깜짝 놀랐다.
반사적으로 손을 휘둘렀다. 침이 손에 나타나며, 공간을 가르고 늑대의 얼굴에 꽂혔다.
“크앙!”
너무 얕았다.
늑대는 얼굴에 침이 박히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시혁을 덮쳤다.
피할 수 없었다. 반항도 못 했다.
시혁은 순식간에 늑대의 육중한 몸 아래에 깔렸다.
늑대가 뻘건 눈을 들어 시혁을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아가리를 벌려 시혁의 목을 물어뜯으려고 했다.
“이익!”
급했다.
엉겁결에 오른팔을 내밀었다.
늑대가 목 대신 팔을 깨물었다. 오른팔이 팔꿈치부터 잘려나갔다.
시혁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오른팔이 있던 곳이 불에 지진 듯 뜨거워졌다. 뒤이어 으스러지는 듯한 통증이 전신을 관통했다.
순간적으로 의식이 끊겼다.
암흑 속에서 겨우 정신을 차렸다.
늑대가 머리를 흔들어 시혁의 팔을 저 멀리 뱉는 것이 보였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또 입을 벌리며 시혁의 목을 물려고 했다.
‘침으로는 안 돼.’
그런 생각이 들었다.
더 강력한 뭔가가 필요했다.
일격에 늑대를 어떻게 할 수는 없더라도, 최소한 겁을 줘서 쫓을 수 있는 뭔가가.
가령 불이라든가……
자연히 몇 가지가 연상되었다.
뜸, 그리고 라이터.
지난 2달 동안 지긋지긋하게 만졌고, 시술하여 눈만 감아도 그 형태와 무게, 질감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들.
세계가 호응했다.
시혁의 왼손에 녹색 빛이 번뜩였다.
아주 익숙한 감촉이 시혁의 손에 느껴졌다.
그게 뭔지 확인할 겨를도 없이, 시혁은 물체의 위쪽에 달린 단추를 눌렀다.
화악!
“깨갱깽!”
화염이 솟구쳤다.
시퍼런 불길이 일어 늑대를 휩쓸었다.
늑대가 깜짝 놀라 몸을 튕겼다. 시혁을 공격하던 것도 중지하고, 불이 닿지 않는 곳까지 물러났다.
겉으로는 화려한데 실속은 없었다.
설령 적중했더라도 제대로 된 상처는 입히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기에는 시혁의 공격력이 너무 약했으니까. 지금은 잠깐 늑대를 놀라게 한 것에 불과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퍼억!
화살이 하나 날아와 늑대의 머리를 꿰뚫었기 때문이다.
조금 짧긴 해도 꽤나 두툼한 화살이었다. 늑대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일격에 죽어버렸다.
“허억, 허억.”
시혁은 숨을 몰아쉬었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오른팔에 침을 꽂았다. 금방 팔이 재생되면서, 시혁을 괴롭히던 통증이 서서히 사라졌다.
다른 늑대들도 금방 처리되었다.
치료사들은 크고 작은 부상을 당했다. 그저 땅에 구르기만 한 이도 있었지만, 팔을 하나 잃거나 목을 물려 죽을 뻔한 이들도 많았다. 다행히 죽은 이는 없었다.
어이가 없었다.
중장보병 몇 명만 대열 중간에 배치했어도 이럴 일은 없었다. 늑대들이 돌입하기 전 먼저 반격했을 테고, 더 수월하게 일을 처리했겠지.
앰버튼 경은 겉보기만 멀쩡했지, 실은 전술에 대해선 문외한이었던 걸까?
시혁의 의문은 곧 풀렸다.
몸에서 휘황한 빛이 일어나 시혁의 몸을 감쌌기 때문이다.
2레벨로 올랐다.
다른 치료사도 2레벨이 되었다. 앰버튼 경이 가까이 다가와 그걸 보더니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들어오자마자 두 명이 레벨 업이라, 나쁘지 않군.”
시혁은 의문에 찬 눈으로 앰버튼 경을 쳐다보았다.
저번에 권세 신봉자 진영에 소환되었을 때는 레벨 업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족히 수백 명은 치료를 하고 나서야 레벨이 오른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늑대에게 한 번 당한 것만으로 레벨이 올랐으니 궁금할 만도 했다.
다시 행군을 시작한 후 근처 치료사에게 슬쩍 질문을 했다.
치료사는 시혁을 한 번 보고 대답을 해주었다.
“자네는 수습인 것을 감안해도 아는 게 정말 없군? 간단하네. 안전한 곳에서 반복 작업을 하는 것보다는 위험한 곳에서 위기를 벗어나는 게 더 많은 경험이 쌓이거든. 게다가 자네는 새 능력을 깨달았잖은가? 당연히 레벨이 올라가지. 아마 3레벨도 금방 될 걸?”
치료사는 시혁의 손에 들린 라이터를 가리켰다.
방금 전 장쾌하게 불길을 뿌리던 장면은 그로서도 인상이 깊었던 것이다.
시혁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도 공격력은 변화가 없는 것 같은데요? 침으로 공격하나, 불로 공격하나 거기서 거기 같아요.”
“무슨 소릴! 자네가 다룰 수 있는 속성이 하나 생긴 거 아닌가! 불은 곧 정화의 힘이니, 이 숲의 변질된 생명들에게 상당한 타격을 입힐 수 있지. 어디 그뿐인가? 그 능력을 잘 활용하면 앞으로 부상자들을 치료할 때도 유용할 거야.”
“아하, 그 생각을 못했습니다.”
시혁이 침을 던져 공격하면 물리적인 피해를 입힌다. 여기에 생명의 마나가 추가적인 피해를 주는 형식이다.
그런데 라이터와 뜸은 자체적으로 불 속성에 속했다. 따라서 전투와 치료, 양쪽에서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시혁은 내친 김에 한 가지를 더 물어보았다.
“참, 제 경험이 없어서 한 가지 더 여쭤보고 싶은데, 혹시 아르거스로 오는 시간이 정해져 있습니까? 제가 아르거스를 오는 게 항상 일정한 것 같은데요.”
“소환 주기 말인가? 당연하지.”
들어 보니 귀환 당시의 상황에 따라 다른 모양이었다.
전투에서 승리하여 상대 반신을 물리쳤다면 바로 다음날 소환이 된다. 이때는 거의 대부분 승리했던 반신의 진영에 다시 속할 때가 많았다.
만약 결착을 못 내고 반신이 귀환하여 따라 귀환했을 때는 7일이 걸린다. 자신이 죽었을 경우는 30일, 반신이 패배했을 경우는 90일이었고.
승리 1일, 귀환 7일, 죽음 30일, 패배 90일.
시혁은 그 숫자들을 한 번 입 안에서 굴려 보았다.
“가끔 소환 주기를 마음대로 하는 이들도 있다고 하던데 어떻게 그게 가능한 건지는 모르겠네. 아무튼 대개는 이 네 가지 경우에서 벗어나지 않으니까 잘 기억해 두는 게 좋을 거야.”
“이해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뭘, 나도 심심하지 않아 좋았지.”
치료사는 수더분하게 웃어 보였다.
< 영웅 부대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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