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 세계의 한의사-6화 (6/250)

< 신봉자의 성 -3- >

“물을 뿌릴 때는 꼭 머리에서 몸통, 몸통에서 사지로 뿌리세요. 그 반대가 되면 소각의 저주가 전신으로 빠르게 퍼지게 되니까 위험해져요. 하지만 한쪽으로 몰아넣게 되면 저주 치료가 한결 쉽죠. 정 뭐하면 팔이나 다리 하나쯤은 잘라버려도 좋고요.”

“이해했습니다.”

시혁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아무렇지도 않게 팔이나 다리를 잘라도 된다고 하니 기가 질렸던 것이다.

하기야 아르거스에서는 손짓 몇 번이면 팔을 재생시킬 수 있으니 사지 절단에 대한 관념이 지구와는 많이 달랐다.

시혁은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덧 다음 전투가 다가왔다.

묵직한 분위기가 성 전체에 내려앉았다.

처음 시혁이 도착했을 때와는 확연히 다르게, 살얼음을 딛는 듯한 긴장에 휩싸였다.

이제 벌어질 지옥화염의 공세는 그 강도가 무시무시할 터.

시혁도 그 분위기를 감지했다. 자연히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온다!”

치료소 밖에서 누군가 소리를 지르는 게 들렸다.

하늘이 적색으로 물들었다.

불의 비.

그런데 심상치가 않다.

붉다 못해 핏빛이었다. 불길하기 짝이 없는 기운을 물씬 풍겼다.

그 하늘의 군데군데가 둥근 파문을 일으켰다. 파문이 서로에게 뻗어나가며 얽히고설켰다. 그러면서 동그란 핏빛 구 같은 것이 생성되었다.

2층의 창문을 통해 그것을 본 베리아와 쟈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맙소사, 화염 폭격이라니!”

“말도 안 돼!”

불의 비보다 상급 이적.

지옥화염이 작정을 한 모양이었다. 이곳 성은 권세 신봉자의 성 중 하나일 뿐인데 화염 폭격을 사용하는 것을 보면.

핏빛 구가 불타기 시작했다.

거대한 화염의 구가 수십 개가 넘게 생성되었다.

그것들이 유성처럼 낙하했다. 대기를 불사르며 내리꽂혀 성을 박살냈다.

그에 대응하여 흰색 방어막이 성을 감쌌다.

불의 비를 완벽하게 막아냈던 이적이었다. 그러나 화염 폭격에는 부족한 감이 있었다.

처음 몇 발은 막아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화염의 구가 보호막을 두드리자, 얼마 지나지 않아 깨져나갔다. 공간을 가르고 강림하여 우뚝 선 건물들을 강타했다.

폭음이 터졌다.

세상이 흔들렸다.

성 사령부가 직격당해 한쪽이 완전히 허물어졌다. 탑도 몇 개가 무너지고, 성벽도 군데군데 구멍이 뚫렸다. 기사 대기실 중 하나가 당해 기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왔다.

지속 시간이 짧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게 아니었으면 화염 폭격만으로 성이 결딴났을 테니까.

“쿠오오오!”

“키이익!”

악마들이 기괴한 소리를 질러댔다.

조만간 벌어질 살육을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전투가 벌어지지도 않았건만, 부상자들이 치료소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베리아가 시혁을 보고 말했다.

“최시혁 님! 일단 1층으로 내려가세요. 전투 시작되면 바로 올라오고요.”

“알겠습니다.”

화염 폭격의 영향은 컸다.

성 내에 위치한 건물 중 상당수가 불길에 휩싸였다. 인부들이 분주히 오가며 물을 끼얹어 불을 진화했다. 그나마 치료소는 당하지 않아 다행스러웠다.

시혁은 부상자들에게 빠르게 침을 놨다.

단순 부상은 쉽게 치료가 가능하다.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데, 밖에서 와 하는 함성 소리가 들렸다.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부상자들이 미친 듯이 밀려들었다.

더구나 시혁이 2층으로 올라가니 1층은 완전히 혼돈의 도가니가 되었다.

2층은 상대적으로 한가했다.

하지만 단순히 업무량으로 따질 수는 없었다.

2층에는 소각의 저주에 걸렸거나, 회복시키는데 더 많은 마나를 필요로 하는 중급 병종들이 올라오니까. 환자의 수는 적어도, 더 세밀하고 주의 깊은 치료가 필요했다.

첫 소각의 저주 피해자가 올라왔다.

일반 보병.

몸통 전체에 불이 붙어 있었다. 보호 장비를 착용한 인부들이 우악스럽게 갑옷을 벗겨냈다.

“끄아악! 끄아아악!”

고통이 심한지 부상자가 몸을 뒤틀었다. 입에서는 계속해서 처절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시혁은 눈살을 찌푸렸다.

적색의 화마는 몸통은 물론 사지 전체에 옮겨간 뒤였다. 심지어 목까지 올라왔다. 여기서 조금만 더 진행되면 치료사가 몇 명이 달라붙어도 살리지 못한다.

쟈크가 그걸 보고 혀를 찼다.

“운이 좋군. 첫 번째가 아니었으면 포기했을 거야.”

치료사의 마나는 무한하지 않다. 따라서 극한 상황의 경우, 치료하는데 더 많은 마나가 소모되더라도 기본 병종보다는 더 상위의 병종을 치료하게 된다.

시혁이 달라붙었다.

인부 하나가 움푹 파인 그릇 하나에 물을 떠 와 시혁의 옆에 놓았다. 시혁은 두 손으로 물을 퍼서 보병의 목과 팔, 다리에 뿌렸다. 가장 불꽃이 맹렬히 타오르는 왼쪽 다리만 제외했다.

그 행위에 생명의 마나가 움직였다.

물을 뿌리는 순간 거기 깃들어, 불에 휩싸인 보병의 피부를 통해 흡수되었다.

치이이익!

물이 증발하며 수증기가 발생했다.

불길이 눈에 띄게 약해졌다.

한 번으로는 안 된다. 시혁은 계속해서 물을 뿌렸다. 그때마다 불의 마나와 생명의 마나가 격돌했다.

생명의 마나가 우세했다.

시혁에게 계속해서 지원을 받으니까 당연한 일.

결국 왼쪽 발을 제외하고는 모두 꺼졌다. 피부는 시꺼멓게 타서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이 정도야 아르거스에서는 별 것 아니었다.

쟈크가 앞으로 나섰다.

옆에 선 인부를 향해 손짓을 하자, 인부가 큰 도끼를 꺼내더니 힘껏 내리쳤다.

“끄아악!”

결박되어 있던 보병이 비명을 질렀다.

인부는 보병의 불타는 다리를 무릎에서부터 잘라 버렸다.

이것으로 소각의 저주를 완전히 제거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래도 치료하는데 드는 마나를 90% 정도는 아끼는 게 가능했다.

쟈크가 두 손을 뻗었다.

“흐업!”

잠시 심호흡을 한 후 기합을 질렀다.

녹색 광채가 폭발하듯 쏟아졌다.

쟈크가 보병의 몸을 주물렀다. 녹색 광채를 후광처럼 두른 상태라 아주 빠르게 회복되었다. 피부가 재생되고 잘린 다리가 돋아났다.

시혁은 신기한 눈으로 자크를 쳐다보았다.

쟈크가 그 시선을 느꼈다.

씩 웃더니, 한 수 가르쳐준다는 어조로 말했다.

“신기하게 볼 것 없네. 자네도 숙련 치료사가 되면 특기가 하나 생길 테니까. 뭐, 그게 뭐일지는 아직 모르지만.”

“그렇습니까?”

“그래. 각자 특기는 다 다르거든. 나는 집중 치료지만, 저기 베리에 님은 마나 회복에 관한 거야. 자네 특기도 아마 다른 게 생길 걸?”

확실히 쟈크가 환자를 치료하는 시간은 매우 짧았다. 베리에와 비교하면 반의 반도 걸리지 않는 듯했다.

대신 마나가 더 빨리 떨어졌다. 베리에는 쉬지 않고 치료를 하는 반면, 쟈크는 숨을 헐떡일 때가 많았다. 결국에는 자기 방에서 쉬었다가 나오곤 했다.

뭐든지 일장일단이 있는 법이다.

시혁은 쉬지 않았다. 마나를 소모하는 것도 아니니, 다른 보병에게 걸린 소각의 저주를 약화시키는데 집중했다.

치이익! 치이익!

“으아아아!”

“조금만 참으세요. 곧 좋아질 겁니다.”

시혁은 계속해서 물을 뿌렸다.

처음에는 참 조심스럽게도 움직였다. 손에다 물을 떠서 불타는 부위에 붓는 게 고작이었다. 효율은 높았지만, 속도는 그만큼 느렸다.

자연히 환자가 밀렸다.

베리아와 쟈크, 둘 다 말은 안 했지만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이대로는 안 돼.’

시혁은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더 빠르게 움직였다.

아예 나무통을 침상 사이에 놓게 했다. 인부에게서 나무 그릇을 빼앗듯이 받아들었다. 나무 그릇을 한 손으로 잡고, 다른 손으로는 마나를 불어넣으며 퍼내듯 물을 뿌렸다.

소각의 저주가 시작된 팔이나 다리에 물이 튀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마나가 많이 소모되어도 무시했다. 일단 급한 불부터 끄겠다는 생각으로 움직인 것이다.

그러자 힘은 들어도 환자들을 빨리 베리아와 쟈크, 두 선배 치료사에게 넘기는 게 가능했다.

근 한 달 동안의 인턴 경험이 도움이 되었다.

액팅, 즉 부항과 뜸을 뜨는 것은 시간적으로 볼 때 인턴 업무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처음에는 요령이 없어 1명에 20분씩 걸렸는데, 이젠 그 10분이면 2명씩 끝내곤 했다.

처음과 비교하면 거의 4배 가까이 효율이 올라갔다고 할 수 있었다.

핵심은 동선을 최소화하고 동작을 간략히 하는 것.

그 경험을 적용하자 치료소 2층이 비로소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시혁은 소각의 저주 환자들을 전담했다. 일단 저주를 약화시켜 놓은 뒤, 선배 치료사에게 넘겼다. 인부를 부려 적당한 시점에 팔이나 다리를 자르게 했다.

그럼 베리아나 자크가 달라붙었다. 둘 다 소각의 저주 피해자에게 붙어 있으면 시혁이 부상자들을 치료하기도 했다.

마나가 대량으로 소모되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좀 쉬었으면 했지만 불가능했다. 시혁이 빠르게 움직이는데도 환자가 빠르게 들어왔다. 이제는 1층과 2층의 침상은 물론, 바닥까지 환자를 눕혔는데도 수용할 공간이 없었다.

그만큼 전투가 격화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초반에 화염 폭격을 얻어맞은 영향이 컸다. 그때의 상흔이 남아서, 권세 신봉자 진영이 점차 밀리는 중이었다.

베리아와 쟈크가 냉정한 결정을 내렸다.

“이제 기본 병종 소환자들은 그만 치료하도록 하지.”

“최시혁 님도 중급 병종 이상만 치료하세요.”

“예.”

인부들이 2층에 있던 보병과 궁병들을 끌어냈다. 치료소에 들어오기 전 완전히 결박해 놓은 상태라 그들은 반항도 못 해보고 쫓겨났다.

시혁은 그것을 보고 비감(悲感)을 느꼈다.

살리려면 살릴 수 있었다. 단지 경제 논리에 의해 밀어냈을 뿐이다. 그들에게 들어갈 마나를 아껴, 더 도움이 될 병종들을 살려야 한다는 이유 때문에.

이게 과연 옳은 일일까.

시혁의 마음을 눈치 챈 것인지, 쟈크가 시혁의 어깨를 툭 하고 쳤다.

“그런 표정 짓지 말게. 이곳이 아르거스가 아니었으면 내 선택도 달랐을 테니까. 저들 모두 아르거스에서 죽어도 멀쩡히 되살아난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단지 계급 진급이 늦어질 뿐이야.”

“알겠습니다.”

마음이 편하진 않아도 납득할 순 있었다.

시혁은 억지로 얼굴을 폈다.

기본 병종의 저주 치료를 포기하자 확실히 여유가 생겼다. 2층에 가득 찼던 환자들이 점차 회복되어 치료소를 나섰다. 나중에는 시혁이 짬짬이 1층으로 내려가 그로인을 돕기도 했다.

하지만 대세는 이미 기울어 있었다.

치료사들이 아무리 열심히 치료를 해도, 회복되는 병사보다 죽어나가는 병사가 많았다.

성벽이 무너졌다.

화염 마귀, 지옥 파수견, 용암 박쥐, 불길 광마, 불꽃 거인들이 물밀 듯이 들이닥쳤다.

성 전체가 악마들에게 유린당했다.

치료소도 그들의 공격을 피해내지 못했다.

“막아!”

“공격해!”

치료소로 대피한 이들과 함께, 악마들의 공격을 막았다.

“으랏차!”

견고한 갑옷으로 전신을 감싼 기사가 검을 휘둘렀다.

강렬한 힘이 깃들어 있었다. 검에 휩쓸린 악마들이 수수깡처럼 쓰러졌다.

그러나 수가 너무 많다.

문을 통해서만 들어오지 않았다. 창문으로도 기어들어왔다. 한쪽에서는 벽을 부수려고 불의 마법을 쉬지 않고 쏘아대고 있었다.

“이익!”

시혁은 손을 뻗어 공격했다.

별로 효과는 없었다.

치료사의 공격력은 극도로 빈약하기 때문이다. 기본 병종은 물론, 인부의 주먹질만도 못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으니 반항하는 것에 불과했다.

예정된 종말이 다가왔다.

쿠구궁!

집중된 불의 마법에 의해, 치료소 한쪽의 벽이 무너져 내렸다. 거대한 불꽃 거인들이 무너진 벽을 통해 치료소 안을 들여다보았다.

“끝이다……”

누군가 절망에 차 중얼거렸다.

불꽃 거인들이 한쪽 손을 들어올렸다.

손 위에 맹렬한 불이 머물렀다. 스스로 형체를 갖추더니 둥그런 구 형상으로 변했다.

다음 순간, 파괴의 불길이 치료소를 휩쓸었다.

어마어마한 격통이 시혁을 으깼다.

암흑이 찾아왔다.

< 신봉자의 성 -3- > 끝

ⓒ 산호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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