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봉자의 성 -1- >
1달 전과 똑같았다.
빛이 번쩍였다.
눈부신 섬광이 잦아들기를 기다린 후, 시혁은 눈을 조심스럽게 떴다.
검은 도화지에 마법진을 그린 듯한 하늘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다음으로는 건물들이 보였다. 성벽이 늘어서 있고, 곳곳에 뾰족한 탑이 위치했다. 검과 방패, 갑옷으로 무장한 보병들이 그 위에 자리를 잡았다. 거인 석상 역시 우뚝 서 있었다.
재빨리 주위를 살폈다.
혹시 전투 중이 아닐까 싶어서였는데 그렇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최소한 간단히 훑어본 바로는 그러했다.
그때였다.
말로 형언하기 힘든 어떤 울림이 시혁의 의식 깊은 곳에서 우러나왔다.
[저쪽으로 가라.]
저쪽?
어디냐고 물을 필요는 없었다. 그 울림이 부상한 즉시, 시혁은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깨달았으니까.
단지 방향만이 아니라, 어떤 경로를 거쳐 얼마나 멀리 가야 하는지도.
마치 원래부터 알고 있는 것 같았다고 할까.
시혁은 놀라움과 공포를 동시에 느꼈다. 빨리 이동해야 할 것 같은 느낌에, 머릿속에 떠오른 경로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체력이 좋지는 않은 터라, 얼마 뛰지 않았는데 숨을 헐떡이기 시작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조화일까.
의문을 가지면서도 끝없이 달렸다.
성문을 통과하자 드넓은 들판이 나왔다. 다 익은 밀이 끝이 보이지 않게 펼쳐져 있었다. 밀밭을 지나니 이번에는 커다란 산이 시혁의 앞을 가로막았다.
“아놔, 저길 올라가라고?”
시혁은 산을 보고 투덜거렸다.
하지만 방금 전의 명령은 절대적인 힘을 담고 있었다. 조금 늦게 가거나, 살짝 돌아가는 건 가능했지만 결국 그 명령에 따라야 했다.
어쩔 수 없이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다행히 돌로 포장된 도로가 있어 어렵진 않았다.
산 위에는 커다란 성이 있었다. 두툼한 성벽으로 스스로를 두르고, 높은 탑 위에 마법 방어 병기를 설치한 강력한 성이었다.
시혁은 스스럼없이 그 안으로 들어갔다.
“오, 새로운 치료사인가?”
중년의 남자 하나가 시혁을 보고 반색했다.
흰색의 긴 가운을 입고 있었다. 두건이 달리고, 전신을 감싸는 형태였다.
지금 시혁이 입고 있는 옷과 같았다.
남자도 치료사인 모양이었다.
시혁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반갑습니다. 최시혁이라고 합니다.”
“반갑네. 그로인이라 부르게 다른 곳에서 만났다면 좋은 이야기 상대가 됐을 텐데 그럴 수 없으니 아쉽구먼. 곧 전투가 시작될 테니 따라오게나.”
그로인이 시혁을 데려간 곳은 성의 후방에 위치한 한 건물이었다.
야전 치료소쯤 되는 것 같았다. 2층 건물 안에 하얀 침상이 빼곡하게 늘어서 있었다. 부상자들을 더러운 담요 위에 눕혀놓기만 했던 저번보다는 훨씬 나은 상황이다.
그 안으로 들어간 후, 그로인이 시혁을 돌아보았다.
“이 성에 배치된 치료사는 자네까지 합쳐서 총 다섯이라네. 세 명은 2층에, 두 명은 1층에 배치되지. 우리가 할 일은 부상자를 치료하는 한 편, 우리 둘로는 감당하기 힘든 부상자를 2층으로 올리는 일이라네.”
인부들이 치료소, 이 건물 안을 서성이고 있었다. 촌스러운 멜빵바지에 파란 셔츠를 입은, 순박해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기본 병종에도 속하지 못하나, 자원을 채취하고 건물을 건설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이들.
시혁은 그들을 한 번씩 보고는 질문을 했다.
“감당할 수 없는 부상자도 있습니까?”
당연한 의문이었다.
저번 경험으로는, 목숨만 붙어 있다면 어떤 부상을 입었든 간단히 치료하곤 했으니까.
아니다. 다 그렇지는 않았다.
몸에 불이 붙었던 환자.
그 환자는 치료하기가 불가능했다. 오히려 시혁의 치료가 독이 되어 눈 깜짝할 사이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로인이 묘한 얼굴로 시혁을 보았다.
“자네, 아직 아르거스에서의 경험이 많지 않은가 보군? 자네 계급이 어떻게 되나?”
“계급이요? 그게 뭡니까? 아르거스는 또 뭐죠?”
“이런……”
그로인이 혀를 찼다.
“처음 소환된 건 아닌 것 같았는데? 뭐, 아직 시간이 좀 남은 것 같으니 설명해주지.”
시혁이 소환된 이 정체불명의 세계가 바로 아르거스였다.
원래는 생명이 꽃피고 문명이 발전하던 아름다운 행성이었다고 한다. 그러다 모종의 일로 인해 행성 전체가 산산조각이 났다.
종말의 순간 신들이 자신의 존재를 사용하여 아르거스 행성을 유지하지 않았다면 완전한 파국을 맞이했을 것이다. 그나마 완벽하게 종말을 저지할 수는 없어서, 행성은 지금도 끝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신들은 한 가지 거대한 이적을 발휘했다.
이계의 존재들을 소환한 것이다.
소환된 이들은 서로 경쟁하고, 다툼을 벌이게 된다. 그 과정이 치열할수록, 강력한 힘이 생성되어 아르거스 행성을 복구한다.
시혁은 고개를 갸웃했다.
“소환자들끼리 싸우면 힘이 생성된다고요? 이상하네요. 소환하고 어쩌고 하면 힘이 소모될 것 같은데.”
“나도 자세한 사정은 모르네. 하지만 효과가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지. 초기에 비해서 아르거스 행성이 크게 좋아졌다네. 저기 저거 보이는가?”
그로인이 하늘을 가리켰다.
흰 색 격자무늬가 새겨진 하늘 너머, 작은 별 같은 게 보였다.
언뜻 보면 지구와 비슷한데, 중요한 차이점이 있었다.
깨진 상태다.
절반 정도는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데, 나머지 절반은 형편없이 망가진 상태였다. 수천 조각이 나서 우주 공간에 둥둥 떠 다녔다.
그로인이 그 별을 보며 말했다.
“처음 경쟁이 시작되었을 때만 해도 심각했다고 하더군. 아르거스 행성이 완전히 깨져 있었으니까. 지금은 좀 나아진 거야. 신들이 보호하는 지역이나 반신들이 소유한 성역에선 원주민들이 살고 있으니까.”
“그런데 소환자들이 그렇게 싸울 이유가 있습니까? 저 같으면 그냥 어디 숨어 있을 것 같은데요.”
“있지. 이 경쟁의 승리자는 복구된 아르거스 행성의 신이 될 자격을 얻거든. 그걸 거부하더라도 강력한 권능을 자기 세계에서 발휘할 수 있으니 손해는 아니네. 고향 세계에선 일개 무지렁이였다 해도, 영웅으로 진화하면 그 권능을 고향 세계에서도 조금은 발휘할 수 있어. 아르거스에서 보면 별 것 아니지만, 고향 세계에서는 다르지. 인생이 역전된다고 봐야지. 어차피 선택권도 없고.”
물론 위험성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전장에서 싸우다 죽어도 대부분은 영향이 없다. 신들의 힘이 소환자들을 보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항상 그렇지는 않았다. 가끔 현실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고 했다. 그 영향은 긍정적일 수도, 부정적일 수도 있는데 부정적일 때가 문제였다.
듣도 보도 못한 병에 걸리거나, 아예 괴물로 변하기도 하니까.
여기까지 듣고, 시혁은 한 가지 사실을 알아차렸다.
지구의 이능력자와 발현자.
그들이 이곳과 관련이 있었던 것이다.
이곳에서 영웅이 되면 지구에서 이능력자로 각성한다. 특정 조건에 의해 지구의 육체에 영향을 미치면 특이한 힘을 발휘하는 발현자가 된다.
그로인은 음울한 얼굴로 말했다.
“여기 있는 이들 중 원해서 소환된 사람은 없다네. 소환을 중단시킬 방법도 없지. 사실 어마어마한 폭거야. 영웅 진화에 성공하면 그만한 보상을 받긴 하지만, 일이 다 잘 된다고 볼 수는 없으니까.”
“그야 그렇죠.”
“여기 기억을 고향 세계에서도 유지할 수 있다면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볼 텐데, 아르거스의 신들은 참 교활한 자들이야. 고향 세계에 있을 땐 여기 기억을 잊어버리니까. 그건 영웅 진화를 하든, 반신으로 거듭나든 마찬가지라고 하더군.”
그로인의 말에 시혁은 묘한 느낌을 받았다.
기억을 잊는다고?
시혁은 그렇지가 않았다. 죽을 때 느꼈던 공포는 사라졌지만, 기억은 뚜렷하게 남아 있던 것이다.
막 그걸 물어보려고 하는데, 그로인이 화제를 돌렸다.
시간은 촉박하고, 알려줘야 할 것은 많았기 때문이다.
시혁은 그로인에게 여러 가지 정보를 들었다.
자신의 상태를 확인하는 방법을 배웠는데 그게 참 유용했다. 가만히 앉아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자, 몇 가지 정보들이 둥실둥실 떠올랐다.
[신입]
[치료사]
[1레벨]
[특기 없음]
[특화 미정]
[생명 속성]
[권세 신봉자 진영]
[강화 사항 없음]
두서없이 떠오른 까닭에 좀 난잡했지만, 정보량이 많지는 않아 금방 파악할 수 있었다.
그로인이 시혁의 정보를 듣고 입맛을 다셨다.
“아직 신입이라고? 이런, 그래도 수습 정도는 기대했는데 아쉽군. 어쩔 수 없지. 내가 고생을 하는 수밖에. 자네도 힘들어도 꾹 참고 열심히 치료하게나. 레벨이 오르면 그래도 할 만 할 거야.”
영웅 진화 이전 소환자의 계급은 6단계로 나뉜다.
신입, 수습, 숙련, 전문, 대가, 거장.
계급이 오를수록 전장에 소환되었을 때 초기 능력치가 강해진다. 레벨이 오를 때의 상승폭도 더 크다.
처음 전장에 소환되었을 때는 다 같은 1레벨이지만, 1레벨이라도 다 똑같지는 않은 것이다.
내친 김에 한 가지 궁금한 것을 더 물어보았다.
“아까 막 소환되고 어떤 목소리가 제 안에서 울리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건 뭡니까?”
“자네는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군? 반신일세. 신위 경쟁의 승리를 눈앞에 둔 소환자들이지. 그들 또한 서로 싸우고 있어. 우리를 장기판의 말처럼 활용하고, 막강한 이적을 뿌리면서 말이야.”
신위 경쟁.
이 거대한 경쟁의 정식 명칭이라고 했다. 필요한 만큼 신들이 탄생하고 아르거스 행성이 회복되어야 끝난다던가.
시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궁금한 게 남아 있었지만 더 물어볼 수는 없었다. 밖에서 긴 나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전투가 시작되나 본데? 자네도 준비하게. 곧 부상자들이 들어올 테니까.”
“알겠습니다.”
시혁은 1층에 난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았다.
치료소는 구석에 위치해 있어 시야가 좋지는 않았다. 기껏해야 성벽의 일부와 하늘, 사령부의 벽이 보이는 것의 전부였다.
별 게 없어 고개를 돌리려는데, 시혁의 눈에 이상한 장면이 보였다.
하늘이 붉어졌다.
시뻘겋게 달아오르며, 화염이 들끓어 오르기 시작했다.
본 적이 있는 현상이었다.
시혁의 눈이 커졌다.
“그로인 님! 불의 빕니다!”
저번에 소환되었던 성을 간단히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상대 반신의 이적.
그로인은 심드렁하게 반응했다.
“알아. 저쪽 반신, 지옥화염은 전투를 시작할 때 항상 불의 비를 뿌리거든. 치료소 밖으로 나가지만 말게. 안에 있으면 안전해.”
저번에 봤던 불의 비는 건물 안에 있든 밖에 있든 모든 것을 다 불살랐는데?
하지만 잠자코 그로인의 말을 따랐다. 최소한 시혁 자신보다는 많은 것을 알고 있을 테니까.
아니나 다를까.
시혁은 몰랐지만, 성의 상공에 흰 빛이 번뜩였다.
빛은 둥글게 퍼져 성 전체를 감쌌다. 일종의 보호막이었는데, 불의 비가 그 위를 무차별적으로 난타했다.
시혁은 보호막 안에서 그 장면을 보았다.
보호막과 불의 비가 치열하게 힘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불의 비가 보호막의 일부를 뚫었나 싶으면, 즉각적으로 주변에서 힘이 모여들어 그곳을 복구했다.
싸움은 오래 가지 않았다.
반신 지옥화염이 스스로의 이적을 중지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시혁을 소환한 반신, 권세 신봉자도 보호막을 거두었다.
전투가 시작되었다.
거친 욕설과 함께, 처절한 비명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뭐가 터진 것인지 쾅쾅 하는 폭발음도 들렸다. 이 구석진 곳까지 피비린내와 뭔가 타는 냄새가 풍겼다.
동시에, 인부들이 부상자들을 데리고 치료소로 달려왔다.
“빨리, 빨리!”
“급합니다!”
대부분은 보병과 궁병이었다. 시혁도 익숙한 병종이라, 침을 꺼내어 치료를 시작했다.
화상 환자가 많았다. 팔 다리가 떨어져 나간 보병도 있었다. 그 몸에 대고 침을 놓자, 언제 그런 부상을 입었냐 싶게 빠르게 회복되었다.
아직 2층으로 올라가는 이는 없었다. 시혁과 그로인 선에서 해결이 됐다. 부상자들이 많아 소모하는 힘이 많긴 했지만 충분히 따라갈 수 있었다.
전투가 격화된 것은 시간이 좀 더 흐른 후였다.
성 앞에서 커다란 폭음이 울리나 싶더니, 부상자들이 들것에 실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상태가 이상하다.
지금까지 봤던 부상자들과 확연히 달랐다. 외상이나 화상을 입은 게 아니라, 아예 불이 전신에 붙어 있었다.
한쪽 팔이나 다리를 기점으로 하여 타오르는 적색의 사악한 불꽃.
환자들이 몸을 뒤틀며 고함을 질렀다.
“살려줘!”
“으아아악! 죽고 싶지 않아!”
시혁의 눈이 커졌다.
저번에 소환되었을 때 봤던 증상 아닌가.
“그로인 님, 저거……”
그로인이 환자를 힐끗 보았다.
심드렁한 얼굴로 결정을 내렸다.
“소각의 저주군. 2층으로! 앞으로 저런 환자는 모두 2층으로 보내도록 하게.”
< 신봉자의 성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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